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이색취재] 대선판의 숨은 설계자, 킹메이커의 세계 

시대정신도, 영웅도 만들어낸다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영화 [킹메이커] 등장한 DJ의 책사 엄창록, 킹메이커의 원조
여론조사 분석 이어 온라인 집단지성으로 선거판 핵심도 진화


▎주요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킹메이커들은 기상천외한 선거 전략으로 승리를 위해 암약했다. 영화 [킹메이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책사 엄창록씨의 활약상을 그렸다. / 사진:메가박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계에서 가장 노련한 책사로 꼽힌다. 잠시나마 국민의힘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에게 “우리(선대위)가 해준 대로 연기만 해달라”고 말할 만큼 자신의 선거 전략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노욕에 찬 정치 기술자’라며 평가절하하지만, 정치판의 책략가에게 이 정도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리더의 운명은 명분에, 책사(策士)의 운명은 실리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현대 정치에서 선거판은 전쟁터다. 총성 대신 육성이, 포성 대신 함성의 크기로 상대를 압도하려는 싸움이 벌어진다. 물밑에서는 온갖 전술, 전략이 동원된다. 각 후보 캠프마다 제갈량을 자처하는 이들의 머리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때로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기도 한다. 전쟁이든, 운동경기든, 선거든 이기는 쪽이 모든 걸 차지하는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게임이기에 그렇다.

5년마다 펼쳐지는 대통령 선거는 한국 정치판의 역량이 총동원되는 가장 치열한 승부의 현장이다. 그래서 대선 때마다 내로라하는 책략가들이 ‘주군’의 승리를 위해 음지에서 진검승부를 벌였다. 이들에겐 ‘킹메이커’란 호칭이 최고의 영예다. 권력의 정점에 선 리더보다, 리더의 마음을 움직이는 숨은 실력자에 매료된 이들이 주로 킹메이커로 이름을 날렸다.

‘선거판의 여우’라 불린 DJ의 ‘장자방’


▎1. 선거판의 여우’라고 불렸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책사 엄창록씨는 능수능란한 흑색선전과 치밀한 조직관리로 군사정권 시절 DJ를 야당 대선 후보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 2.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 지역구에 출마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의 관권·금권선거를 극복하고 당선에 성공했다.
전략은 단순히 ‘뇌피셜’에서 나오지 않는다. 리더를 움직이고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전략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초한지]에 나오는 중국 한나라 고조 유방의 책사 장량(張良, 장자방)은 항우에게 패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유방이 유생 역이기의 계책에 따라 제후들의 힘을 빌려 위기를 타개하려 하자 일곱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막는다. 장량의 설명을 들은 유방은 계획을 접었고, 후에 천하를 제패했다.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치권의 최고 책략가를 ‘장자방’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유방은 장량을 두고 “장막 안에서 주판을 굴려 천 리 밖의 승리를 얻는 능력은 장자방이 나보다 뛰어나다”고 평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책사의 활약이 눈에 띄기 시작한 건 직선제가 부활한 1987년 대선 때부터다. 직접선거의 결과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민심’이다. 민심의 흐름을 정확히 읽는 것이 선거 전략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1987년 전까지는 유세장에 운집한 군중 규모로 민심을 가늠하는 정도였다.

1987년 대선에서 ‘정치 컨설턴트’라는 이름으로 전략가들이 등장했다. 선거제도가 발달한 미국과 유럽의 선거운동 전략을 배운 이들이다.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정책적 대안을 개발하려고 1981년 설립한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현대사회연구소에서 정책기획실장과 고문을 지낸 전병민씨는 1987년 대선에서 미국 갤럽의 여론조사 기법을 적용한 선구자로 꼽힌다. 당시만 해도 정부여당은 경찰이나 안기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만든 여론동향 보고서로 민심을 파악하던 때였다. 전씨는 이후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의 차남 현철씨가 주도한 ‘동숭동팀’에서 선거 전략 수립에 깊이 관여했다.

이보다 앞서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뛰어난 책사로 엄창록씨가 꼽힌다. ‘선거판의 여우’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승리를 위해서라면 흑색선전도 마다치 않았던 인물이다. 1월 26일 개봉하는 영화 [킹메이커]에서 국회의원 후보 김운대(설경구 역)의 참모로 활약한 서창대(이선균 역)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어난 엄창록은 한국전쟁 때 북한 인민군의 심리전 담당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군 복무 때 요제프 괴벨스와 마오쩌둥의 심리전술을 익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난 뒤 강원도 인제에서 살다가 1961년 5월 인제군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출마한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고 김 전 대통령의 참모로 활동을 시작했다. DJ는 1959년 재보궐선거,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인제군 지역에 출마했지만 연거푸 낙선했다. 엄창록과 만난 1961년 재보궐 선거에서 처음으로 당선의 꿈을 이뤘다. 다만 당선 직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의원선서도 못했다.

DJ는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남 목포 지역구로 내려가 재선에 성공한다. 김대중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박정희 정권은 1967년 제7대 총선에서 목포를 특별지역구로 지목해 군인 출신 김병삼을 공화당 후보로 내세우고 정권 차원에서 노골적인 견제에 나섰다. 금품 살포 등 불법적인 유권자 매수행위도 비일비재했다.

‘바닥 민심을 훑어라’… YS 누른 ‘두더지 작전


▎선거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대선 캠프 관계자들은 한두 사람에 의해 선거 전략과 판세가 요동치는 시대는 지났다고 입을 모은다. 사진은 영화 [킹메이커]의 한 장면.
이 선거에서 엄창록의 진가가 발휘됐다. 그는 여당의 부정행위를 역이용했다. 여당 선거운동원인 척하면서 거만한 태도를 취하거나, 푼돈을 넣은 봉투를 여당 이름으로 돌려 유권자들에게 안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식이었다. 일부러 차를 타고 다니면서 욕을 퍼붓고 상대방 캠프를 대거나, 여당 후보 이름으로 유권자 수백 명을 음식점에 초청했다가 헛걸음치게 하기, 여당 후보 이름으로 고무신을 돌렸다가 다음 날 빼앗아가기 등 기발한 모략선전이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관권 부정선거가 횡행했던 당시에는 야당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계책이었다. 실제로 DJ는 여당의 온갖 부정에도 불구하고 여유롭게 당선하면서 대선주자로서 발판을 다졌다.

1971년 DJ와 박정희가 맞붙은 제7대 대선에서도 엄창록의 활약이 이어졌다.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신민당 당내 경선에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승리가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1994년 [국민일보]가 연재한 ‘비화 김영삼의 사람들’에 따르면 YS는 당시 일반적인 선거전략에 따라 지구당위원장들을 포섭하는 데 집중하며 세를 불리고 있었다. 원내 세력이 약했던 DJ 진영은 밑바닥 표, 대의원들을 훑는 저인망 전략을 세웠다. 엄창록은 전국 조직을 총괄하며 이 작전을 지휘했다. 결국 DJ가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엄창록의 선거전략은 기발했다. 그의 계책은 ‘두더지 작전’이라고 불렸다. 한 예로 선거 조직원들이 제대로 활동하는지를 확인하려고, 한 지역에 본래 대의원이 5명뿐인데도 가공의 대의원을 집어넣어 6명으로 명단을 만든 뒤 이를 조직원에게 넘겨줬다. 사후 보고 과정에서 가공인물 1명을 찾아낸 조직원은 제대로 활동한 것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했다. 또 조직원을 파견할 때 반드시 연고지를 피해 임지를 정해줬다. 고향이 전남인 한화갑은 경남으로, 충남 출신 김성식은 충북으로, 전남 출신 김장곤은 충남으로 보냈다.

그는 ‘조직의 대가’로도 불렸다. 엄창록의 조직 편성법은 이른바 ‘1·3·5조직’이다. 한 명이 3명을 만들고 3명이 5명을 만드는 조직원 확대 작업이다. 조직책이 대의원을 접촉한 뒤에는 심사반을 투입해 대의원에게 ‘후보 친척’으로 위장해 조직책의 활동 내역을 점검토록 했다. 불성실하다고 평가된 이는 활동비를 줄이거나 교체하는 등 철저히 관리했다. 충북 조직책이었던 김성식은 “청주에 사는 대의원을 만나러 가는데 일부러 우산을 안 쓰고 비를 쫄딱 맞고 갔다. 그랬더니 내 정성에 감동해 우산까지 주면서 돕겠다고 하더라”고 회고했다.

본선이 시작되자 향토예비군제 폐지, 남북교류와 평화통일 등 ‘멸공’, ‘북진통일’을 당연시했던 당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획기적인 공약이 엄창록의 머리에서 나왔다. 또 DJ의 경제정책을 그의 이름을 따 ‘대중경제론’이라고 이름 붙여 유권자에게 각인화를 시도했다. 이는 후에 DJ노믹스, 초이노믹스, MB노믹스 등 각 정권의 경제 정책을 상징하는 네이밍으로 굳어졌다.

직선제 이후 여론조사 통한 과학적 분석이 대세


▎역대 대통령들의 대표 책사들. 왼쪽부터 여론조사를 처음 도입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책사 전병민 전 한국정책연구원 고문, 노무현을 만든 이광재 전 의원, MB의 남자 정두언 전 의원, 문재인 대통령이 ‘양비’라 부른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
엄창록의 활약을 예의주시해온 박정희 정권은 ‘선거판의 여우 생포 작전’을 전개했다. 1971년 1월 27일 발생한 DJ 자택 폭발물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DJ의 비서들을 연행했다.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엄창록은 집요한 회유를 받았다. 당시 DJ의 부산 조직책을 맡았던 서호석씨의 증언은 이렇다. “정보부가 그를 회유할 때 번동에 있는 그의 집 앞에는 육군 헌병이 보초를 서 사람들을 막았고, 헬기가 집 앞 상공에 떠서 시위해 주민들이 항의도 했어요. 당시 정보부장인 이후락이 ‘당신이나 나나 오야붕을 모시는데 나는 나를 인정하는 지도자를 갖고 있고, 당신은 그렇지 못한 지도자를 갖고 있지 않으냐. 나하고 일하자’고 회유했다더군요.” 당시 DJ 수행비서였던 권노갑은 “엄창록이 후광(DJ의 아호)에게 전국구 의원 자리와 비서실장을 요구했다. 그런데 거절하니까 넘어간 것”이라고 증언했다.

정보부에서 돌아온 엄창록은 대선 열흘 전쯤 다시 종적을 감췄다. 이때쯤 영남지역에 수상한 전단지가 살포됐다.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영남에 뺏긴 대통령 호남인이 찾아오자” 등의 지역감정을 담은 문구가 ‘From 호남향우회’ 명의로 돼 있었다. 또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는 식의 흑색선전이 영남지역에서 나돌기도 했다. 이에 자극받은 영남 표심이 박정희에게 몰렸다. 결국 그해 대선에서 DJ는 45.25% 득표율로 낙선했다.

정치 연구자들은 당시 처음으로 등장한 지역감정이 엄창록의 작품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DJ 진영에서 굳이 영남 유권자의 정서를 자극하는 자충수를 둘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1971년 대선 이전에 DJ가 ‘호남 푸대접론’을 제기한 적은 있다. 다만 호남지역 유세에 국한했을 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주의에 대해 처음 과학적으로 분석을 시도한 박상훈 국회 미래연구원 거버넌스그룹장(전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은 저서 [만들어진 현실: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에서 지역감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기점을 1971년 대선으로 봤다.

엄창록은 대선이 끝난 뒤 한 달여 만에 다시 나타났지만, 자신이 운명공동체로 여겼던 DJ를 끝내 찾아가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않았다. 1987년엔 안기부가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키려고 엄창록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당시 엄창록은 YS와 DJ가 단일화를 못하니 자신이 개입할 필요도 없다며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엄창록은 1988년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했다.

엄창록이 군사정권과 여당을 상대로 네거티브를 펼친 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폴리티쿠스에서 펴낸 [남산의 부장들]에서 엄창록의 뚜렷한 소신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처음 DJ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공화당의 선거운동은 법을 어기는 범죄 바로 그것입니다. 공무원을 동원해 돈 봉투를 살포하고, 투·개표 조작까지 멋대로 합니다. 관권, 금권에 대응하지 않으면 야당은 정치적으로 살길이 없습니다.”

시대가 흘러 이제 엄창록의 계책은 현실에서 쓸모가 사라졌다. 특히 1987년 직선제 개헌에 이어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하면서 앞서 언급했듯이 여론조사를 기반으로 한 과학적인 전략 수립으로 진화했다. 젊고 사고가 유연한 이들이 ‘여론조사’란 무기를 들고 ‘차세대 제갈량’, ‘진화한 장자방’으로 등장했다.

DJ에 이어 민주당 정권을 계승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책사로는 이광재 민주당 의원이 꼽힌다. 노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1988년에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할 당시 이 의원 나이는 23살이었다. 이 의원은 19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차리고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착수했다. 안희정, 김병준, 여택수, 이강철 등이 함께했다. 이들은 ‘금강팀’으로 불렸다.

“2022 대선의 최고 책사는 ‘집단지성’”

이후 보수·진보 대표 양당의 가장 뛰어난 책략가는 당 부설연구소를 맡는 게 관례로 자리 잡았다. 국민의힘은 여의도연구원, 민주당은 민주연구원을 통해 여론을 조사하고 분석해 전략을 짠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서울시장 시절부터 보좌하며 그를 대권에 올려놓은 정두언 전 의원은 2011년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았다. 노무현, 문재인 두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양비’ 양정철 전 비서관도 2019년에 민주연구원장을 맡아 2020년 4·15 총선 전략을 설계했다. 민주당은 압승을 거뒀다.

책략가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자기 역할이 끝나면 자리에 미련을 두지 않고 훌훌 털고 떠난다는 점이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경우 여야를 오가며 자기 역할을 끝내면 홀연히 떠나길 반복했다. 양정철 전 원장도 마찬가지다. 선거에 이기고도 스스로 청와대와 거리를 두며 언론에 호명되는 걸 극도로 꺼렸다. 2004년 노무현 청와대의 홍보기획 비서관을 마친 이후 2017년 대선에 승리하자 홀연히 떠났다. 2019년 민주연구원장을 맡기 전까지 그는 공식 직함을 일절 갖지 않았다.

2022년 대선판에서 주목할 책사는 누구일까. 민주당에서는 경기연구원장을 지낸 이한주 가천대학교 경제학과 석좌교수를 꼽는 이가 많다. 이 교수는 이재명 후보의 대표 정책인 기본소득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후보가 성남지역 재야 변호사로 활동할 무렵부터 인연을 맺어 이 후보의 경제 교사 역할도 했다. 이 후보가 대선 경선에 나갈 때 이 교수는 각종 경제 관련 통계와 그래프, 수치가 담긴 두툼한 보고서를 달달 외우도록 했다는 후문도 있다.

국민의힘에서는 수면 위에 드러난 책략가가 보이지 않는다. 김종인 전 위원장이 킹메이커 역할을 자처했다가 물러난 뒤로는 이준석 대표가 ‘비단 주머니’를 주거나 ‘숙제’를 내는 식으로 윤석열 후보의 정치 감각을 높여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정도다. 한때 선대위 파행에 이를 정도로 논란이 됐던 이른바 ‘윤핵관(윤석열 캠프 핵심 관계자)’을 의식해 윤 후보의 전략 그룹이 더 잠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선거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대선 캠프 관계자들은 한두 사람에 의해 선거 전략과 판세가 요동치는 시대는 지났다고 입을 모은다. 민주당 대선 캠프에서 기획통으로 꼽히는 한 인사는 “세대별, 성별, 지역별, 계층별 이해관계와 요구가 제각각이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구도가 복잡해졌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분야별 담당 조직에서 내놓는 분석과 의견이 모여 커다란 전략이 완성되기 때문에 몇 사람을 킹메이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그의 해석이다. “온라인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아이디어와 관계망을 누가 선점하느냐에 따라 판세가 달라진다.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서 선거의 승패를 좌우할 최고의 책사는 강력한 집단지성 네트워크가 아닐까.”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2202호 (2022.0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