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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28)] 중국공산당, 복잡한 민족 문제를 현장서 직접 체험 

장정(長征)의 길에서 ‘다민족국가’ 길을 찾다 

식별 사업 통해 56개로 획정, 다양성 수용 획기적 노선 채택
전통적 ‘다름의 정치’ 회복, 70년간 안정적 체제 기틀 만들어


▎지난해 6월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앞두고 대장정을 재현하는 공연이 펼쳐 지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세계의 언어 분포를 그린 도판(뒷페이지 그림)에 오스트로네시아 어족(Austronesian Family)이 갈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에 주로 분포하는데, 동쪽으로는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섬들,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모퉁이의 마다가스카르 섬까지 펼쳐져 있다. 문명 초기부터 이 영역의 해상 이동이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Guns, Germs, and Steel 총, 균, 쇠]에서 새로 배운 뜻밖의 사실 하나가, 이 어족의 출발점이 타이완이라는 것이다. 친족언어(sister languages) 사이의 선후관계를 밝히는 것은 비교언어학의 중요한 과제다. 언어 A에 없는 문명 요소가(도구, 관계 등) 언어 B에 나타난다면 A가 B보다 앞선 형태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이완이 이 어족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현재의 사용 지역 중에서 따진 것이다. 어느 시점에는 중국의 영남(嶺南) 지역에서 타이완까지 이 언어의 사용자들이 퍼져 있었는데, 대륙에서는 중화문명의 압력 아래 이 언어가 사라진 반면 타이완 원주민에게는 지금까지 전승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출발점은 타이완


▎세계 언어 분포 지도. / 사진:위키피디아
타이완이 오랫동안 중국문명 밖에 있었던 사실을 원주민의 언어가 말해준다. 우리가 중화민국을 ‘중국’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공’으로 부를 때는 중화민국이 자리 잡고 있던 타이완이 중국의 중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로 타이완에 중화제국의 본격적 행정이 시작된 것은 1680년대의 일이었다. 해협 건너 복건(福建)성이 완전한 중국 영토가 된 후에도 천년 가까이 타이완은 왕화(王化)의 밖에 있었던 것이다.

17세기까지 타이완은 중국에서 확실한 이름조차 갖지 못하고 있었다. [후한서]와 [삼국지]에 ‘이주(夷洲)’라는 막연한 이름이 나타나고, [송사]와 [문헌통고]에 “천주(泉州) 동쪽에 유구국(流求國)이 있다”고 한 것은 그 북동쪽에 있던 유구(琉球)와 구분이 된 것인지 미심쩍기도 하다. 명나라 때 민간에서 “대원(大員 또는 臺員)”이라 부른 것은 타이완 남쪽의 한 부족 이름이었다고 하는데, 1684년 청나라가 정성공(鄭成功) 세력을 소탕한 후 복건성 예하의 부(府)를 설치하면서 붙인 “대만(臺灣)”이란 이름은 민간의 호칭이 굳어진 것이었다.

16세기 초까지 타이완에는 한족의 이주가 극히 적었다. 16세기 후반부터 이주가 늘어난 것은 인근 해상활동이 늘어난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여기저기 해적소굴이 생겨나는 정도였는데, (17세기 초에 스페인과 네덜란드 세력이 일시 타이완을 ‘점령’했다고 하는 것도 이런 해적소굴 차원이었다.) 1640년대부터 정성공 세력이 수십 년간 자리 잡고 ‘왕조’를 칭할 만큼 큰 조직을 이루었다. 그 시기에 한족의 이주가 급증한 결과 대만부가 만들어진 것이다.

16~17세기 해상활동의 증가로 타이완의 중요성이 커져 ‘부’가 만들어진 것처럼 19세기 해상활동의 또 한 차례 격증이 타이완을 중국의 20번째 ‘성(省)’으로 승격시켰다.(1887) 대만부가 설치된 후에도 원주민에 대한 청나라의 통제력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지나가던 배가 이곳에 난파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는데, 그 선원들이 청나라 관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면 관례에 따라 자국 영사에게 인도되었지만, 원주민의 손에 학살당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1871년 12월 타이완 동남해안에서 난파한 오키나와 배 한 척이 타이완의 행로에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 ‘무단(牧丹)사건’도 그런 상황에서 일어났다.

슈리(나하) 항을 함께 떠나 미야코지마와 야에야마로 향하던 (둘 다 오키나와 열도의 남쪽 섬들이다.) 네 척의 배가 태풍에 휩쓸렸는데, 타이완 동해안에서 난파한 한 척의 생존자들은 청나라 관헌의 도움으로 살아 돌아갔다. 그런데 행정력이 취약한 동남해안에서 난파한 또 한 척의 선원들은 참혹한 운명을 맞았다. 69명 승선자 중 66명이 상륙했다가 그중 54명이 원주민에게 학살당하고 12명만이 7개월 후에 귀국할 수 있었다.

오키나와 조정은 이 문제를 청나라에 제기할 뜻이 없었다. 청나라의 통제력이 타이완의 오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오키나와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은 국가가 개입할 일이 아닌 당사자들의 문제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오키나와를 병합할 마음을 먹고 있던 일본에게는 좋은 빌미였다. 피해자들이 일본 국민이라고, 그리고 가해자들이 청나라 국민이라고 주장하며 청나라를 압박하는 것은 1석2조의 책략이었다. 게다가 판적봉환(版籍奉還)으로 많은 사무라이가 실업 상태에 빠지면서 정한론(征韓論)을 비롯한 해외 침략의 욕구가 터져 나올 때였다. 1874년 일본의 대만 출병은 일본 당국의 여러 필요가 어우러진 결과였다.

1873년 봄 북경에 간 일본 외무대신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가 무단사건과 같은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타이완의 “청나라 지배 밖에 있는” 지역을 정벌하겠다고 통보했다. 청나라 측에서는 피해자(오키나와인)와 가해자(타이완 원주민)가 모두 청나라 백성이므로 일본이 개입할 필요가 없는 국내 문제라고 반박했다.

아직 교화(敎化)를 받지 못한 ‘생번(生蕃)’은 문명의 울타리 밖에 있지만 제국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전통적 화이관(華夷觀)을 청나라 측은 주장한 것이다.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일률적인 권한과 책임을 가진다는 일본 측의 근대적 국가관과 어울릴 수 없었다. 양측 주장이 엇갈린 가운데 일본은 1874년 5월 사이고 쓰구미치(西鄕從道, 1843~1902,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를 사령관으로 수천 명의 군대를 타이완 남부에 상륙시켰다.

전투 사상자보다 일본군 말라리아 피해가 열 배


▎네덜란드 수비대가 정성공 군에 항복하는 모습(1662, 타이난의 젤란디아 요새). / 사진:위키피디아
6개월 주둔의 군사적 성과는 미미했지만(전투로 인한 양측 사상자보다 일본군의 말라리아 피해가 열 배나 컸다.) 외교적 성과가 컸다.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무단사건에 대한 배상금을 받으며 오키나와를 병합할 근거를 강화했고, 나아가 20년 후 타이완을 탈취할 배경도 만들었다. 청일전쟁을 이긴 일본이 시모노세키조약(1895)에서 요동반도와 타이완을 획득하려 할 때 러시아-프랑스-독일의 ‘3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는 뱉어냈지만 타이완을 지킬 수 있었던 데는 1874년의 출병 사실이 배경이 된 것이다.

폴 바클레이의 [Outcasts of Empire 제국의 따라지들](2018)은 일본의 타이완 통치 50년간 원주민 인식방법을 살핀 연구다. 중국 원주민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상황이 만들어낸 특이한 주제다. 중국, 특히 서남부에는 독자적 문화를 가진 많은 종족이 있었고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개별적인 관심을 크게 갖지 않았다. 중국의 전통적 원주민관을 바클레이는 일본의 타이완 연구 개척자 이노 가노리(伊能嘉矩, 1867~1925)의 말로 설명한다.

“(중국인들이 타이완 원주민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 자기네와 다른 언어와 풍속을 가진 다른 사람들로 인식했을 뿐,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 명나라 때 ‘동번(東蕃)’이라는 이름이 쓰였고 … 청나라가 타이완을 점령한 후 정치적 복속 여부에 따라 ‘생번(生蕃)’과 ‘숙번(熟蕃)’으로 크게 구분했다. … (그러나) 종족을 따져 살피지는 않았다.”(191쪽)

‘생번’이 중국인에게는 여러 변경에 널려있는 익숙한 존재였던 반면 일본인에게는 새로운 존재였다. 종래 경험한 이질적 존재는 아이누와 유구인 정도였는데, 아이누는 ‘숙번’의 범주에 들고, 유구인은 더 높은 수준의 문명을 누려온 사람들이었다. 일본이 열도를 넘어 ‘제국’으로 나아가는 초입에서 타이완 원주민은 이질적 존재를 상대하기 위한 첫 숙제가 되었다. (일본에서 ‘족(族)’이란 말이 나쁜 뜻으로 흔히 쓰이는 것도 이질적 존재와의 공존 경험이 적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이 타이완 원주민에게 큰 관심을 가진 또 하나 이유는 개발의 필요에 있었다. 중국에게는 타이완의 자연환경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던 반면 일본에게는 유일한 아열대지역 영토로서 사탕수수, 고무 등 전략적 가치를 가진 자원의 개발이 절실했다. 청나라 관헌이 ‘생번’ 지역을 방치한 것과 달리 일본은 ‘생번’ 지역을 최대한 좁혀서 자원 착취의 기반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고, 그를 위해 원주민에 대한 적극적 이해가 필요했다.

이질적인 사람들, 즉 오랑캐에 대한 중국인의 무관심은 오만한 중화사상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유기론적인 정치사상에도 원인이 있었다. 문명 수준에는 차등이 있는 것이고, 교화(敎化)는 서서히 이뤄지기를 기다릴 일이지 갑자기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낮은 수준 사람들이 높은 수준 사람들을 보고 배워야지, 높은 수준 사람들이 낮은 수준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너무 애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중국에도 ‘근대화’의 과제가 떨어졌고, 그 중요한 열쇠 하나가 ‘국민국가’에 있었다. 이질적인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내부의 오랑캐들, 특히 문명의 접근이 어렵던 ‘생번’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교화의 압력을 강화할 것인가, 아니면 없애 버릴 것인가? 국가 안에 특별한 자리를 만들어서 이질적인 대로 어울리는 길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인가? 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일본인의 연구와 통치 시도가 중국인들에게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민족 식별 사업은 ‘미래’를 안정시키는 데 목적두고 추진


▎스먼 전투는 1874년 일본의 타이완 출병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 사진:위키피디아
일본의 1880년대 말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로 근대국가 건설의 기초공사가 마무리된 데 비해 중국은 많이 뒤쳐졌다. 중국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입헌운동이 활발해져서 신해혁명(1911) 직후 헌법이 만들어졌지만 오랫동안 실효성을 갖지 못했다. 1947년의 중화민국헌법과 1954년의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이 비로소 실효성을 가진 헌법으로 나타났다. 그중 중화민국헌법은 1948년부터 1987년까지 계엄기간 중 임시수정헌법에 가려져 있다가 1991년에야 실효성을 발휘하게 되었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은 문화대혁명 와중인 1975년 ‘75헌법’으로 대치되었지만 얼마 안 가 ‘78헌법’과 ‘82헌법’으로 재정비되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후 1954년 (9월 20일) 헌법 발포까지 5년이나 시간이 걸린 사실이 눈길을 끈다. 헌법 제정의 주체가 될 전인대(全人大, 全國人民代表大會) 구성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전인대 구성을 위해서는 ‘인민(人民, 국민)’의 범위와 구조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그중 가장 까다로운 일이 ‘민족(民族)’의 획정이었다.

토머스 멀레이니는 [Coming to Terms with the Nation 중국의 민족 만들기](2011)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운남(雲南)성을 중심으로 소수민족 획정 과정을 살펴본다. 애초에 당국은 간단한 일로 생각했다. 1953~54년 호구조사에서 피조사자가 자기 소속 민족을 스스로 밝히게 했다. 목록을 정해놓고 선택하게 한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써넣게 한 것이다. 그랬더니 단 한 사람을 구성원으로 하는 20여 개를 포함해 4백여 개의 민족 명단이 나왔다. 객관성의 기준을 세울 필요가 분명했다. 그래서 1954년 초에 인류학자와 언어학자 중심으로 조사대를 서둘러 꾸려 ‘민족 식별(識別)’ 사업에 나섰다. 가을에 출범할 전인대에 민족대표도 포함될 것이기 때문에 이 거대하고 복잡한 작업에 겨우 6개월의 시간이 주어졌다.

20년 전 멀레이니가 연구에 나설 때까지 1954년의 민족 식별 사업에 관한 체계적 연구가 없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학문적 기준 없이 자의적으로 행해졌다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까지 들먹이는 비판적 시각이 외국에는 많았다. 서둘러 진행된 상황 때문에도 그런 의심이 들기 쉬웠다. 멀레이니는 새로 공개된 (50년이 지나) 자료를 활용하며 작업 참여자 몇 사람을 인터뷰하는 (그중 한 사람의 세밀한 일기가 기대 밖의 큰 가치를 발휘했다.) 등 새로운 방법의 연구를 통해 이 식별 작업에서 예상 밖의 큰 가치를 발견했다고 한다.

학문적 기준에 대한 멀레이니의 너그러운 태도에 나는 공감한다. 56개 인구집단을 ‘민족’으로 설정한 기준의 엄밀성에는 물론 불만스러운 점이 많다. 회족(回族), 만족(满族), 위구르족(维吾尔族), 티베트족(藏族), 몽골족(蒙古族), 강족(羌族) 조선족(朝鲜族) 등 서방에서 동북방에 걸쳐 분포하는 민족들은 역사 속에도 존재가 분명하고 인구도 1백만 명에서 1천만 명 사이로 고른 편이라서 쉽게 납득된다. 그러나 서남방에는 장족(壯族), 묘족(苗族), 이족(彝族), 토가족(土家族) 등 인구 1천만 명 전후의 큰 민족들과 3556명에서 51069명 사이의(2010년 통계) 19개 초미니 민족을 포함한 진짜 ‘소수’민족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큰 민족들은 더 구분할 여지가 없는 것인가? 작은 민족들은 따로 세울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것인가?

멀레이니의 관점에 공감하는 것은 ‘정확성’ 차원에서 이런 의문을 해소시켜 주기 때문이 아니라 민족 식별 사업의 목적을 ‘타당성’ 차원에서 해명해 주기 때문이다. 각 인구집단의 상태가 확정적인 것이 아니고, 그들의 ‘현재’를 정확하게 묘사하기보다 다민족국가 안에서 그들의 ‘미래’를 안정시키는 데 사업의 진정한 목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근대국가, 유별나게 높은 수준의 균질성 추구


▎1915년 저항운동으로 체포된 타이완인들을 법정으로 호송하는 모습. / 사진:위키피디아
이 사업이 스탈린의 민족관을 넘어서는 장면을 그린 80~91쪽에서 이 관점이 가장 확실히 나타난다. 스탈린은 영역, 언어, 생산양식, 문화의 네 가지 공유자산을 가진 집단이 민족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자본주의체제를 전제로 성립하는 것으로, 중국의 많은 소수민족에게는 적용되기 어려운 것이다. 운남성 조사단장 린야오화(林耀华, 1910~2000)는 이 울타리를 넘어서기 위해 ‘종족 잠재성(ethnic potential, 멀레이니의 표현)’이란 개념으로 ‘민족’의 정의를 확장했다. 스탈린의 4대 공유자산을 지금 갖추고 있지 않더라도 장차 갖추기 위한 조건을 확인할 수 있으면 ‘민족’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현실에 나타나 있지 않은 ‘잠재성’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고무줄 잣대’를 피할 수 없다. 실제로 조사단원들은 ‘조사’보다 ‘설득’에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조사단이 그린 그림을 피조사자들이 받아들이고 권해주는 자리에 들어가도록 설득하는 일이었다. 배경의 국가권력이 조사단의 설득력을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에 피조사자의 인식을 강압적으로 바꾼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 멀레이니가 인정하는 ‘타당성’은 1954년 당시에 확립된 것이 아니라 그 후 국가의 꾸준한(교육과 언어를 포함하는) 문화정책을 통해 56개 민족의 다민족국가를 ‘현실’로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구축된 것이다.

C. A. 베일리는 [The Birth of the Modern World 근대 세계의 탄생](2004)에서 전근대 정치조직의 일반적 특성을 ‘다름의 정치(politics of difference)’로 표현했다.(29~36쪽) 거대한 제국처럼 보여도 실상 제국의 중심부에서 통제하는 것은 일부 지역과 일부 영역(상비군과 교통-통신망 등)에 국한되고 그밖에는 여러 세력과 다양한 요소들이 공존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베일리는 비정상의 위치에서 정상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균질성은 근대국가의 지향이다. 인간사회의 복잡성을 감안하면 ‘다름의 정치’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근대국가가 유별나게 높은 수준의 균질성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어서 그 한계를 넘을 때는 전체주의의 폐단이 나타나곤 했다. 탈근대 시대 정치의 과제가 균질성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는 데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국가사회의 균질성은 근대국가의 경쟁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일까? 엔진에 비교한다면 균질화된 국가는 순간출력이 높지만 연료효율이 낮은 엔진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강압적 ‘국론통일’이 단기간의 동원력을 끌어올릴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사회 내의 모순을 더 격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근대국가의 균질성 지향은 자원 공급이 폭증하는 (그래서 단기적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고, 자원 절약에 역점을 둘 탈근대 상황의 정치체제는 이질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속가능성을 늘리는 길이 될 것이다.

20세기 초의 중국 정치사상가들이 국민국가 건설의 과제 앞에서 ‘국민’의 범위를 정하는 의견은 대개 ‘5족공화(五族共和, 漢-满-蒙-回-藏)’로 모였다. 중화제국의 다양성을 지키려는 뜻이었지만 다양성의 인식에 한계가 있었다. 여러 색깔이 어울리는 그림이기는 하나 깔끔한 5색 무지개의 그림일 뿐이다. 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민족 식별 사업을 통해 그릴 그림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이 된다. 색깔부터 56개나 되고 그중 십여 개 색깔은 꽤 넓은 영역에 고르게 칠해지지만 그 밖의 수십 개 색깔은 여기저기 얼룩처럼 묻어있는 지저분한 그림이다.

장정(長征)은 중국공산당 성격 바꾼 중대 사건


▎운남성과 귀주성의 소수민족자치구역 분포도. 빗금으로 표시된 곳은 둘 이상 소수민족의 자치구역이고 작은 네모는 향-진(鄕-鎭)급 자치구역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1934~35년의 장정(長征)은 중국공산당의 성격을 바꿔놓은 중대한 사건이었고 민족문제의 복잡성에 대한 공산당의 인식을 심화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1년의 장정 기간 중 대부분을 광서(廣西), 귀주(貴州), 운남(雲南), 서부 사천(四川) 등 민족 분포가 복잡한 지역에서 생존을 위해 현지 주민들의 도움을 얻으려 발버둥치는 입장으로 지냈다. 미개한 오지 주민들을 멀리서 내려다보던 중국 지도계층의 전통적 입장과 다른 경험이었다. 1935년 1월의 준의(遵義) 회의에서 코민테른파 대신 마오쩌둥 지도체제를 출범시키는 데도 중국 현실의 밑바닥을 투철하게 인식한 경험이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53~54년 호구조사에서 수백 개 민족명이 나온 것은 민족의 획정을 당사자에게 맡긴다는 이상주의를 보여주었다. 1954년의 민족 식별 사업에서 이를 수십 개로 줄인 것은 현실과의 타협이었다. 타협이기는 하지만 현실의 적극적 수용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노선이었고, 그 후 70년간 일관된 민족정책을 통해 안정된 다민족국가를 키워냈다.

민족정책의 일관성이 완벽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전체주의 풍조가 휩쓴 문혁(文革,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일체의 민족 정체성이 위협을 받았다. 조선족사회의 내 또래 (1950년 대 출생) 지식인들은 ‘민족심(民族心)’ 표출에 힘을 많이 쏟았는데, 성장기에 겪은 문혁 분위기에 대한 반발로 이해한다. 그들은 근래 들어 아랫세대의 민족심 약화를 걱정하기도 한다.

19세기 ‘보이지 않는 것’에 소홀했던 시대


▎중국(2450개 글자)(왼쪽)과 일본(2268개 글자)의 한자타자기. 중국의 타자 고수들은 능률 극대화를 위해 글자들 사이의 관계를 따지면서 자기 식의 자판 배열 방법을 모색했고, 그것이 컴퓨터시대에 쓰일 입력프로그램의 준비가 되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민족 정체성의 첫 번째 지표인 언어를 놓고 봐도 그들의 걱정은 이해가 된다. 조선족 자치구역에서 조선어는 한어와 나란히 공용어로 쓰이고 초-중등 교육도 조선어 학교와 한어 학교로 구분해서 시행된다. 조선족 학생은 조선어 학교에 다녀야 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한어 학교 취학이 허용된다. 우리 또래에서는 5%가량이 허용되었고 그 정원이 늘 남아돌았는데, 지금은 한어 학교에 다니려는 학생이 너무 많아서 경쟁이 치열하게 되었다.

중국의 경제발전에 따라 사회 유동성이 커진 결과다. 조선족사회를 벗어날 기회가 별로 없던 윗세대와 달리 아랫세대 젊은이들은 어느 곳에 가서 어떤 일을 하며 살지 선택의 범위가 넓어졌다. 넓은 선택 범위를 더 잘 누리려면 한어 교육을 받아야 한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바람의 힘이 아니라 햇볕의 힘이다. 중국 소수민족의 정체성은 국가의 공식적 정책보다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의해 서서히 허물어진다. 카오스처럼 복잡하던 민족 분포 상황은 한어 사용의 확장에 따라 단순화되어 왔다. 인구 1천만 명이 넘는 만주족은 일상생활에 만어(滿語)를 쓰지 않으면서 한족과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과경(跨境)민족(중국 밖의 민족과 연결된 소수민족)’의 특성을 가진 조선족은 변화하는 상황 앞에서 기회와 위기를 함께 맞고 있다. 조선족사회의 정체성 약화 이유로 ‘한화(漢化)’를 많이 지적하지만 그 못지않게 큰 이유가 ‘한국화’에도 있다. 한국의 힘이 커지고 중국과의 관계가 확장되면서 조선족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조선족사회의 진로는 한-중 관계의 큰 열쇠일 뿐 아니라 중국 국가성격의 지표로서 두 나라가 유의할 과제다.

동아시아 사회들의 근대 진입 과정을 살피면서 프레데리크 바스티아의 1850년 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이 생각난다. 당시 유행하던 ‘깨진 유리창’ 설법을 반박한 글이다. 빵집 유리창이 깨졌을 때 빵집 주인은 손해를 보지만 유리가게에 일거리가 생기기 때문에 사회 전체에는 손해가 아니라는 설법이다. 눈에 보이는 몇몇 사람의 득실만 따진다면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빵집 주인이 다른 곳에 그 돈을 썼을 보이지 않는 가능성까지 고려한다면 사회의 손실이 분명하다는 것이 바스티아의 주장이다.

이 글의 내용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글이 뒤늦게 널리 알려지게 되는 경위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폰 비저가 1914년 ‘기회비용(opportunity cost)’ 개념을 제기하면서 이 글을 인용한 것이다. 바스티아 자신도 근대경제학의 개척자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인물인데, 그가 제기한 개념이 60여 년 동안 파묻혀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19세기 후반이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지 않던 시대, “파괴는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자원 공급의 급격한 증가 속에서 사람들이 자기 코앞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던 시대였다. 파괴의 극단적 형태인 전쟁마저 정당화되던 시대였다. 제국주의 경쟁이 한계에 이르러 세계대전이 일어날 상황에 이르러서야 사회 전체의 득실을 제대로 생각하는 ‘기회비용’ 개념이 경제학에 채택된 것이다. 20세기 후반 자원과 환경 문제가 부각되면서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눈은 더욱 달라졌다.

아편전쟁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 백여 년 기간이 중국에게 ‘치욕의 세기’였다. 치욕의 원인은 근대화의 부진에 있었고, 첫 번째 비교 대상이 일본이었다. 일본의 성공과 중국의 실패를 비교하는 데도 ‘보이는 것’에 얽매여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하는 추세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타자기 때 한자 사용 불편… 컴퓨터 시대에 되레 유리

멀레이니의 또 하나 책 [The Chinese Typewriter: A Hi story 한자타자기의 역사](2018)를 읽으며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생각을 굴려보게 된다. 통신 발달은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영역의 하나다. 그런데 표의문자인 한자가 정보-통신 분야에서 중국의 큰 핸디캡이 되었다. 전보를 주고받으려면 글자 하나하나를 네 자리 숫자로 전환해서 보내고, 받는 쪽에서 이 숫자를 다시 한자로 전환해야 했다. 정해진 수의 부호를 순서대로 늘어놓기만 하면 되는 표음문자에 비해 같은 분량의 정보처리에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정보처리의 이런 부담은 경쟁의 시대에 대단히 불리한 조건이다. 그래서 20세기 초반의 중국에서는 한자 대신 주음부호를 써서 표음문자처럼 만들자는 운동도 일어났다. (한국에서 한때 한글 ‘풀어쓰기’ 주장이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근년의 컴퓨터 기술은 표의문자를 오히려 더 유리한 위치로 옮겨놓았다.

‘한자타자기’의 한글 입력은 11타로 이뤄진다. ‘Chinese typewriter’는 19타다. 그런데 지금 중국어 입력프로그램으로 ‘汉字打字机’ 입력은 불과 6타면 된다. 각 글자 핀인의 첫 음소를 ‘hzdzj’라 치면 화면에 ‘汉字打字机’가 뜨고, 엔터키를 누르면 완성된다. 모든 정보처리 활동에서 한자가 알파벳보다 유리하게 되었다.

컴퓨터 환경에서 한자의 이점이 기술조건의 변화가 어쩌다 가져다준 횡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멀레이니는 강조한다. 수천 개 글자를 담는 식자(植字)판을 조금이라도 더 능률적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글자들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체계적 인식이 형성되어 지금 쓰이는 입력프로그램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표의문자의 유리한 점은 기계식 타자기 시대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많았다. 문자만이 아니라 전통시대의 온갖 제도와 관습에는 오랫동안 선택받고 발전해 올 수 있게 한 특성들이 있는데, 근대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는 이 특성들이 ‘봉건적’이다, ‘비능률적’이다, 하는 이유로 배척받는 일이 많았다. (베트남어에서는 그래서 한자가 사라졌다.) 중국의 민족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도 스탈린 식 근대적 민족관에 얽매이지 않고 전통적 ‘다름의 정치’ 원리를 되살린 데 이유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오랑캐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더 깊어진 하나의 의문이 있다. 중국과 베트남이 진정한 ‘공산주의’ 국가였던가? 마오쩌둥과 호치민, 그리고 그 가까운 협력자들이 근대의 ‘개인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제창한 ‘사회주의’는 정통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하나의 발전단계가 아니라 전통적 질서 원리의 회복에 뜻이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이 의문을 더 넓게, 더 깊이 파헤치기 위해 동아시아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을 살펴보는 또 하나 작업을 준비하면서 ‘오랑캐의 역사’를 마친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9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202202호 (202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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