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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26)] 대한제국 대신 출신 동농 김가진의 별장 ‘백운장’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아픔 서려 

74세에 대일 항쟁 위해 상하이 망명 결행, 병마 시달리다 세상 떠나
‘백운장’ 일본인에게 넘어간 뒤 음식점 돼, 지금은 ‘백운동천’ 각자만


▎백운장은 ‘백운동천’이라는 각자만 남기고 사라지고 말았다. / 사진:이성우
광화문에서 경복궁을 끼고 세검정 방향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빠른 길을 택하고자 하는 사람은 경복궁 지하철역 교차로에서 효자동·청운동을 거쳐 자하문 터널을 통과하고, 조금 느리지만 주변 경치를 감상하고자 한다면 청와대 영빈관 앞에서 무궁화동산과 칠궁 사이에 난 도로를 이용해 창의문 쪽으로 넘어간다.

경복궁 지하철역 교차로에서 자하문 터널을 통과해 세검정 삼거리에 이르는 약 3.2㎞의 도로를 자하문로라고, 칠궁 앞에서 창의문 고개를 넘어 자하문 터널과 합류하는 석파정 부근까지의 약 1.7㎞의 도로는 창의문로라고 한다. 창의문이 곧 자하문인데, 도로 명칭을 자하문로와 창의문로로 나눠 사용하니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든다. 한양도성의 4개 소문(小門) 중 하나였던 창의문(속칭 자하문)은 조선시대 부암동과 세검정 지역을 경유해 개성과 의주 방면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했다.

그렇다면 창의문로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었을까? 답은 ‘아니다’이다. 창의문로는 1953년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해 처음 등장했다. 그렇다면 자하문로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다녔던 길이었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청운동과 부암동을 연결하는 약 500m 길이의 자하문 터널은 1986년에야 개통됐다.

하지만 자하문로의 역사는 오래됐다. 조선 영조 46(1770)년경 그려진 ‘한양도성도’에도 자하문로가 표시돼 있으며, 1900년에 제작된 ‘한성부지도’나 1910년 그려진 ‘경성부시가도’에도 자하문로를 볼 수 있다. 지금과 차이가 있다면 물길이 복개돼 도로가 되고, 주택들을 철거한 후 도로를 넓혔다는 점이다. 지금의 도로를 기준으로 얘기한다면 자하문로 중앙선을 중심으로 서쪽에 복개한 물길과 옛 도로가 있었으며, 중앙선의 동쪽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대일 항쟁기인 1925년부터 순차적으로 시작된 복개로 백운동 계곡, 청풍계, 옥류동의 물길이 사라지면서 2차선 정도의 도로가 만들어졌고 1978년 들어 중앙선 동쪽의 주택들을 철거하면서 4차선 넓이의 도로로 확장됐다. 하지만 이 도로도 북쪽으로 가다 보면 인왕산의 끝자락에 막혀 경기상업고등학교 앞 즈음에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86년 자하문 터널이 뚫리면서 연결된 것이다.

옛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부근에서 창의문을 지나야 부암동과 세검정 방향으로 갈 수 있었다. 이 길은 어디였을까? 이에 대한 단서는 정선이 그린 두 점의 ‘창의문도’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한 점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고, 다른 한 점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장동팔경첩’에 있다.

정선의 작품 ‘장동팔경첩’에 옛 사람 다녔던 창의문 길 나와


▎대례복을 입은 동농 김가진의 모습. / 사진: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
두 그림 모두 정선의 작품으로, 이 두 점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바위와 소나무들 사이로 길고 짧은 선들이 구불구불하게 창의문까지 연결돼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선들이 옛사람들이 다녔던 길을 표현한 것이다. 창의문까지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급해 길고 짧은 선을 이용해 계단을 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에서 창의문과 연결된 성곽의 동쪽은 북악 능선과, 서쪽은 인왕 능선과 연결돼 있고 옛 도로는 창의문 아래쪽 남서 방향으로 나 있다. 지금의 지형에 대입해보면 창의문에서 언덕을 내려오다 청운벽산빌라 쪽으로 방향을 틀어 계단을 타고 내려간 후 경기상업고등학교 서쪽 담장과 만나는 삼거리 정도까지의 500m 남짓한 코스가 옛 도로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도로는 대일 항쟁기에 보수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1933년 11월 29일 [조선일보] ‘창의문 마루턱으로 십이간(十二間) 도로계획’ 제하의 기사를 보면 “새로운 연도부터 예산 5만원을 들여 청운동부터 창의문을 넘어 근교 명승의 하나인 세검정까지 십이간 산책 도로를 신설키로 정하고”라고 나온다. 여기서 십이간은 20m가 조금 넘는 길이로, 꽤 넓은 도로로 확장할 계획이라는 의미다. 1936년 9월 29일 [조선일보] ‘유원지 자하문 밖 신도로 촉성기운’ 제하의 기사에는 “경성부 당국에서 성의만 있다면 청운정 백운장이라는 요릿집 앞으로부터 창의문까지는 겨우 500m내외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니 창의문으로 올라다니는 언덕과 병행해서 개천 자리에 토관을 묻어 올라간다면 용이하고 편하게 15m 길을 내게 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과연 ‘청운정 백운장이라는 요릿집’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백운장에 대한 언급은 대일 항쟁기 소설가 겸 평론가로서 활동했던 월북작가 엄흥섭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산가영춘기(山家迎春記) 창의문 고개’의 내용에 나온다.

“창의문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사람은 쓰봉 기럭지가 길어서는 안 된다. (중략) 여자이면 긴 치맛자락을 끌어서는 안 된다. 굽 높은 구두를 신어서는 더구나 안 된다. 창의문 고갯길은 돌밭길이요 바위 언덕길이요 모래 흙투성이의 길이기 때문이다. (중략) 백운장에서 창의문까지에는 적어도 칠팔개의 가로등이 필요한 것은 밤에 저물어야 이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의 공통적 요구들이다.”([조선일보] 1937년 3월 26일)

현판석에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 글씨 쓴 명필


▎김가진 집터 표석은 서울 종로구 체부동 45번지에 있다. / 사진:이성우
백운장은 지금은 사라진 지명인 백운동에 있었던 동농 김가진의 별서(別墅)고, [조선일보]에서 언급하고 있는 백운장은 대일 항쟁기 본정 2정목(지금의 충무로 2가)에 청향원이라는 고급 일식점의 별저(別邸)로, 이름만 같은 전혀 다른 곳이다.

김가진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 고종의 측근 관료다. 헌종 12(1846)년 1월 29일(음력) 한성부 북부 사재감 신교(지금의 신교동)에서 예조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지낸 부친 김응균과 모친 함안 박 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동농이며,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선원 김상용의 11세손인 장동 김씨 집안이다. 세 살 때 벌써 글자를 알아보기 시작했을 정도로 총명했지만, 서자 출신이었던 그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다 그의 나이 32세 되던 고종 14(1877)년에야 비로소 서얼들의 관직이었던 정9품 규장각 검서관에 올랐다.

이후 하위직을 전전하던 그는 관직 입문 10년째인 고종 23(1886)년 정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면서 고위직 관료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는 고종 21(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혁의 바람이 불면서 적서의 차별 역시 철폐됐기 때문이다.

김가진은 고종 23(1886)년 10월 주차청국천진주재종사관에 올라 외교관으로서의 첫 업무를 시작했다. 이후 고종 28(1891)년 2월까지 약 4년간 일본 주재 공사관에서 대일본 관련 업무를 담당한 일본통이자 뛰어난 외국어 실력, 탁월한 외교관으로서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고종 33(1896)년 7월에는 건양협회의 후신인 독립협회가 창설되면서 위원으로 선출됐고,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명필로 알려진 김가진은 이때 현판석에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 글씨를 썼다고 한다.

고종 44(1907)년 7월 19일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했다. 김가진은 순종 1(1908)년 9월 23일 규장각 제학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마무리했다. 그의 나이 63세 되던 해였다. 30여년간 숨 가쁘게 달려온 공직생활의 종지부를 찍은 듯했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하문 터널 위쪽 옛 백운동 지역에 가면 ‘백운동천’(白雲洞天)이라고 각자 된 커다란 바위를 볼 수 있다. 백운동천 왼쪽으로는 ‘광무 7년 계묘 중추 동농’이라는 관지(款識)가 작게 새겨져 있다. 1903년 계묘년 가을 동농(김가진의 호)이 썼다는 뜻이다.

지금은 사라진 백운동이라는 지명은 ‘흰 구름이 아름답다’라는 뜻이다. 백운동에 김가진의 별서가 있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나, 그가 어디서 살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가진이 태어난 곳은 서울 종로구 신교동으로 알려져 있고 집터 표석은 체부동 45번지에 있다. 1896년 7월 28일 자 [독립신문]에는 “7월 19일 세포동 사는 중추원 의관 김가진 씨 집에서 불이 나서 즉시 껐으나”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세포동이라는 지역이 어디인지는 좀처럼 확인되지 않는다. 지금의 종로구 통인동에 있던 사포섯골을 사포동이라고도 불렀기에 혹시 사포동을 세포동이라고 한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백운동은 ‘흰 구름이 아름답다’는 뜻


▎장동팔경첩에는 조선시대 창의문을 지나 부암동과 세검정 방향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김가진의 둘째 아들인 성엄 김의한 선생이 1946년 10월 1일 미군정청 사법부 소청국에 제출한 ‘청운동 가옥과 토지에 대한 소청 사유’에 의하면 김의한 본인의 본적은 종로구 사직동 162번지다. 다시 말해 김의한이 태어나던 때 김가진의 집은 사직동에 있었다는 뜻이다. 김가진의 며느리 수당 정정화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기록한 책 ‘장강일기’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10년 전 서울 사직골의 시댁으로 시집 왔을 때의 그 철없던 시절, 1910년 가을, 계집아이티가 완연했던 내 나이 열한 살 때의 일이다”(‘장강일기’ 18쪽)

남편인 김의한과 1900년생 동갑내기인 정정화는 결혼 당시 시댁이 사직동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1896년부터 1900년 사이 언젠가 김가진이 세포동에서 사직동으로 이사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10여 년 후인 1911년 북부 장통방 수표교 동북천변 79통 1호로 이사하겠다는 [매일신보]1911년 4월 27일의 광고 기사와, 그로부터 며칠 후인 1911년 5월 5일 [매일신보] ‘김남의 가정정리’ 제하의 기사에서 “사직동 소재 가옥을 방매해 수표교 등지로 옮기고”라는 내용으로 보아 1911년 5월 이후 사직동의 집을 팔고 수표교 근처로 이사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김남’이란 남작 김가진을 줄여 쓰는 용어다. 일제는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 12일 조선귀족령에 의거, 국권 피탈에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공의 크기에 따라 귀족 지위를 부여했는데, 이때 김가진에게도 남작의 지위가 내려졌다.

김가진의 첫째 아들은 김중한으로 고종 24(1887)년 태어났다. 1911년 2월 26일 자 [매일신보]는 “(김중한이) 1911년 2월 23일 만취해 귀가 후 번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검시 결과 독약을 먹은 것이 확실하다”고 하고 있어 첫째 아들의 자진이 사직동에서 수표교 부근으로 이사하는데 영향을 줬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김가진이 수표교 근처의 집을 계속 유지하면서 살고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백운장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별서로서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정화 선생은 ‘장강일기’에서 백운장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내가 처음 서울 시댁에 들어왔을 때 인왕산 기슭의 백운장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 으리으리한 규모에 기가 질린 일이 있었다. 서울에서 으뜸가는 주택으로 만여 평의 숲이 집 둘레를 싸고 있었다.”(‘장강일기’ 277쪽)

이때가 1910년 가을쯤이었으며, 백운장이 정정화 선생의 말처럼 기가 질릴 정도로 으리으리한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정정화 선생의 다음 말에서 알 수 있다.

“시아버님이 백운장에서 기거하기 전에는 조정 대신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초라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장강일기’ 277쪽)

김가진의 부친 김응균은 예조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지냈지만, 이재에 그리 관심을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더욱이 서자 출신 김가진 형제를 두고 양자를 별도로 들여야 하는 조선의 사대부 법도가 적용되다 보니 부친의 재산조차도 김가진이 아닌 양자의 몫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3년 발간된 ‘오래된 서울’에 실려 있는 김자동(김가진의 손자)의 2012년 10월 인터뷰에 의하면 “아버지(김의한)가 1900년에 태어난 곳도 이 집이고 어머니(정정화)가 1910년 시집온 곳도 바로 이 집이라고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강일기’나 ‘청운동 가옥과 토지에 대한 소청 사유’에는 본적이 사직동 162번지라고 나온다. 사직동 162번지는 약 50평 정도 되는 한옥으로 이로써 백운장은 별서였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1916년 4월 일본 관리에게 퇴거명령 받아


▎장명국의 책 ‘대동단 총재 김가진’에는 백운장의 소유권이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과정이 자세히 나온다.
‘동농 김가진전’의 저자 김위현은 책에서 백운장의 건축 시기를 1890년 후반 정도로 추정하면서 “안종덕의 ‘석하집’에서 ‘백운장기’를 쓴 시기를 계묘, 즉 1903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건물이나 조경은 이미 1903년 이전 완성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백운장기’ 첫 줄은 “중추원 부의장 동농 김공이 건축한 별장”으로 시작하는데, 김가진이 중추원 부의장으로 임용된 날은 고종 39(1902)년 12월 17일이며, 고종 40(1903)년 12월 30일 비원 중수를 위한 비원 증치 안건의 반포와 동시에 비원감독으로 임명됐다. 따라서 비원을 중수하고 남은 재목을 하사받아 백운장을 지었다고 알려진 세간의 이야기들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며, 다만 중수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하사받은 재목으로 기존의 백운장을 증축·개축했을 수는 있다고 본다. 또한 백운장기의 내용 중에는 “정자 동쪽 석벽의 큰 글자인 ‘백운동천’은 김가진의 글”이라고 하고 있어 안종덕이 방문했을 당시 ‘백운동천’ 각자는 이미 새겨져 있었고, 백운장 역시 그의 방문 이전에 이미 완성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가진이 언제까지 백운장을 소유하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12년 작성된 ‘경성부 북부 청운동 토지조사부’에는 청운동 5번지(대지 135평), 6번지(대지 1357평), 7번지(전 1423평) 등 대지와 전을 포함해 2915평이 김가진 소유로 돼 있었다. 하지만 1917년 제작된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서는 일본인 실업가 츠다 가지오 소유로 변경돼 있다.

[매일신보] 1913년 9월 5일 ‘거금을 휴대 도주’ 제하의 기사에 의하면 “북부 백운동 21통 1호 남작 김가진 씨의 집 하인 이동근이 김 남작의 심부름 돈 3000원을 휴대하고 도주했다”고 나오며 [매일신보] 1915년 9월 3일 기사에는 동 신문의 기자가 김가진과의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곳을 ‘백운동 정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1915년까지도 백운장은 김가진 소유였음이 확실하다. 정정화 선생은 ‘장강일기’에서 “망국 후 얼토당토않은 일에 휘말려 백운장의 소유권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됐는데 재판정에까지 소유권 문제가 확산됐다”고 말하고 있다. 이 내용은 장명국의 책 ‘대동단 총재 김가진’에 좀 더 자세히 나온다.

“서기 1916년 4월경에 갑자기 가옥과 대지를 강제 집행 처분당했고 일본 관리에게 퇴거명령을 받았습니다. 뜻밖의 사유에 분개해 그 사유를 조사하였더니 자가서생(청지기) 방치선이 주인의 인장을 도용해 당시 시가 8만 엔으로 추산되는 가옥과 대지를 7천 엔에 전당이 잡힌 형식하에 경락되게 한 것이었습니다.”(‘대동단 총재 김가진’ 208쪽)

위 내용은 ‘대동단 총재 김가진’의 부록으로 첨부된 ‘청운동 가옥과 토지에 대한 소청 사유’에 나온다. 김의한 선생이 1946년 미군정청 사법부 소청국에 제출한 소청원 내용 중 일부다. 이런 연유로 일본인의 소유로 넘어 간 이후 백운장은 사쿠라이, 카타네쿠, 히가시타쿠로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1930년 5월 30일 고급 일식집인 청향원의 분점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정정화 선생은 ‘장강일기’에서 “시댁의 생활 형편이 날로 영락해졌으며, 기미(1919)년에는 체부동의 보다 작은 집으로 옮겼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김가진은 관직을 내려놓을 무렵인 순종 1(1908)년 6월, 대한협회 회장에 취임해 국가 주권 회수에 나섰으며, 3·1운동 후인 1919년 4월에는 전협, 최익환 등과 함께 결성한 비밀 독립운동 조직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로 활동했다. 대동단은 1919년 11월 28일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전국적인 시위를 전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조선에서 대동단 활동이 어려워지자 김가진은 그해 10월 10일 아들 김의한 선생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의 나이 74세 때 일이다.

조선서 독립운동 어려워지자 아들과 함께 망명


▎김가진은 중국 상하이에서 병마에 시달리다 1922년 7월 4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 역시 중국 상하이에서 거행됐다.
상하이에 도착한 김가진은 임시정부 및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74세의 나이로 상하이까지 가는 망명의 길은 무리에 가까운 험로였다. 상하이에서 그는 병마와 가난에 시달리다 1922년 7월 4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금도 상하이 홍차오루 만국공묘에 묻혀 있다.

광복 후 김의한 선생은 1946년 5월 귀국했다. 당시 백운장은 귀속재산으로 분류돼 미군정청의 통제 하에 있었다. 일본은 물러갔지만, 1946년 9월까지도 백운장은 일식에서 한식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요릿집이었음이 신문 광고를 통해 확인된다. 김의한 선생은 귀국하자마자 백운장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 임대받을 수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김가진 집안과 개인적으로 무척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인이 소유했던 수많은 귀속재산을 연고자에게 불하했다. 하지만 백운장만은 유서 깊은 건물이라는 이유로 불하하지 않았다. 물론 임대했던 토지 규모는 1912년 이전 김가진 소유였을 때보다 3배 가까이 넓은 8521평이었다. 이는 김가진 소유 토지 주변의 소유권자가 일본인으로 변경되면서 광복 후 일괄적으로 귀속재산으로 분류됐기 때문일 것이다.

1948년 5월 8일 [공업신문]에 따르면, “서울시에서 요정 등 156개 업장에 대해 위생설비 불량과 허가장 불법 매매 등을 단속해 폐쇄 조치했는데, 백운장도 그중 하나였다”고 한다. 실제 백운장이 영업폐쇄 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 후 결핵요양원으로 사용하는 홍승한이라는 의사와 신흥대학과의 백운장 쟁탈전이 발생해 급기야 1950년 2월 12일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담화문을 발표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 대통령은 “누가 소유권을 가지던지 건물과 기지와 운치를 손상시키지 말고 산장이나 유람처로 만들어 서울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라”고 했다. 이후 백운장은 1958년 5월 30일 국무회의에서 외빈숙소용도로 국유화 조치가 통과되면서 김의한 선생의 손을 떠나게 됐다. 국무원사무국에서 제출한 ‘국무회의 부의안’의 내용을 보면 김의한 선생은 1955년 11월 26일 재무부와 임대차계약을 체결해 백운장을 요식업소로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의한 선생은 6·25전쟁 당시 납북된 상태였기에 백운장 운영이나 불하와 관련해 실제적으로는 선생의 아들인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이 추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기인 1962년 9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통상 몰몬교회)에서 이 일대를 구입했으며, ‘백운동천’ 각자를 포함해 나머지 인왕산 백운동 계곡은 2014년 10월 3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됐다. 결국 백운장은 원 소유주였던 김가진 집안에는 돌아가지 못한 채 ‘백운동천’이라는 각자만 남기고 사라지고 말았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202호 (202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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