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23)] 불교 설화 이용해 한국史 첫 여자 임금 입지 강화 

선덕여왕 권능 키워준 ‘불귀신의 짝사랑’ 

‘신라 소식통’ 불교계 조력자 역할, 인도 설화 각색 뒤 전파
불길 막는 이야기로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통치자 형상화


▎MBC 사극 [선덕여왕]에서 세 치 혀와 출중한 미모로 사람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미실(왼쪽), 그리고 신념과 의지로 앞길을 개척해나가는 덕만공주(훗날 선덕여왕). 각각 배우 고현정(왼쪽)과 이요원이 역을 맡아 열연했다. / 사진:MBC
여왕을 연모했다. 먼발치에서 행차를 한번 보고 지귀(志鬼)는 혼자 사랑에 빠져버렸다. 활리역에서 말을 돌보는 미천한 자다. 감히 품어서는 안 될 어리석은 연심이다. 주위 사람들이 비웃어도 아랑곳없다. 단아하고 아리따운 자태가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가슴을 꽉 메우는 걸 어쩌란 말인가. 주제넘지만 짝사랑은 죄가 없다.

하지만 존귀한 여왕이다. 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볼 수 없으니 상심이 깊어갔다. 시름에 겨워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나날이 야위었다. 이러다가 사람 죽겠다 싶었는지 인정 많은 관리가 궁에 연통을 넣었다. 불쌍해서 그리한 것이다. 물론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여왕이 미천한 역졸에게 은혜를 베풀줄은 꿈에도 몰랐다.

“짐이 내일 영묘사에 가서 분향할 것이니 너는 그 절에서 짐을 기다려라.”(성임, [태평통재] ‘지귀’) 놀랍게도 지엄한 분의 전갈이었다. 짝사랑 사연을 들은 선덕여왕은 의외로 선선히 받아들였다. 나이 50이 넘어 즉위한 여자 임금이다. 연모하는 자가 있다니 민망한 일이다. 그래도 내 백성인데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여왕은 공주 시절 당숙 용춘(음갈문왕)을 남편으로 맞았다. 성골 사내아이를 얻어 왕위를 잇게 하려는 아버지 진평왕의 뜻이었다. 그러나 끝내 자식을 보지 못하고 본인이 여성 최초로 성골만이 앉을 수 있는 보위에 오른 것이다. 선덕여왕은 생각했다. 백성이 곧 자식이다. 자식 한 명 구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만백성을 다스릴까.

지귀는 벅찬 감격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그는 영묘사로 달려갔다. 막상 여왕의 용안을 뵙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참 기다리는데 느닷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간밤에 잠을 못 이룬 탓이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시야가 가물가물 흐려졌다. 안되는데, 잠들면 안 되는데….

영묘사에 당도한 선덕여왕은 탑 아래에서 곤히 잠든 지귀를 발견했다. 여왕이 분향을 마치고 나왔을 때도 역졸은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내 백성이 고단한가 보구나. 선덕여왕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팔찌를 빼 그의 가슴에 놓았다. 두 마리 용이 서로 몸을 휘감고 도는 양각 문양의 황금 팔찌였다. 미천한 백성에게는 어마어마한 선물이었다.

앞일을 내다본 여왕의 세 가지 일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초상.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었던 진평왕의 딸로 신라의 첫 번째 여왕에 올랐다.
여왕은 잠을 깨우지 않고 궁으로 돌아갔다. 지귀가 눈을 뜬 것은 행차가 속절없이 멀어진 뒤였다. 화들짝 몸을 일으키는데 가슴에서 금팔찌가 툭 굴러떨어졌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절 마당은 적막하기만 했다. 그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팔찌를 들여다봤다. 한눈에 봐도 진귀한 보물이었다. 그제야 선덕여왕이 이미 다녀갔음을 깨달았다. 안 보면 죽을 것 같았던 여왕이다. 잠이 들어 만나볼 기회를 놓치다니 믿기지 않았다.

지귀는 팔찌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어우러진 한 쌍의 용이 가슴 속으로 지글지글 타들어 갔다. 불에 덴 것처럼 심장이 화끈거렸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후회와 자책이 타는 듯한 갈망에 불을 붙인 것이다. 이윽고 심화(心火)가 몸을 살랐다. 지귀의 생명이 꺼지고 불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탑을 잡고 일어서자 화염이 탑에 옮겨붙었다. 서라벌 거리로 나서자 화마가 집과 건물을 삼켰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불귀신의 사랑이었다.

지귀의 불같은 사랑 이야기는 15세기 성임이 지은 [태평통재]와 16세기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등에 실려 있다. 원전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 신라 설화집 [수이전]이다. 사랑의 대상이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이기에 흥미롭고 역사적으로 재해석해볼 가치가 있다.

평범한 백성이 어쩌다가 여왕에게 반했을까? 단지 미색이나 고귀한 신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에 대한 신라인들의 호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한국사 최초의 여왕은 앞일을 내다보는 ‘신령한 지혜’로 나라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에 나오는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에 그 내막이 담겨 있다.

여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 가운데 첫 번째는 모란 그림과 꽃씨에 관한 일화다. 당 태종 이세민이 선덕여왕에게 선물을 보냈다. 홍색(紅色)·자색(紫色)·백색(白色)의 모란꽃 그림과 그 씨 석 되였다. 여왕은 그림 속에 탐스럽게 핀 꽃을 들여다봤다. 한 신하가 감상 소감을 청하자 왕이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꺼냈다.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

선덕여왕은 꽃씨를 정원에 심으라고 명했다. 얼마 후 모란꽃이 피었는데 정말로 향기가 나지 않았다. 신하들이 놀라워하면서 왕에게 어떻게 아셨느냐고 물었다. 여왕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벌과 나비가 안 보이니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는 당나라 황제가 나에게 짝이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두 번째는 옥문지의 개구리 떼 일화다. 영묘사의 연못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 떼가 나타나 3~4일 동안 울었다. 괴이한 징조에 서라벌이 술렁거렸다. 이 소식을 듣고 선덕여왕이 장군 알천과필탄을 불러 명했다. “서쪽 교외로 나가면 여근곡(女根谷)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 반드시 적병이 숨어 있을 테니 그대들이 가서 화를 제거하라.”

두 장군은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출전했다. 현지 주민들에게 물으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수색에 들어가니 깊은 골짜기에서 적병 500명이 튀어나왔다. 서라벌을 급습할 목적으로 잠입한 백제군 선발대였다. 신라군은 그들을 모두 죽이고 여근곡에 매복했다. 백제군 본대 1200명이 들어오다가 매복에 걸려 궤멸됐다. 알천과필탄은 서라벌 남산으로 정찰 나간 적장 우소도 찾아서 죽였다.

나라 사람들은 기뻐하면서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했다. 여왕에게 영감을 준 것은 옥문지와 여근곡이었다. 옥문(玉門)과 여근(女根)은 둘 다 여인의 국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묘사 옥문지에 괴이한 징조가 나타나자 선덕여왕은 서쪽 교외의 여근곡을 떠올렸다.

음양오행에 여인은 음(陰)이고, 음은 흰색이고, 흰색은 서쪽이라 했기 때문이다. 개구리가 우는 모습은 성난 병사의 형상과 닮았다. 이에 적병이 여근곡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신하와 백성들은 탄복했다. 묘하지만 여왕이기에 설득력 있는 해석이었다.

세 번째는 도리천에 묻히게 된 일화다. 선덕여왕이 어느 날 신하들에게 말했다. “짐은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인즉, 나를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국왕이 죽음을 예견하자 신하들은 깜짝 놀랐다. 게다가 도리천은 불경에 나오는 천상계다. 대체 어디에 묻으라는 말인가? 신하들이 의아해하자 여왕은 위치를 알려줬다. 낭산(狼山) 남쪽이었다.

선덕여왕은 647년 1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꼽은 그날이었다. 신하들은 여왕을 낭산의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냈다. 사람이 죽으면 기억도 흩어져간다. 도리천에 관한 궁금증도 여왕과 함께 묻혔다. 세월이 흘러 문무왕이 낭산 기슭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했다.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였다. 불경에 따르면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 나라 사람들은 여왕의 능이 마침내 도리천이 됐다며 그 신령한 지혜를 거룩하게 여겼다.

[삼국유사]의 ‘선덕왕지기삼사’는 일연 선사가 왕실 서고 자료와 각지의 옛이야기를 참고해 쓴 것이다. 정사 [삼국사기]에도 모란 그림과 꽃씨, 옥문지의 개구리 떼 일화가 나온다. 여왕에게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다는 것을 사관들도 인정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것이 여성 최초로 보위에 오르는 데 밑거름이 됐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자질만으로는 나라 사람들을 온전히 납득시키기 어려웠다. 선덕여왕이 즉위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성골 왕실에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법흥왕 이후 형성된 성골은 국왕의 직계 가족과 가까운 친척으로 이뤄져 있었다. 왕이 바뀌면 성골도 새 임금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먼 친척인 진골은 성골의 왕위 독점을 못마땅해했다. 성골 왕실에 남자가 없다면 진골이 왕위를 이어야지 무슨 여자 임금이냐고 으르렁댔다.

50세 넘어 즉위… ‘성골 할머니 임금’ 전략 사용


▎선덕여왕릉은 경주 낭산 소나무 숲 안에 있다. 비석 대신에 소나무가 여왕을 호위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진평왕이 공주를 후계자로 정하자 반발이 컸다. 즉위 전해(631년)에 이찬 칠숙과아찬 석품 등의 반란이 일어났다. 진골 일부가 성골 왕실에 반기를 든 것이다. 전통적인 남성 지배층은 여왕 등극을 선선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백성에게도 여자 임금은 낯설고 불안했다. 안 그래도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이 잦아지고 있었다. 나라 사람들은 632년 선덕여왕의 즉위를 의혹의 눈길로 바라봤다.

한국사 최초의 여왕은 난제를 안고 첫걸음을 내디뎠다. 자신에 대한 반감을 충성으로, 불신을 확신으로 바꿔놓아야 했다. 여왕을 ‘성조황고(聖祖皇姑)’라고 칭한 것은 그녀가 어떤 전략을 세웠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풀이하면 ‘성스러운 혈통의 할머니 임금’이라는 뜻이다. 성골임을 내세우는 동시에 연장자의 덕목을 기대할 수 있는 왕호다.

선덕여왕은 50세를 넘어 지긋한 나이에 임금이 됐다. 아버지 진평왕이 무려 53년이나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이다. 당시로선 할머니 나이였다. 성스러운 할머니답게 신령한 면모를 널리 알린다면 민심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선덕왕지기삼사’는 이런 용도로 쓰였다. 그것은 여왕이 보여준 지혜를 신령하게 포장하고 각색한 이야기였다.

모란 그림과 꽃씨 일화는 왕위에 오르면서 유포한 즉위담이었다. [삼국사기]는 공주 시절에 당나라에서 가져온 그림과 꽃씨를 보고 진평왕에게 식견을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했다. ‘선덕왕지기삼사’에서는 세계적인 명사 당 태종을 등장시켜 여왕의 지혜와 당당한 처신을 도드라지게 했다. 보위에 앉을 만한 여자 임금임을 극적으로 밝힌 것이다.

옥문지의 개구리 떼 일화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5년(636년)의 일이다. 이 해에 여왕의 병이 위중해 의술과 기도가 효험이 없을 정도였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백제군이 신라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했다. 선덕여왕은 장군 알천과필탄을 보내 적을 격파하는 한편 국가적 위기에 불안해하는 민심을 이야기로 달랬다. 이 일화는 당시 유행한 음양오행 사상을 덧입혀 여왕의 신령한 지혜를 한층 부각시킨 것이다.

도린천 일화는 사후에 여왕을 신격화하는 데 쓰였다. 선덕여왕은 647년 1월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세상을 떠났다. 상대등 비담 등이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 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내전은 김유신·김춘추 등 근왕 세력의 승리로 끝났지만, 여왕은 불미스러운 죽음을 맞아야 했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은 낭산 기슭에 사천왕사를 창건하고 이 일화를 유포해 선덕여왕을 도린천에 묻힌 신으로 격상시켰다. 여왕을 신격화함으로써 나라 사람들을 화합시키고 신국(神國)의 위엄을 드높인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고 전파하려면 소식통이 있어야 한다. 삼국시대 이래 불교 세력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사실 왕이나 귀족들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반면 설법과 포교를 하는 승려들은 상류층뿐 아니라 하층민과도 두루 교류했다. 게다가 나라 구석구석 안 가는 데가 없었다. 신분과 지역을 아우르는 유력한 소식통이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국왕 저격한 불교 소식통


▎경주에 위치한 진평왕릉과 선덕여왕릉 사이의 너른 벌판.
부처님 말씀만 설파하는 게 아니었다. 백성들은 나랏일이나 세상사가 궁금했고 불제자들은 그것을 알기 쉽게 이야기로 전하였다. 신령하게 포장하고 각색하여 귀에 쏙쏙 들어가게 했다. 일연 선사의 [삼국유사]가 흥미 만점의 이야기보따리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많은 이야기가 불가(佛家)에서 흘러나와 불가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신라 불교는 법흥왕 때 공인된 후 한동안 성골 왕실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했다. 국왕 일가를 석가 일족으로 미화시키고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 존재로 떠받든 것도 승려들의 힘이었다.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이 사라지자 불교 세력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임금과 대립하기도 했다. 신라 제48대 경문왕은 그래서 고충이 많았던 것 같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보면 알 수 있다.

경문왕은 보위에 앉자 갑자기 귀가 길어져서 당나귀의 귀처럼 됐다. 왕비와 궁인들은 모두 이 사실을 몰랐지만, 모자 장인만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평생 국왕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았는데 죽을 때가 되자 입이 간지러워 참기가 힘들었다.

장인은 혼자 도림사(道林寺) 대나무숲에 들어가 목청껏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그 뒤 바람이 불기만 하면 대나무숲에서 이런 소리가 났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경문왕이 싫어해 숲의 대나무를 몽땅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 바람이 불면 또 소리가 났는데 “임금님 귀는 길다”라고만 했다([삼국유사] 기이 ‘경문대왕’).

[삼국유사]는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은유와 상징의 보고(寶庫)다. 암호를 해독하듯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미가 있다. 경문왕의 본명은 응렴(膺廉)이다. 이름처럼 청렴하다 하여 헌안왕의 사위가 됐고 머지않아 왕위를 물려받았다. 부패한 진골 귀족들은 새 임금을 무시하고 틈만 나면 제거하려고 했다. 왕을 깎아내리는 이야기가 도처에 난무했다.

대나무 베고 산수유 심은 경문왕


▎관광객들이 경주 분황사 석탑(국보 제 30호) 주변을 백등을 든 채 돌고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도 그중 하나였다. 그 시절 나귀는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은 ‘검지려(黔之驢)’라는 우화에서 나귀가 뒷발질만 하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것을 꼬집었다. 겉보기엔 그럴싸하지만 알고 보면 보잘것없는 재주를 풍자한 것이다. ‘당나귀 귀’는 아둔하고 재주 없는 사람을 비꼬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임금으로서는 참기 힘든 조롱이었다.

문제는 이야기의 발원지가 도림사 대나무숲이었다는 것이다. 이 숲은 입도림(入都林)이라 하여 서라벌을 출입하는 길목에 있었다. 이야기를 전국에 퍼뜨릴 수 있는 입지였다. 도림사의 승려들은 신라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식통이었다.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국왕의 권위가 떨어지자 경문왕은 반격에 나섰다. 숲의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은 것이다. 대나무는 꼿꼿해 쓴소리를 마다치 않는 비판 세력을 일컫는다. 반면 산수유는 사악한 기운을 막으니 근왕 세력을 뜻한다. 경문왕은 도림사 소식통을 적대 세력에서 우호 세력으로 바꾸고 백성들에게 ‘청렴한 귀인’으로 다가갔다. 정적들의 모반을 여러 차례 진압하고 마침내 나라를 안정시켰다.

선덕여왕 또한 신라의 소식통인 불교 세력에 공을 많이 들였다. 영묘사와 분황사를 창건하고 황룡사에 백고좌 법회를 열어 인왕경을 강론하게 하였다. 인왕경은 왕권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 호국불교 경전이다. 승려 100명에게 도첩을 내려 나라에서 신분을 보장해준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법사를 대국통으로 삼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삼화사.
불교 세력은 기꺼이 선덕여왕의 정치적 버팀목이 돼줬다. 승려들은 여왕의 지혜를 신령하게 포장하고 각색해 널리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선덕왕지기삼사’는 불교 소식통을 타고 신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지귀 이야기 또한 불제자들의 입김이 실렸다. 인도 고승 용수의 [대지도론]에 나오는 ‘술파가 설화’를 끌어다 쓴 것이다.

어부 술파가는 왕녀의 미모에 반해 식음을 전폐하다가 병이 나고 말았다. 술파가의 어머니는 왕녀에게 고기와 생선을 바치며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청했다. 왕녀는 천사(天祠)에서 만나주기로 했고 술파가는 기뻐하며 천신의 동상 뒤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천신은 이 만남을 용납할 수 없어 술파가를 깊은 잠에 빠지게 했다. 왕녀는 술파가를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목걸이를 벗어 가슴에 놓고 돌아갔다. 뒤늦게 일어난 술파가는 목걸이를 부여잡고 울부짖다가 몸 안에서 음욕의 불길이 타올라 죽음을 맞았다.

불귀신을 푸른 바다 밖으로 내쳐 만나지 않으리라

술파가 설화의 목적은 종교적으로 음욕을 경계하는 데 있다. 반면 지귀 이야기는 ‘백성에게 사랑받는 여왕’을 세속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 정치색은 선덕여왕의 권능을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야기가 막바지로 치달으며 여왕은 통치자로서 주술을 행하고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

불귀신이 된 지귀가 거리를 활보하자 서라벌 곳곳에 화재가 일어났다. 신하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재변을 고하자 선덕여왕은 술사를 불러 주문을 짓도록 했다. “지귀의 마음에서 타오른 불길이/ 몸을 사르더니 불귀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으로 내쳐/ 만나지 않고 어울리지 않으리라.” (권문해, [대동운부군옥] ‘심화요탑’)

나라 사람들은 이 주문을 문과 벽에 붙여 화재를 막았다. 여왕의 주술은 힘이 세다. 태고부터 이어져 내려온 여주술사, 곧 무녀의 역사가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무녀왕의 면모는 그녀의 왕호 ‘성조황고(聖祖皇姑)’, 성스러운 혈통의 할머니 임금과도 제법 잘 어울린다. 선덕여왕과 신라 불교는 그렇게 민간신앙과 한 몸이 됐다.

여왕의 주문에 푸른 바다 밖으로 내쳐진 지귀는 가엾다. 여왕과 만날 수도 어울릴 수도 없는 불귀신이 됐다. 그가 불꽃으로 화한 영묘사는 두두리(豆豆里)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지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두두리는 도깨비의 원형이다. 지귀 또한 도깨비 같은 남자다. 불귀신은 비 내리는 적막한 밤에 이름 모를 산천을 떠도는 도깨비불이다. 제 몸을 다 불사르고도 추적추적 타오르는 짝사랑의 정념…. 선덕여왕은 영혼이 안타까웠을까? 시인의 말을 빌려 뒤늦은 마음을 전한다.

“그래도 그 어지러운 불이 다 스러지지 않거든/ 다스리는 노래는 바다 넘어서 하늘 끝까지./ 하지만 사랑이거든/ 그것이 참말로 사랑이거든/ 서라벌 천년의 지혜가 가꾼 국법보다도 국법의 불보다도/ 늘 항상 더 타고 있거라.”(서정주, [선덕여왕의 말씀])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202호 (2022.0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