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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11)] 기승전결 무시하고 갑자기 등장한 17세기 유럽의 시대 정신 

바로크 예술은 교회·왕 동상이몽의 합작품 

초대형 교회당 지어 권위·파워 과시, 대표 도시 나폴리엔 건축물 가득
‘빛의 화가’ 카라바조 파격도 창조·상상 자극하는 서양의 세계관 산물


▎이탈리아 나폴리의 바로크 시대 교회. 바로크 건축물의 가장 큰 특징은 직선이 아닌 곡선에 3차원으로 굽은 표면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데 있다. 바로크의 어원처럼 ‘찌그러진 진주’ 같은 모양의 건축물인 셈이다. / 사진:유민호
'인 메디아스 레스(In medias res)’

유럽문학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한 번쯤 접했을 라틴어다. 직역하자면 ‘사물의 도중에’로 풀이된다. 구어(口語)로 표현하자면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알(卵)에서부터’를 의미하는 라틴어 ‘아브 오보(Ab ovo)’에 대칭되는 개념의 문학 용어이기도 하다. ‘알에서부터’라는 의미는 ‘얘기의 출발은’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문학이나 연극으로 표현된 고대 로마 당시 유행했던 ‘스토리 전개방식’이 두 가지 라틴어 표현 속에 녹아 있다.

‘아브 오보’는 스토리의 기원이 된 사건이나 배경에서부터 출발하는 문학 형식이다. 간단히 말해, 시간적 추이에 따른 기승전결(起承轉結) 기법의 문학이다. 바이블에서처럼, 예수의 선조에서부터 성모 마리아를 통한 탄생, 복음 전파와 십자가 처형, 마지막으로 부활에 이르는 ‘연역적 사고’에 기초한 문학이다. 이에 반해 ‘인 메디아스 레스’는 기원, 배경을 생략한 채 곧바로 스토리 핵심으로 들어가는 문학이다. 기승전결이 아니라 전결(轉結)이 먼저 오고 기승(起承)은 뒤따라 오는 식의 귀납적 사고의 문학이다. 기원 배경에 대한 부분은 중간에 등장하는 인물·사건·상징을 통해 간헐적으로 비춰주면서 풀어나간다.

고대 그리스 호메로스(Homer)의 일리아드(Iliad)는 ‘인메디아스 레스’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일리아드 첫 구절의 라틴어는 ‘Meninaeide, thea, Pele-iadeoAchileos’로 시작된다. 풀이하자면 ‘여신이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페레우스의 자식인 아킬레스의 분노를…’이런 의미다. 트로이전쟁은 10년에 걸쳐 이뤄졌다. 일리아드는 10년째에 접어든, 그리스와 트로이와의 전쟁 3일간에 걸친 얘기에 불과하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스파르타 여왕 헬레나(Helen) 출생, 아름다움을 다투는 세 여신의 경쟁, 10년 동안 계속된 전쟁에 관한 언급 없이 곧바로 여신의 얘기부터 시작된다. 곧이어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기원전 13세기 에게해 역사가 이어진다. 따라서 집중하지 않거나 상상력이 빈약할 경우 따라가기 어려운 문학이 ‘인 메디아스 레스’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개인의 문학적 상상력을 북돋워주는 효과도 있다. 전지적 관점의 작가가 시시콜콜 얘기하는 대로 따라갈 필요가 없다. 추론과 상상력에 기초한 독자적인 문학 세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Hamlet)을 보자. 햄릿의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머니가 어떻게 재혼했는지에 대한 얘기도 없이, 곧바로 햄릿의 고뇌가 연출된다. 햄릿이 왜 슬픔과 분노에 빠졌는지는 아버지 유령이나 기억(Flashback)을 통해 서서히 파악해 나갈 수 있을 뿐이다.

요즘 뜸하지만, 한 때 ‘스티브 잡스 따라 하기’가 유행한 적이 있다. 내 자식을 어떻게 하면 창조·상상의 대열에 넣을지에 대한 경쟁이 한국 교육 무대에 펼쳐졌다. 2022년 현재는 대충 꼬리만 남은 듯하지만, ‘리버럴 아트(Liberal Arts)’가 교육의 영 순위로 떠오르기도 했다. 근본은 무시한 채 눈앞의 현상에만 매달리는 ‘천박한 욕심’에 불과하다. 한국, 나아가 동양은 ‘아브 오보’식의 순차적 세계관에 익숙한 문화권이다. 얘기의 출발점은 항상 ‘옛날 옛적에…’서부터 시작된다. 등장인물 설명과 얘기의 배경이 되는 부분이 분명하고, 교훈은 무엇인지에 대한 얘기도 확실하다. 연역적 기승전결 사고에 기초한 문학이다.

개인의 상상력 북돋는 호메로스적 사고


▎고대 그리스의 음유시인 호메로스는 이야기를 중간부터 시작해 듣는 이들에게 호기심과 개인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서양식 스토리텔링의 원조다. 호메로스와 같은 역순 구성(프리퀄)은 스타워즈 시리즈, SF영화 제작사 마블의 세계관 등 히어로물 영화 전개방식으로도 자리 잡았다. / 사진:유민호, 스타워즈
동양인의 세상을 보는 눈 역시 ‘아브 오보’에 기초한다. 좋게 말하면 정리 정돈된 세상이지만, 얘기의 패턴이 비슷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서양은 다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Odyssey)가 그러하듯, 전부 생략한 채 주인공이 칼립소(Calypso) 요정에 갇힌 얘기부터 등장한다. 어떤 과정에서 외딴 섬에 갔는지에 관한 부분은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 21세기 추리소설은 ‘인 메디아스 레스’의 대표적인 장르에 속한다. 개인적 차원의 창조·상상은 추리소설이 갖는 매력의 출발점이다. 창조·상상 없이는 추리소설 자체가 불가능하다. 스승이나 부모가 직접 나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하는 ‘아브 오보’식 설명은 추리소설에 안 통한다.

상대적이지만, ‘아브 오보’가 수동적, ‘인 메디아스 레스’는 능동적 세계관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에서 열까지 순차적인 설명과 함께 진행하는 ‘아브 오보’가 동양 교육, 트로이 전쟁 영웅들의 무용담을 보면서 거꾸로 그들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추적해가는 ‘인 메디아스 레스’가 서양 교육의 배경에 있다. 동양은 기승전결 세계관에서 벗어날 경우 촉수를 잃고 헤매게 된다. 이단이나 반역자로 몰리기도 한다.

서양은 기승전결을 무시한, 파격의 세계관을 창조·상상이라 부르며 응원한다. 따라서 동양이 순차적 서열에 기초한 집단, 서양이 독립적 개성에 근거한 개인에 방점을 두게 된다. 코로나19 전염병 시대는 동·서양 세계관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최적의 본보기 중 하나다. 마스크 착용 하나라도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해결하려는 서양, 집단 방역을 위해 전 국민 착용 의무화로 나가는 동양이란 전혀 다른 두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과연 동양에서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이 출현할 수 있을까? 말 한마디 잘못할 경우 과거 신상이 전부 털리면서 파렴치범, 나아가 형사범 정치범으로 끝날 운명이다. 일리아드는 현존하는 서방 문학 최고(最古) 고전에 속한다.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로서만이 아니라, 서방 ‘지(知)’의 출발점이 ‘인 메디아스 레스’로 구성된 대서사시 ‘일리아드’의 가치이자 의미다.

‘인 메디아스 레스’ 세계관이 지배한 유럽, 추리소설 발달


▎터키 트로이 근처에 있는 아킬레스의 무덤. 현존하는 서양 최초의 문학인 일리아드는 아킬레스의 분노에 관한 얘기로 시작된다.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에 관한 얘기가 전부 생략된 채 중간에서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식의 구성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아브 오보’와 ‘인 메디아스 레스’ 사이의 우열관계다. ‘아브 오브’가 ‘인 메디아스 레스’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다를 뿐 각자 장단점이 있다. 스티브 잡스 하나 없는 중국이라지만, 1979년 개방 이래 불과 43년 만에 미국에 대적할 패권 국가로 부상했다. 방역을 이유로 1300만 대도시를 하루 만에 봉쇄할 수 있는 나라도 중국이다. 덕분에 그 넓은 대륙의 전염병 감염자 수도 한 자릿수에 그친다. 14억 인구 대국이지만, 시진핑 단 한명의 모델만 따르면 모든 것이 편하다. 복잡하게 창조·상상으로 소비할 시간도 없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브 오보’ 세계관에도 장점이 있다는 말이다.

뜬구름 잡는 얘기일 듯하지만, 추리소설을 원한다면 ‘아브 오보’가 불편해질 것이다. 추리소설이 발달한 곳일수록 민도(民度)와 민주주의 수준도 높다고 한다. 추리소설은 1841년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프랑스에서는 철학자 볼테르(Voltaire)가 추리소설의 원조라 주장한다. 동양에서 보면 누가 되든 상관없다. 크게 보면 ‘민주주의 문명·문화 종주국=추리소설 원조’란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중국을 비롯한 동양 대부분의 나라에는 추리소설이 거의 없다. 관심을 갖는 독자도 별로 없다. 따라서 추리소설 작가도 없거나 극소수에 그친다. ‘아브 오보’에 맞춰, 기승전결 세계관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동양적 질서이자 미덕이다.

‘인 메디아스 레스’ 세계관은 문학만이 아닌 예술 사조에도 나타난다. 17세기 갑자기 등장한 바로크 예술이 주인공이다. 기존 예술의 맥을 잇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예술세계가 유럽 전체에 펼쳐진다. 기승(起承) 없이 곧바로 전결(轉結)에 던져진다. 서양 예술사에서 바로크는 ‘크고 화려하고 극적인 요소를 갖춘 예술이나 음악’을 지칭한다. 바로크(Baroque)라는 단어가 프랑스어에서 왔다고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포르투갈어 ‘바로코(Barroco)’가 출발점이다. ‘불규칙한 모양의 진주(irregularly shaped Pearl)’라는 의미다. 포르투갈을 거쳐 프랑스에서 이론화되면서 마치 ‘바로크=프랑스’라는 식으로 인식됐을 뿐이다.

사실 유럽 예술사를 보면 프랑스가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하늘을 찌르는 건축 양식인 고딕(Gothic)도 출발점은 프랑스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달라진다. 고딕 양식 건축물의 출발점은 아랍의 이슬람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혼재했던 12세기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프랑스로 수입되면서 ‘고딕=프랑스’라는 식으로 평가된다. 프랑스는 중앙집권제 절대왕정 체제다. 왕이 인정하는 순간 곧바로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유럽 다른 나라는 19세기 민족국가 출현 이전까지만 해도 사분오열 지방분권 체제로 구성됐다. 절대왕정 덕분에 프랑스가 이론화·제도화에 앞장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원으로 들어가면 대부분 프랑스 밖이 출발점이다. 대항해 시대와 맞물려 16세기 아시아 항로 개척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포르투갈이 ‘불규칙한 모양의 진주’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인류 제2의 바벨탑 전성시대


▎나폴리 한복판의 ‘자비의 교회’에 있는 카라바조의 명작 중 하나인 ‘일곱 가지 자비’(1607년). 카라바조는 뚜렷한 음영으로 대비를 극대화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성화에 등장시키는 등 파격을 시도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불규칙이란 말은 규칙·조화의 반대편에 선 개념이다. 그렇다면 규칙·조화로서의 진주는 무엇일까? 15세기부터 거의 200여년 간 불어닥친 이탈리아 발(発) 르네상스다. 매너리즘(Mannerism), 즉 이미 정해진 교과서적인 스타일에 맞춰진 예술의 시대가 바로 르네상스다. 고대 그리스 인본주의 복원이라 말하지만, 한 우물만 판 장인시대가 바로크 이전 유럽 예술세계의 대세였다. 바로크는 규칙·조화로서의 르네상스를 무시하고, 크고 높고 넓은 진주의 세계로 나간다. 예술과 무관한 대부분의 사람은 ‘전혀’ 이해하질 못했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인류 제2의 바벨탑 전성시대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바로크 예술에 환호하면서 박수를 보낸다. 대항해시대를 통한 유럽 왕조의 경쟁은 식민지 쟁탈만이 아닌, ‘한층 더 바로크적인 바로크 경쟁’으로 이어진다. 규칙·조화와 무관하든 말든 상관없다. 크고 높고 넓게 나아가는 예술의 경쟁이 17세기 유럽 전역에 펼쳐진다.

창조·상상은 바로크 예술을 ‘인 메디아스 레스’ 세계관으로 연결한 가장 큰 이유다. 유럽을 지배했던 르네상스 시대에 전혀 볼 수 없었던 세계가 17세기 유럽 예술의 시대정신으로 등장한 것이다. 개인적 판단이지만, 바로크 예술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탄생한 성(聖)과 속(俗)의 공동작품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신을 앞세운 가톨릭 교회와 권력을 과시하려는 왕의 동상이몽의 합작품이다.

세속적 권력 확장에 눈이 먼 왕을 위한 용비어천가가 바로크 세계에 울려 퍼진다. 높고 크고 넓게 쌓을수록 눈에 띄고, 화려한 모습으로 비칠수록 왕의 권위도 올라간다. 교회당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신을 앞세운 가톨릭의 권위는 싫지만, 그래도 신에 대한 믿음이 지배하던 때가 바로크 시대다. 14세기 단테의 신곡(La DivinaCommedia)을 통해 지옥이란 개념이 생기면서 권력자 대부분이 사후(死後)를 걱정하게 된다. 돈과 권력은 지옥으로 떨어질 ‘영순위 악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묘안이 등장한다. 바로크 양식의 초대형 교회를 건립할 경우, 권위와 파워도 자랑할 수 있고 신을 찬미하면서 천국행 티켓도 얻을 수 있다. 왕과 가족들의 시신은 장중한 음악과 함께 바로크 교회 제단 바로 앞 명당자리를 차지한다. 바티칸 교황 입장에서 볼 때 초대형 교회가 늘고, 권력자들도 결국 가톨릭의 품 안에 들어온다는 점에서 크고 높고 넓은 바로크 성전(聖殿) 건립을 적극 지지한다.

나폴리는 바로크의 도시다.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지만,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교회와 건축물이 끝없이 이어진 땅이 바로 나폴리다. 4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붕괴한 건축물도 많다. 한국에 있다면 국보급이 될 만하지만, 수리비가 없어서 폐쇄된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전염병으로 인해 2년째 못 들렀지만, 나폴리는 매년 빠짐없이 찾는 필자의 필수 여정(旅程) 중 하나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나폴리는 혼돈(chaos)의 도시다. 거리의 신호등조차 나폴리 스타일에 따라야 한다. 파란 신호라도 자동차가 그냥 달릴 수 있다. 빨간 신호를 만난 보행자라도 그냥 건널 수 있다. 10여 년 이상 필자가 지켜본 바로는 사고가 나는 현장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빨간 신호에 서고, 파란 등에 건널 경우 사고가 일어날 도시가 바로 나폴리다.

표현이 저속하지만, 나폴리는 ‘유럽의 매춘부’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유럽 패권의 흐름에 따라 왕들의 전리품으로 거래됐기 때문이다. 멀리는 기원전 9세기 그리스 도시로 출발하지만, 교황의 지배하에 있다가 16세기 초에는 프랑스, 17세기 스페인, 19세기 초 프랑스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로 넘어간 뒤 통일 이탈리아로 편입된 땅이다. 시시때때로 최고 통치자가 바뀌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은 보장됐다. 통치자가 바뀐다고 해서 저항이나 폭력에 나선 적이 한 번도 없다. 누가 권력자가 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빵과 안전이다. ‘유럽의 매춘부’란 별명을 얻게 된 배경이다.

나폴리의 바로크 건축물 대부분은 17세기 스페인 치하 당시 들어선 것이다. 스페인이 대항해 시대의 주역으로 일확천금 부자가 되면서, 나폴리의 바로크 열기가 시작됐다. 바로크는 돈이 많이 든다. 나폴리가 영원히 스페인의 땅이 될 것이라 믿으면서 행한, 당대 신도시 계획의 일환이었다. 바로크 건축물은 바로크 그림과 조각을 필요로 한다. 크고 거창하며 뭔가 극적인 감동을 줄 그림이다. 수많은 예술가 중에서도 ‘빛의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가 나폴리 바로크 그림의 핵심이다. 극단적으로 카라바조가 나폴리 바로크 예술의 출발점이라 봐도 된다. 빛의 대조와 조절을 통한, 이른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즉 음영법을 활용한 대작이 나폴리 곳곳에 남아있다.

시내 한복판에 들어선 ‘자비의 교회(Pio Monte dellaMi sericordia)’는 나폴리의 명소 중 하나다. 1601년 세워진 바로크 교회인 동시에, 카라바조가 남긴 ‘일곱 개의 자비(The Seven Works of Mercy)’ 명화가 제단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다. 갈 때마다 느끼지만, 교회 자체는 너무도 아담하다. 그림도 바로크 시대 탄생한 다른 그림에 비해 크지 않다. 그러나 성화 앞에 서는 순간 압도될 정도의 신비로운 매력과 박력을 느낄 수 있다. 그림을 전혀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의 영적 파워가 넘쳐난다. 예수가 실천했고 가톨릭이 신봉하는, 인간이 지켜야 할 7개의 기본적인 자비를 묘사한 그림이다. 배고픈 자의 배를 채우고, 죽은 자를 묻어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집 없는 자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병든 자를 위문하고, 감옥에 수감된 사람을 방문해 위로하라는 7개의 가톨릭 신자로서의 계율이자 의무다.

매춘부를 성모의 모델로 삼은 대담한 도전

이미 10년도 넘었지만, 카라바조의 ‘일곱 개의 자비’를 처음 대했을 때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가톨릭의 인간으로서의 기본 계율이자 의무가 한국의 세계관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배운, 삼강오륜(三綱五倫)이 비교 대상이다. 유교적 전통이자 21세기 한국인이 숭상하는 전통 윤리로 생명력을 가졌다. 길게 얘기하면 끝도 없고, 국가·사회·인간·가족 사이의 윤리와 도덕이라 보면 된다.

필자가 주목한, ‘일곱 개의 자비’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각론의 유무’에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 중시하는 오륜 중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보자.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듣기도 좋고 아름다운 말이지만, 구체적인 사안으로 들어갈 경우 해석이 달라지기 십상이다. 나이는 많지만 회사에 늦게 들어온 사람을 장유유서의 관점에서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삼강 중 하나인 부위자강(父爲子綱)을 보자.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이라고 말한다. 비리나 범죄를 저지른 아버지를 목격한 아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가톨릭이 말하는 ‘일곱 개의 자비’는 아주 구체적이다. 물·밥·옷·숙소를 제공해라, 시신은 땅에 묻어라, 환자와 수감자는 직접 찾아가 위로하라는 메시지다. 거창한 명분이나 말 잔치도 필요 없는, 지금 당장 직접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간결하고 분명한 강령이다. 한국적 비극이지만, ‘각론이 없는’ 애매한 윤리와 논리가 활개를 치고 있다. ‘이현령비현령’식 세계관이라도 목소리만 높이면 된다. ‘내로남불 자화자찬’이 절대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필자에게 카라바조는 ‘인 메디아스 레스’ 세계관의 상징으로 느껴진다. 바로크가 그렇듯, 한순간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카라바조가 묘사한 음영법은 바다를 건너 네덜란드의 렘브란트로 이어진다. 나폴리 종주국이었던 스페인조차 카라바조 영향권에 들어간다. 카라바조가 ‘아브 오보’와 무관한 것은 그림 속 인물들에 관한 배경에서도 알 수 있다. 시장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성화에 묘사하고, 심지어 자신이 만났던 매춘부를 성모 마리아로 그려 넣었다. ‘어린 예수와 마리아(Madonna of the Rosary)’ 성화를 보자. 그림의 중심은 흙 묻은 맨발의 순례자들이다. 더러운 순례자의 모습은 신성모독으로 비칠 수도 있다. 카라바조는 엄숙한 시대 상황에서도 예수와 마리아를 찾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기존에 없던, 창조·상상에 기초한 ‘인 메디아스 레스’ 세계관의 대표적인 본보기다.

카라바조는 인류 예술 무대에서 전대미문의 배경을 가진 화가다. 테니스 경기장에서 사람을 죽이고, 평소에도 칼을 휘두르며 폭행을 저지른 흉악범이기 때문이다. 원래 로마에서 활동하면서 명성을 얻었지만, 살인 후 도망가는 과정에서 나폴리까지 밀려간다. 나폴리 교회 곳곳에 남은 성화는 생계유지를 위한 결과물이다. 로마 교황에게 사면을 요청하면서 기다렸다. 그러나 행운은 따르지 않았다. 로마에서의 살인 후 4년에 걸친 도망생활을 하다가 1610년 38살 나이로 세상을 뜬다. 살인 화가 카라바조는 기승전결 인생과 무관하다. 중간부터 치고 들어가는 ‘인 메디아스 레스’ 인생의 전형적인 본보기다. 그러나 복선·상징·사건을 통해 카라바조의 인생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카라바조가 ‘아브 오보’ 세계에 살았다면, 즉 르네상스 시대의 장인 스타일 예술로 일관했다면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매춘부나 동성애자를 성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울 상상 자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경우 ‘아브 오보’ 세계관에 익숙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배척될 뿐이다.

카라바조, 바로크 시대 풍미한 나폴리의 이단아

38년 카라바조 인생은 철저히 혼자다. 5살 때 부모를 잃고, 20살에 그림 솜씨 하나만 믿고 로마로 단신 상경한 고독한 인생이다. 로마에서의 살인은 그런 척박하고도 거친 인생의 결과일지 모르겠다. 빈센트 반 고흐, 이미 11년 전에 세상을 뜬 스티브 잡스를 봐도 기승전결 ‘아브 오보’ 인생과 무관하다. 중간에 갑자기 나타나 추리 소설식 삶으로 나아가면서 독자적인 창조·상상에 의존해 살아가는 인생이다. 대부분 짧은 인생으로 끝난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앞서 강조했듯이, ‘인 메디아스 레스’와 ‘아브 오보’ 사이에 우열은 없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보면 인간의 대부분은 ‘인 메디아스 레스’ 세계관을 동경한다. 좌충우돌 우왕좌왕 스토리 일색인 오디세이가 무려 3000년 간 인류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마스크도 안 쓰고, 접종도 피하면서 각종 대형 이벤트에 몰려다니는 불량스런 나라가 미국이자 유럽이다. 그러나 방역 천국이자 접종 대국이란 코로나19 대응 모범국가 중국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창조와 상상은 자유가 있기에 가능하다. 목숨을 보장할 방역 천국, 접종 대국도 좋다. 그러나 굳이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전염병 속에서 지킬 카오스 자유’를 선택하고 싶다. 잊기 쉬운데, 인류는 전염병을 통해 단련되고 진화해왔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202호 (202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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