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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리포트] 인턴기자, ‘오픈런’ 현장을 가다 

‘전날런’에 ‘노숙런’까지… 영하권 추위도 막지 못한 명품 사랑 

이화랑 월간중앙 인턴기자
가격 인상에도 명품 인기는 고공행진… 소비자들 “하루라도 빨리 사야 이득”
‘득템’ 심리가 부추긴 열풍… 플랫폼 기반 MZ세대 新재테크로 떠오른 ‘리셀’


▎최근 명품 브랜드들이 잇따라 제품 가격을 인상하면서 주요 백화점 입구는 개점 시간 훨씬 전부터 제품을 미리 사두려는 소비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게 됐다. 지난 1월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본점 명품관 앞에서 고객들이 개점 시간을 기다리는 모습. / 사진:연합뉴스
"새벽 5시쯤 도착했는데, 거의 마지막 순번을 받았어요. 들어가도 물건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2월 6일 오전 8시,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본점 앞에서 패딩 점퍼와 모자, 장갑으로 중무장한 채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있던 한 중년 부부가 말했다. 이날 서울은 아침 기온이 영하 8도, 체감 온도는 영하 11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의 날씨였지만, 백화점 앞 ‘오픈런(OPEN RUN·백화점 개점 시간에 맞춰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새벽부터 대기하는 현상)’ 열기는 여전했다. 2월의 첫 주말, 월간중앙이 찾아간 서울 시내 백화점 명품관 앞에는 이른 새벽부터 샤넬·롤렉스 등 명품을 사기 위해 오픈런에 뛰어든 시민 100여 명이 각 매장 라인에 줄지어 서 있었다. 시민들은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에도 노상에서 밤을 지새우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준비해온 방한용품 두르고 길거리 밤샘까지


▎2월 6일 오전 8시경 롯데백화점 본점 롤렉스 매장 대기 줄에 앞번호 대기자들이 설치한 텐트 열댓 개가 늘어서 있는 모습. / 사진:이화랑 인턴기자
서울 도심 한복판, 대기 현장에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대기열 앞쪽을 중심으로 텐트가 곳곳에 늘어서 있었고, 돗자리와 침낭, 등산용 접이식 의자, 담요와 손난로를 준비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제각기 준비해온 방한용품을 두르고 개점 시간을 기다렸다. 대부분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청하고 있었지만 책을 읽거나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보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사람들도 보였다.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던 시민들 중 한 남성은 “(오픈런이) 요즘 더 치열해진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롤렉스 매장 대기 줄 끝에서 만난 한 중년 여성은 “남편 시계를 사주려고 왔는데, 도착해보니 이미 줄이 길더라. 이렇게까지 치열할 줄 몰랐다”고 말했다. 51번째로 도착했다는 그는 “앞사람한테 들어보니 이미 50명이 다 차서 줄 서도 소용없다고 했다”면서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긴 아쉬우니 기다려보겠다”고 말했다.

오픈런 과열 양상에 백화점 측은 입장 인원 제한에 나섰다. 코로나19 확산세와 추위로 인한 사고를 우려해 내놓은 대책인데, 제한하는 인원수는 지점별로 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가 방문한 롯데백화점 본점 롤렉스 매장은 하루에 50팀까지로 입장 제한을 두고 있었다. 그러자 입장 번호를 받기 위해 고객들이 더 일찍 대기하기 시작하면서 오픈런이 더 치열해지는 부작용이 나오고 있다.

유통업계 전문가와 명품매장 관계자들에 따르면 백화점 오픈런 열풍이 거세진 이유는 명품 브랜드들의 가격 인상 랠리 때문이다. 샤넬코리아는 1월 11일 코코핸들 플랩백 등 인기 제품의 가격을 10~17%가량 올렸다. 지난해에만 2월과 7월, 9월, 11월 총 4차례에 걸쳐 가격을 인상했는데, 새해에 기습적으로 또 한 번 가격 인상을 단행한 것이다. 롤렉스도 1월 1일 새해 벽두부터 가격을 상향 조정했다. 롤렉스의 가격 인상은 2년여 만이며, 인기 제품인 서브마리너 일부 모델의 경우 13~16%가량 가격이 올랐다.

명품 브랜드가 진입 문턱을 높이면서 제품 확보를 위한 경쟁은 더 심화됐다. 이미 소비자들 사이에는 ‘오늘이 제일 싸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명품 가격은 계속해서 오르고, 어떤 제품의 가격이 인상될지 모르니 하루라도 먼저 사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이다. 근처 샤넬 매장 대기 줄 40번대에 서 있던 김성현(37·가명)씨는 “아내에게 가방을 사주려고 왔다”며 “아내가 이전부터 갖고 싶어 하는 모델이 있었는데, 점점 가격이 올라서 더 오르기 전에 사려고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처음에는 이런 고생 하지 말고 그냥 웃돈 주고 사라고 말했었는데, 100만원 이상씩 (프리미엄이) 붙다 보니 돈이 아까워서 그렇게까지는 못 사겠다고 하길래 직접 오픈런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간신히 롤렉스 입장 번호를 받았던 중년 부부는 앞쪽에 설치된 텐트들을 가리키며 “저런 사람들은 대부분 ‘업자(리셀러)’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남편 강영재씨(가명)는 “나는 10년 된 시계를 바꾸고 싶어서 주말에나 가끔 나온다”며 “일반 직장인이 저렇게 매일같이 새벽부터 나와서 텐트 치고 기다릴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강씨는 “비싼 모델은 ‘피(P·프리미엄)’가 붙는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모이는 것”이라며 “저렇게 되팔기 위해 줄 서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 같은 실수요자들은 불편하다. 원하는 모델을 구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픈런을 1년 정도 했다”는 40대 남성 윤재호씨(가명)는 “최근에는 한 달 내내 한 것 같다”며 “어제 오후 11시에 도착해서 텐트를 치고 기다렸는데, 대기 등록 전날 오후 7시에 도착해서 15시간을 기다린 적도 있다”고 말했다. 윤씨는 “오늘은 주말이라 줄이 더 일찍 끊겼다. 평일은 그나마 직장인들이 일을 나가니 덜한 편”이라며 “오픈런이 최근에 더 과열된 추세다. 돈이 된다 하니 기사 보고 온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시계를) 살지 안 살지, 직접 쓰려고 사는 건지 아닌지 딱 보면 안다. 주로 앳된 얼굴, 젊은 사람들이 ‘구매대행’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한테는 롤렉스에서도 알고 물건을 안 보여준다”고 속삭였다.

“명품 하나 잘 건지면 주식, 코인보다 낫다”


▎같은 날 비슷한 시간대 롯데백화점 본점 앞에 건물 외벽을 빙 두르는 긴 대기 줄이 형성됐다. 샤넬 매장 입장을 기다리는 대기자들의 모습. / 사진:이화랑 인턴기자
최근 샤넬·롤렉스 등 명품 브랜드는 구매대행을 철저히 단속하고 있다. 나날이 기승을 부리는 재판매업자(리셀러)들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앞서 ‘매장별 연간 1인당 시계 1점’과 같은 구매 수량 제한 정책을 펼쳤더니, 구매대행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피해가려는 행태가 여럿 발생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현재 명품 브랜드 매장 직원들은 방문 고객을 상대로 일일이 신분증을 확인하고, 본인 명의 카드로만 물건을 결제하도록 하는 등 리셀러와의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전날 밤에 도착해서 롤렉스 10번 안쪽 번호를 받았다는 30대 남성 신태현씨(가명)는 “처음에는 여기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갔었는데, 도착해보니 내가 첫 번째더라. 적당한 순번을 찾아서 여기로 넘어오게 됐다”며 “빨리 들어간다고 다 살 수 있는 게 아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원하는 제품의 구매 성공 여부는 순전히 ‘운’에 달려 있다고 한다. 고객은 대기하는 매장에 어떤 제품이, 언제, 얼마나 입고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고객이 시계를 고르는 게 아니라 시계가 고객을 고른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3개월 넘게 오픈런에 참여하고 있다는 신씨는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를 보여주며 “이 모델(에어킹)을 피 주고 샀는데, (구매 당시) 정가가 716만원 정도였고 피는 200만원 정도 붙었다. 그런데 최근에 정가가 70만원 정도 오르고 나서는 2500만원 정도에 되팔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자와 신씨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윤씨는 “내가 구하려는 모델은 GMT”라며 “모 주얼리 브랜드와 컬래버한 제품은 현재 정가가 780만 원 정도인데 4000만원까지도 되팔린다”고 덧붙였다. 리셀을 통한 차액이 적게는 수십만원부터 많게는 수천만원에 달하는 데서, 사람들 사이에 ‘명품 하나 잘 건지면 주식이나 코인보다 훨씬 나은 투자’라는 시각이 자리 잡게 된 이유를 엿볼 수 있었다. 신씨는 “솔직히 들어가서 내가 원하는 시계가 없더라도 좋은 물건이 있으면 사려고 한다”며 “그 물건이 나한테 필요하지 않더라도 내가 사고 싶은 모델을 구하려면 프리미엄을 줘야 하는데, 거기에 보태서 살 수 있지 않겠나. 교환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대체품이라도 건지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명품 수요가 폭등하면서 오픈런 자체가 돈이 되기 시작한 분위기다. 근래에는 ‘줄서기 대행 아르바이트’까지 생겨났다. 국내 최초 줄서기 대행업체 오픈런 갓바타는 지난해 7월 개업한 이후 11월까지 매월 전월 대비 200% 이상 가파르게 성장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경쟁 업체들이 출현하면서 성장세가 잠시 완화했다가 올해 1월에 접어들면서 수익률을 다시 회복한 상태다. 김태균 오픈런 갓바타 대표는 “월평균 약200건, 지금까지 누적 1430여 건을 서비스(2월 초 기준)했다”며 “한 달 매출액은 평균 1900만원에서 2000만원 정도 되는데, 그중 20%가 업체 수익이고 나머지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돌아간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에 따르면 이 업체 서포터(아르바이트생)만 100여 명 정도이고, 주로 20대 취업준비생이나 30대 직장인들이 부업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평균 시급은 1만3500원 선으로 형성돼 있다.

줄 서기 대행 서비스를 이용해 대기 1번을 따낸 적이 있다는 양지수(25·가명)씨는 “남자친구와 예물을 사려고 2월 첫 주에 1박 2일 일정을 잡고 오픈런을 했다”며 “금요일 오후 7시에 3시간 알바를 쓰고, 밤 10시부터 토요일 아침 10시까지 12시간 동안 기다렸다. 너무 추워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는데, 피를 주고 사기엔 부담이 돼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양씨는 “리셀 때문에 롤렉스의 가치가 더 높아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우리 커플처럼 진짜로 필요한 사람들이 사기 힘들다 보니 부당하게 느껴진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오픈런 대란은 심리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현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수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리셀로 창출할 수 있는 경제적 효용과 코로나19 상황 속 보복소비 심리, 희귀 상품을 ‘득템’했을 때의 희열 등을 꼽았다. 이 연구위원은 “인간은 본연적으로 희귀 상품에 대한 열망이 있다”며 “공급과 수요의 원칙에 따라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때 공급이 차단되면 더 갖고 싶어 하는 심리적 배경이 있다. 남들이 정말 얻기 어려운, 한정적인 제품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심리, 즉 ‘득템 심리’가 오픈런 열풍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다”고 바라봤다.

롤테크, 샤테크 이어 스니커테크 등장

리셀 문화가 성행하는 것도 명품 시장이 과열되는 이유 중 하나다. 웃돈을 받고 팔아도 수요가 있다 보니 투자 관점에서 구매하려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리셀은 ‘요즘 애들’의 새로운 재테크 수단으로 떠올랐다.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2030 젊은 층의 투자처로 각광받고 있다. 2020년 3월 서비스를 시작한 리셀 플랫폼 크림만 해도 가입자가 190만 명이 넘는데(2021년 말 기준), 이 중 2030 세대가 8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조사업체 리서치앤마켓에 따르면 2021년 글로벌 중고 명품 시장은 326억 달러(한화 약 39조원) 규모이며 2025년에는 471억 달러(한화 약 56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중고 명품 시장이 향후 10년 동안 연 10~15% 성장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리셀 시장은 명품 제품은 물론 의류나 잡화 등 카테고리도 점점 다양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특정 브랜드의 한정판 운동화도 리셀 대세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롤테크(롤렉스+재테크)’, ‘샤테크(샤넬+재테크)’에 이어 ‘스니커테크(스니커즈+재테크)’라는 합성어가 등장한 배경이다. 1월 14일 신세계백화점 대구점에서 이른바 ‘좀비런’ 광풍이 연출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당시 많은 청년이 해당 지점에서 17만9000원에 선착순으로 판매한 한정판 나이키 골프화 에어 조던 1 로우 G를 손에 넣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역주행하는 등 위험한 질주를 벌여 화제가 됐다. 여러 중고 거래 사이트에 따르면 현재 이 신발의 인기 색상은 정가의 3배 이상인 60만 원 선에 거래되고 있다.

한정판 운동화를 모으는 게 취미인 직장인 조규현(26)씨는 “리셀로 한 달에 50만원까지 벌어본 적이 있다”며 “운동화를 좋아하고 수집하는 사람들치고 재테크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다. 부모님 세대가 부동산에 투자하듯 (우리 세대는) 신발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씨는 “언론에서는 자극적인 사례들, 싸게 사서 엄청 비싸게 파는 품목들만 과장해서 보여주는데, 오히려 가격이 떨어지는 제품들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MZ세대의 리셀테크와 관련해 이 연구위원은 “요즘은 현물 자산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다. 젊은 소비자들은 엄청난 자산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소액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다면 뭐든 투자한다”며 명품업계의 가격 인상과 함께 플랫폼의 일상화, 그로 인한 중고 거래 활성화, 취미의 다양화 등을 시장 확대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어 “사회가 더 개인화되고 취미에 대한 존중을 요구함에 따라 (시장이) 더 확장할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리셀러들이) 타 소비자의 상대적 박탈감을 끊임없이 자극해 특정 브랜드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을 제공한다거나, 세금을 탈피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등의 문제는 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이화랑 월간중앙 인턴기자 hwarang_lee@naver.com

202203호 (202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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