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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담론 (15)최종회] 일본 한일합방 추진에 설 자리 잃은 실력양성론 

안창호, 좌절 끝에 자해소동까지 벌여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한 강경 원론주의자들 ‘무력투쟁’ 지향
청도회담 계기로 분열… 노선 갈등에 낙담, 미국으로 돌아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임정 초기 많은 역할을 한 도산 안창호, 둘째 줄 오른쪽 끝이 백범 김구.
안중근 의사가 이토 통감을 사살하자 일제는 당장 두 가지를 추진했다. 첫째는 국내외 연루자들의 색출, 체포였고 둘째는 한일합방이었다. 이 중에서 한일합방은 일제의 극우세력인 흑룡회(黑龍會)와 그 앞잡이 일진회가 주동했다. 그래서 주모자는 흑룡회의 간부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와 다케다 한지(竹田範之) 그리고 일진회 회장 이용구였다. 우치다와 다케다는 헤이그 특사를 기화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킨 주모자이기도 했다. 그런 우치다와 다케다는 이토 사살을 기화로 한일합방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들은 암중으로 일본 흑룡회와 극우 정치인들을 상대로 지금이 한일합방의 적기임을 호소하는 한편 일진회를 움직여 대한제국 내에 합방 여론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통감을 사살한 1909년 10월 26일로부터 한 달여 후인 1909년 12월 3일 저녁, 한양에서 일진회 임시총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회장 이용구는 한일합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결과 임시총회는 고종황제, 이완용 총리 그리고 소네 아라스케(曾禰鬼助) 통감에게 일진회 명의로 한일합방 청원서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를 위해 청원서 기초위원을 선정했는데, 다케다와 일진회 총무 최영년이었다.

다케다의 [오해구현(鰲海鉤玄)]에 의하면, 합방 청원이 결의된 그날 저녁, 다케다와 최영년은 청원서를 기초하기 위해 밀실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청원서 3통의 초안은 이미 다케다 자신이 다 완성해 놓았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통해 일진회 임시총회 개최, 한일합방 청원서 작성, 기초위원 선정 등 모든 것들이 다케다와 우치다 등에 의해 기획, 공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 죽자 일진회 내세워 한일합방 추진


▎1910년 한일합방을 기념해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사진 엽서. 일본 메이지왕의 초상이 국화, 봉황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밑에 배치된 조선 순종임금의 초상은 상대적으로 초라하다.
밀실에 들어간 다케다는 자신이 완성한 청원서 초안을 최영년에게 보여주며 “원고는 이미 완성됐으니, 선생이 교정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라고 말했다. 최영년은 아무 말 없이 원고를 읽고 난 후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한 마디도 덧붙일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최영년은 “다른 두 편은 할 말이 없고, 오직 상표문(上表文-고종황제에게 올리는 청원서) 한 편은 우리나라에 관례가 있으니 몇 자 고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아마도 당시 최영년은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최영년은 마지막 순간에 그래도 고종 황제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지키고자 상표문을 고치려 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최영년은 “‘금아한국대황제(今我韓國大皇帝)’라는 표현은 어찌 죽은 시체를 헛되이 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금대한국형세(今大韓國形勢)’로 고쳐야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고종황제에게 한일합방을 청원하는 글에서 ‘한국 대황제’라고 표현하는 것은 고종황제를 놀리는 일이라 생각해 ‘한국 대황제’를 ‘대한국 형세’로 바꾸고자 했을 듯하다. 이어서 “‘입기궁 불견기처(入其宮 不見其妻-그 집에 들어가 그 처를 보지 않는다)’에서 ‘궁(宮)’자는 ‘실(室)’ 자로 바꾸고, ‘기욕차위 사기장지 처기가득견야(旣辱且危 死期將至 妻其可得見耶-욕되고 위태로우며 죽을 시기가 닥쳐오니, 처를 볼 수 있겠는가?)’라는 표현에서 ‘사(死)’ 자는 ‘위(危)’ 자로 바꾸고, ‘처(妻)’ 자는 ‘안(安)’ 자로 고쳐야 합니다”라고 했다. ‘궁(宮)’ 자는 ‘실(室)’ 자로 바꾸자는 것은 궁(宮)이라는 글자가 왕궁으로서 대한제국 황실을 직접 나타내므로 이를 완화하기 위해 실(室)로 바꾸자는 것이며, ‘사(死)’ 자는 ‘위(危)’ 자로 바꾸고 ‘처(妻)’ 자는 ‘안(安)’ 자로 바꾸자는 것은 사(死)나 위(危) 같은 극단적인 표현을 완화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최영년은 한일합방이라는 본질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지엽말단적인 표현 몇 글자만 바꾸었다. 물론 그 이유는 합방 청원을 다케다가 주도하고, 자신이 총무로 있는 일진회는 그것을 앞장서서 추진하는 상황에서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다케다는 최영년의 제안을 군말 없이 수용했다. 그렇게 수정이 끝난 청원서 3통은 최영년의 막내아들이 정자로 베껴 써서 완성했다.

다음날인 12월 4일, 일진회 회장 이용구는 소네 통감에게 보내는 한일합방 청원서를 자신이 직접 가지고 통감부로 가서 접수했다. 그러자 소네 통감은 12월 5일에 이용구를 불러 “반드시 신중하게 있으면서 명령을 기다리시오”라고 당부했다. 아마도 소네 통감은 청원서가 자칫 격렬한 소요를 불러올까 우려했던 듯하다. 한편 이용구는 고종황제와 이완용 총리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직접 전하지 않고 우편으로 내각에 보냈다. 내각에서는 다시 우편으로 이용구에게 반송했는데, 그렇게 세 번을 반복한 후에 내각에서 접수했다고 한다. 1909년 12월 4일자로 된 상표문에서 이용구는 한일합방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진회장 이용구 등 1백만 회원은 2천만 신민을 대표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대황제 폐하에게 아룁니다. (중략) 우리나라는 일본과 같은 종족에서 나와서 아직까지 탱자와 귤만큼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 아니고, 지금 서로 다투는 것도 심하지 않은 만큼 그 국경을 없애고 두 이웃 사이의 울타리를 아주 없애버려서 두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한 정치와 교화 밑에서 자유로이 노닐면서 다 같이 함께 살고 함께 다스려지는 복리를 누리게 한다면 누가 형이고 아우인가를 가릴 것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극히 어진 일본 천황 폐하인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2천만 동포를 교회시키고 양육하여 동등한 백성으로 잘 만들 것입니다. 그러니 살고자 하나 살 수 없었던 사람이 이에 새롭게 살길을 얻게 되며, 죽고자 하나 죽을 수 없었던 사람이 이에 죽을 곳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조상 때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예의 바르고 의리 있으며 성실하고 신의 있는 습속을 다시 시작하여, 보호받는 열등 국민이라는 이름을 벗고 일약 새로운 대제국으로서 세계 1등 민족의 대열에 올라서게 될 것입니다.(하략)”

위의 상표문은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합방해 연방 국가가 되면 대한제국은 일본제국과 동등한 국가가 되어 일약 세계 1등 국가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희망은 흑룡회를 비롯한 일본 우익들이 선전한 대동아주의였고, 그것은 일본의 동아시아 패권을 위한 선전일 뿐이었다. 그런 일본 우익의 선전에 이용구를 비롯한 일진회 회원들이 세뇌됐음을 위의 상표문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이용구는 12월 5일자로 된 ‘합방성명서’를 언론에 발표했다. 근본 취지는 위의 상표문과 같았다. 이 성명서는 12월 8일 대한매일신보에도 실렸다. 이로써 일진회의 한일합방 청원은 전국적으로 알려졌으며 대한제국 내에서는 큰 파문이 일었다. 한일합방을 일본이 아닌 대한제국의 일진회가 앞장서서 요구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연히 엄청난 비난과 반발이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안창호, 김구, 이갑 등 주요 민족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수감 중이었다. 1909년 10월 26일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통감을 사살한 직후, 일제는 연루자들을 찾는다며 주요 민족지도자들을 체포, 수감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직적인 저항운동이 불가능했다.

신민회, 한일합방 대책 결사항전과 실력도모 놓고 논의


▎한일합방을 추진한 일진회 고문 우치다 료헤이(왼쪽부터), 다케다 한시, 이용구 일진회 회장.
안창호는 1909년 10월 31일 평양 대성학교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 용산 헌병대에 수감됐다. 이때를 전후로 김구, 이갑, 이종호 등 수백 명이 체포됐다. 안창호는 자신이 주도해 세운 평양의 대성학교에 업무차 갔다가 체포됐다. 10월 31일 아침, 일본 헌병들이 대성학교를 포위하고 안창호를 찾자 그는 태연히 걸어 나와 평양역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대성학교에서 근무하던 정영도가 평양역까지 안창호를 따라 왔다가 다시 급히 학교로 돌아와 약간의 돈을 변통해 거리에서 배 몇 개를 사 안창호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안창호가 용산 헌병대에 수감돼 있는 동안 서울의 남녀 학생들은 밤이 되면 감방 근처에 모여들어 애국가를 합창했는데, 안창호가 지어서 가르친 다른 노래들을 불렀다고 한다. 어떤 여학생은 거짓 핑계로 안창호에게 전화를 걸고, 노래를 불러 듣게 하였다고도 한다. 그 학생들은 안창호가 실력양성을 부르짖으며 길러낸 청년 학생들이었다. 그들에게 안창호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안창호 등은 달포를 두고 조사를 받았으나,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안중근 의사는 해외의 몇몇 동지들과 의논하고 일을 단행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1909년 12월 중순에 안창호 등 신민회 간부들은 헌병대에서 풀려나왔다. 그들이 풀려나왔을 때, 상황은 크게 변해 있었다. 일진회의 ‘합방성명서’로 한일합방이 초미의 문제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안창호를 비롯한 신민회 간부들은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대책이라고 해봐야 큰 선택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일합방’을 결사 항전의 자세로 저지할지, 아니면 실력을 키우며 뒷날을 도모할지 둘 중의 하나였다.

당시 신민회 간부들은 창덕궁 뒤편 원동(苑洞)에 자리한 이갑의 집에 모여서 사후 대책을 논의했다. 이광수의 [나의 고백]에 의하면 당시에도 이미 서북이니 기호니 교남(嶠南-영남)이니 하는 파벌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갑은 비록 평안도 출신으로 서북파에 속했지만, 화합에 힘을 써 모든 파벌로부터 호감과 신임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파벌이 부담 없이 모일 수 있는 곳이 이갑의 집이었고, 그 결과 이갑의 집 사랑은 당시 애국지사의 구락부와 같았다. 신민회 창설이며 헤이그 특사 계획 등이 모두 이갑의 사랑방에서 논의됐다.

한일합방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놓고도 다양한 의견이 나타났다. 무력투쟁을 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통감부와 협력해 자치정부를 세우자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안창호는 이런 의견에 반대했다. 실력이 부족해 이렇게 됐으니, 우선 실력양성이 급선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주요한의 [안도산 전서]에 의하면, 그때 안창호는 “우리 애국자에게 남은 오직 하나의 길은 눈물을 머금고 일보 물러서서 장래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우리가 망국의 비극을 당하는 것은 힘이 없는 까닭이니 힘이 모자라서 잃은 것은 힘을 길러야 찾아질 것이다. 국내에 남을 수 있는 이는 국내에서, 남을 수 없는 동지들은 해외로 나가서, 인격력과 단결력을 기르고,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민력을 배양하는 것, 다시 말하면 신민회 운동을 계속하는 것만이, 조국을 다시 찾는 오직 하나의 길이다”라고 부르짖었다 한다.

안창호·이갑 등 신민회 간부 국외 망명


▎한일합방 조약위임장(왼쪽)에 나타난 순종의 진짜 서명과 1907년 법령(오른쪽)에 나타나 있는 가짜 서명. 서울대 규장각 이소진 관장은 1907년대 반포된 순종의 수결(가인)이 있는 법령이 순종의 자필이 아닌 것으로 보여 일본측이 위조해 반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결국 안창호 의견대로 신민회 간부들은 실력양성 노선에 따라 일부는 국외로 망명하고, 일부는 국내에 남아 힘을 키우기로 했다. 국내에 남을 신민회 간부로는 서울에 전덕기, 평양에 안태국, 평북에 이승훈, 황해에 김구 등이 정해졌다. 주요한의 [안도산 전서]에 의하면, 당시 안창호 생각에 국내 잔류파 간부들은 교육가로서 세상에 알려져 있기 때문에 탄압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국내 잔류파 간부들은 대거 체포됐고, 그 사건으로 국내 신민회 조직은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한편 국외에 망명할 신민회 간부로는 구미 방면은 안창호와 이갑, 연해주는 이동녕, 북간도는 이동휘, 서간도는 이시형과 최석하, 북경에 조성환으로 정하고 이종호 역시 해외로 나가서 모든 동지들의 운동자금을 주선하기로 각각 임무를 분담하였다. 이종호는 고종황제의 비자금을 관리하던 이용익의 손자로서 막대한 자금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국외에 망명할 신민회 간부들의 탈출 방법은 각자 자유행동으로 하되, 중국 산동성 청도(靑島) 항구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1910년 2월에 이갑, 이종호, 이종만은 기차로 떠나 평북 석하(石下)역에서 내려 도보로 아직 얼음이 채 풀리지 않은 압록강을 배로 건너 다시 기차로 봉천을 거쳐 북경으로 갔다. 반면 안창호, 신채호, 김지간, 정영도 등 4명은 1910년 4월 7일에 경기도 행주에서 조그만 목선을 타고 강화도 교동도로 가다가 신채호, 김지간은 멀미가 나 개성 후포에서 내려 육로로 만주를 거쳐 북경으로 갔다. 안창호, 정영도는 황해도 장연에서 중국인 소금 배를 갈아타고 중국 산동성 위해위에 상륙했다. 안창호가 해외로 망명한 1910년 4월은 그가 귀국한 1907년 2월부터 3년 2개월 만이었다. 당시 안창호의 나이 32살이었다. 안창호가 망명할 때 불렀다는 거국가(去國歌)가 당시 사람들에게 유행했다고 한다. 거국가는 총 3절로 되어 있는데, 1절은 “간다 간다 가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ㅡ이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게 하니/ 일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설어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였다.

위해위에 도착한 도산은 북경으로 갔다가 약속한 대로 동지들과 만나기 위하여 청도로 갔다. 1910년 4월 말쯤이었다. 청도에 모인 신민회 간부들은 유동열, 신채호, 이종호, 김지간, 조성환, 이강, 박영노, 김희선, 이종만(李鍾萬-이종호 아우) 등이었다. 이 회담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이강도 참여했는데, 아마도 안창호의 호출로 그렇게 됐을 것이다.

한일합방 임박, 신민회 운동노선 분열


▎용수를 쓰고 형무소에 끌려가는 신민회 독립운동가들. 1912년 일제는 총독 ‘데라우치 모살 사건’ 혐의로 신민회를 탄압, 많은 사람이 죽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이 신민회 간부들의 회담을 청도회담이라고 하는데, 향후 노선을 놓고 그들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크게 급진론과 온건론이었다. 급진론은 당장에 만주로 가서 광복군을 조직해 일본과 개전하자는 무력투쟁론이고, 온건론은 서서히 실력을 키운 후 기회를 보자는 실력양성론이었다. 주요한의 [도산 전서]에는 이동휘가 급진론의 선봉으로서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교육은 무엇이고, 산업은 다 무엇이냐. 당장 나가서 싸우다가 죽으면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당시 이동휘는 회담에 참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청도회담에서 무력투쟁을 주장한 사람은 이동휘가 아니라, 이동휘 계열의 군인 출신 또는 강경 원론주의자들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 안창호는 여전히 실력양성을 주장하였다.

한일합방이 임박한 상황에서 무력투쟁을 통해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 역시 일리가 있었고, 현실적으로 일제와 적수가 안 되니 힘을 기른 후에 결판을 내자는 실력양성론 역시 일리가 있었다. 이에 따라 청도에 모인 신민회 간부들은 무력투쟁론과 실력양성론으로 갈려 결론을 내지 못했다. 한양의 원동에서 해외망명을 결의할 때만 해도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이 설득력을 가졌지만, 한일합방이 추진되는 1910년 4월 상황에서는 무력투쟁론이 더 설득력을 가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청도회담에서는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하고 자기주장대로 각자 운동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 같은 청도회담을 계기로 신민회의 운동노선은 실력양성 일변도에서 각자 생각에 따라 무력투쟁과 실력양성 등으로 갈리게 됐다.

일진회 해산,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아


▎안창호, 이갑 등이 중심이 돼 1908년 1월 조직한 문화계몽 운동을 위한 애국단체 ‘서북학회’의 건물, 현재는 건해 상하기념관. 독립운동 노선을 두고 안창호의 서북파는 ‘실력양성’을, 이상설을 필두로 하는 기호파는 ‘무장 투쟁’을 주장했다.
청도회담 이후 안창호는 이강, 이갑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안창호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시점은 1910년 9월이었다. 그때는 이미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당한 이후였다. 1910년 8월 22일,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됐고 29일 공포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뒤이어 1910년 9월에는 일진회도 해산됐다. 한일합방에 실컷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것이었다.

일진회의 해산은 나름 역사적인 의미를 가졌다. 일진회는 부정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대한제국 시대의 친일 대동아주의를 대표하는 조직이었다. 일진회가 존재했을 때는 친일 대동아주의가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일진회가 해산됨으로써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이런 흐름이 더는 설 자리가 없게 됐다.

한편 신민회는 내부의 운동노선이 통일되지 않음으로써 크나큰 내홍을 겪게 됐다. 그 같은 조짐은 이미 청도회담에서 드러났다. 당시 무력투쟁과 실력양성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있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 정도로 상호 주장이 강했고, 반대로 안창호의 지도력이 약화된 탓이다. 이런 상황은 안창호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서도 여전했다. 당시 안창호를 측근에서 보필하던 이강은 “도산 선생은 늘 어떤 경우에도 별로 낙담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만은 여간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또 선생은 어떤 때는 생각지 않은 행동도 하는 일이 있어서 은근히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요행히 아무런 사고도 없었습니다”라는 증언까지 남겼다. 이강이 언급한 ‘생각지 않은 행동’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자해였다. 극도로 좌절한 안창호가 자해소동까지 벌였던 것이다.

안창호가 그토록 낙담하고 좌절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동포사회의 분열과 자신의 입지 약화였다. 특히 기호파와의 갈등이었다. 안창호가 도착하기 전에 발생했던 정순만의 양만춘 총살 여파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기호파는 안창호를 서북파 수령으로 간주하고 극도로 견제했던 것이다. 게다가 기호파의 이상설은 무력투쟁을 주장하는 대표자이기도 했다. 1910년 6월에 이상설은 의병장 유인석과 함께 13도의군을 창설해 조국을 무력 탈환할 계획을 세웠다. 나아가 7월에는 고종황제를 연해주로 파천시켜 임시정부를 세우고자 하는 계획도 세웠다. 뒤이어 한일합방이 임박한 8월에는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해 합방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런 모든 운동은 입헌군주제 또는 계약군주제를 목표로 추진했으며, 방법론적으로는 무력투쟁을 지향했다. 이런 상황에서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별로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안창호는 1911년 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고, 연해주와 만주의 독립운동은 무력투쟁론이 주도하게 된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203호 (202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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