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 (24)최종회] 왕권 강화가 지상 과제인 숙종, 장희빈을 희생양 삼아 

권력은 ‘궁녀의 사랑’을 배반했다 

적장자 후계자 세우려고 인현왕후 쫓아내고 교체한 왕비에 사약
정권 바꾸는 환국 정치 반복… 당쟁, 사생결단 복수전 격화 부작용


▎숙종 그리고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사극의 단골 소재다. 특히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 가운데 상당수가 장희빈 역을 맡아 연기력과 미모를 과시했다. KBS 사극 [장희빈]에서 숙종(전광열 분)과 장희빈(김혜수 분)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1680년 10월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스무 살 임금 숙종은 두 살 연상의 궁녀 장옥정을 침전으로 불러들였다. ‘장가 옥정’은 대왕대비의 시중을 드는 지밀나인이었다.

6년 전 14세의 나이로 즉위한 숙종은 증조할머니 장렬왕후의 처소에 문안갈 때마다 이 나인을 눈여겨봤다. 얼굴도 예쁘고 처신도 애교스러워 대왕대비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었다. ‘이팔청춘’ 탐스럽게 피어나는 나인을 사춘기 임금은 내심 점찍어뒀다. 그러나 티를 낼 순 없었다. 인경왕후가 궁녀를 엄히 단속했기 때문이다. 봉인은 왕비의 죽음으로 해제됐다. 왕은 꿈에 그리던 나인을 드디어 품에 안았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승은 궁녀가 누군지 알아보고는 치를 떨었다. 역관 장현의 종질녀가 아닌가. 장현은 조선의 대부호였다. 부와 권력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았다. 부를 거머쥔 자산가들이 사업을 키우려면 뒷배가 필요했고, 권력을 꿈꾸는 야심가들이 세력을 키우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장현은 종친과 남인의 물주가 됐다.

명성왕후는 서인 집안 출신이었다. 서인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50년 넘게 정권을 잡았다. 집권당으로서 대대로 왕실과 통혼해 왕비를 배출하고 외척이 됐다. 그러나 예송논쟁에서 서인 영수 송시열이 효종을 깎아내리는 예론을 펴는 바람에 그 아들 현종의 미움을 샀다. 종친들은 서인이 왕권을 업신여긴다며 남인 세력과 손잡았다. 1674년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숙종은 어린 나이에도 과감하게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에게 정권을 넘겼다.

이때 종친과 남인의 자금을 댄 자가 장현이었다. 그 후 남인이 허황하고 무사안일한 국정 운영으로 임금의 신뢰를 잃고, 종친 복선군을 추대해 역모를 꾀한 죄로 옥사에 휘말리며 서인과 외척은 1680년 정권을 되찾았다(경신환국). 서인정권은 남인 영수 허적과 윤휴, 그리고 숙종의 당숙들을 죽음으로 몰았으며 장현은 멀리 유배 보냈다. 그런데 장현의 종질녀가 자기 아들의 승은을 입다니, 서인 당색이 강한 대비 명성왕후는 용납할 수 없었다.

대비는 장옥정을 궁 밖으로 내치고 계비 간택령을 내리게 했다. 1681년 5월 서인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가 숙종의 두 번째 왕비가 됐다. 하지만 승은 궁녀를 출궁시킨 것은 명성왕후의 실수였다. 오빠 장희재의 집에 거처하는 옥정을 바라보고 남인과 종친 세력이 다시 결집했다. 정권을 빼앗기고 지리멸렬했던 그들로선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셈이었다.

1683년 12월 대비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숙종과 장옥정의 사랑을 가로막던 최대 장애물이 사라진 것이다. 대비의 삼년상이 끝나자 장렬왕후가 임금에게 옥정을 다시 입궁시키라고 권유했다. 물론 종친과 남인들의 입김이 들어간 일이었다. ‘현숙한 계비’ 인현왕후는 승은 궁녀를 민가에 두는 건 왕실의 체면을 깎는 처사라며 재입궁을 거들었다.

1686년 봄 28세의 나이로 궁에 돌아온 장옥정을 숙종은 열정적으로 맞이했다. 그리움이 컸던 만큼 사랑도 뜨겁게 타올랐다. 창경궁은 청춘남녀의 놀이터였다. 임금이 수작을 걸면 옥정은 나 잡아 봐라, 하면서 궁을 헤집고 다녔다. 인현왕후에게 달려가 남편 좀 말려달라고 짐짓 읍소하기도 했다. 사랑을 못 받는 왕비를 약 올리고 조롱한 것이다.

임금은 창경궁에 아름다운 별당을 지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특별한 처소, 취선당(就善堂)이었다. 취선당이 다 지어지자 숙종은 드디어 장옥정을 숙원에 봉했다([숙종실록] 1686년 12월 10일). 인현왕후는 속절없이 뒷전으로 밀려났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피의 숙청과 왕비 교체라는 태풍이 조선을 덮쳐오고 있었다.

궁녀에게 승은의 기회 준 문안 인사


▎KBS 사극 [장희빈]에서 장희빈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 김혜수(오른쪽).
조선 시대에 궁녀가 임금의 사랑을 받아 왕실의 일원이 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장옥정은 어떤 나인이었을까? 숙종을 만나기 전까지 궁에서 무엇을 했을까?

궁녀는 구중궁궐, 국왕 일족이 거처하는 액정(掖庭)에서 시중을 들고 일상사를 도맡은 여인들이다. 조선에서는 궁녀를 ‘나인(內人)’이라고 불렀다. 오래 근무하면 ‘상궁(尙宮)’이 된다. 내명부 품계도 받았는데 상궁은 4~5품, 나인은 7~9품이었다.

액정에는 왕·왕비·대비·후궁·세자·세자빈 등의 처소가 있었다. 처소마다 궁녀들이 배치되었는데, 처소의 주인이 뽑을 수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회사 공채가 아니라 부서별 특채였다. 17세기 궁녀 가운데는 공노비 출신이 많았다. 예컨대 대전과 동궁에는 왕실 재산을 관장하는 내수사의 여종들이 큰 줄기를 이뤘다. 또 왕비와 세자빈의 처소에는 ‘본방나인’이라 하여 친정에서 데려온 몸종과 유모들이 근무하기도 했다.

장옥정은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을 지낸 중인 집안 출신이었다. 당시에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중인 궁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801년 공노비 해방 이후였다. 역관의 딸 옥정이 궁에 들어간 데는 필시 어떤 의도가 숨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입궁했다. “장씨는 머리를 땋아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숙종실록] 1689년 5월 6일) 훗날 왕비로 삼겠다는 숙종의 전지에 나온 말이다. 장옥정은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당숙 장현의 보살핌을 받았다. 궁녀로 입궁하기 딱 좋은 나이였다.

궁녀는 ‘왕의 여자’다. 그렇다고 모든 궁녀가 임금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뜻은 아니다. 관념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 궁녀의 업무는 크게 지밀(시중)·침방(의상)·수방(자수)·소주방(음식)·생것방(다례)·세수간(목욕)·세답방(세탁) 등으로 나뉘었다. 이 가운데 실세는 지밀나인이었다. 하인의 힘은 주인과의 거리에서 나온다. 주인 곁에서 문고리를 잡아야 실세다. 지밀나인은 주인의 시중을 들고 심기까지 관리하는 측근들이었다.

장옥정은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지밀나인이었다. 장렬왕후는 인조의 계비로 들어와 자손도 없이 외롭게 늙어가는 여인이었다. 옥정은 대왕대비의 손녀딸 노릇을 해주며 총애를 독차지했다. 임금과 세자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장렬왕후는 비록 실권이 없는 뒷방 늙은이였지만 반드시 문안 인사를 챙겨야 하는 궁중의 큰 어른이었다. 숙종은 세자 시절부터 대왕대비의 처소에 드나들며 예쁜 나인을 마음에 뒀을 것이다.

궁녀가 왕실의 일원으로 벼락출세할 기회는 바로 이 문안 인사의 동선에서 나왔다. 세자의 경우 국왕의 처소보다 대비들의 처소에서 나인을 점찍었다. 아버지의 궁녀는 말 그대로 ‘왕의 여자’였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나 할머니의 나인은 달랐다. 사춘기에 접어들고 이성에 눈뜨면 그 여인이 밤마다 어른거리지 않았을까?

사도세자는 1757년 할머니 인원왕후가 승하하자 대비의 나인 박빙애를 무단으로 데려갔다가 영조에게 격한 꾸지람을 들었다. 이 불행한 나인은 몇 년 뒤 세자의 광기로 인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정조는 세손 시절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수양딸처럼 기르던 나인 성덕임을 마음에 뒀다. 1766년 15세의 세손은 한 살 어린 덕임에게 고백했으나 거절당했다. 덕임은 세손빈이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다며 세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15년 만에 다시 성덕임에게 승은을 내리고자 했다. 이번에는 덕임의 하인을 벌하겠다고 협박해 뜻을 이뤘다. 이 나인이 바로 요절한 문효세자의 어머니 의빈 성씨다.

‘기사환국’으로 ‘기사회생’한 남인, 그러나


▎KBS 사극 [장희빈]에서 숙종 역의 배우 전광열과 장희빈 역의 배우 김혜수.
장현이 종질녀를 장렬왕후의 처소에 들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는 청나라를 오가며 효종의 특명을 수행한 역관이었다. 종친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액정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옥정을 장렬왕후의 처소에 두면 임금이나 세자의 눈에 띌 테고 정보 수집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장현은 자기 딸을 궁녀로 들여보낸 것도 모자라 종질녀까지 입궁시켜 부와 권력을 일구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장옥정은 마침내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후궁이 됐다. 1688년 10월에는 아들까지 낳았다. 28세의 청년 군주는 크게 기뻐했다. 내심 후사를 걱정하던 숙종이었다. 그런데 떡두꺼비 같은 왕자를, 그것도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얻었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해가 바뀌자 숙종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중대 발표를 했다.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원자는 왕위 계승권을 가진 임금의 맏아들을 말한다.

서인 정권은 발칵 뒤집혔다. 출생한지 두어 달밖에 안 된 갓난아기를, 그것도 궁녀 출신 후궁의 소생을 후계자로 정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인들은 인현왕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이니(23세) 적장자를 얻을 때까지 지켜보자고 했다. 그러나 임금은 밀어붙였다. 결국 숙종은 갓난아기를 원자로 삼고 장옥정을 희빈(정1품)에 봉했다.

서인의 정신적 지주 송시열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상소가 날아들었다. 후궁 소생인 송나라 철종의 예를 들며 제왕의 처신을 논했다. 군주를 훈계한 것이다. 숙종은 분통을 터뜨렸다. 송시열은 지난날 효종의 은혜를 입고도 사후 차남이라 해 정통성을 부정한 배은망덕한 자가 아닌가. 원로라 해도 왕권을 업신여기는 언행은 용서할 수 없었다.

1689년 2월 숙종은 송시열의 관작을 빼앗고 도성 문밖으로 내쫓았다. 정계 개편의 신호탄이었다. 재상승지·대간·군부 등 조정의 요직이 다시 남인 세력에게 넘어갔다. 9년 전 경신환국의 복사판이었다. 이 정계 개편을 ‘기사(己巳)환국’이라 일컬었다. 남인으로서는 기사회생했으니 ‘기사(起死) 환국’이었다.

남인 정권은 서인 영수 송시열·김수항 등에게 극형을 내려달라고 임금에게 촉구했다. 정해진 수순이었다. 저들이 남인 거물들(허적·윤휴)을 죽였으니, 우리는 서인 거물들을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사소한 예법 논쟁으로 촉발된 당쟁은 어느덧 사생결단의 복수전으로 격화돼 있었다. 숙종의 극단적인 환국 정치가 빚은 끔찍한 부작용이었다.

김수항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송시열은 일단 죽음을 피했다. 섬에 귀양 보내 가시 울타리를 쳤으니 그만하면 됐다는 숙종의 뜻이었다. 얼핏 관용이나 예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임금은 자기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송시열의 목숨을 미끼로 남겨놓았다.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희빈을 왕비에 앉히겠다는 속셈이 무르익고 있었다.

1789년 4월 숙종은 신하들 앞에서 느닷없이 인현왕후의 투기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중전이 일전에 선왕(현종)과 선후(명성왕후)를 꿈에서 뵈었다며 ‘옥정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액정에 두면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원자는 어떻게 탄생했는가?”([숙종실록] 1689년 4월 21일) 며느리가 거짓말을 꾸며 돌아가신 시부모를 욕되게 했다는 것이다. 하물며 왕가에서 이럴 수 있느냐며 짐짓 분개했다.

남인들이 송시열에게 극형을 내리라고 재차 청하는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오호라, 송시열을 죽여줄 테니 서인 왕비를 투기죄로 몰아 쫓아내는 데 협조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남인 정권이라도 중전 폐출에 발 담그기는 꺼림칙했다. 국모이자 본부인을 몰아내는 일이다. 민심이 술렁일 게 뻔하였다. 그들은 임금의 폭주를 만류했다. 서인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국왕이 후궁에게 눈이 멀어 법도를 무너뜨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왕비 교체는 알고 보면 왕권 강화를 위한 숙종의 승부수였다. 그는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신하가 국왕을 능멸하는 폐단이 극에 달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1674년 즉위하자마자 송시열을 유배 보낸 것도 그래서다. 이 자가 바로 ‘무엄한 신하’의 우두머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임금으로서 그의 지상과제는 왕권 강화였다.

전무후무 궁녀 출신 왕비 탄생


▎KBS 사극 [장희빈]에서 인현왕후 역을 맡은 배우 박선영.
숙종은 왕권을 높이려면 적통을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장자, 왕비 소생의 맏이가 보위에 올라야 임금의 권위가 바로 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현종의 적장자였다. 현종이 효종의 적장자였으므로 적장자의 적장자였다. 조선은 적장자의 수난이 계속된 나라였다. 그때까지 적장자의 적장자로 즉위한 것은 단종이 유일했다. 숙종 때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위시킨 건 우연이 아니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숙종은 2대 연속 적장자 임금의 정통성을 내세워 세게 나갔다. 그는 새로 태어난 원자도 보위에 오르려면 당연히 적장자가 돼야 한다고 믿었다. 후궁 소생인데 어떻게 적장자일 수 있는가? 방법이 있다.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희빈을 왕비에 앉히면 된다. 원자를 왕비 소생으로 만드는 것이다. 적장자의 적장자의 적장자, 그것이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길이라고 숙종은 확신했다.

사실 기사환국으로 남인에게 정권을 돌려준 것도 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정지 작업이었다. 남인 정권이 발을 빼자 왕은 겁을 주기로 했다. 때마침 오두인·박태보 등 서인 86명이 중전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문구 몇 군데를 꼬투리 잡아 상소를 주도한 자들을 한밤중에 잡아들였다. 압슬과 낙형을 가하고 몽둥이로 입을 쳐서 죽였다. 그리고 앞으로 중전 폐출을 거론하는 자는 역적죄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남인들도 더 이상 임금에게 토를 달지 못했다. ‘지엄한 협박’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이다.

1689년 5월 2일 인현왕후가 쫓겨나 흰 가마를 타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곡(哭)하면서 따르는 이가 넓은 길을 메웠다. 5월 6일에는 장희빈을 왕비로 삼는다는 숙종의 전지(傳旨)가 내려졌다. 전무후무한 궁녀 출신 왕비의 탄생이었다.

숙종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자 남인 정권에 옜다, 하고 선물을 던져줬다.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린 것이다. 서인의 거목은 왕명을 받들기 위해 제주도에서 뭍으로 나왔다. 스승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기 위해 제자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그 무렵 서인은 송시열과 윤증의 ‘회니시비’가 공개되며 노론과 소론으로 갈려 있었다. 하지만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쓰러지자 ‘한 지붕 두 가족’은 서로 협력해 반전을 도모했다.

숙종과 폐비 극진한 편지 주고받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창릉동에 있는 장희빈의 대빈묘.
한편 숙종은 1693년 새 왕비를 제쳐두고 무수리 최씨에게 승은을 내렸다. 무수리는 궁에서 물 긷는 하녀였다. 궁녀 출신 왕비 장옥정은 나인들의 욕망을 경계했다. 신데렐라는 자기 하나로 족했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지밀나인들을 엄히 단속했다. 왕의 시선이 천한 무수리에게 향한 건 그래서다. 왕비의 단속망을 피해서 하녀를 넘본 것이다. 장옥정에 대한 숙종의 애정은 식어갔다. 부부 관계에 이상기류가 흘렀다.

인현왕후 폐출은 민심의 이반을 불렀다. 세간에는 죽은 인경왕후의 숙부 김만중이 지은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가 나돌고 있었다. 한림학사 유연수가 현숙한 부인 사씨를 내치고 간악한 첩 교씨를 집에 들였다가 신세 망치는 이야기다. 유연수는 숙종, 사씨는 인현왕후, 교씨는 장옥정을 빗댄 것이다. 백성들도 본부인을 쫓아낸 임금을 욕했다. 국왕은 정치인이다. 민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폐비 복위? 못할 것도 없다.

숙종은 다시 환국을 모색했다. 때마침 남인 정권이 서인 세력의 정변 음모를 밝혔다며 옥사를 일으켰다. 서인들도 맞불을 놓았다. 왕비의 오빠 장희재가 무수리 출신 후궁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숙종은 옥사를 부풀린 집권당을 벌하고 사랑하는 후궁의 편에 선 서인당에 정권을 넘겼다. 1694년 갑술환국이었다. 이 또한 기사환국처럼 왕비 교체를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장옥정 죽음과 함께 남인 몰락… 조선은 내전 소용돌이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의 서오릉. 정면의 능은 조선 19대 왕인 숙종과 그의 제1 계비 인현왕후를 합장한 명릉이다.
숙종은 폐비를 복위시켜 민심을 얻고자 했다. 그냥 궁에 데려와서는 티가 안 난다. 기왕이면 모양 좋게 꽃가마에 태워야 한다. 감동적인 드라마가 필수다. 임금과 폐비는 극진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숙종실록]에 실려 있다. 중간에 감질나는 ‘밀당’도 있고, 거의 연애편지를 방불케 한다.

“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 오듯 눈물을 흘리니 어찌 다시 만날 날이 없겠는가?”(숙종의 편지) “첩의 죄는 죽어 마땅한데 목숨을 보전한 것은 성은에서 나왔습니다. 천만뜻밖에 옥찰이 내려지니 감격의 눈물만 흐를 뿐입니다.”(폐비의 답장) “답장을 읽으니 만나서 이야기한 것 같구려. 열 번이나 펴보는데도 매번 눈물이 납니다. 옷과 가마를 보낼 테니 이제 돌아오시오.”(숙종의 답장) “옷과 가마가 다분수에 넘쳐 감당할 수 없습니다. 도로 거두시면 마음이 편할 듯합니다.”(폐비의 사양 편지) “또 번거롭게 하는구려. 지나치게 사양 말고 오늘 들어와야 하오. 몇 글자라도 회답해주오.”(숙종의 독촉 편지)

1694년 4월 12일 숙종은 인현왕후를 서궁 경복당으로 맞아들이고 장옥정은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인현왕후는 저간의 마음고생 때문인지 종기로 고생하다가 1701년 세상을 떠났다. 세자의 생모 희빈이 복위할 것이라는 소문이 궁에 돌았다. 이때 숙빈 최씨의 고변이 나왔다. 희빈이 저주굿을 벌여 중전을 해쳤다는 것이다. 장옥정이 받은 것은 오매불망 기다리던 복위 교서가 아니라 한때 사랑한 남자가 보낸 사약이었다.

숙종이 장희빈에게 붙인 죄목이다. 왕은 한때 사랑한 여자를 희생양 삼아 본부인과 첩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자 했다. 후궁의 왕비 책봉도 금지했다. 궁녀의 사랑은 그렇게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권력은 늘 사랑을 배반하고 아프게 했다.

장옥정의 죽음과 함께 남인도 몰락했다. 피 튀기는 당쟁의 주역은 서인 내 노론과 소론으로 바뀌었다. 두 붕당은 왕위 계승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소론은 장희빈이 낳은 세자를 후원했고, 노론은 최숙빈 소생의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밀었다.

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 이윤이 즉위했다. 그가 바로 조선 제20대 왕 경종이다. 적장자의 적장자의 적장자 임금이었다. 숙종의 뜻대로 왕권이 강화됐을까? 경종은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조선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203호 (2022.0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