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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 (72)]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 하서(河西) 김인후 

시대 바로 이끄는 ‘지식인의 지조’ 보여주다 

중종에게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 등 사림파 명예회복 직간
제자 인종은 신원에 큰 역할… 송시열 “도학·절의·문장 겸비”


▎하서의 13세손인 김성수 도유사가 필암서원 강당인 청절당 앞에 섰다. / 사진:송의호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두고 조야(朝野) 사림(士林)은 원통하고 억울해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심을 개진해 죄가 없음을 드러나게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전하의 의심을 풀어 드리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천(九泉)을 떠도는 신하의 충분(忠憤)을 씻지 못했습니다. 간혹 바른말 하는 사람이 나오면 의론하는 자들은 소학(小學)의 무리로 배척하고 있으니, 선비의 풍습이 바르지 못함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1543년(중종 38) 세자 거처인 동궁에 불이 나자 종6품 홍문관 부수찬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금기나 다름없는 주제를 끄집어낸 것이다. 기묘사화는 중종과 훈구 세력이 반정 이후 급진 개혁을 이끈 조광조 등 신진사류를 전격 숙청한 사건이다. 이날 경연 석상에 상소한 부수찬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선생이다. 동궁 화재 같은 변고가 더는 일어나지 않도록 기묘사화로 억울하게 희생된 명현을 이제는 신원(伸冤, 원한을 풀어줌) 해야 한다는 조정 내부의 첫 직언이었다.

1월 18일 선생의 흔적을 찾아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서원(筆巖書院)을 방문했다. 하서가 모셔진 곳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9곳 중 하나다. 문루인 확연루(廓然樓)를 지나 서원 강당인 청절당(淸節堂)에서 김성수 도유사를 만났다. 그는 서원을 운영하는 실무 책임자이자 하서의 13세손이다. 김 도유사는 서원의 구조적 특성을 먼저 설명했다. “서원은 평지에 자리한 정남향입니다. 그런데도 확연루·청절당 등이 남쪽은 닫혀 있고 북쪽이 열려 있어요.” 즉 청절당은 서쪽 문으로 들어가 돌아서야 오를 수 있는 구조다. 서원이 남쪽 아닌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중종은 김인후의 상소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인후가 동궁 화재에 예민하게 대응한 것은 그가 세자(후일 인종)의 스승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1543년 하서는 홍문관 박사로 시강원(侍講院) 설서(說書)를 겸하며 세자의 지도 임무를 맡아 한 달에 열흘씩 궁궐에 머물렀다. 세자는 승정원 숙직실로 가끔 김인후를 찾아 질문하는 등 특히 그를 믿고 따르며 [주자대전] 한 질을 하사할 정도였다.

두 사람의 마음은 묵죽 그림으로 발전했다. 김 도유사가 두루마리를 펼쳐 서화의 복제본을 벽에 건 뒤 말했다. “인종이 세자 시절 대나무를 그린 뒤 스승에게 화제(畫題)를 써달라고 합니다.” 대나무 옆으로 바위가 있는 그림 한쪽에 절의를 다지는 김인후의 시가 적혀 있다. ‘뿌리·가지·마디·잎이 모두 정미(精微)하고/ 석우(石友) 정신이 그 안에 들어 있네/ 임금의 조화를 바라는 마음 비로소 깨달으니/ 천지를 아우르는 뜻 어길 수 없어라.’ 흔치 않은 군신 합작 서화가 완성되자 세자는 그것을 김인후에게 하사한다.

인종 승하 소식 접한 뒤 벼슬 버리고 낙향


청절당을 나왔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손은 시리고 경내는 내린 눈이 얼어붙어 있다. 청절당 맞은편에 처마 공포(栱包)를 용머리로 장식한 작은 건물이 보인다. 필암서원이 자랑하는 경장각(敬藏閣)이다. 인종이 세자 시절 김인후에게 내린 묵죽도와 묵죽도 목판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경장각 초서 편액은 김인후의 문묘 종사를 허락한 정조 임금이 썼다. 묵죽도 목판 3점은 2006년 도난당했다가 지난해 회수돼 재판 중이다.

하서는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휴가를 얻어 귀향한다. 그러나 진언이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세채는 훗날 김인후의 행장(行狀)에 그 일을 이렇게 평가했다. “중종은 이로부터 정암(조광조) 등 제현(諸賢)의 원통함을 알고 자못 뉘우치는 뜻을 보였다. 이후 신원을 청하는 자가 많았으니 이는 선생 덕분이었다.” 김인후는 그 뒤 부모가 연로하다며 사직을 거듭 요청해 고향 가까운 곡성의 옥과 현감에 임명된다. 이듬해 중종이 승하한다. 드디어 세자가 왕위에 올랐다. 인종이다. 1545년(인종 1) 봄 명나라 사신 장승헌이 오자 하서는 전례문을 전담하는 제술관(製述官)으로 부름을 받는다. 조정에 돌아온 것이다. 하서는 환후가 잦은 인종의 약 시중을 자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임지인 옥과로 돌아왔다. 하서는 정작 임금이 된 인종을 곁에서 보필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그해 7월 옥과현에서 인종이 승하했다는 부음을 접한다. 그는 비통해서 혼절한 뒤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 무렵 왕실은 외척인 윤임과 윤원형이 대윤과 소윤으로 갈라지고 권력 다툼이 치열해진다. 당쟁의 시작이다. 중종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으면서 왕위 승계를 둘러싼 다툼은 을사사화의 빌미가 된다.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어린 명종이 왕위를 이으면서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에 나선다. 이를 계기로 윤임이 이끄는 대윤은 일거에 쇠락하고 윤원형의 소윤이 세력을 얻으면서 반대 세력 척결이 자행된다.

인종 승하일마다 통곡, 죽음에 의문 제기


▎인종이 그림을 그리고 김인후가 화제(畫題)를 쓴 묵죽도. / 사진:국립광주박물관
필암서원으로 돌아간다. 경장각 옆 동쪽에는 ‘계생비(繫牲碑)’가 세워져 있다. 희생을 매어 두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서원이 춘추 향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할 가축을 매어 놓고 수태 여부 등 하자가 없는지 사흘간 살피는 용도다. 또 희생을 위로하는 비이기도 하다. 김 도유사는 “호남 선비의 생명 중시 사상이 담긴 비석”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서원의 맨 뒤에는 제향 공간인 하서의 위패가 모셔진 우동사(祐東祠)가 있었다. 우동사 오른쪽 벽에는 하서의 제자이자 둘째 사위인 양자징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필암서원을 나와 맥동으로 이동했다. 맥동으로 들어서는 도로변 산기슭에 ‘筆巖(필암)’이라 새긴 작은 바위가 보였다. 이름 그대로 붓 모양을 닮았다. 풍수지리학에서는 터를 잡은 곳에 붓 모양의 산(문필봉文筆峯)이나 바위가 있으면 대학자가 난다고 말한다. 이 마을은 필암과 인연이 있는 대학자를 김인후로 보고 있다. 필암서원 이름도 이 붓 바위에서 연유한다.

더 들어가니 산자락에 백화정(白花亭)이 있다. 표석에는 ‘1552년 세워진 하서의 외헌(外軒)이자 태어난 곳’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곳은 김인후가 순창에서 돌아와 10년 동안 학문에 전력한 공간이기도 하다. 하서는 또 여기서 일재 이항, 소재 노수신, 고봉 기대승과 더불어 강론하고 질정하며 도학(道學)을 집약했다. 김 도유사가 백화정 앞에서 건너편 산을 가리켰다. 알처럼 생겨 ‘난산(卵山)’이라 이름 붙여진 봉긋한 작은 산이다.

김인후는 인종이 승하하고 낙향한 뒤 매년 7월 1일이면 집 남쪽 난산으로 들어가 통곡하며 밤을 지새우고 내려왔다. 지금은 그 자리에 통곡대라는 단이 만들어져 있다. 국립광주박물관이 펴낸 <하서 김인후와 필암서원>에는 ‘하서 연보 24년 을사조’의 숨은 통곡 사연이 적혀 있다. “문정왕후가 윤원형과 더불어 인종 살해를 도모했는데, 7월 1일 음식을 드신 후 바로 크게 아팠다. 강공망이 그 음식을 맡아보며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먼저 마셔보지 못한 것이 한이다’ 하였다. 권벌은 ‘대비가 차마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김인후의) 벗이라 했다.”

이른바 인종 독살설이다. 김인후는 병사(病死)로 공식화한 인종 승하에 의문을 제기하며, 자신이 약을 쓰는 일에 참여하지 못하고 임금의 거처를 옮기지 못한 걸 통탄한 것이다. 연보는 집안에 몰래 전해졌다.

생가인 백화정을 지나 더 들어가면 김인후 신도비가 나온다. 신도비는 나란히 두 개가 세워져 있다. 그중 오른쪽이 처음 세워진 신도비며, 왼쪽 것은 글자가 마모돼 후손 중 재력가가 근래 다시 세웠다고 한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우암은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모두 갖춘 하서 김 선생을 태어나게 했다”고 썼다. 신도비 뒤로 원당산 중턱에 묘소가 보인다. 서쪽 능선 아래 재실에서 대나무 숲길을 따라 묘소로 올라갔다. ‘문정공 하서김선생지묘’ 앞에 예를 표했다.

김인후는 1519년(중종 14) 10세에 전라도 관찰사 김안국에게서 [소학]을 배웠다. 13세엔 [시경]에 매달려 내리 1000번을 읽는 등 17세까지 송순과 박상 문하를 출입하며 사서오경과 제자백가 등을 섭렵했다. 그는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해 퇴계 이황 등과 교유한다. 당시는 기묘사화를 겪은 지 오래지 않아 선비들 풍습이 야박했는데 김인후는 홀로 퇴계와 서로 뜻이 맞아 학문을 강론하고 연마했다. 퇴계는 “평생 함께 교유한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며 돈독한 우의를 표현했다. 그는 성균관 시절 돌림병에 걸려 생명이 위급해진 때도 있었으나 관원 유희춘의 도움으로 회생하기도 했다. 김인후는 뒷날 유희춘이 유배를 떠나자 의지할 곳 없던 그의 어린 아들을 사위로 맞아들일 만큼 의리가 남달랐다.

퇴계와 뜻이 맞아 교유


▎김인후가 태어나고 도학을 집약한 백화정. / 사진:송의호
1540년(중종 35) 그는 별시 문과 병과로 급제해 권지승문원 부정자에 선임된다. 관직으로 본격 진출한 것이다. 이듬해 4월 사가독서에 뽑혀 퇴계 등 12명과 계를 만들고 홍문관 정자·저작을 역임한다. 1543년 마침내 세자 시강원 설서로 앞에서 본 것처럼 세자 시절 인종과 가까워졌다. 김인후는 인종 승하 이후 을사사화가 일어나 많은 동지를 잃게 되자 병을 이유로 낙향했다. 1548년 그는 어버이를 모시고 순창 점암촌에 우거하며 슬픔으로 술과 시에 젖었다. <명종실록> 졸기(卒記)에는 “술과 시를 좋아했고 마음이 관대하여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행장에는 “매양 술이 적당하면 호기가 비로소 발하여 옆 사람을 감동시켰는데 다만 정신이 어지러움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1549년 그는 부친상을 당하고 몸을 가누지 못했으며 빈소와 장례, 제사에 정성과 예를 다했다. 1551년에는 다시 모친이 별세해 여묘를 지키는 동안 문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그는 이후 성균관 전적, 홍문관 교리, 성균관 직강 등 요직에 제수되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김인후는 홍문관 교리를 사양하는 전(箋)에서 “일찍이 논사(論思)의 직분을 다하지 못해 경연에서 식은땀을 흘렸으며, 보양(輔養)을 올바로 하지 못해 시강원에서 부끄러웠다”며 “병든 몸이 감당하기 어려움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향에서 목숨을 마치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한다. 이후 그는 고향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1549년 하서는 [주자대전]을 읽고 [대학강의발]을 지었으며 1556년엔 서경덕의 [독주역시(讀周易試)]를 읽고 그의 성리학을 비판한다. 다음 해는 주돈신의 [태극도설]과 장횡거의 [서명(西銘)] 등을 읽고 자신의 연구를 종합해 [주역 관상편]과 [서명사천도]를 지었으나 소실됐다. 1558년(명종 13) 하서는 고봉 기대승과 함께 [태극도설]을 토론하고 이듬해 일재 이항에게 글을 보내 그의 ‘태극음양일물설’을 논박한다. 또 고봉과 퇴계의 사단칠정 논쟁에 대하여 정밀한 논리로 고봉의 주정설(主情說, 사단칠정이 모두 정) 형성에 깊은 영향을 준다.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 하서와 고봉은 어떤 관계일까. 나이는 하서가 17년 위로, 고봉의 딸이 하서의 손자며느리가 됐다. 그러나 학문은 스승과 제자 관계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하서의 제자로는 정철·변성온·기효간·조희문·오건 등을 든다. 김인후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 등에도 정통했다. 또 시와 시조도 일가를 이루었다. 남긴 시만 1600여 수에 이른다. 초학자에게 한시를 가르치기 위해 칠언고시 연구(聯句) 100개를 뽑아 훈민정음 창제 100년 뒤 한글로 해석을 붙인 [백련초해(百聯抄解)]를 저술하기도 했다.

“을사년 이후 관작은 쓰지 말라”


▎김인후가 칠언고시 연구(聯句) 100개를 뽑아 한글로 해석을 붙인 [백련초해] 목판. / 사진:국립광주박물관
김인후는 1560년(명종 15) 정월 “내일은 보름이니 정성 들여 생수를 준비해 사당에 행전케 하라”며 의관을 단정히 하고 제사를 모시면서 자녀에게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 관작은 쓰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이튿날 가족과 제자,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은 명종이 내린 관직명은 위패에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종가는 정유재란 당시 왜적의 손에 의해 불탔고 이후 지켜지지 못했다고 한다.

김인후는 홍문관 부수찬 시절 중종에게 “자고로 정치를 잘한 임금은 모두 어진 인재를 가까이하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라고 직언했다. 지도층과 선비가 바로 서야 인륜을 밝히고 풍속을 아름답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인종은 왕으로 있던 짧은 기간 성리학 숭상과 기묘사화로 희생된 사림파의 명예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조광조와 김정, 기준 등의 복직이 이뤄진 데는 인종의 역할이 컸다. 지식인의 지조는 시대를 바르게 이끄는 힘이다.

[박스기사] 호남 성리학 전파에 기여한 김인후 | 왜란·호란 거치며 호국과 충절 드러낸 호남 학맥

호남지역은 영남에 비해 성리학맥이 늦게 형성됐다. 조선의 사림파는 성종~연산군 시기 영남에서 기호로 확산됐지만 호남은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다만 호남에는 사림을 선도한 김종직·김굉필·정여창의 사우와 제자, 중종 초년의 기묘 사림과 사장(詞章) 대신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된 현량과 급제자들이 일부 있다.

국립광주박물관이 펴낸 [하서 김인후와 필암서원]에 따르면, 대표적 인물은 김종직의 제자인 이계맹(전주)·최부(나주)와 김굉필의 제자인 이적·최충성(광주)·윤신·유계린(해남)·맹권 등이다. 여기서 유계린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유희춘의 아버지이자 최부의 사위이다. 또 기묘사화에 연루된 최산두(광양)·윤구(해남)·유성춘(유희춘의 형, 해남)·안처순(남원)·양팽손(능주)·박상(광주)·고운·이계맹 등과 현량과 급제자 28명 중 방귀온(나주) 등이 있다. 이러한 분포는 당시 전국을 놓고 보면 미미한 수준이다.

호남에 성리학이 널리 보급되고 사림파가 확대되기 시작한 시점은 중종 치세의 중기 이후다. 최산두·박상·안처순 등 기묘 사림은 이 무렵 고향에 돌아와 제자를 기르고 성리학을 보급했다. 김인후는 이 시기 그들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이후 기대승·이항·유희춘과 함께 호남 성리학을 사실상 형성한다. 김인후는 이후 조선 성리학의 정착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김인후와 교유한 인물 중 기대승·이항·양산보·유희춘 등은 모두 사돈사이며, 최산두·박상·송순 등과는 사제 사이다. 호남의 성리학은 이항·기대승·송흠·박상·김인후·유희춘 등이 전수해 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호남의 학맥은 친족적 상호관계 속에서 사제와 동우(同友)가 됐다.

호남 학맥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호국과 충절을 드러낸다. 이항의 제자 김천일은 고경명과 함께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성혼의 제자 김덕령은 금산에서 왜군과 장렬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203호 (202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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