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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 (12)] 인류 최초의 평화 조약 새겨진 카데시의 석판 

패자 없는 위대한 평화, 불멸의 약속으로 남다 

3300년 전 카데시에서 격돌한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평화 선언
끝까지 약속 지킨 인류의 모범으로 남아 뉴욕 유엔 본부 장식


▎기원전 1274년 시리아 중부의 카데시에서 람세스가 이끄는 이집트군과 철기를 지닌 히타이트가 격돌했다. 양쪽은 전쟁이 끝난 뒤 서로를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한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을 맺었다. 조약을 새긴 점토판은 사본으로 만들어져 뉴욕 유엔본부에 걸려 있다. / 사진:유민호
'5000년 역사 1000번의 외침(外侵)’.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한반도 역사의 궤적을 한마디로 압축한 말이다. ‘디지털 숫자에 근거한’ 객관성을 띤 표현으로 느껴진다. 평균 5년에 한 번씩 외침을 입은 셈이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로, 수많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뿌리를 굳건히 지켜온 ‘품격의 나라’라는 자긍심이 투영돼 있다. 침략만 받았지, 남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피해자 논리도 ‘1000번 외침’이란 표현에 드리워져 있다.

‘1000번 외침’은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 말일까. 외침의 개념에서부터 규모, 외침의 대상을 입은 구체적 피해 상황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대략 100번 정도의 외침은 한국인 모두가 인정하는 역사 속 사건에 해당할 듯하다. 그러나 500번 1000번으로 넘어가면 ‘그게 무슨 외침?’이라고 여길 사건들이 넘치리라고 확신한다. 국경과 민족 개념이 모호하던 시대에 이뤄진 ‘수십명 단위 절도단’도 외침이란 거창한 표현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반도는 다른 나라들이 눈독 들일 정도의, 금으로 도배한 전설이나 신화와 무관한 곳이다. 대륙과 해양이 교차하는 반도일 뿐, 지구 위 수많은 땅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 평범한 곳이 다른 곳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은 침략을 당했다는 식의 발상 자체가 이상하다.

한반도가 외부 침략으로 고생했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다. 문제는 엄청난 과장이다. 크고 많으면 이기는, 이른바 크기·높이·길이·넓이로 승부를 보는 ‘만리장성 세계관’과 맞닿는 점이 불편할 뿐이다. 5000년에 이른다는 한반도 나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앞뒤가 안 맞는, 엄청 늘려진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333년 시작된 단군조선이 출발점이지만, 700년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더 첨가해 5000년이 된 셈이다. 문제는 단군조선 이후 1000년간 지속했다는 기자조선이다. 학계에서는 실체조차 부정 시 되는 수수께끼의 왕조다. 단군은 있지만, 기자는 없는 뻥 뚫린 역사가 5000이란 숫자에 드리워져 있다.

개인적 판단이지만, 한반도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삼국시대가 시작된 기원전 1세기를 기점으로 삼을 수 있을 듯하다. 유물·유적·기록도 있다. 무리해서 5000년으로 늘리는 과정에서 엇박자가 난다. 삼국시대 이래 2000년 역사가 한반도의 어제라고 말한다 해서 부끄럽거나 손해 볼 것도 없다. 21세기 세계 최고 문명국으로 대우받는 북유럽의 경우 8세기 이후 바이킹 역사가 전부다. 불과 1200여 년 역사가 지구 전체가 꿈꾸는 이상적인 선진국의 어제다. 역사가 길다고 해서 자랑스럽고, 짧다고 해서 미개하게 보는 만리장성 세계관 자체가 열등감의 소산이 아닐까.

여담이지만, 만리장성은 외침 방어용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내부 구성원을 만리장성 밖으로 못 나가게 만드는 ‘쇄국의 상징’이란 점이 더 주목할 부분이다. 몽골 대제국이 그러했듯이, 아무리 길고 높은 만리장성도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공략할 수 있다. 내부 구성원은 다르다. 만리장성 밖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터부시한다. 2022년 시진핑 체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만리장성의 진짜 역할은 외부 침략이 아니라 내부 통제에 있다.

‘5000년 역사’에 드리워진 ‘만리장성 세계관’

‘1000번 외침’이란 말은 진짜 핵심이 빠진 공허한 시구(詩句)로 와 닿는다. 중요한 것은 ‘1000번 외침’이 아닌 ‘외세의 침략 이후 얻은 교훈이 무엇인가?’라는 부분에 있다. 외침을 어떤 환경에서 당했고, 외침 도중과 이후에 어떤 시련과 준비를 했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논리다. 그러나 그런 얘기를 접해본 적이 없다. 가십성 에피소드는 넘친다. 전체를 관통하는 교훈으로서의 역사는 거의 없다.

유럽·미국·일본의 텔레비전을 보면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가 넘친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 얘기도 많지만, 중세 심지어 고대 전쟁사에 관한 기록물이 거의 매일 어딘가에서 방영된다. 한국의 경우 전쟁 다큐멘터리도 드물지만, 있다 해도 흑백논리에 입각한 선악 우위론이 주류다. ‘남의 나라를 침략한 못된 왜구’라는 식이다. 정작 왜구가 가졌던 무기체계와 보급품에 관한 객관적인 분석 비교는 드물다. 전쟁을 선악으로 나눈 뒤, 선의 정당성만 강조하는 ‘주자학적 전쟁관’이 대세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条約)을 통해 중국이 영국에 무릎 꿇고, 1853년 미국 페리의 흑선(黒船)이 일본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던 시기 조선은 무엇을 했을까? 당시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 위정자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불쌍한 서방의 야만인이 너무도 애원하기 때문에 중국과의 교류를 허락했다는 ‘대륙의 허세’에 앞장서 맞장구친 나라가 조선이었다. 일본의 경우 야만인 서방보다 더 미개하기 때문에, 페리의 흑선에 의해 멸망한다 해도 야만인끼리 싸움에 불과하다며 눈을 감았다.

뉴욕 유엔본부는 세계 문화 예술품의 집산지이기도 하다. 전 세계에서 날아온 수많은 전시물을 유엔본부 안팎에서 만날 수 있다. 200여 나라가 세계 평화를 염원하면서 나름의 귀중하고 역사적인 물건이나 작품을 유엔에 기증한다. 유엔본부 내 복도는 그런 평화의 선물들을 위한 전시 공간으로 활용된다. 유엔에서 최고 실권을 쥔 공간이라고나 할까? 3년 전 유엔 안보리 회의실에 들른 적이 있다. 북핵 관련 결의안을 만들 때 자주 비추지만, 회의실 한복판에 노르웨이 화가가 그린 초대형 벽화가 걸려 있다. 평화를 주제로 한 벽화로, 노르웨이 출신 초대 유엔 사무총장 ‘트뤼그베 리(Trygve Lie)’의 권위 아래 영구 전시되고 있다. 안보리 회의실 전시물 중 필자가 주목한 것은 바깥 복도에 걸린 작품이다. 가로세로 대략 1m 정도 크기의, 초대형 점토 태블릿 하나가 눈에 띈다. 카데시(Kadesh) 평화조약의 복사판으로 1970년 터키에서 보내온 귀중한 유물이다. 인류가 최초로 선보인 평화조약의 내용이 담긴 점토판이다. 평화를 목적으로 세워진 유엔의 이념과 이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류의 보물인 셈이다.

유엔 본부에 서 있는 인류 최초의 평화 선언


▎중국 지린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벽에 그려진 수렵도. 오른쪽 위에 몸과 고개를 뒤로 돌려 사슴에게 화살을 겨누는 무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런 활 쏘는 방식은 2세기 페르시아 지역에서 유래된 ‘파티안 조준법’으로 불린다.
카데시 전투는 기원전 1274년 5월,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Ramesses) 2세와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Muwatalli) 2세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무려 3300여년 전 역사지만, 당시 람세스가 탔던 말(馬) 이름이 무엇인지, 히타이트 군인들이 어디에서 야영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이 소상하게 남아있다. 전투 당시 양국이 각각 3만 정도의 보병과 3000대 정도의 마차군단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카데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마차를 통한 대규모 기동작전이 연출된 전투다. 서로 병력을 전부 집결시킨 뒤 평야에서 일시에 공격하는 방식도 카데시 전투에서 전개됐다. 마차는 21세기 최첨단 탱크에 비견될만한, 기원전 13세기 당대 최신 병기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는 2인승 가벼운 마차를 핵심부대로, 히타이트는 바퀴가 큰 3인승 대형 마차를 전투의 주역으로 활용했다. 마차 한 대를 2마리 말이 끌었다. 1명은 말을 조종하고, 나머지는 활이나 창으로 공격하는 식이다.

흥미롭게도 마차군단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알렉산더는 마차군단이 움푹 팬빈 공간을 주로 공략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동방원정 당시 페르시아군은 마차군단을 앞세워 알렉산더를 공격했다. 알렉산더는 마차군단이 달려들면 일부러 길을 열어 움푹 팬 ‘ㄷ’ 진형 안으로 몰았다. 3면으로 포위된 마차군단은 알렉산더 군대가 자랑하는 길이 5m에 달하는 긴 창에 의해 살해된다. 이후 마차군단의 위력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대신 1인용 기마 화살부대가 최정예군으로 활용된다. 유목민 전투 방식으로 15세기 대포가 본격 활용하기 전까지 첨단 병기로 자리 잡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중국 지안현에서 발견된 고구려 무용총(舞踊塚)이야말로 한반도 최고 수준의 예술 현장이라 믿고 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수렵도가 압권이다. 폼페이 벽화 이상의 화려한 색상과 말을 타고 사냥하는 생동감이 벽화 전체에 넘실댄다. 반도 안에서 주자학 논쟁으로 소일했던 쇄국의 어제라고 믿기 어려운 살아있는 역사다.

수렵화에서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은 이른바 ‘파티안 조준(Parthian shot)’에 대한 묘사다. 이란의 조상 격인 2세기 페르시아권 나라인 파티아에서 유행한 기술이다. 기마 상태에서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전투법이다. 말을 타고 도망은 가지만, 뒤에 쫓아오는 적에게 연거푸 화살을 쏘는 기상천외한 전투 스타일이다. 기마 상태에서 화살 공격도 어렵지만, 목과 몸을 뒤로 젖힌 채 쏘는 화살은 거의 서커스 수준의 고난도 기술이다. 2세기 로마는 페르시아 공격 중 파티안의 화살 공격에 속수무책 무너진다. 로마는 기마 상태에서 목과 몸을 뒤로 젖힌 채 화살로 공격한다는 발상 자체가 없었다. 고구려 벽화 속 ‘파티안 조준’ 수렵도를 보면, 고구려가 당대 최고 수준의 최신 전술을 활용한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데시 두고 대결한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화해

카데시 전투의 발단은 전략적 요충지를 둘러싼 당대 패권국가 사이의 경쟁에 있다. 카데시는 현재의 시리아 중부 카티나 호수(Qattinah Lake) 주변을 지칭한다.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지중해 아나톨리아로 들어가는 입구다. 기원전 13세기 당시 카데시는 히타이트 세력권에 있었다. 이집트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북부에 정주해 사는 나라다. 나일강 하나만으로도 파라오의 권위를 충분히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육지를 따라 지중해 북부로 올라가는 카데시 지역까지 세력을 넓히려 한다는 생각 자체가 의문이다.

그 배경에는 파라오 람세스의 개인적 레거시(Legacy) 욕구가 있다. 이집트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람세스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 것이다. 무려 90살까지 살았던 인물로, 재임 기간도 67년에 이르는 이집트 역사상 최장(最長)·최고(最古)의 장수 파라오다. 초대형 건축물이나 조형물에 관심을 가진 인물로, 이집트 전역에 흩어진 수많은 유적 유물의 상당수가 람세스 재임 기간에 창조된 것이다.

카데시 전투는 파라오 5년 차에 들어섰던 29살 때 벌어진다. 파라오로서 뭔가를 보여주며 절대 권위를 쌓아 나가야 할 시기다. 카데시는 아버지인 파라오 세티(Seti) 1세 때도 공격에 나섰다가 실패한 땅이다. 아버지 원한도 풀 겸 대규모 마차 군단과 함께 카데시 출병에 나선 것이다. 람세스는 카데시에서의 무용담을 이집트 곳곳에 남긴다. 이집트 벽화를 보면 카데시가 29살 파라오의 독무대로 느껴진다. 물론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입장에서는 정반대다.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는 당시 시리아인들이 특화했던 점토판 기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히타이트 독자의 언어를 통해 무와탈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당대 역사를 아주 구체적으로 남겼다. 터키가 유엔 안보리에 기증한 카데시 점토판은 무와탈리가 남긴 당대 승리의 징표였다고 볼 수 있다.

카데시 전투는 밀고 밀리는 상황 끝에 사실상 무승부로 끝난다. 전투에서는 이집트가 이겼지만, 카데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은 히타이트에 그대로 남게 된다. 평화조약은 전쟁이 끝난 뒤 곧바로 체결된다. 다시는 서로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서로에게 문서로 남긴다. 당시의 평화조약 내용은 히타이트 점토판은 물론 현재 이집트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크게 4가지 사안으로 나뉘어 공표됐다.

1. 양국은 평화를 지속한다. 아들과 손자 이후 세대 모두에게 평화조약은 적용된다.
2. 서로에게 공격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
3. 상대국의 정치범과 범법자를 만날 경우 즉각 송환에 나선다.
4. 자국 내에서 발생한 반란범은 서로 도와서 근절한다.


평화조약을 보면 양국이 마치 동맹국이 된 듯한 상태로 변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국 내 반란범을 합동 축출한다는 것은 국내 정치문제까지 서로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관계라 볼 수 있다.

카데시 평화조약은 21세기에도 불가능한, 국제정치의 모범답안이자 이상적인 모델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위업이지만, 카데시 평화조약은 크게 볼 때 2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역사를 선보인다. 첫째,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을 임시방편이 아닌 국가·개인의 굳건한 약속으로 발전시켜나갔다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평화조약은 지키기보다 파기나 무효로 돌변하기 십상이다. 조약을 통해 내가 유리해지면 약속을 지킬 수도 있다. 그러나 우발적 피해를 보게 되면 감정 통제가 어려워진다. 지도부가 휘하 군인 개개인을 모두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포로 송환과 관련해 히타이트는 1000명을 이집트는 10명을 되돌려 보낼 경우 과연 평화조약이 지속할 수 있을까? 송환된 포로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 빠져 있다면 어떨까?

주기적으로 이뤄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조약은 좋은 본보기다. 한 발의 총성으로도 약속 전부가 파기될 수 있다. 놀랍게도 카데시 전투 이후 이집트와 무와탈리 사이의 평화조약은 무려 40여 년이나 이어진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행적이다. 무와탈리가 죽으면서 후계자인 하투실리(Hattushili) 3세가 등장한 뒤에도 평화조약은 지속한다. 조약은 히타이트가 내부 분열로 망하면서 유명무실해질 때까지 지속한다. 결과적으로 카데시 평화조약은 우주 전체가 부러워할 정도로 모범적인 모델로 남게 된다. 엄밀히 말해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는, 영원한 약속으로서의 평화조약이 된다.

히타이트 멸망 전까지 40여년간 평화 유지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전투를 묘사한 그림. 병거를 탄 람세스가 적들을 물리치는 모습을 과장되게 크게 표현했다.
둘째로 꼽을 위대한 위업은 신권(神権) 정치를 넘어선 세속정치의 힘이다. 고대 정치는 인간만이 아닌 신들 사이의 패권경쟁이기도 했다. 전쟁에 이긴다는 것은 각자의 신이 승리하는 것으로 풀이됐다. 국가 위신과 명예 차원이 아니라, 신의 영광을 실현하는 증거로서의 정치이자 전쟁이다. 전쟁에 이기지 못할 경우 왕조차 신관에 의해 쫓겨날 수 있다. 우연이겠지만, 카데시 전투는 호메로스(Homer)의 트로이 전쟁 발발 시기와 겹쳐진다. 트로이 전쟁은 대략 기원전 13세기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중해 동쪽에서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에게해 동쪽에서는 그리스와 트로이 전쟁이 동시에 벌어진 셈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Iliad)]에 관심이 있다면, 트로이 전쟁의 모든 것이 올림퍼스의 신들과 직접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른바 신의 대리전이 트로이 전쟁이다.

같은 시기였기에 비슷한 세계관이 지배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집트와 히타이트 전쟁에서는 신의 그림자가 별로 강하지 않다. 신의 영광이나 저주를 떠올리며 전쟁에 임하는 그리스, 트로이 용사들의 세계관이 카데시 전투 현장에서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신의 눈치를 안 보면서 임의로 결정짓는 식의 정치이자 전쟁이다. 신은 양보하지 않는다. 무조건 다른 신을 압도하고 절대적 파워를 갖는 것이 고대종교의 기본이다. 따라서 적당한 협상이나 중재안은 신의 의미와 위치를 애매하게 만들 불경스러운 행위로 통했다. 21세기 이슬람권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고대의 경우 죽더라도 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자는 식의 생각이 한층 더 강했다. 신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화나게 할 경우 어차피 벌을 받고 죽게 된다고 믿었다.

그리스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적당한 선에서 트로이와 평화조약을 맺고 귀환했다고 가정해보자. 제우스와 아테네의 명예와 영광을 모독한 폭군으로 내몰리면서 신의 이름을 앞세운 반란군에 의해 곧바로 살해됐을지 모르겠다. 평화조약은 고대 정치 역사상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는 전대미문 외교다. 그러나 평화조약에 임할 당시 이집트와 히타이트 모두 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배려가 거의 없다. 왜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파라오 자신이 신으로 여겨진 이집트 특유의 신권정치와 메소포타미아 신들을 수입한 히타이트 종교관이 배경에 있다고 본다.

이집트는 파라오가 신이기에 신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히타이트는 외부 종교를 수입해 믿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토착 신권 정치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강력한 신권 정치의 이집트와 반대로 세속정치 파워가 남달랐던 히타이트 정치 구도가 낳은 기묘한 결과가 바로 평화조약인 셈이다. 신의 영향력과 무관한, 인간이 자신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창조해낸 위대한 모델이 카데시 평화조약인 것이다.

유럽 도시의 일상적 풍경이지만, 비둘기나 그리스 여신 에이레네(Eirene; 로마명 팍스, Pax)를 내세운 조각이나 기념관이 많다. 보통 비둘기는 올리브 가지를 물고 있고, 여신은 횃불이나 과일로 채워진 뿔고둥을 안고 있다. 국기가 장식된 화환·화분·꽃병이 주위를 감싸고 있다. 평화를 테마로 한 공간, 즉 평화 제단에 해당하는 곳이다. ‘전쟁이 아닌 평화를, 죽음이 아닌 관용을, 증오가 아닌 사랑을’ 이란 주제가 평화제단의 공통분모다.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 어디에 가도 평화의 제단을 쉽게 볼 수 있다. 양적으로, 수백 수천 군데에 달할 듯하다.

정치·이념 뺀 자유 정착할 때 진정한 평화 깃들어

한국에도 평화 공원이란 이름의 공간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인터넷에 보면 대략 스무 군데 정도가 있다. 수적으로 볼 때 많다고 볼 수도 적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규모가 엄청나다. 주관적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평화 공원은 평화를 염원하는 공간이란 느낌이 별로 안 든다. 전쟁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일상적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굶주림과 인간성 상실로 점철된 증오의 시간이 얼마나 잔인한지에 대한 기억이 전해지질 않는다.

평화의 개념이 유럽과 전혀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정치적·이념적·추상적·제도적 의미의 평화는 한국에 넘친다. 2022년 한국에서의 평화는 북한과의 화해 정도로 해석되지 않을까? 북한과의 정전·평화 논의에 무심할 경우, 그렇다면 전쟁을 원하느냐며 다그치는 공기도 읽을 수 있다. 유럽에서의 평화는 구체적으로 뭔가를 보여주고 만들어가자는 의미와 무관하다. 상대를 향한 평화가 아니라 1인칭, 나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 밴 평범하고도 소박한 하루의 안식으로서의 평화다.

자유롭게 산책을 하고 원하는 책을 읽을 시간, 점심에 찻집에서 수다를 떨고 저녁에 와인집에서 언성을 높일 자유가 유럽식 평화의 출발점이다. 구체적·실용적·현실적 의미로서의 평화다. 남북 정전협정 같은 뭔가 엄청난 역사를 만들어내는 정치적·이념적·추상적·제도적 평화가 아니다. ‘1000번의 외침’으로 고생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초상화가 왜 이토록 거창할까? 각론은 없고 만리장성 세계관으로 도배한 총론만 득세한다. 북한과 화해가 이뤄진 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평화가 정착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북핵 문제 하나 제대로 언급하기를 꺼리는 상황에서 정전·평화협정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길가는 삼척동자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카데시 평화조약은 4개 항의 내용에서 보듯,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며 현실적이다. 평화조약을 통해 히타이트는 이집트에 철기 기술을 넘기고, 이집트는 히타이트에 풍부한 농산물을 제공하는 무역 파트너로 발전한다. 무려 3300년 전 역사이지만, 패자 없이 모두를 승자로 만든 위대한 인류의 공적(公績)이다. 1000번 외침이 있어도 교훈과 무관한 껍데기 역사로 추락할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외침으로 아무리 고생을 한다 해도 교훈을 얻지 못하면 한층 더 많은 침략을 당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 논리만 되뇌며 준비하지 않는 나라의 운명은 너무도 뻔하다. 그러나 단 한 번 전쟁이라도 후세 모두가 롤모델로 삼을 교훈의 역사를 창조해내는 나라도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유엔 안보리 회의실 앞에 서울발(発) 평화의 선물이 전시되길 기원해 본다. 상상컨대, 제거된 북핵 뇌관이 떠오른다. 2022년 3월 탄생할 새 대통령의 역할이 되겠지만, 카데시 역사에 준하는 새로운 평화의 징표를 창조해내길 기원한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203호 (202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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