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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년 역사’에 드리워진 ‘만리장성 세계관’‘1000번 외침’이란 말은 진짜 핵심이 빠진 공허한 시구(詩句)로 와 닿는다. 중요한 것은 ‘1000번 외침’이 아닌 ‘외세의 침략 이후 얻은 교훈이 무엇인가?’라는 부분에 있다. 외침을 어떤 환경에서 당했고, 외침 도중과 이후에 어떤 시련과 준비를 했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논리다. 그러나 그런 얘기를 접해본 적이 없다. 가십성 에피소드는 넘친다. 전체를 관통하는 교훈으로서의 역사는 거의 없다.유럽·미국·일본의 텔레비전을 보면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가 넘친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 얘기도 많지만, 중세 심지어 고대 전쟁사에 관한 기록물이 거의 매일 어딘가에서 방영된다. 한국의 경우 전쟁 다큐멘터리도 드물지만, 있다 해도 흑백논리에 입각한 선악 우위론이 주류다. ‘남의 나라를 침략한 못된 왜구’라는 식이다. 정작 왜구가 가졌던 무기체계와 보급품에 관한 객관적인 분석 비교는 드물다. 전쟁을 선악으로 나눈 뒤, 선의 정당성만 강조하는 ‘주자학적 전쟁관’이 대세다.1842년 난징조약(南京条約)을 통해 중국이 영국에 무릎 꿇고, 1853년 미국 페리의 흑선(黒船)이 일본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던 시기 조선은 무엇을 했을까? 당시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 위정자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불쌍한 서방의 야만인이 너무도 애원하기 때문에 중국과의 교류를 허락했다는 ‘대륙의 허세’에 앞장서 맞장구친 나라가 조선이었다. 일본의 경우 야만인 서방보다 더 미개하기 때문에, 페리의 흑선에 의해 멸망한다 해도 야만인끼리 싸움에 불과하다며 눈을 감았다.뉴욕 유엔본부는 세계 문화 예술품의 집산지이기도 하다. 전 세계에서 날아온 수많은 전시물을 유엔본부 안팎에서 만날 수 있다. 200여 나라가 세계 평화를 염원하면서 나름의 귀중하고 역사적인 물건이나 작품을 유엔에 기증한다. 유엔본부 내 복도는 그런 평화의 선물들을 위한 전시 공간으로 활용된다. 유엔에서 최고 실권을 쥔 공간이라고나 할까? 3년 전 유엔 안보리 회의실에 들른 적이 있다. 북핵 관련 결의안을 만들 때 자주 비추지만, 회의실 한복판에 노르웨이 화가가 그린 초대형 벽화가 걸려 있다. 평화를 주제로 한 벽화로, 노르웨이 출신 초대 유엔 사무총장 ‘트뤼그베 리(Trygve Lie)’의 권위 아래 영구 전시되고 있다. 안보리 회의실 전시물 중 필자가 주목한 것은 바깥 복도에 걸린 작품이다. 가로세로 대략 1m 정도 크기의, 초대형 점토 태블릿 하나가 눈에 띈다. 카데시(Kadesh) 평화조약의 복사판으로 1970년 터키에서 보내온 귀중한 유물이다. 인류가 최초로 선보인 평화조약의 내용이 담긴 점토판이다. 평화를 목적으로 세워진 유엔의 이념과 이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류의 보물인 셈이다.
유엔 본부에 서 있는 인류 최초의 평화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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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데시 두고 대결한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화해카데시 전투의 발단은 전략적 요충지를 둘러싼 당대 패권국가 사이의 경쟁에 있다. 카데시는 현재의 시리아 중부 카티나 호수(Qattinah Lake) 주변을 지칭한다.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지중해 아나톨리아로 들어가는 입구다. 기원전 13세기 당시 카데시는 히타이트 세력권에 있었다. 이집트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북부에 정주해 사는 나라다. 나일강 하나만으로도 파라오의 권위를 충분히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육지를 따라 지중해 북부로 올라가는 카데시 지역까지 세력을 넓히려 한다는 생각 자체가 의문이다.그 배경에는 파라오 람세스의 개인적 레거시(Legacy) 욕구가 있다. 이집트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람세스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 것이다. 무려 90살까지 살았던 인물로, 재임 기간도 67년에 이르는 이집트 역사상 최장(最長)·최고(最古)의 장수 파라오다. 초대형 건축물이나 조형물에 관심을 가진 인물로, 이집트 전역에 흩어진 수많은 유적 유물의 상당수가 람세스 재임 기간에 창조된 것이다.카데시 전투는 파라오 5년 차에 들어섰던 29살 때 벌어진다. 파라오로서 뭔가를 보여주며 절대 권위를 쌓아 나가야 할 시기다. 카데시는 아버지인 파라오 세티(Seti) 1세 때도 공격에 나섰다가 실패한 땅이다. 아버지 원한도 풀 겸 대규모 마차 군단과 함께 카데시 출병에 나선 것이다. 람세스는 카데시에서의 무용담을 이집트 곳곳에 남긴다. 이집트 벽화를 보면 카데시가 29살 파라오의 독무대로 느껴진다. 물론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입장에서는 정반대다.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는 당시 시리아인들이 특화했던 점토판 기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히타이트 독자의 언어를 통해 무와탈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당대 역사를 아주 구체적으로 남겼다. 터키가 유엔 안보리에 기증한 카데시 점토판은 무와탈리가 남긴 당대 승리의 징표였다고 볼 수 있다.카데시 전투는 밀고 밀리는 상황 끝에 사실상 무승부로 끝난다. 전투에서는 이집트가 이겼지만, 카데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은 히타이트에 그대로 남게 된다. 평화조약은 전쟁이 끝난 뒤 곧바로 체결된다. 다시는 서로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서로에게 문서로 남긴다. 당시의 평화조약 내용은 히타이트 점토판은 물론 현재 이집트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크게 4가지 사안으로 나뉘어 공표됐다.1. 양국은 평화를 지속한다. 아들과 손자 이후 세대 모두에게 평화조약은 적용된다.2. 서로에게 공격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3. 상대국의 정치범과 범법자를 만날 경우 즉각 송환에 나선다.4. 자국 내에서 발생한 반란범은 서로 도와서 근절한다.평화조약을 보면 양국이 마치 동맹국이 된 듯한 상태로 변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국 내 반란범을 합동 축출한다는 것은 국내 정치문제까지 서로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관계라 볼 수 있다.카데시 평화조약은 21세기에도 불가능한, 국제정치의 모범답안이자 이상적인 모델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위업이지만, 카데시 평화조약은 크게 볼 때 2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역사를 선보인다. 첫째,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을 임시방편이 아닌 국가·개인의 굳건한 약속으로 발전시켜나갔다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평화조약은 지키기보다 파기나 무효로 돌변하기 십상이다. 조약을 통해 내가 유리해지면 약속을 지킬 수도 있다. 그러나 우발적 피해를 보게 되면 감정 통제가 어려워진다. 지도부가 휘하 군인 개개인을 모두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포로 송환과 관련해 히타이트는 1000명을 이집트는 10명을 되돌려 보낼 경우 과연 평화조약이 지속할 수 있을까? 송환된 포로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 빠져 있다면 어떨까?주기적으로 이뤄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조약은 좋은 본보기다. 한 발의 총성으로도 약속 전부가 파기될 수 있다. 놀랍게도 카데시 전투 이후 이집트와 무와탈리 사이의 평화조약은 무려 40여 년이나 이어진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행적이다. 무와탈리가 죽으면서 후계자인 하투실리(Hattushili) 3세가 등장한 뒤에도 평화조약은 지속한다. 조약은 히타이트가 내부 분열로 망하면서 유명무실해질 때까지 지속한다. 결과적으로 카데시 평화조약은 우주 전체가 부러워할 정도로 모범적인 모델로 남게 된다. 엄밀히 말해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는, 영원한 약속으로서의 평화조약이 된다.
히타이트 멸망 전까지 40여년간 평화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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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이념 뺀 자유 정착할 때 진정한 평화 깃들어한국에도 평화 공원이란 이름의 공간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인터넷에 보면 대략 스무 군데 정도가 있다. 수적으로 볼 때 많다고 볼 수도 적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규모가 엄청나다. 주관적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평화 공원은 평화를 염원하는 공간이란 느낌이 별로 안 든다. 전쟁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일상적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굶주림과 인간성 상실로 점철된 증오의 시간이 얼마나 잔인한지에 대한 기억이 전해지질 않는다.평화의 개념이 유럽과 전혀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정치적·이념적·추상적·제도적 의미의 평화는 한국에 넘친다. 2022년 한국에서의 평화는 북한과의 화해 정도로 해석되지 않을까? 북한과의 정전·평화 논의에 무심할 경우, 그렇다면 전쟁을 원하느냐며 다그치는 공기도 읽을 수 있다. 유럽에서의 평화는 구체적으로 뭔가를 보여주고 만들어가자는 의미와 무관하다. 상대를 향한 평화가 아니라 1인칭, 나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 밴 평범하고도 소박한 하루의 안식으로서의 평화다.자유롭게 산책을 하고 원하는 책을 읽을 시간, 점심에 찻집에서 수다를 떨고 저녁에 와인집에서 언성을 높일 자유가 유럽식 평화의 출발점이다. 구체적·실용적·현실적 의미로서의 평화다. 남북 정전협정 같은 뭔가 엄청난 역사를 만들어내는 정치적·이념적·추상적·제도적 평화가 아니다. ‘1000번의 외침’으로 고생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초상화가 왜 이토록 거창할까? 각론은 없고 만리장성 세계관으로 도배한 총론만 득세한다. 북한과 화해가 이뤄진 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평화가 정착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북핵 문제 하나 제대로 언급하기를 꺼리는 상황에서 정전·평화협정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길가는 삼척동자에게 물어보길 바란다.카데시 평화조약은 4개 항의 내용에서 보듯,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며 현실적이다. 평화조약을 통해 히타이트는 이집트에 철기 기술을 넘기고, 이집트는 히타이트에 풍부한 농산물을 제공하는 무역 파트너로 발전한다. 무려 3300년 전 역사이지만, 패자 없이 모두를 승자로 만든 위대한 인류의 공적(公績)이다. 1000번 외침이 있어도 교훈과 무관한 껍데기 역사로 추락할 수 있다.역설적이지만, 외침으로 아무리 고생을 한다 해도 교훈을 얻지 못하면 한층 더 많은 침략을 당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 논리만 되뇌며 준비하지 않는 나라의 운명은 너무도 뻔하다. 그러나 단 한 번 전쟁이라도 후세 모두가 롤모델로 삼을 교훈의 역사를 창조해내는 나라도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유엔 안보리 회의실 앞에 서울발(発) 평화의 선물이 전시되길 기원해 본다. 상상컨대, 제거된 북핵 뇌관이 떠오른다. 2022년 3월 탄생할 새 대통령의 역할이 되겠지만, 카데시 역사에 준하는 새로운 평화의 징표를 창조해내길 기원한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