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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중의 뮤지컬 오디세이 (9)] 미국선 컬트 취급 작품, 한국선 대성공 반전 '지킬 앤 하이드' 

흥행 대박 터진 ‘지금 이 순간’ 그 중심엔 조승우가 있었다 

국내 초연 때 ‘티켓 파워’ 신조어 만들며 스타 마케팅 열풍 일으켜
인간 양면성 충격적으로 보여줘, ‘센’ 드라마 선호 한국 정서에 ‘딱’


▎뛰어난 가창력과 연기로 흥행 돌풍을 일으킨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많은 뮤지컬 넘버 가운데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만큼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히트한 곡도 드물다.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하고, 레슬리 브리커스가 노랫말과 극본을 쓴 [지킬 앤 하이드]는 1990년 미국 휴스턴에서 초연됐다. 이 작품은 수정을 거쳐 1997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다. 뮤지컬의 심장부에서 1543회 공연되며 나름의 성공을 거뒀고, 작곡가 와일드혼의 이름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작품의 분위기가 다소 어두워서인지 미국에서는 일종의 컬트(cult) 뮤지컬로 받아들여졌다. 대중화를 이루지는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킬 앤 하이드]와 궁합이 찰떡인 나라는 따로 있었다. 와일드혼도 예기치 못했던 엄청난 성공이 바로 한국에서 잉태됐다.

[지킬 앤 하이드]는 지난 2004년 여름, 오디뮤지컬컴퍼니가 제작해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국내 초연됐다. 그 무렵이 뮤지컬이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검증되지 않은 초연 무대였고, [오페라의 유령]이나 [레미제라블]처럼 화려한 아우라도 없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개막하자마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티켓은 동이 났고, 스태프들은 밀려드는 관객들에게 연신 “줄을 서시오!”를 외쳐야 했다. 무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무엇이 관객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었을까. 이 거대한 흥행 대폭발의 중심에는 작품성에 앞서 타이틀롤을 맡은 배우 조승우가 있었다. ‘태풍의 눈’이었다.

[지킬 앤 하이드]를 처음 봤을 때의 감흥은 지금도 생생하다. 수백 편의 공연을 봤지만, 그때만큼 온몸이 떨리는 전율을 느낀 적이 또 있을까. 배우 조승우가 보여준 지킬과 하이드 덕분이었다. 조승우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1999)으로 대중에 이름을 알렸지만, 김민기 대표가 이끄는 극단 학전의 [지하철 1호선]과 창작 뮤지컬 [카르멘]을 통해 이미 뮤지컬 팬들에게는 인지도가 높은 배우였다. 한창 성장 가도를 달리던 그에게 [지킬 앤 하이드]는 날개를 달아줬다. 주마가편(走馬加鞭 )이었다.

좋은 배우의 첫째 조건은 뭐니뭐니해도 발성이다. 단어의 음가(音價)를 정확하게 짚어야 한다. 음가를 콕 짚어야 대사에 감정이 실리고, 감정이 실려야 연기가 살아난다. 특히 남자 배우의 경우, 발성이 중요하다. 관객들은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목소리만 좋아도 배우로 성공할 수 있음을 그동안 수없이 봐왔다.

사실 우리말은 발음하기 쉽지 않다. 받침이 있어서 그런 듯하다. 그래서 빠르게 대사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다 보면 발음이 뭉개지기 쉽다. 하지만 조승우는 달랐다. 쟁반에 구르는 옥구슬처럼 명료한 발성으로 대사를 소화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지킬과 하이드라는 이중인격을 표현했다. 나비가 공중을 유영(遊泳)하듯 잔잔한 톤으로 시작해 어느 순간, 헐크 같은 괴물로 변해 에너지를 발산했다. 그의 손짓과 동작 하나하나에 관객은 넋을 잃었다.

로맨틱 멜로로 각색된 미스터리 스릴러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매력은 역동성에 있다. 2010년 공연 중 한 장면. / 사진:오디뮤지컬컴퍼니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의 미묘한 변화가 섬세하게 실려 있었다. 관객을 천천히 빨아들여 어느 순간 쥐락펴락한다. 잔잔하던 객석의 물결은 그가 ‘지금 이 순간’을 열창할 때 파도로 변했고, 지킬과 하이드를 숨 가쁘게 오가며 부르는 ‘대결(Confrontation)’에서는 쓰나미가 됐다.

조승우는 굉장한 노력파이기도 하다. [지킬 앤 하이드] 초연을 앞뒀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신춘수 오디뮤지컬컴퍼니 대표가 밤늦게 연습실에 불이 켜져 있어 무슨 일인가 싶어 들어가 봤다. 그랬더니 조승우가 팔뚝에 주사 놓는 장면을 쉼 없이 반복해서 연습하고 있었다. 옷소매를 걷어 올리는 동작, 주사를 주입하는 각도 등을 여러 방향에서 시도해보며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지킬 앤 하이드]를 통한 조승우의 등장은 국내 뮤지컬 분야에 스타 마케팅 열풍을 일으켰다. ‘티켓 파워’란 신조어도 생겼다. “티켓 파워가 있는 배우를 출연시켜야 흥행에 성공한다”는 불문율이 제작자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지킬 앤 하이드]는 조승우를 비롯한 류정한·김소현·김선영·쏘냐 등 낯익은 스타 배우들이 훌륭한 앙상블을 이룬 덕분에 미국에서처럼 컬트가 아닌 대중적인 뮤지컬로 국내에 연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지킬 앤 하이드]의 대박에는 조승우라는 걸출한 배우의 활약 말고도 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배우의 매력 이전에 당연히 텍스트 자체의 힘이 있었다. 그 가운데 원작과는 다른, 등장인물의 재구성은 [지킬 앤 하이드]를 성공시킨 바탕이 됐다.

[지킬 앤 하이드]는 [보물섬]으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원작이다. 원작은 헨리 지킬의 친구인 변호사 어터슨이 내레이터를 맡아 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미스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세기 말 런던. 괴이한 살인사건이 잇달아 벌어지고 시민들은 공포에 떤다. 이 사건을 추적하게 된 어터슨은 하나하나 증거를 찾아낸 끝에 마침내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낸다. 흉악한 살인마는 뜻밖에도 똑똑하고 선량한 의사이자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지킬의 또 다른 모습, 하이드였다는 반전의 구도다.

뮤지컬에서는 지킬(그리고 하이드)을 메인 캐릭터로 끄집어내고 어터슨은 조연으로 설정했다. 여기에 원작에 없는 여성 캐릭터들을 창조했다. 지킬의 약혼녀 엠마, 지킬에게 연민을 품는 술집 아가씨 루시가 그들이다. 엠마는 청순하고 고운 심성을 지닌 양갓집 규수다. 지킬을 향한 변치 않는 사랑과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연구 끝에 선악 분리해내는 시약 만들어


▎영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1931)의 한 장면. 주연 배우는 프레드릭 마치다.
루시는 지킬이 ‘총각 파티’를 하러 간 술집에서 만난 아가씨다. 지킬의 친절함에 감동해서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엠마가 빛의 영역에 있다면 루시는 어둠의 영역에 있다. 출신 성분은 대조적이지만 지킬에게 애정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어내고, 지킬을 중심으로 삼각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지킬 앤 하이드]는 미스터리 스릴러에 로맨틱 멜로를 얹었다.

멜로 드라마는 통속적이라고 눈총을 받기는 하나 대중 흡인력에서는 최고의 장르다. 더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권선징악의 멜로드라마를 좋아한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TV 드라마의 생명력은 이 멜로의 힘에 있다.

스티븐슨은 1880년대 영국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살인마 잭(잭 더 리퍼)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 소설을 썼다. 살인마 잭은 창녀들을 연쇄 살인해 런던의 밤을 공포로 물들인 장본인이다. 국내에서도 수차례 공연된 체코 뮤지컬 [잭 더 리퍼]의 분위기가 [지킬 앤 하이드]와 비슷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주인공 헨리 지킬은 장래가 촉망되는 똑똑한 의사다. 그는 아버지의 정신병이 인간의 심성에 깃든 악(惡)에 기인한다고 믿는다. 고민하던 그는 결론을 내린다. 인간의 심성에 있는 선과 악을 분리해낸다면, 그래서 악을 제거한다면 아버지의 병도 나을 수 있지 않을까?

원작자인 스티븐슨의 발상은 흥미롭다. 틀 자체는 과학적이다. 19세기는 인간의 과학에 대한 신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였다. 르네상스 이후 발흥한 합리주의, 이성주의가 세상을 이끌었고, 자연과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못할 게 없어 보였다.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나 [지구 속 여행] 같은 소설을 보면, 이런 과학적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가 잘 담겨 있다.

스티븐슨 역시 지킬 박사를 통해 과학의 힘으로 선과 악을 분리하겠다는 발상을 펼친다. 치료제로 암세포나 바이러스를 박멸하듯, 악(惡) 또한 약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여기에 살짝 트릭이 있다. 과학이란 수(數)와 양(量)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수량화돼야 분리도 가능하다. 그런데 선과 악은 수량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양이 아니라 질(質)이기 때문이다. 스티븐슨 또한 이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질을 양으로 슬쩍 건너뛰면서 긴박감 넘치는 드라마 속으로 독자를 유도한다.

지킬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선과 악을 분리해낼 수 있는 시약을 만들어낸다. 제조에는 일단 성공했지만, 약의 효능을 검증할 방법이 없다. 임상시험의 대상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지킬은 성 주드 병원의 이사회에 나가 자신의 연구를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지만, 위원들은 그를 조롱할 뿐이다.

화가 난 지킬은 고뇌를 거듭하다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자신을 연구대상으로 삼기로 한 것이다. 비장하게 자신의 팔뚝에 주사를 꽂으며 부르는 곡이 바로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으로 시작하는 ‘지금 이 순간(This is the moment)’이다.

지킬의 실험은 성공한다. 그의 마음속에 있던 선과 악은 분리된다. 하지만 곧 부작용이 발생한다. 분리된 악이 강해도 너무 강한 것이다. 선에 통제되기는커녕 오히려 선을 압도한다. 그의 육체를 지배하게 된 악은 스스로를 ‘에드워드 하이드’라고 이름 짓는다. 이제 그는 하나의 몸에 지킬과 하이드라는 두 개의 인격을 갖게 됐다. 지금도 이중인격의 대명사로 널리 쓰이는 지킬과 하이드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와일드혼 감성 가득한 음악도 성공 요인


▎배우 조승우 주연의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첫 일본 공연의 한 장면.
악의 화신인 하이드는 평소 지킬이 못마땅해했던 성 주드 교회 이사회 위원들을 차례로 무참히 살해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고고한 척하지만, 뒤에서는 온갖 추한 짓을 마다치 않는 위선적인 인물들이었다. 실존하는 ‘지킬과 하이드’였던 것이다. 하이드의 잇단 끔찍한 범죄로 온 런던 시내는 공포에 떤다. 지킬의 의도는 선했으나 결과는 최악이었다. 스티븐슨은 쥘 베른의 순수한 낙관주의와 달리 과학 만능주의가 초래할 수 있는 비극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지킬은 하이드의 힘에 이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악을 분리해 제거하려던 최초의 의도와 달리 악으로부터 역습을 당했다. 그의 목표는 이제 바뀌었다. 의도하지 않았던 부작용의 산물, 하이드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지킬은 친구인 어터슨을 통해 루시에게 “빨리 이곳을 떠나라”는 내용의 편지를 전한다. 하이드가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루시는 편지를 받고 떠날 준비를 하지만 그녀 앞에 하이드가 나타난다. 루시는 끔찍한 죽임을 당한다.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 자신의 또 다른 존재인 하이드가 저지른 끔찍한 살인에 지킬은 괴로워한다. 그에게 남은 선택은 이제 하나뿐이다. 함께 죽는 길뿐이다.

엠마와의 결혼식 날, 결국 사건은 터진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 지킬은 자신의 몸이 서서히 하이드로 변하는 것을 느낀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친구인 어터슨의 지팡이를 뺏어 자신을 찌른다. 자신을 없앰으로써 괴물 하이드를 처치한다.

[지킬 앤 하이드]는 나라마다, 또 프로덕션마다 음악 순서와 드라마 구성이 약간씩 다르다. 국내 공연 버전 역시 노래 순서도 살짝 바꾸고 드라마도 압축했는데, 이것이 제대로 먹혔다. 원작보다 캐릭터의 색깔이 훨씬 짙어졌고, 드라마의 에너지도 강해졌다. 강하고 센 드라마를 선호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향과 딱 맞아 떨어졌다.

지킬이 ‘지금 이 순간’을 부른 뒤 자신에게 약을 투여하는 장면이 좋은 예다. 브로드웨이 버전에선 여기서 알약을 먹지만, 국내에서는 팔뚝에 주사를 놓는 방식을 택했다. 어떤 게 더 강렬한 효과를 줄지 말할 필요가 없다. 수많은 뮤지컬 넘버 가운데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만큼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히트한 곡도 드물다. 물론 [캣츠]의 ‘메모리’나 [에비타]의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같은 불후의 명곡들은 있다. 또 ‘에델바이스’나 ‘도레미 송’처럼 교과서에도 실린 [사운드 오브 뮤직]의 전설적인 곡들도 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국내에 소개된 작품의 넘버 가운데 신흥 히트곡으로 떠오른 곡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이 노래에는 사연이 참 많다. 배우들이 오디션에서 자유곡으로 너무 자주 선택해 절대 불러서는 안 되는 금지곡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고, 노래방의 인기 넘버가 됐으며, 다양한 TV 예능프로그램과 CF에서도 여전히 들을 수 있다. 뮤지컬 팬이 아니더라도 “아, 그 노래!”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지킬이 하이드에게 선전포고하면서 부르는 ‘대결(Confrontation)’ 또한 압권이다. 1970년대 인기만화 ‘마징가 Z’의 아수라 백작처럼 얼굴을 반반 분할한 채 지킬과 하이드를 오가며 부르는 곡이다. 선과 악을 대표하는 두 캐릭터가 서로 조롱하고 싸우고 갈등하는 것을 1인 2역으로 소화하며 엄청난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현란한 조명 속에서 긴박하게 목소리를 바꿔가며 지킬과 하이드의 대립을 묘사하는 테크닉이 화려하다. 맑은 지킬의 목소리와 굵고 혼탁한 하이드의 목소리를 중국의 전통 가면극 변검처럼 빠르게 오가며 소화한다.

[지킬 앤 하이드]에는 ‘지금 이 순간’ 말고도 우리 귀에 익숙한 매력적인 넘버들이 넘쳐난다. 이 작품의 근원적인 성공 요인이다. 와일드혼은 감성 가득한 팝 멜로디를 활용해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냈다. 한 작품에서 이렇게 많은 히트 넘버가 탄생하기도 흔치 않은 일이다.

TV CF 음악으로도 사용됐던 ‘언젠가 꿈에’(Once upon a dream)’는 귀에 익은 곡이고, 엠마가 지킬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을 표현하는 ‘지금 그대로 나를 대해줘요(Take me as I am)’도 애절한 멜로디가 일품이다. 루시가 지킬에 대한 사랑을 품게 되면서 부르는 ‘당신 같은 사람(Someone like you)’, 우울한 생활을 청산하고 새 인생을 살겠다는 꿈을 담은 ‘새로운 삶(A new life)’도 여배우들이 갈라 쇼에서 자주 부르는 명곡들이다.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라(No one knows who I am)’, ‘위험한 게임’(Dangerous game)’도 참 매력적이다.

자신이 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가장 위험


▎뮤지컬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 / 사진:EMK뮤지컬컴퍼니
와일드혼은 이 작품을 통해 국내 팬들 사이에서 일약 스타 작곡가로 떠올랐다. [지킬 앤 하이드]의 인기를 발판으로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몬테 크리스토], [황태자 루돌프] 등이 잇달아 공연됐다. 2011년에는 국내 설앤컴퍼니와 힘을 모아 김준수·윤공주·전동석, 브로드웨이 배우 브래드 리틀 등이 출연한 창작 뮤지컬 [천국의 눈물] 음악을 맡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와일드혼은 다작 스타일이다. 여러 나라에서 작품을 많이 만들어왔다. 이 모든 작품 가운데 그의 재능이 최고로 결집된 베스트 작품은 [지킬 앤 하이드]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작품들에서는 [지킬 앤 하이드]의 그림자가 강하게 드리워져 있다. 이따금 엇비슷한 멜로디도 들린다. 국내 팬들의 큰 기대를 모았던 창작 뮤지컬 [천국의 눈물]은 아주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지킬 앤 하이드]의 빅 히트는 당시 부글부글 끓고 있던 국내 뮤지컬 시장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었다. 국내 뮤지컬 시장은 2004년부터 2007년에 이르기까지 뮤지컬 ‘빅뱅’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만큼 일대 활황을 맞았다. 수많은 해외 화제작이 쏟아져 들어왔고, 창작 뮤지컬 제작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지킬 앤 하이드]는 특히 [오페라의 유령]이나 [레미제라블]처럼 해외에서 대박을 터트린 작품이 아니더라도 우리 정서와 맞는다면 국내에서 재발견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국내 정서에 맞게 작품을 살짝 변형하는 테크닉도 이때부터 활발해졌다.

[지킬 앤 하이드]는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 성선설을 따르느냐, 성악설을 따르느냐는 풀기 어려운 문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개념부터 애매모호하다. 자신이 선이라고 굳세게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장 위험하다.

선과 악의 문제는 인간이 욕망의 존재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기적인 욕망을 어떻게 통제하느냐, 어떻게 선의 에너지로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헨리 지킬의 꿈은 무모했고 결과는 비참했지만, 그 최초의 의도는 여전히 고민해야 할 숙제임은 분명하다.

※ 김형중 - 공연 칼럼니스트. 연세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20년 넘게 공연 담당 기자로 일했고 한국뮤지컬대상과 청룡영화상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무대예술의 경이로움을 글로 풀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쓴 책으로 [우리시대 최고의 뮤지컬 22]가 있다.

202203호 (202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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