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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복거일 소설 ‘이승만’ | 물로 씌여진 이름 (제1부 광복) 

제21장 얄타 (12) 

사람들의 관심이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의 협력에 쏠린 사이, 중국의 경제 사정은 빠르게 악화했다. 군벌끼리의 어지러운 내전들이 ‘북벌’의 성공으로 끝나자마자 중일전쟁이 시작되어, 사회가 피폐했고 경제는 점점 어려워졌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이 가속되어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뒤로는 초인플레이선(hyperinflation)으로 상황은 나빠지고 있었다.
인플레이션의 근본적 요인은 국민당 정부의 만성적 적자 재정이었다. 국민당 정부가 들어선 1927년에 정부 세입의 49%가 중국 은행들로부터 차입이었다. 그 뒤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면서, 세수는 줄었고 전쟁 비용은 늘어났다. 자연히 정부 세입에서 차입의 몫은 꾸준히 늘어났다. 그렇게 적자 재정이 오래 이어지면 사회에 유통되는 화폐의 양이 늘어나서 필연적으로 물가가 오르게 된다. 화폐 발행이 워낙 빠르게 늘어났으므로 국민당 정부의 인쇄 시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히말라야를 넘는 ‘나는 호랑이들’이 우선적으로 공수한 것은 영국에서 인쇄한 중국 화폐 다발이었다.



중국의 화폐 제도에 심각한 내상을 입힌 것은 미국의 은광(銀鑛) 지원 정책이었다. 미국 정부는 1933년부터 대량의 은을 매입해서 1935년엔 은의 가격이 세 곱절이 되었다. 이런 폭등은 은본위제도를 유지해온 중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은이 해외로 유출되어 화폐의 양이 줄어들자 물가가 갑자기 내려갔다. 수입품은 값이 내려가서 경쟁력이 커졌고, 중국 제품은 경쟁력을 잃었다.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빚을 진 기업 사람들은 갑자기 무거워진 빚에 짓눌렸다. 반어적으로 가장 큰 빚을 진 것은 국민당 정부였다. 결국 1935년 11월에 국민당 정부는 은본위제도를 포기하고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지폐를 법정통화로 삼는 관리통화제도를 채택했다. 적자 재정과 겹쳐서 이런 전환은 통화 남발을 불렀다. 그래서 극심한 디플레이션이 갑자기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고, 1943년엔 초인플레이션으로 악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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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호 (202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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