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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특집] 성공한 대통령을 위한 조건 (4)사회 통합 

윤석열 정부 ‘통합’으로 가는 길, ‘스위스 모델’에 있다 

경제 성장 체감 못하는 한국 사회 누적된 모순, 자산·젠더로 분열되며 정치 신인 선택
스위스의 산업구조·지역자치 참고 바람직, 성과보다 과정 중시 통해 갈등 해소 필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통합의 대한민국’을 목표로 내걸었다. 통합의 선결 조건은 국가가 국민에게 ‘안정성’을 줄 수 있느냐는 여부다.
대선이 끝났다. 윤석열이 이겼다. 프랑스 사회당 정부의 경제부 장관으로 있다가 독자 출마해 프랑스 대통령이 된 마크롱과 유사한 점이 없지는 않다. 다만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중도의 독자 영역을 개척하는 아주 미세한 가능성을 추구하지 않고, 넓은 정치 인프라를 확보하고 있는 보수 쪽 공간으로 들어갔다. 프랑스의 마크롱은 초기에는 독선적인 국정 운영으로 노란 조끼 시위 등 곤경에 처했다. 팬데믹 한가운데에서는 방역 실패로 역시 위기에 처했다. 이후 -8%(2020년 4월 경제 성장률 전망)까지 내려갔던 경제 위기를 빠르게 회복하고, 지금은 재선이 유력한 상황이다. 재선을 앞두고 마크롱은 유럽에서 가장 강한 대통령 중심제로 인해 자신에게 씌워진 불통 이미지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마크롱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윤 당선인이 참고할 수 있는 가장 근접한 사례가 마크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편 정부에 있다가 독자 출마한 사실상 정치 신인이라는 점이 그렇고, 중도에서 출발하려고 했다는 점이 그렇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은 아직 출범하지도 않은 윤석열 정부의 실패를 기다리거나 혹은 기원한다. 주변에 진보 쪽 인사가 아주 많고, 한국 사회에서 아주 적은 좌파도 꽤 있다. 그리고 녹색당을 비롯해 정치 지형에서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 혹은 소수자 운동을 하는 사람도 꽤 된다. 이재명에게 투표했든 혹은 심상정에게 투표했든, 매번의 선거가 그렇듯이 결과는 아픔을 준다. 전격적으로 의원내각제가 도입되지 않는 이상, 한국처럼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나라에서는 피하기 어려운 일이다.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든 절반 이상의 국민은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출범도 하지 않은 윤석열 정부의 실패를 기원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우리 모두가 공멸하는 길이다.

정권은 정권이고, 경제는 경제다. 1990년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6년 반 정도 있었다. 우리나라가 아직 전형적인 개발도상국이었던 시절이다. 처음 파리에 갔을 때 ‘풍요’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갈 브레이드는 전후 서방 자본주의 국가가 도달한 상태를 ‘풍요 사회’라고 진단한 바 있다. 1973년 1차 석유파동이 벌어지기 전까지 불황 없이 호황만 계속된 30년간을 ‘영광의 30년’이라고 부른다. 그 시기에 벌어진 사회 현상을 요약해서 ‘풍요로운 사회’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책에서만 보던 풍요를 처음 접하고 ‘이게 잘사는 것이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에 파리를 몇 번 더 갔었는데, 더는 그렇게 풍요로운 사회라는 느낌이 강력하게 들지는 않았다. 그건 한국이 더 잘살게 됐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쓰는 국민소득 지표인 GNI와 함께 경제학자들은 생산 규모를 살피기 위해서 1인당 GDP도 종종 살핀다. 차이점은 재외 한국인과 한국 내 외국인의 송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다. 1인당 GDP 기준으로는 2020년 한국이 4만1369달러로 일본의 4만603달러를 미세하게 추월했다. 물론 코로나19 팬데믹 한가운데에서 나온 수치를 ‘국뽕’ 스타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다만 추세만 본다면 지난 몇 년간 한국이 빠른 속도로 일본의 1인당 GDP에 근접해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영끌과 빚투, 벼락 거지 양산한 한국 사회


▎마크롱(가운데 서 있는 이) 프랑스 대통령은 해야만 한다고 믿은 정책을 관철한 결과, 재선이 유력하다. /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프랑스도 그렇게 먼 곳에 있지 않다. 현재의 흐름대로 간다면, 조만간 한국 경제가 1인당 지표로는 프랑스를 넘어갈 순간이 올 것이다. 4~5년 이내에 올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독일, 미국 그리고 흔히 북유럽 모델이라고 부르는 스웨덴 등 몇 개 국가와 스위스 정도만 한국 앞에 남는다. 1990년에 내가 느꼈던 그 풍요를 지금은 한국에 오는 많은 외국인이 얘기한다. 이게 객관적인 한국의 경제·사회 흐름이다.

물론 아직 우리는 촘촘한 복지와는 거리가 멀고, 국민이 이런 거시 경제상의 성과를 체감하기도 어렵다. “부자 나라의 가난한 국민” 현상, 이게 한국 사회가 서 있는 또 다른 객관적 현상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의 거시 지표는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GDP는 자연 생태의 역할이나 가사 노동의 가치 같은 비(非)금전 경제 효과나 지하경제와 같이 공식적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분야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받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쓰는 지표 중에서는 가장 표준적이고, 또 장기적인 흐름을 잘 보여준다. 과연 윤석열 정부 5년 후에 이 지표는 어떻게 돼 있을까?

외형적이고 거시적인 수치들과 달리, 한국 사회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선진국이라면 확보했어야 할 사회적 요소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승자 독식’의 경제 분위기는 여전하고, 국가가 위기에 빠진 개인을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을 만들지 못했다. 자살률은 높고, 출산율은 낮다. 여기 더해 ‘자산 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

소득 증가에 따른 점진적 중산층 진입의 신화는 깨졌고, 믿을 것은 자산밖에 없다는 사회적 흐름이 특히 청년층 사이에서 만들어졌다. 부동산에서는 영혼까지 끌어들여 구매한다는 ‘영끌’이, 주식에서는 빚을 내서라도 투자해야 한다는 ‘빚투’가 벌어졌다. 이런 전통적인 자산과는 스타일이 다른 암호화폐에 열광하는 일이 벌어졌고, 자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고가의 럭셔리 백에서 미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투기 대상이 됐다. 급기야 가만히 있다가 자신만 뒤처진다는 ‘벼락 거지’라는 말이 등장하게 됐다. 모두가 불안하고, 모두가 자신밖에 믿지 못하는 사회가 과연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

젠더 문제, ‘해결’하기보다 ‘해소’해야


▎신남성연대 회원들이 남성 혐오 페미니즘을 규탄하고 있다.
선거는 워낙 박빙의 차이로 끝났다. 이긴 쪽에서는 승리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모든 곳이 기여도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 차이가 없었다면 아마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진 쪽에서는 모든 요소가 패배의 요소가 된다. 용퇴 결단을 내리지 못한 일부 586 정치 인사, 충분한 득표를 올리지 못한 서울의 일부 지역, 심상정의 정의당에 투표한 사람들 혹은 심지어 경선 상대의 일부 열성적 지지자, 모두 다 패배의 요소가 된다. 아마 이 혼동은 오래갈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윤 당선인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특기할 상황은 역시 젠더 갈등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노동 약자를 분석할 때 연령, 젠더, 인종, 이렇게 세 가지 변수를 주로 사용한다. 젊을수록 연봉이 낮게 되고, 고령이 되면 또다시 낮아진다.

젠더와 인종은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아직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발생시킬 정도의 규모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분명히 문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전면적으로 정치 의제가 되지 않았다. 반면 연령은 이제 청년 경제를 중심으로 점차적으로 그 중요성이 대두되는 중이다. 노동 시장이 위축돼 충분한 고용이 발생하지 않으면, 이런 경제 약자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렇다면 젠더의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젠더 문제가 커진 이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다. 압축성장의 연장선에서 여성의 경제 활동 증가 속도가 너무 빨라서 다른 제도와 문화가 적응할 시간이 미처 없었다는 점이다. ‘68혁명’ 이후로 여성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의미가 변한 유럽 사회와 달리, 한국은 2000년 대 이후 짧은 시간에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증가하면서 사회가 미처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노동 시장, 특히 청년들의 노동 시장 상황도 그렇게 좋지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사실상 청년에 대해서는 완전 고용에 가까운 상황을 만들었던 미국이나 일본 혹은 독일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의 상황이 좀 이해가 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외국에서도 여성의 경제 활동이 강화되면서 남성의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게 좀처럼 정치 의제로 등장하지 않은 것은, 20세기 초중반 여성도 투표에 참여하는 개별 국가의 여성 참정권 운동 이후로 젠더 문제가 상당수 내부화됐기 때문이었다. 표로 계산해도 한쪽 성(性)이 특정 정당에 몰리면, 다른 쪽 성은 반대편 정당에 몰리기 때문에 결국 득표에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지는 못한다는 현실적 문제도 있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이 현상을 결국 목격하고야 말았다.

보수는 언제나 남성 근본주의인 메일 쇼비니즘(male chauvinism) 쪽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프랑스 극우파의 대표인 마린 르 펜은 자기 나름의 페미니즘 노선을 가지고 있다.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반박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여성 정치인으로서 그도 자기 나름의 페미니즘 노선을 가지고 있다. 한국과 같은 정치적 상황은 유럽 극우파 정당에서도 보기 힘들다.

이 문제는 윤석열 정부가 그대로 안고 가게 될 문제다. 어쩌면 지금 20대의 바로 앞에 있는 586세대가 가졌던 문제조차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 혼자서 풀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젠더 문제는 ‘해결’이 아니라 ‘해소’될 문제가 아닐까 한다. 정책적으로 해결한다고 이미 생긴 갈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경제적으로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고, 노동 시장의 문제를 줄여나가면서 점차 젠더 갈등을 해소하는 쪽이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 아닐까 한다.

분산형 시스템 통한 지역자치 활성화 과제


▎여성들이 불법촬영 편파 수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 경제 모델을 차용하다가 박정희 시절에는 프랑스의 중앙형 모델을 차용했다. 경제개발계획 자체가 드골의 시그널 경제를 변형한 것이다. 서울 지하철에서 TGV에 이르기까지, 철도 체계를 프랑스에서 수입하면서 수많은 공무원이 프랑스 연수를 다녀왔다. 대통령 중심, 서울 중심 체계는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IMF 경제 위기 이후로는 신자유주의가 유행했고, 미국 경제 모델이 대거 들어왔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는 네덜란드 모델이 청와대 일각에서 추진됐지만, 뿌리내리지 못했다. 보편 복지 담론의 증가와 함께 스웨덴 등 북유럽 모델이 진보 정권에서 참고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주목하지 않은 모델은 지금 세계 최고의 국민소득을 기록하고 있는 스위스 모델이다. 우리가 아는 스위스는 관광에 관한 이야기 아니면 비밀계좌와 같은 금융권 이야기다. 물론 그렇다고 해봐야 스위스 경제 내에서 관광이나 금융의 비율이 다른 EU(유럽연합) 국가에 비해서 엄청나게 높은 것은 아니다. 사실 스위스는 제조업과 정밀 공업이 탄탄하다. 국민투표에 의해서 국가적으로 지원하는 농업도 일정 정도는 버틴다. 국민경제 산업별 비율과 역할은 거의 이상적으로 균형 잡힌 경제를 끌고 간다.

그렇지만 내가 윤석열 정부에게 스위스 사례를 참고하도록 권유하고 싶은 것은, 이런 산업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통합의 힘’ 그리고 국민이 갖는 ‘안정성’ 때문이다. 수치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스위스나 스웨덴 같은 나라의 청년이 갖는 안정성은 우리의 청년과 비교하기가 몹시 어렵다. 그들은 국민소득 3만~4만 달러를 지나갈 때도 우리보다 아주 안정적이었고, 국민이 느끼는 삶의 안정성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았다.

안정성은 최근 UN에서 많이 언급하는 ‘행복’과는 조금 다른 층위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소득이 높아서 안정성이 생긴 것이 아니라, 그런 안정성 덕분에 청년들의 혁신과 창조 같은 정신이 발생한다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스위스는 언어권만으로도 독일어, 불어, 이탈리아어 등 서로 다른 경제권이 하나의 연방을 형성하고 있다. 국민 통합이 국가의 기반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나라에서 지역 간 통합이 깨지면 각기 독립 선언을 하게 되고, 스위스 연방은 이내 해체되는 구조다.

스위스는 북유럽 국가는 아니다. 스웨덴 모델을 비롯한 북유럽 모델은 좌파 세력의 존재와 사회 전반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는 노동조합의 권위가 특징이다. 현실적으로 한국에는 이런 게 없다. 유럽 기준으로는 중도 혹은 중도 우파 정도 되는 ‘진보’가 있고, 좌파는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다. 노조는 더하다. 세력도 약하지만, ‘귀족 노조’로 몰려서 사회적 대타협의 주체가 될 권위 자체가 없다.

스웨덴과 달리 스위스는 보수가 더 강한 나라다. 극우파 정당도 집권은 못하지만 규모가 아주 크고, 엔지니어와 전문직 그리고 농민 등으로 폭넓은 지지기반을 갖는 보수가 강한 나라다. 정치 지형상으로는 한국과 아주 비슷하다. 스위스는 보수가 강한 나라지만, 우리와의 차이점은 연방제는 물론이고 지역 자치가 아주 발달해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중앙이 쥐고 있는 예산은 물론, 권한을 각 지역으로 전환하는 분산형 시스템을 통한 지역자치 활성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지역 경제, 지역 일자리, 이런 이야기들이 공허한 것은 중앙이 무엇인가 해주고, 어떤 기업인가를 유치해야 한다는 외생적 모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지역자치와는 좀 다른 방향으로 우리는 가고 있다. 보수가 이런 전환을 이루어내면 그 정권은 훨씬 더 오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안정성은 정부가 그냥 소통을 강화하고, 더 많이 만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적합한 시스템 디자인이 필요하다.

한국 국민은 무능보다 오만 더 싫어해

문재인 정부의 경제에서 가장 결여된 것은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톱다운(top down)’ 방식으로 경제가 진행됐고, 그걸 ‘밀실 행정’이라고 불렀다. 집권자 입장에서는 가장 손쉬운 방식이기는 하다. 그러나 ‘경제 민주화’를 오랫동안 주창했던 문 정부에서도 밀실 행정을 통한 톱다운 방식은 여전했다. 과정이 생략되고 성과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것은 21세기 경제 방식은 아니다.

행정적 관점에서 원전 문제의 출발도 과정이 생략된 경제적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다. 원래도 한국의 보수는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톱다운을 선호했다. 빠른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변화가 중요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충분히 토론하는 일이다.

정권이 바뀌고, 사람들은 사회적 갈등이 봉합되거나 최소한 완화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선진국 1그룹으로 진입하는 한국, 과정을 생략했던 지난 일들에 대한 반성과 변화가 생기기를 소망한다. 선진국 경제는 과정이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경제라고 생각한다. 아주 작은 표 차이로 승리한 윤 당선인에게는 정책의 ‘정당성’이 생명일 수도 있다. 이 정당성은 과정에서 생긴다. 검사 출신 대통령은 태생부터 밀실 이미지가 강하다. 이걸 사회적으로 털어내는 것, 그건 결국 과정을 잘 밟는 정책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독선, 오만은 모두 과정을 생략한 정책에서부터 나온다. 그리고 한국 국민은 무능보다 오만을 더 싫어한다. 그래서 선진국 국민이다.

힘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성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하던 시절도 있었다. MB 정권 초기에 ‘얼리 버드’라는 말이 청와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이 정부는 망할 거라고 생각했다. 곧이어 촛불 집회가 터지고, 가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터졌고, MB 정부는 사랑받는 정부와 아주 먼 곳으로 가버렸다. 성과가 전부가 아니다. 이제는 과정이 중요한 시대로 가고 있다. 더 넓게 소통하고, 국민과 가까이 있고, 그러면서 진행되는 과정을 반대든 찬성이든 폭넓게 논의하는 시대, 그게 이 정도 덩치를 가진 우리 경제가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면서 가는 길이 아닐까 한다.

- 우석훈 성결대 교수·경제학자 honortomeadows@gmail.com

202204호 (2022.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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