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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수의 국가를 품격 있게 만든 지도자들 (6)최종회] 덩샤오핑·시진핑의 ‘차이 나는’ 리더십 

강한 중국 초석 깐 덩샤오핑, 중국 중심주의로 갈등 유발한 시진핑 

덩(鄧) 시절 한·중 수교로 협력 증진… 시(習) 집권 후 상호 불신 커져
한·미, 한·미·일 협력이 이뤄져야 한·중 관계도 더 발전해나갈 수 있어


▎1992년 10월 제14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한 덩샤오핑. 이 대회에서 사회주의 체제에 시장경제 제도를 접목하는 덩샤오핑의 지도 노선을 중국 공산당 지도 이념으로 채택했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중국의 한계를 보여줬다. 지난 40년간 중국은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뤘지만,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중국의 대외관계는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그 결과 2020년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에서 실시한 국제 여론조사에서 주변국 및 서구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시각이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1980년대 중국은 낙후되고 빈곤에 처한 상황이었지만, 국제사회는 중국을 믿고 그들과 협력했다.

중국이 외국과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나아가고 국민도 대외적으로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된 중심에는 덩샤오핑(1904~1997)이 있다. 현재 중국은 강국으로 부상했음에도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과거 덩샤오핑의 리더십이 더욱 돋보이고 다시금 그를 떠올리게 한다.

덩샤오핑은 150㎝ 남짓한 키에 두 눈은 멀리 떨어져 있고, 찐빵같이 둥그스레한 얼굴이다. 이웃집 아저씨같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덩샤오핑은 인민복을 즐겨 입고 줄담배를 피우는 골초로 침을 뱉는 습관이 있다. 중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중국인 그대로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였으며 중국의 새로운 역사를 만든 주인공이다. 그가 최고지도자로서 통치한 기간은 15년여에다. 그러나 국가의 틀을 개조한 그의 지도력은 지금도 중국의 유산으로 남아 있으며 중국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데 중요하다.

중국은 19세기 말 제국주의에 의해 청나라가 와해했던 경험 때문에 외국에 대한 트라우마가 지금도 남아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1893~1976)은 소련을 제외하고는 외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으며, 다른 나라와의 협력을 통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인식이 없었다. 그는 외국과의 접촉을 철저히 통제했기에 불과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거의 고립된 국가였다.

이런 상황에서 덩샤오핑이 1978년 나라의 문을 열기 시작했을 때 중국인들은 과거의 적인 미국·일본과 협력하는 것에 반발심과 경계심이 있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과감하게 실시하는 한편 자신의 미국·일본 방문 당시 사진을 널리 배포함으로써 중국인들에게 외국의 현대화된 모습에서 중국의 낙후성을 인식하게 하고 외국에서 배워야 한다는 시각을 갖도록 했다.

중국에 대한 외국의 시각 역시 처음에는 조심스러웠다. 미국인들은 공산주의를 오랫동안 불신했는데 덩샤오핑이 여러 행사에서 자신 있게 행동하고, 텍사스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로데오’를 관람하는 등 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통해 중국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일본인들도 중국의 현대화를 지원하는 것이 과거를 치유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인식하면서 중국의 공업과 기반시설 건설을 도왔다. 덩샤오핑의 해외 방문과 개혁·개방 정책으로 중국인들은 점차 폐쇄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발전된 외국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이것이 외국과의 거리감을 좁히면서 궁극적으로 중국 발전의 토대가 됐다.

개발도상국의 특징은 지도자들의 장기 집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국가가 드물다는 점이다. 20세기 제국주의가 후퇴하는 가운데 중동·중남미·유라시아 지역에서 여러 민족국가가 새롭게 건국한 이후 대체로 강력한 지도자들이 장기간 통치했지만, 경제적으로 부강을 이룬 나라가 거의 없다.

개도국 지도자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열정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경제적인 통찰력이 없었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모르다 보니 국민 잠재력을 끌어내지 못했다. 마오쩌둥 시절의 중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공산주의적 논리에 매달려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동생산, 공동 분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개혁이 시작되기 전인 1977년의 중국은 1949년 건국 이전의 중국과 큰 변화가 없었다. 자연재해와 기근이 빈발한 가운데 농민들은 텅 빈 밥그릇을 들고 누더기를 걸친 채 구걸하고 진흙 오두막에서 한 가족이 담요 한 장으로 버티기도 했다.

이러한 중국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덩샤오핑의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서부터였다. 마오쩌둥은 처참한 현실을 외면하고 부정했지만, 덩샤오핑은 중국이 낙후된 국가라는 것을 직시하는 가운데 변화를 위해 개혁과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덩샤오핑은 공산주의가 가난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주의가 후진적이고 빈곤한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시장경제의 경쟁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가 후진·빈곤 의미하는 건 아니다” 주장


▎마오쩌둥(왼쪽)과 덩샤오핑.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했고, 덩샤오핑은 국가 개조의 틀을 마련했다.
그는 사회주의에도 시장경제의 인센티브가 있고 자본주의에도 계획경제의 규제가 있을 수 있으며, 시장경제의 장점을 활용하는 것이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윤 동기 부여, 상품경제, 건전한 경영 등 시장적 요인을 활용해 중국 사회를 발전시키고자 시스템을 개조해나갔다.

그는 국가의 현대화를 위한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실천해나갔다. 1980년에, 2000년까지 국민소득을 4배 증진해나가는 목표를 설정한 후 이 목표가 가능한지 세계은행 등의 전문가들과 수시로 협의하고 매년 성장 과정을 확인했다. 덩샤오핑은 국제 경제기구와 협력해 개발 프로젝트를 마련하고 경제 발전에 드는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화교 자본을 확보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개혁 과정에서 한국·대만 등 성공한 국가들의 현대화 경험을 참고하는 등 자본국가나 공산국가 관계없이 어느 국가의 정책이나 지원이라도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면 수용한다는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덩샤오핑은 국가 시스템을 개조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과학기술 및 교육에 역점을 뒀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정치적 사상이 검증되지 않고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덩샤오핑은 대학입시 제도를 부활해 누구라도 능력이 있으면 고등교육을 받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고 유능한 젊은이들을 해외로 파견해 선진 과학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미국과 수교 이후 매년 수천 명의 유학생을 내보냈는데 인재 유출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지만 덩샤오핑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아울러 해외 중국계 두뇌를 초청해 자문을 듣고 고급인력 확충에 심혈을 기울였다. 덩샤오핑의 중국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 과학기술 및 교육에 기반을 둔 개혁개방, 시장경제의 장점과 선진 기술의 도입 등이 중국 발전의 초석이 됐다.

덩샤오핑은 외교 업무를 총괄하면서 소련·베트남의 위협에 대응하는 것과 서구와의 협력을 통해 중국의 현대화를 추진하는 데 목표를 뒀다. 당시 중국의 최대 관심사는 1969년 중·소 국경 분쟁 이후 주적(主敵)이 된 소련의 베트남 진출을 억제하는 것과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에 대응해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미국·일본 방문… 국가 발전 위해 무엇을 수용할지 고민


▎1989년 11월 5일 김일성을 영접하기 위해 베이징역에 나온 장쩌민·리펑 등과 담소하는 덩샤오핑.
이러한 목표에 따라 덩샤오핑은 14개월 동안 동남아 5개국과 북한·일본·미국 등 8개국을 방문했는데 어느 국가를 방문하더라도 소련 패권주의의 위험성과 이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과 협력이 중요한 점을 강조했다. 덩샤오핑은 1978년 9월 평양을 방문해 북한이 소련과 접근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외교를 했다. 1978년 11월에는 태국·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동남아 국가를 방문해 소련·베트남의 위협을 설명하면서 중국과의 공동전선 구축을 요청했다.

미국이 소련에 우호적이지 않도록 1978년 12월에 미국의 대만 무기 수출을 수용하면서까지 서둘러 수교했고 1979년 1월에는 미국을 방문했다. 그는 카터 대통령에게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고 지역적 패권을 확장해나가고 있는 점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동남아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을 견제할 목적으로 중국이 베트남을 공격할 것임을 미리 알려줬다.

이에 대해 카터 대통령은 중국의 베트남 공격에 반대하는 의견을 나타냈지만 적극적이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중국이 베트남을 공격할 경우 소련이 미국을 의식해 베트남을 지원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판단을 내린 이후 1979년 2월에 베트남을 공격했다.

이 같은 덩샤오핑의 정책 이행 과정을 분석해보면 전략과 목표를 매우 치밀하게 세우고 이를 주도면밀하게 실행해나간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동남아시아에서 소련·베트남의 위협을 제거하겠다는 전략을 세운 이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명분으로 베트남을 공격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으며 이를 위한 방책을 실행했다.

먼저 중국 군대를 베트남 국경선에 집결시켜 공격을 준비해나가는 한편 동남아 국가와 북한·일본·미국을 방문해 이들 국가의 협조를 확보했다. 또한 베트남을 전면적으로 공격할 경우에 소련이 참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봐 일부 국경선만 넘어 베트남을 침략하는 군사전을 기획했다. 실제로 1979년 2월 중국이 침략하자 베트남군의 저항이 강력했고 오히려 중국군의 피해가 커 군사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없었다. 다만, 중국이 베트남을 공격했을 때 소련이 지원하지 않았고, 이후 베트남이 중국을 의식해 캄보디아로부터 철수함으로써 중국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이로 인해 덩샤오핑의 위상은 더욱 확고해졌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현대화를 위해 첨단 과학기술의 지원을 받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미국·일본의 과학센터 및 첨단기업을 방문해 현장을 관찰하고 국가 발전을 위해 어떠한 점을 수용할지 고민했다. 일본의 닛산자동차·신일본 제철소·마쓰시타 전기회사 등을 방문하고 신칸센 고속열차를 직접 탑승하면서 신기술 발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또 신기술의 습득뿐만 아니라 생산 및 품질을 제고하는 관리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돼 일본에 대규모 중국 사절단을 보내 연수하도록 했다. 아울러 국가의 현대화에 제철 능력이 필수적인 점을 배우게 돼 일본의 지원을 받아 중국 연해 지역에 현대식 대형 제철소를 설립했다.

그는 미국을 방문하면서 무역·투자보다 과학기술 협력에 초점을 두고 미·중 정상회담에서 첨단 지식·자본·기술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워싱턴 이외에 필라델피아의 템플대, 애틀랜타의 포드 자동차, 휴스턴의 항공우주센터 및 석유시추 기술 회사, 시애틀의 보잉 항공사를 방문해 교육 및 최첨단 기술의 위력을 직접 목도했다. 그는 과학기술 분야의 진전을 위해 중국계 미국 과학자들을 초청하고 뛰어난 젊은이들이 미국에 유학해 신기술을 습득하도록 장려했다.

덩샤오핑은 미국·일본 방문을 계기로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했다. 보수 세력의 반발과 심각한 부패, 빈부 격차 발생 등으로 개혁·개방의 속도는 불가피하게 조절했지만, 그 방향을 절대 바꾸지는 않았다. 심지어 1988년 이후 물가 상승 등 개혁에 따른 부작용이 발생하고, 1989년 톈안먼 사태를 전후해 자신이 지명한 후야오방·자오쯔양 등이 실각하는 등 지도력이 도전받았음에도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경제특구 확대 등 개혁의 흐름을 이어가 현재의 강한 중국을 만드는 초석을 깔았다.

덩샤오핑이 국가를 통치하거나 중요정책을 실시한 방식은 만기친람(萬機親覽)이 아니었다. 나이가 많았고 청력이 약화돼 회의에 참여할 수 없는 신체적 어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중장기적 전략이나 정책에 집중했다. 장기 전략을 마련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정책을 결정한 이후 자신이 등용한 후야오방 총서기 또는 자오쯔양 총리가 책임을 지고 구체적으로 실행하도록 했다.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미래로 중국을 안내한 지도자


▎2월 4일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만나 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AFP 연합뉴스
덩샤오핑은 권력은 위임했지만, 권력의 끈을 놓거나 느슨하게 한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공산당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자신의 방침에 부응하지 못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처했다. 경제 성장에 따라 민주 세력의 자유화 요구가 심해지고 공산당에 대한 반대가 증가하자 공산당을 비판하는 주도자를 장기간 투옥하고 구금했으며,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 때는 수천 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반대세력을 강하게 진압했다.

그는 16세에 고향을 떠나 다시는 고향을 찾지 않을 정도로 지역이나 당파·동료와 거리를 뒀다. 동료의 개념은 당과 국가를 위한 공통의 대의명분을 위해 함께 일한다는 의미이며, 개인적 친분이나 자신에 대한 충성심으로 동지를 평가하지 않았다. 그 결과 권한을 위임하기는 하지만 개인 간의 의리가 아니라 국가에 도움이 되느냐 여부에 따라 인재를 등용했다. 자신이 등용한 사람이라도 국가의 이해에 부합되지 않는 경우 최고위직이라도 가차 없이 내쳤다. 과도하게 자유를 추진했던 후야오방이나 톈안먼 사태 처리와 관련해 학생들의 입장에 공감했던 자오쯔양을 실각시켰다.

비스마르크는 “지도자라면 역사의 발걸음을 주의 깊게 듣고 그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덩샤오핑은 분명히 역사의 흐름을 읽고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미래로 가는 길로 중국과 중국인을 안내한 통찰력 있는 지도자였다. 그는 중국의 낙후된 상황을 부정하지 않고 직시하는 가운데 중장기전략으로 강성한 중국의 토대를 만들었다. 국제사회와 공생하고 화합하는 리더십이 널리 인정받으면서 덩샤오핑은 20세기의 뛰어난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리더십은 중국 중심주의를 내세워 주요국들과 갈등관계를 유발한 시진핑의 리더십, 뚜렷한 목표 없이 이상적인 구호를 내세우고 과거에만 얽매여 미래를 위한 개혁에는 한 발자국도 내디디지 못한 우리의 리더십과 너무나도 대비된다.

중국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충실… 냉철하게 바라봐야

덩샤오핑 시절에 우리는 중국과 수교를 하고 한·중 간의 협력이 증진되면서 국민 상호 간에 호감도도 높았다. 중국은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협력 대상국이지만 한·중 관계는 우려스럽기만 하다. 지난 5년간 정부는 저자세로 중국에 호의를 나타냈지만, 중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는 오히려 거칠어지고 상호 불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의 설문조사에서 한·중 국민 상호 간 호감도는 어느 때보다 낮은데 시진핑 정권 출범 이후 중국의 자국 중심적 행동이 주요 원인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지도층도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덩샤오핑이 중국을 개조하고 강국으로 만든 뛰어난 지도자이지만 그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바라봐야 한다. 그는 중국을 경제·군사적으로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지만, 정치적인 민주화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민주주의를 주장하거나 정권을 위협하는 데모에 대해 무자비할 정도로 진압했다.

또 대외적으로 중국 국익을 위해 주변국을 활용했으며 오랜 우방국이라도 국익을 달리할 경우 적으로 삼고 대응했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이 200여만 명을 학살한 비인류적인 집단이었음에도 중국에는 베트남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적 협력국으로 중요했다. 반면 베트남과는 오랜 기간 우방 관계였지만 베트남의 친소련 경향과 동남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반대해 침공했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중국이 보인 입장을 살펴보면 중국은 자국의 이해를 위해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은 뒷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중국의 속성을 직시해야 한다. 중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로 주변 정세가 불확실하게 되는 점을 바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한에 대한 부담을 줘 자국과의 관계가 긴장되는 점을 바라지 않는다.

더욱이 미·중 갈등국면에서 북한은 한국·미국에 대한 중요한 협상 카드인 점에 비추어 오히려 북·미관계나 남북관계의 진전이 반드시 중국에 유리한 것도 아니다. 중국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성과를 거두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중국 관계가 왜곡되는 부작용만 낳았을 뿐이다.

이제 5월 새로 출발하는 정부는 북한 문제를 중국과 협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시각을 가지고 냉철하게 대응해야 한다. 우리가 매달린다고 중국이 한국을 지지하거나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멈추거나 경제체제의 변화를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한·미, 한·미·일 협력이 긴밀하게 이뤄질 경우 남북 간의 협력선에 새로운 돌파구가 있을 가능성이 더 크고, 한·중 관계도 보다 발전해나갈 수 있다. 북한·중국과 서두르기보다 마라톤을 한다는 자세로 신정부는 협상해나가야 할 것이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덩샤오핑의 리더십을 깊이 되새기면서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시점이다.

※ 조윤수 - 미국·러시아·독일·싱가포르·쿠웨이트·터키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2017년 주(駐)터키 대사를 마지막으로 37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현재는 책 집필, 대학 강연, 언론 기고를 통해 외교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독일 통일 30년, 독일의 과거에서 한국의 미래를 본다] [대사와 함께 떠나는 소아시아 역사문화산책] 등 근무한 국가의 모습과 주요 국제 사안을 책으로 엮었다. 현재 [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락, 터키 공화국의 자화상] [중앙유라시아에서 본 새로운 역사흐름]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202204호 (2022.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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