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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14)] 훔친 물건 처분, 정보 교환 장소로도 이용된 주막 

정약용, 도둑 소굴로 지목, 유행가 속 이미지는 허상일 뿐 

대중 심금 울린 노래 ‘번지 없는 주막’ 속 푸근·애틋한 느낌과는 달라
조선 후기 주막, 술집보다 여관과 비슷… 외국인은 ‘호텔’로 표현도


▎주막은 푸근하면서도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과거의 이미지 중 하나인데, 이와 같은 주막의 이미지는 실제와는 다른 허상일 뿐이다. 사진은 김홍도의 풍속화 ‘주막’.
요즈음은 주막이라는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 쓰이는 데가 있는데, 바로 술집의 상호이다. 무슨 무슨 주막이라는 상호는 꽤 많이 볼 수 있어서, 여기에서는 주막이 아직 살아 있는 단어이다.

이처럼 현재 ‘주막’이라는 말은 술집의 다른 이름처럼 됐지만, 조선 후기에 주막은 술집보다는 여관이라는 의미가 더 컸다. 순전히 술을 파는 술집도 주막이라고 했고, 또 여행객에게 음식을 팔고 재워주는 집도 주막이라고 했다.

조선 중기까지의 여행객은 주로 관청의 일을 보기 위해 다니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관청에서 준비한 숙소에서 묵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조선에는 일반인이 묵는 여관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상업의 발달로 일반 여행객이 늘어나면서, 조선에서도 이들을 위한 숙소가 점차 생겨난다. 주막은 바로 이런 일반 여행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돈을 버는 영업인데, 조선 말기에는 그 수가 매우 많아졌다. 이번 호에서는 조선 후기 주막의 실상이 어떠했나를 보기로 한다.

백년설이 1940년에 취입한 ‘번지 없는 주막’이라는 노래는 남북한에서 모두 함께 부르는 대중가요다. 작사자 박영호의 고향은 원산인데, 그가 광복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이 노래는 월북작가의 노래로 금지곡이 될 뻔했다고 한다. 후에 반야월(본명 박창오)이 원 가사의 내용을 약간 바꿔 새로 등록해 금지를 면했고, 백년설도 이 새로 만든 가사로 계속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발표된 1940년 무렵에 ‘주막’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였는지 처음 발표될 때의 노래 가사를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노래의 제1절은,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나리든 그 밤이 애절쿠려.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이다. 1절의 가사만으로는 주막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주막의 성격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바람이 불어 창살에 능수버들이 부딪치는 어느 비 오는 날 밤에, 떠나는 남자에게 언제 돌아오겠느냐고 울면서 묻던 여자가 있었다는 것 정도를 알 수 있다.

2절은 “아주까리 호롱 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는 불같은 정이었소.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이다. 이 가사를 통해, 노래의 화자는 남자이고 이별주를 따라주는 사람은 술집의 여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남자는 여자의 귀밑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사랑의 맹세를 했으나, 여인은 그 사랑의 맹세를 믿지 못하고 언제 돌아오겠느냐고 물으며 울고 있다. 2절의 내용에서는 이 노래가 남녀의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아직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번지 없는 주막’ 화자는 술집에서 사귄 여인 못 잊는 남자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 최고의 히트곡을 작사한 작사가 겸 가수 반야월(1917~2012).
3절의 가사는 “깨무는 입술에는 피가 터졌소, 풍지를 악물며 밤비도 우는구려. 흘러가는 타관길이 여기만 아닌데, 번지 없는 그 술집을 왜 못 잊느냐”인데, 여기에서 비로소 주막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입술을 깨물며 이별의 슬픔을 참는 여인은 주막에서 술 시중하는 사람이고, 노래의 화자는 타향의 어느 술집에서 사귄 이 여인을 잊지 못하는 남자다. 3절의 가사를 통해 이 노래에서 말하는 주막이 술집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 노래의 가사는 유행가에 자주 등장하는 술집 여자와 나그네가 헤어지는 내용으로, 정을 맺은 술집 여인을 두고 떠나야만 했던 남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다. 입술을 깨물며 이별의 설움을 참는 가련한 여인과 어쩔 수 없이 헤어진 후 여인을 그리워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오랜 전통이 있다. 여기서는 이런 정도로 노래 가사의 의미를 보고, 이 노래에서 주막을 어떤 곳으로 묘사했는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이라는 표현은 아주 허술한 주막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허술한 주막에도 손님의 술 시중을 드는 여자가 있다. 여인이 손님에게 이별주를 따라주는 곳이 방인지 술청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문풍지가 있다는 것으로 보아 방인 것 같다. 그렇다면 1940년 무렵 이 노래의 작사자가 묘사한 주막은, 방이 따로 있고, 또 접대부도 있는 술집인 셈이다.

‘번지 없는 주막’은 그 말만으로는 초라한 술집을 연상시키는데, 실상은 그렇게 허술한 술집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이 노래의 작사자는 술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주막이라는 말을 썼을까? 아마도 주막이 술집보다 더 운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주막의 용례나 그 명칭의 유래를 알아보기 위해서, 조선시대 주막에 관한 내용이 있을 만한 자료를 뒤져봐도 주막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자료는 구하기 어려웠다. 주막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서민과 관련된 내용은 자료를 찾기란 쉽지 않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자신들의 일상을 기록해놓은 자료는 거의 없으므로, 서민에 관한 자료도 결국은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지식인들의 기록을 통해서 찾아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양반 지식인은 서민들의 삶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조선시대 서민의 일상에 관한 구체적인 모습을 알아보려고 하면, 자료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막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정조가 아끼던 학자 이덕무가 쓴 여행일기를 보게 됐다. 이덕무는 [청장 관전서]라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는데, 여기에는 그가 28세 때 서울에서 황해도 장연의 조니포까지 갔다가 온 일기가 들어있다. 그는 1768년 음력 10월 4일 서울에서 출발해서 벽제·개성·연안·해주·애정 등지에서 묵으면서 5박 6일 만에 조니포에 도착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17일에 출발해서 청석리·광탄∙금광천·청단·연안·개성·파주 등지에서 묵으면서 7박 8일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올 때는 사촌누이와 함께 오느라고 날짜가 더 걸렸다.

이 당시 이덕무는 벼슬을 하지 않을 때이고, 또 사적인 일로 여행하는 것이었으므로, 모두 주막에서 묵으면서 여행을 했다. 이 여행일기를 보면 첫날 그가 묵은 곳은 벽제점(碧蹄店)인데, 벽제(碧蹄)라는 지명은 옛날에 이곳에 벽사(甓寺)가 있었는데 그것이 와전돼 벽제가 됐다고 한다고 했다. 벽제의 지명에 관한 전설은 김천에서 온 배를 파는 장사꾼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말썽이 잦았던 곳


▎조선 후기 주막은 술집보다는 숙박시설에 가까웠다. 그러나 음식값만 받고 숙박료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음식점이라고 봐야 할 것 같기도 하다. 2008년 강릉시가 복원한 옛 주막터.
이덕무는 이 과일 장수와 함께 주막에서 자고, 다음 날도 이 과일 장수와 같이 가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듣는다. 과일 장수는 입담이 좋아서 지나는 길에 있는 여러 가지를 쉬지 않고 설명했고, 이덕무는 그의 얘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들었다. 과일 장수라면 양반은 아닌데, 이덕무는 이런 사람과 한 방에서 잔 것이다. 벽제 이후에는 마지막으로 묵은 애정(艾井)만 제외하고는 모두 주막에서 묵었고, 애정에서는 주막이 없어서 동네의 유지 집에서 묵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모두 주막에서 묵었다.

이덕무의 여행일기는 물론 한문으로 쓴 것인데, 각 지역에서 묵은 곳의 명칭은 ‘점(店)’이라고 썼다. 예를 들면 벽제점·한천점·광탄점·청단역점·해주서문점 등이다. 또 주막의 남자 주인은 점인(店人)이라고 했고, 여자 주인은 점녀(店女)라고 했다. 이덕무는 이 여행일기에서 ‘점(店)’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간단한 설명을 써놓았다.

“점(店)은 주막인데, 술과 숯의 발음이 비슷해 그대로 탄막(炭幕)이 돼버렸고 심지어 관청의 문서까지도 탄막이라고 쓴다.”

이덕무의 이 설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약간의 보충이 필요하다. 18세기 후반에 주막이라는 단어를 한자로 쓸 때는 주로 점(店)이라고 썼으므로, 한문으로 된 기록에서 ‘점(店)’이라고 쓴 것은 주막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주막은 어디서 온 말인가? 이덕무는 여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주막은 술막에서 온 것이다. 막(幕)은 허술하게 임시로 지은 집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술+막은 허름한 술집을 말하는 것이다. 술막의 ‘술’은 순우리말이므로, 한자로 술막을 표현하려면 주막(酒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18세기에는 ‘탄막(炭幕)’이라는 단어가 주막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이덕무는 주막과 탄막이 같은 의미가 된 것은 ‘술’의 발음이 ‘숯’과 비슷해서 술막이 숯막과 혼동됐고, 숯의 한자인 ‘탄(炭)’과 ‘막(幕)’이 합쳐져서 탄막이 됐다고 봤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관청에서 작성한 문서를 보면 주막과 함께 탄막도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수행원으로 1855년 북경에 갔었던 서경순은 중국의 술집에는 조선처럼 술 시중을 드는 여자가 없다는 말을 듣고는, 중국의 술집은 멋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울의 술집에서 멋지게 차려입은 한량들이 여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며 놀다가 때로는 싸움판이 벌어지는 것도 하나의 통쾌한 일이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술집은 말썽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그런데 주막은 술 취한 사람들끼리 다투는 정도가 아니라 도둑의 소굴이기도 했었다. 다산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에는 도적의 폐단을 막기 위한 방법을 써놓은 대목이 있는데, 다산은 도둑의 소굴로 주막을 지목했다. 정약용의 말을 들어보기로 한다.

정약용은 도둑들이 훔쳐오는 물건을 팔아주거나 그들의 뒤를 봐주는 사람들은 주로 고을에 가까운 주막에 머문다고 했다. 서울이나 큰 고을 근처의 주막에는 많은 사람이 수시로 드나들기 때문에 비록 낯선 사람이라도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둑들은 훔쳐온 물건을 이 주막에 와서 장물아비에게 전달하고, 또 정보도 서로 교환한다. 도둑을 막기 위해서는 주막을 엄격하게 단속해서 이들이 숨어 있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정약용은 말했다.

외국인 선교사들 눈에 비친 주막의 모습

다산의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꽤 여러 가지가 있다. 일찍이 선조 7년(1574)에 유희춘이 임금에게 강의하는 도중에 “근래에 도둑이 점점 불어나 경기도의 탄막은 나그네가 숙박하는 곳인데 도둑들이 엄습해 그 집을 불태웠다고 하고, 서울 안에도 저녁이나 밤사이에 노략질하는 수가 많다고 합니다”고 아뢴 것이 있다.

그리고 인조 16년(1638)에는 경기도 파주의 탄막에서 정부의 물건을 훔치면서 사람까지 해친 일이 있었다. 병조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파주는 서울과 가까운 곳이고 탄막은 관청의 바로 앞에 있는데도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으니, 철저히 조사할 것을 요청한다. 병조의 보고에서 눈여겨볼 것은 “도둑놈들이 도적질을 자행해 재물을 가지고 가는 사람을 전부터 자주 살해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그리고 손님만 피살되고 주인은 상처를 입지 않는 것도 이상합니다”는 말이다. 이때 병조에서도 탄막의 주인이 이러한 범죄와 연관이 있다고 본 것이다.

영조 4년(1728) 경기감사 이정제가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도둑들이 밤에는 주막에서 자고 낮에는 시장에 모여들므로, 착실하게 잘 살펴보겠습니다”는 말이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다산 정약용이 말한 것처럼 주막은 도둑들이 서로 연락하고 묵는 장소였던 것이 사실이다.

위에서 본 몇 가지 내용만으로는 조선시대 주막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보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주막과 관련된 글은 단지 주막에 묵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막의 모습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한 글이나 그림은 19세기 말부터 조선을 찾아온 외국인의 여행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뒤에 조선에 온 외국인이 쓴 조선 여행기는 상당히 많다. 이들은 조선을 여행하면서 어디선가는 숙박을 해야 했으므로, 여행기에는 대체로 주막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다.

그런데 외국인들의 주막 묘사는 자기 나라의 음식점이나 여관과 다른 점이나 뒤처진 점을 주로 기술하므로, 부정적이거나 우스꽝스럽게 써놓은 것이 많다. 그러나 이런 자료로 1900년 무렵 조선의 주막 모습을 자세히 그려낼 수 있으니, 참으로 귀중한 것이다. 여행기 이외에 외국어 사전을 통해서도 주막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사전을 보기로 한다.

1890년에 언더우드가 편찬한 한영사전에서는 주막을 한자로는 ‘酒幕’이라고 쓰고 영어로는 ‘hotel’ 또는 ‘inn’이라고 했다. 그리고 1897년에 게일(James S. Gale)이 편찬한 한영자전에서는 주막을 한자로는 ‘酒店’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inn’ 또는 ‘wineshop’이라고 했다. 언더우드는 주막을 주로 여관의 개념으로 썼고, 게일은 여관이나 술집이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언더우드의 영한사전에서 hotel이나 inn의 항목을 보면, 한국어로 ‘주막·탄막·술막’ 등을 함께 나열해놓았다. 탄막(炭幕)이나 술막도 주막과 같은 의미로 본 것이다.

조선 말기 외국인의 여행기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아마도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들(Korea & Her Neighbours)]일 것이다. 비숍의 책에는 여러 군데 조선의 여관을 묘사한 대목이 나오는데, 특히 제10장의 [한국의 조랑말-한국의 길과 여관]에서 상세하게 그려놓았다. 서울에서 원산으로 가는 도중에 비숍이 묵은 ‘사방거리’는, 현재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에 있는 지명이다. 비숍이 여관(inn)이라고 한 것이 바로 주막이니, 비숍의 묘사를 통해 주막의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큰 고을의 안에 있는 주막은 규모가 좀 크고, 마을 밖에 있는 것은 길가의 오두막이나 다름없는 허름한 집이다. 주막의 방에는 여러 명이 함께 잠을 자는데, 대체로 방은 지저분하고 벌레가 많다. 따로 자고 싶은 손님은 안방을 빌려서 자기도 한다. 방값은 따로 받지 않고 식사 요금만 지불한다. 손님에게 제공하는 음식만이 아니라 말이나 노새의 여물도 쑤기 때문에 방은 언제나 너무 뜨겁다.

음식값만 내면 숙박 가능… 요금은 매우 저렴

비숍을 도와주려고 함께 갔던 밀러가 어느 날 얘기한 것을 보면 “나는 마당에서 자고 싶었으나, 주인이 호랑이가 무서우니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가로 3m, 세로 2.4m의 뜨거운 방에서 일곱 명의 손님과 함께 잤는데, 여기에는 고양이와 날짐승도 함께 있었다”고 자신의 상황을 묘사했다. 온돌방이 너무 뜨거운 것이 당시 외국인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는지, 대부분의 외국인 여행기에는 이 내용이 들어 있다.

비숍은 이 주막에서 주인 아내의 호의로 안방을 빌려서 묵었다. 그녀도 이날의 일을 적어놓았는데, 호랑이 때문에 문을 열어놓을 수는 없고, 방바닥은 너무 뜨거워서 질식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작은 주막에는 마구간도 같은 지붕 밑에 있어서 밤새도록 말이 서로 싸우고 마부들이 나와서 떠드는 소리 때문에 비숍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도 써놓았다.

조선의 주막에 대한 이사벨라 비숍의 이와 같은 묘사는, 대체로 다른 외국인이 쓴 여행기의 내용과 일치한다. 외국인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여러 명이 함께 한 방을 쓰는 것과 방이나 주변 환경이 지저분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방값을 따로 받지 않고 음식값만 받는데, 그 요금이 매우 싸다는 점도 조선 주막의 하나의 특징으로 거론했다.

조선 후기의 주막은 술집보다는 숙박시설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음식값만 받고 숙박료는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숙박시설이라기보다는 음식점이라고 봐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이 점이 조선시대 주막의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술과 음식을 파는 곳도 주막이라고 하고, 여행객이 말이나 노새와 함께 묵는 곳도 주막이라고 했다는 것 또한 흥미 있는 점이다. 주막과 관련된 그림이 여러 장 남아 있으니, 이런 그림과 함께 주막 관련 글을 잘 살펴보면, 주막의 정확한 모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주막은 푸근하면서도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과거의 이미지 중 하나인데, 이와 같은 주막의 이미지는 실제와는 다른 허상일 뿐이다. 유행가는 이런 허상을 적절하게 잘 이용해서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것을 하나의 특징으로 삼는데, ‘번지 없는 주막’은 이런 유행가의 속성을 유감없이 잘 보여주는 노래다.

※ 이윤석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30여 종의 [홍길동전] 이본(異本)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30여 권의 저서와 8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204호 (2022.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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