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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3) 거창 감악산에서 

 

백의의 운무꽃 산자락에 휘날려, 평생 헤매 찾던 무릉도원 아닐까

미국 애리조나 사막 한가운데 은밀하게 숨겨진 UFO 비행장처럼 높은 산들이 빙빙빙 거창 감악산을 에워싸고, 붉은 해를 잉태한 동쪽 하늘의 아름다운 첩첩 산들을 축복하며… 어여쁜 선녀들이 하얀 드레스를 입고, 백의의 운무꽃을 산자락에 휘날리며, 나빌레라 승무를 추고 있었다.

그 광경이 얼마나 신비롭고 멋진 장관이던지…. 신혼 첫날밤 야릇한 황홀경처럼 육신이 몽롱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환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쩌면 여기가 평생을 헤매 찾던 그 무릉도원이 아닐까?


싱그러운 새 봄 새 아침!

거창 감악산 952m 정상, 또 다른 이국적인 세계에서는 무수한 생명체가 영롱한 아침 햇살을 솜사탕처럼 먹고 있었다.

소위 우리 인간들이 말하는 광합성 작용으로 나무들이 태양에너지를 씹으면서 화학반응이 일어나, 산소 탄수화물 등의 부산물이 만들어지면서 생태계의 거대 용광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맞물려서 톱니바퀴처럼 돌고, 마치 악어의 깊은 눈물 속 미묘한 고요처럼, 펄펄 끓고 있는 생태계의 용광로가 아름답고 경이롭게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광합성이 모든 생명 에너지의 씨앗으로 우주의 삼라만상은 한 몸뚱이, 한 가족, 공동 운명체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감악산은 이런 대자연의 자연미에 과학적인 인공미가 더해져 색다른 맛도 났다.

높고 아름다운 산들이 겹겹이 에워싼 천혜의 요새로, 방송국의 송신탑, 작은 천문대, 한가한 바람들이 풍력 발전기를 꽤 부리며 돌리고, 이름 모를 야생화 귀여운 새들이 인공적인 조형물과 어울려 이국적인 맛을 풍겼다.


어찌 그 정점 한가운데 홀로 앉아 오묘한 자연의 순리를 감상하고 미지의 세계를 흠모하며 낭만의 나래를 펼치는데 행복과 즐거움이 밀려오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서 최근 OTT로 본 [마리아]라는 제목의 영화가 내 마음의 고요와 행복을 자꾸 깨뜨렸다. 유럽의 작은 소도시 수학을 잘하는 평범한 11살의 소녀 마리아 이야기다.

체육 시간, 운동보조 역할로 사용된 재즈 행진곡 등의 경쾌한 리듬 음악이 하나님을 불경스럽게 만드는 불량 음악이라며, 자기 딸을 체육수업시간에 빼달라는 극단적으로 종교를 믿는 엄격한 엄마 슬하에서 자란다.

마리아는 오직, 그분의 말씀이 참 진리로 모든 삶의 목적과 방식이 그분만을 따르고 순응하다 그분 곁으로 가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며 훈육 받고 교육된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친구들과의 우정도 다 부정되고 이단아가 되어… 핍박·순교·부활·재림·영생의 삶의 궤적에 어린 소녀 마리아가 오직 빨리 천국에 가기 위해 굶어 죽어가는 과정을 대비해 오버랩시켜,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고 죽음을 왜소화하면서, 싸구려 거룩함을 창조한다.

인간의 외곬적인 신념과 교육이 얼마나 비참한 파멸·허무로 몰아넣는지를 영화는 잘 보여준다. 부활하지 못한 어린 딸의 싸늘한 시신 앞에 결국 통곡하는 어머니의 눈물…. 니체의 말처럼 신은 죽었다가 아니라, 신이 죽어 얼마나 행복한가를 생각했다.

그 순간… 부지불식간에 감악산의 아름답던 운무도, 상쾌한 새 아침도 사라지고 약육강식 전쟁터만 남았다.

어쩌면 인간사란 태양에너지의 매직쇼에 초대된 광대로 꼭두각시처럼 연기하다가, 그 역할이 끝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허망한 그림자가 아닐까?

등산은 사람을 생각하는 철학자로 만들어 거창의 멋진 관광지 창포원, Y자 출렁다리, 수승대를 감상시킨 후, 나를 일상으로 되돌려 놨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0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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