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2)] 독립만세운동 불씨 일으킨 신한청년당 

2·8 독립선언문 선포하고 3·1운동 일어나… 전 세계에 독립 의지 보여줘 

여운형, 미국 특사 지원 약속에 파리회의 대표 파견하고 청원서 작성
국내·일본·연해주·만주로 파견된 밀사들, 자금 모으고 독립 운동 고취


▎2·8독립선언의 주역들. 독립선언문은 전조선청년독립단 (全朝鮮靑年獨立團) 명의로 춘원 이광수가 초안을 작성했다. / 사진:재일본한국YMCA
여운형은 1929년 7월 상해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한양으로 압송된 여운형을 경기도 경찰부의 도순사(道巡査) 월천사랑(越川四郞)이 신문(訊問)했다. 본적, 주거, 신분, 직업, 씨명, 연령을 묻는 신문에 그는 “본적은 경성부 연지동인데 번지는 자세하지 않고, 주거지는 상해 프랑스 조계 노신부로(勞神父路) 390번지이며, 신분은 양반, 직업은 상해 복단대학 교사, 씨명은 여운형, 연령은 금년 43살”이라고 대답했다. 종교는 무엇인가라는 신문에는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만 지금은 아무런 믿음도 없습니다”라고 진술했다. 1910년대까지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가 1920년대 들어 신앙을 잃고 무신론자가 됐음을 고백한 것이었다. 특히 1920년대 당시 공산주의에 경도해 있었다.

한편 여운형은 조선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동기와 일시를 묻는 신문에 “1919년 1월경부터입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평화회의가 개최되어 민족자결 사상이 발흥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대표자를 파견하여 조선의 해방을 호소하고자 했던 것이 동기가 되어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뒤이어 당시 상황을 묻는 신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자세한 진술을 남겼다.

윌슨 미 대통령, 상해에 특사 파견해 민족자결주의 선전


▎여운형은 독립청원서 2장을 작성해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하려 했으나 도달하지 못했다. 이후 전 세계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다.
“1918년 1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대표 크레인(Chales Crane)이 상해에 왔습니다. 당시 중국인들의 환영회가 상해의 칼튼 카페에서 개최되었는데 모인 사람이 1천여 명이었고 나도 참석자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크레인은, 이번에 파리에서 개최되는 세계평화회의는 각국 모두 중대한 사명을 띠고 있고 그 영향 또한 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각국 간의 감정, 오해 등을 없애고 참된 세계평화를 불러오며, 또 피억압민족에 대하여 그 해방을 강조함으로써 피압박민족에게는 해방을 도모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이기에, 중국에서도 대표를 파견하여 피압박의 상황을 설명하고 그 해방을 도모해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 연설을 듣고 매우 감격하였기에 환영회가 끝난 후 곧바로 크레인에게 면회를 요청하였습니다. 나는 지금의 연설을 듣고 매우 감동을 받아, 우리들도 피압박민족으로서, 이 기회에 해방을 도모할까 하므로, 대표를 파견하여 조선의 사정을 개진하고 각국의 동정을 얻어 해결할까 합니다만, 대표 파견에 지장이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지장이 없고, 자신도 충분히 도와줄 것이므로 대표를 꼭 파견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2통의 영문 청원서를 작성하였습니다.(하략)” ([피의자신문조서 (제1회)] (1929.7.18., 경기도 경찰부), [몽양여운형전집] 1, 몽양여운형선생전집발간위원회 편, 한울, 1991)

정병준 교수의 [3.1운동의 기폭제-여운형이 크레인에게 보낸 편지 및 청원서](역사비평 119쪽, 2017)에 의하면, 크레인은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최측근 자문이었다. 크레인은 윌슨 대통령이 프린스턴대학 총장으로 재임하던 시절부터 친밀한 관계였으며, 1912년 대통령선거 당시 가장 많은 기부금을 냈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하자, 윌슨 대통령은 크레인을 동북아 특사로 파견해 자신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를 선전하게 했다.

크레인은 하와이, 필리핀, 일본, 조선, 만주를 거쳐 1918년 11월 26일 상해에 도착했으며 크레인 특사 환영회가 거창하게 열렸다. 다음날 즉 11월 27일 점심때에도 칼튼 카페에서 환영 오찬회가 열렸다. 환영회 연설에서 크레인 특사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적극 선전하면서, 중국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호소하면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상해의 중국인들은 이 같은 크레인 특사의 연설을 들으며 희망에 벅차 환호했다.

여운형이 경찰 신문에서 한 진술은 바로 11월 27일 점심때 칼튼 카페에서 열렸던 크레인 특사 환영 오찬회에 여운형도 참석했다는 의미다. 그는 “파리강화회의가 피압박민족에게 해방을 도모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크레인 특사의 연설에 크게 고무됐다. 연설이 사실이라면,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보내 호소하면 독립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대에 들뜬 여운형은 오찬 환영회가 끝난 후 개인적으로 크레인 특사를 찾아 조선 사람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다면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크레인 특사는 자신이 도와줄 수 있겠다고 대답했는데, 이 대답은 다분히 외교적 수사였다.

파리강화회의는 근본적으로 승전국인 연합국이 패전국들을 처리하기 위한 회의였다. 여러 승전국 중 하나인 미국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회의가 아니었다. 게다가 일본은 승전국 중의 하나였다. 그러한 일본이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식민지 조선을 군말 없이 독립시켜 줄 리가 없었다. 다른 승전국인 영국이나 프랑스의 식민지도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군말 없이 식민지를 독립시켜야만 하는 나라는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이었다. 그런데도 여운형은 크레인 특사의 연설에 크게 고무돼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만 파견하면 곧 조선이 독립할 것으로 기대했다. 냉엄한 국제 현실을 지나치게 희망적으로 판단했다.

여운형, 냉엄한 국제현실을 지나치게 희망적으로 판단


▎1919년 파리평화회의 한국민족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이 작성한 독립청원서 비망록.
여운형은 크레인 특사 면담 직후 장덕수를 찾아 갔다.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한 장덕수는 중국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논의하기 위해 1918년 5월경 상해로 왔다. 여운형의 전갈에 고무된 장덕수는 2박 3일에 걸쳐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했다. 그 초안을 여운형이 수정해 1918년 11월 29일 완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2통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다. 하나는 크레인 특사를 통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이고, 또 하나는 상해의 미국 언론인 토마스 밀러드(Thomas Millard)를 통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한 용도였다.

독립청원서의 청원자는 신한청년당 총무 여운형 명의였으며 날짜는 1918년 11월 29일로 했다. 2통의 청원서는 여운형이 크레인과 밀러드에게 직접 전달했다.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참전으로 정의, 인도, 자유에 기초한 승리가 되었습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국제연맹이 세계 평화의 유지기관으로 제시되었는데, 한국과 일본 문제는 동양 평화 및 세계 평화와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중략)”로 시작했다. 특히 일본의 강압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 피식민지 조선인들의 처참한 상황을 등을 설명했다. 이어 조선의 독립은 동양 평화는 물론 세계 평화에도 반드시 필요하므로 꼭 도와주기를 요청하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이 독립청원서는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당사자인 크레인 특사가 전달하지 않았다. 아마도 크레인 특사는 신한청년당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체가 보내는 청원서라고 판단해 전달하지 않았던 듯하다.

밀러드에게 부탁한 독립청원서 역시 파리강화회의에 전달되지 않았다. 밀러드가 일본 경찰에게 독립청원서를 탈취당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장덕수와 여운형이 큰 기대를 걸고 작성한 2통의 독립청원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다고 청원서 작성이 전혀 무의미한 결과를 가져온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매개로 역사적인 성과가 있었다.

독립청원서 전달 이후, 여운형은 신한청년당 당원들과 함께 전 세계인들에게 조선 사람들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계획 두 가지를 세웠다. 첫째는 신한청년당 대표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조선독립을 호소하자는 계획이었다. 둘째는 파리강화 회의에 파견한 대표의 활동을 성원하고 나아가 조선 사람들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거족적 독립운동 추진 위해 신한청년당 밀사 파견


▎1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정상들(왼쪽부터). 이 회의에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설명하고 국제연맹 창설을 제안했다.
첫 번째 계획에 따라 김규식이 파리 밀사로 선정됐다. 미국에서 유학했고 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규식이 최고의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1919년 2월 1일 파리를 향해 출발했다. 여비 등 필요한 자금은 신한청년당 당원인 김철이 한양으로 가서 천도교 교주 손병희로부터 3만원을 받아와 충당했다. 이미 파리에서는 1919년 1월 18일부터 강화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전 세계를 향해 일본의 만행을 성토하고 조선독립을 호소했다.

한편으로 두 번째 계획에 따라 국내, 만주와 연해주, 일본 등에도 밀사가 파견됐다. 이들은 파리 밀사 김규식의 출발에 앞서 1919년 1월 말경 파견됐다. 국내에는 서병호, 김순해, 선우혁, 김철 등이 밀사로 움직였다. 만주와 연해주에는 여운형이, 일본에는 장덕수가 밀사로 갔다. 이 밀사들은 국내, 만주와 연해주, 일본의 동포들에게 윌슨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를 설명하고, 파리에 파견한 대표 김규식의 성공을 위해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아울러 파리 밀사 파견에 필요한 운동자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그런데 국내 밀사로 파견된 서병호, 김순애, 선우혁, 김철 등은 개신교 신자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서병호는 한국사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소래교회를 개척한 서상조의 아들로서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한국인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기도 했다. 서병호는 금릉대학에 유학해 여운형의 후배가 됐는데, 선배 여운형의 권유로 신한청년당에 가입했다. 서병호의 아버지 서상조, 그리고 큰아버지 서상륜은 소래교회의 개척자이자 개신교 장로교의 유력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또한 서병호는 김구례(金求禮)의 남편인데, 김구례는 소래교회의 출석교인이자 만석꾼이던 김성섬(金聖蟾)의 딸이었다. 또한 안창호와 의형제로 신민회 지도자였던 김필순(金弼淳)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한편 서병호의 부인인 김구례는 국내 밀사로 파견된 김순애의 언니였다. 그 김순애 또한 파리 밀사로 파견된 김규식의 부인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파리 밀사 김규식과 국내 밀사 서병호는 동서지간이었다. 이들 서병호, 김규식 그리고 그들의 처인 김구례, 김순애는 혼인관계로 얽혀있을 뿐만 아니라 장로교 신자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국내 밀사 김순애는 훗날 한국의 여성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주인공으로 성장했다.

2·8독립선언문 선포 이어 국내서 3·1운동 이끌어내


▎운동 당시 종로의 만세 시위.
선우혁 역시 금릉대학에서 유학해 여운형의 후배가 됐는데, 선배 여운형의 권유로 신한청년당에 가입했다. 물론 선우혁도 독실한 장로교 신자였다. 김철은 이미 국내의 손병희로부터 3만원의 독립자금을 받아와 파리 밀사 김규식의 경비에 충당한 경력이 있었고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처럼 학연, 신앙, 혈연 등으로 단단하게 결합한 김규식, 서병호, 김순애, 선우혁, 김철 등은 그 누구보다 믿을만한 사람들이기에 파리 밀사와 국내 밀사로 선정됐다고 이해할 수 있다.

국내, 만주와 연해주, 일본에 파견된 밀사들은 한국독립운동사상 최고의 결실인 3.1독립만세운동을 이끌어냈다. 국내 밀사들은 개신교 지도자들과 민족지도자들을 만나 파리 밀사 김규식을 성원하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조선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거족적 만세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 결과 개신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거족적 3·1운동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일본 밀사로 파견된 장덕수의 노력 역시 역사적인 결실을 가져왔다.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독립선언서가 선포됐다. 2·8독립선언문은 전조선청년독립단(全朝鮮靑年獨立團) 명의로, 춘원 이광수가 초안을 작성했다. “전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로 시작하는 2·8독립선언문은 최팔용, 이광수, 백관수 등 11명의 대표자 명의로 4개항의 결의문으로 끝을 맺었다.

결의문 중 3항은 “본단(本團)은 만국강화회의(萬國講和會議-파리강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도 적용하기를 청구함”이라고 쓰며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지만, 4항에서는 “전항의 요구가 실패될 때는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血戰)을 선언함”이라고 하며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불안감을 표하기도 했다. 2·8독립선언은 국내의 3·1운동에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는 면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광수 등 상해로 모인 독립운동가, ‘상해임정’ 토대


▎운동 이후 많은 민족지도자가 상해로 모였다. 자연스럽게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한편 만주와 연해주 밀사로 파견된 여운형 역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1919년 1월 20일 만주로 출발했다. 특히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지도자 여준(呂準)에게 편지를 보내 현 상황을 설명하고 단합할 것을 요청했다. 또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이동녕, 문창범, 박은식, 조완구, 정재관 등을 만나 현 상황을 설명하고 단합을 제안했다. 이후 여운형은 3월 6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상해로 귀환했다. 이 같은 여운형의 노력으로 만주와 연해주에서도 국내의 3·1운동에 호응해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렇게 국내, 만주와 연해주, 일본 등으로 파견된 밀사들의 노력으로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가 널리 알려졌으며 동시에 상당한 독립운동자금도 확보했다. 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해로 집결하게 됐다. 그중 한 사람이 춘원 이광수였다. 이와 관련해 이광수는 1932년 1월 1일 발간된 [삼천리](제4권 제1호)에 ‘나의 해외 망명시대, 상해의 2년간’이란 글을 발표했는데, 그 글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광수가 도쿄에서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할 때 와세다 대학 3학년이었다. 이광수는 독립선언서 초안과 함께 영문번역문을 1919년 2월 초하룻날 새벽에 완성했다. 매서운 눈보라가 날리는 그 날 새벽에 그와 일본 유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 새벽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릴 때마다 일본 경찰이 들이닥치는 줄 알고 학생들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다음날 즉 2월 2일에 최팔용이 이광수에게 상해로 가라고 했다. 이유는 상해로 가서 2·8독립선언서를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광수는 즉시 도쿄를 떠나 상해로 갔다.

1919년 2월 5일 아침 이광수는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이광수의 [나의 고백]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그는 장덕수와 함께 자취하던 조동호를 찾아갔다. 이층에 있는 조동호의 자취방에는 침대 두 개가 있었고, 그중 하나를 이광수가 썼다. 당시 발생한 에피소드로 이광수가 도착하던 날 밤, 조동호는 이광수의 주머니를 털어 소주를 사 마시고 취해서 방바닥에 오줌을 싸기까지 했다고 한다. 2월 8일이 되자 이광수는 상해의 유력한 언론사를 찾아 도쿄의 2·8독립선언서를 알렸다. 상해 언론사는 처음에는 이광수를 믿지 않다가 다음날 도쿄의 2·8독립선언서가 언론에 알려지면서 그를 유력한 취재원으로 대접하기 시작했다. 이후 국내에서 3·1운동이 폭발하면서 수많은 민족지도자가 상해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럽게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205호 (2022.04.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