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15)] ‘과메기’로 전국적 스타가 된 청어의 비밀 

“맛이 담박, 산란하러 올 때는 바다를 덮을 정도” 

장기 보존 위해 대가리 자르고 배 갈라 내장 제거한 다음 건조
정조 때 영일현의 조정 진상 물품 중 건문어와 함께 관목청어도


▎경북 영덕군 영덕읍 창포리 해안에서 어민들이 과메기의 원조 격인 청어과메기를 말리고 있다. 과메기는 청어의 눈을 꼬챙이에 꿰어 말렸다는 뜻의 ‘관목(貫目)’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60~70대 중에는 어릴 때나 젊은 시절에 청어를 먹어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외국에서 먹어보거나 통조림을 먹은 것이 아니라 우리 바다에서 잡은 청어를 많은 지역에서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필자가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수산물에 대해서 배울 때, 청어는 식용 이외에 기름을 짜거나 비료로도 쓰는 아주 흔한 생선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흔하다고 알려진 생선을 실제로는 보지 못하다가 2010년 무렵에 비로소 처음으로 국내산 청어를 맛볼 수 있게 됐다.

조선시대에도 청어는 이렇게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바닷물고기였다. 어떤 때는 주체할 수 없이 많이 잡히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청어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근래에 청어가 다시 돌아오자, 먹거리로서 청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자연히 청어에 관한 얘기도 많아졌다. 그리고 ‘과메기’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청어는 상당히 익숙한 생선이 됐다.

지나친 화장 비아냥거릴 때 “청어 굽는 데 된장 칠하듯”


▎겨울철 별미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과메기. 주로 청어나 꽁치를 말려서 만든다.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인 필자는 고전문학 작품의 내용을 현대어로 옮기면서 자세한 주석을 붙이는 작업을 많이 해왔다. 지금까지 해온 고전 작품의 주석 가운데 가장 재미있던 것은 우리나라 고전소설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춘향전]이다. [춘향전]에는 19세기 서울의 다양한 서민 문화를 보여주는 내용이 많이 들어 있어서, 조선 후기 서울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런데 작품의 내용 가운데 지금은 이미 사라져버려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 있고, 또 어떤 것은 현재 남아 있기는 해도 실제로는 쓰이지 않는 것도 있다. ‘청어’도 그런 것 중의 하나다.

변 사또가 어떤 기생을 비난하는 장면 중에 “이마 앞 꾸민다고 뒤통수까지 머리를 생으로 다 뽑고, 머릿기름 바른다고 청어 굽는 데 된장 칠하듯 하고, 입술연지를 벌겋게 왼뺨에다 칠하고, 분칠을 회칠하듯 하고, 눈썹 꾸민다고 양편에 똑 셋씩만 남기고 다 뽑고”라는 대목이 있다. 기생의 치장을 묘사한 이 대목의 내용은, 모두 지나치게 꾸민 것을 이르는 말이다.

머리에 기름을 너무 많이 발랐다는 비유를 할 때 ‘청어 굽는 데 된장 칠하듯 하다’는 표현을 썼다. 이 대목을 통해 청어를 구울 때는 된장을 매우 많이 발랐었다는 사실과 함께 ‘청어 굽는 데 된장 칠하듯’이라는 속담은 지나치게 화장한 것을 비아냥거릴 때 쓰는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도령이 처음으로 춘향의 집에 찾아가서 술상을 받는 장면에는 “약주가 한 병이요, 고추장에 관목 찐 것, 감동젓에 무깍두기·열무김치 들기름 치고, 광주 분원 사기잔에 춘향이 술 부어 손에 들고, 도련님 약주 잡수”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에서 ‘광주 분원’은 현재 경기도 광주시에 있던 조선시대 관청에 납품하는 그릇을 굽던 곳이므로, 춘향이 집에서 쓰는 술잔이 고급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서울 사람들이 먹던 깍두기는 감동젓깍두기였고, 열무김치에는 들기름을 쳐서 먹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감동젓’은 곤쟁이젓을 말하는 것으로, 곤쟁이는 새우처럼 생긴 작은 갑각류다.

그런데 ‘고추장에 관목 찐 것’은 무엇인가? 관목(貫目)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말린 청어’라고 설명을 붙여놓았다. 그렇다면 ‘고추장에 관목 찐 것’은 말린 청어를 쪄서 고추장을 찍어 먹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말린 청어를 다시 물에 불려서 고추장을 발라서 찐 것인가? 또는 다른 방식인가? 맛있는 요리라는 것은 분명한데, 여러 음식 관련 자료를 찾아봐도 ‘고추장에 관목 찐 것’이 어떤 요리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려웠다.

이 청어 요리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여러 문헌을 살펴봤다. 아래에서 그동안 읽은 문헌에서 본 청어 얘기 몇 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청어는 한자로는 청어(靑魚)라고 쓰는데, 때때로 청어(鯖魚)라고 쓰기도 한다. 청어를 순우리말로는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알 수 있는 자료로는 [훈몽자회]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최세진이 1527년에 어린이의 한자 학습을 돕기 위해 간행한 책으로 한자의 음과 뜻을 적어놓은 것이다. 여기에서 ‘鯖’ 자를 보면 ‘비 쳥’이라고 돼 있는데, 현재의 표기로 한다면 ‘비웃 청’이다. 그러니까 16세기에 청어를 ‘비웃’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비웃이라는 단어는 서울과 서울 근처에서만 쓰이는 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몇몇 유명 인사의 서울에 관한 수필을 보면 이 비웃(청어)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데, 대체로 비웃이라는 말은 이들에게 생소한 어휘였다.

울산이 고향인 국어학자 최현배의 수필 [‘사주오’ 두부장수]를 보면 “하룻밤을 자고 나서 그 이튿날 이른 아침에 들창 밖에서 들려오는 각종 행상의 외치는 소리는 참으로 어린 시골내기의 귀를 찔러 놀라게 했다. ‘생선 비웃들 사려!’, ‘무우드렁 사려!’, ‘맛있는 새우젓 사오!’ 어느 소리가 하나 귀에 익은 게 없다. 모두 신기 그것이다. 갓 온 시골내기는 먼저 온 영남 친구더러 그 외침의 뜻을 물으며 서로 보고 웃었다”고 해 서울에 처음 왔을 때 비웃을 사라고 외치는 장사꾼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을 말했다.

16세기 이전 서울에서는 ‘비웃’으로 불려


▎청어는 우리나라 근해에서 잡혀온 친숙한 어종으로 값이 싸고 맛이 좋다. 굽거나 찌거나 말리거나 등 다양한 방법으로 먹었다.
부산이 고향인 수필가 김소운은 ‘서울 고현학(考現學)’이라는 수필에서 “서울서 살은 햇수가 그다지 길지는 않으나, 같은 사람의 기억으로도 옛 서울에는 잊히지 않는 생활의 풍물시가 있었다. 첫새벽 베갯머리에 들려오는 삐걱삐걱 물지게 소리, ‘무 드렁!’, ‘생선 비웃드렁!’ 하는 장사꾼의 목소리, 밤거리에서 듣는 군밤 장수의 목청을 구을른 군밤타령은 해학과 익살로 엮어진 일편의 풍자시이기도 했다”고 했다. 김소운도 비웃을 파는 장수의 외침이 잊히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고향이 황해도인 시인 노천명도 수필 ‘시골뜨기’에서 “서울은 정말 별난 곳이라 생각됐다. 별난 것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우리 게와 달라 무슨 장사들이, ‘비웃드렁 사려! 움파 드렁 사려!’ ‘드렁’ 하며 외치고 다니는 것도 재미있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달음박질 뛰어나가 문밖에 가 서서 구경을 했다”고 해 어린 소녀가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받은 인상을 회상했다.

세 사람이 얘기한 서울의 모습은 대체로 1910년대다. 세 사람 모두 서울에 대한 인상에서 ‘비웃드렁 사려’라고 외치는 장사꾼의 소리가 신기했다고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는 청어를 비웃이라고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비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비유어(肥儒魚)·비의청어(飛衣鯖魚)·비우어(肥愚魚)·비오(脾惡)·유어(儒魚) 등이라고 썼는데, 이런 단어는 모두 ‘비웃’과 비슷한 한자음이다. 이제는 서울에서도 ‘비웃’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서 이 단어가 없어지다시피 됐지만, 16세기 이전부터 청어를 가리키는 말은 비웃이었다.

조선 후기에 수산물을 다룬 책이 몇 가지 전하는데 김려의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1803),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1814), 서유구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1820년 무렵) 등이다. 이런 책에는 모두 청어 항목이 수록돼 있다.

김려는 촉망받는 인물이었으나, 천주교 사건에 연루돼 1797년에 귀양을 가게 된다. 첫 귀양살이를 한 곳에서 문제를 일으켜 1801년에 경상도 진해로 귀양지를 옮기게 됐는데, 이곳에서 [우해이어보]를 썼다. 우해는 진해의 다른 이름으로, 김려는 진해에서 본 어류 72종에 대한 여러 가지 내용을 이 책에서 다뤘다. 진해에서 나는 청어를 참청어[眞鯖]라고 하면서, 동해나 서해에서 나는 청어와는 다르다고 했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형으로, 1801년 천주교 사건에 연루돼 전라도의 흑산도로 유배를 갔을 때 [자산어보]를 썼다. 그는 흑산도 근해의 어류 155종에 대해서 기술했는데, 청어 항목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청어는 맛이 담박하다. 산란하러 올 때는 바다를 덮을 정도로 많다. 청어는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몇 가지 종류가 있다.” 그리고 ‘관목청어’를 따로 기술해서, 청어 말린 것을 ‘관목(貫目)’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서유구는 판서와 대제학 등을 역임한 인물로, 그는 [임원경제지]라는 방대한 저술로도 유명하다. [난호어목지]에서는 어류 55종의 명칭을 설명했고, 이 내용은 [임원경제지]의 [전어지(佃漁志)]에 대부분 인용돼 있다. [난호어목지]에서는 각 어류의 이름에 한글로 음을 붙여놓았기 때문에 어류의 이름을 쉽게 알 수 있어서 매우 편리한데, 청어(靑魚)에는 ‘비웃’이라고 붙였다.

청어살 설치한 곳에 세금 매겨… 조선 후기 폐단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배우 설경구가 [자산어보]의 저자 정약전 역을 맡아 열연했다.
서유구는 중국의 청어가 민물고기인 데 비해 우리나라의 청어는 바닷고기라고 했고, 일본에서 말하는 청어는 우리나라 것과 같은 종류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청어를 반으로 갈라서 말리는 데 비해, 조선에서는 통째로 말리는 것이 다르다고 했다.

이와 같은 수산물 전문 저술이 아니더라도 청어를 언급한 서적은 많다. 허균의 [도문대작]에서는 우리나라 청어를 네 가지로 분류했는데, 동해 북부·경상도·전라도·황해도 해주 등지가 각기 그 산지라고 했다. 이렇게 청어의 산지를 함경도·경상도·전라도·황해도로 분류하는 방식은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익은 청어가 많이 잡히는 곳으로 경상도의 울산과 장기 사이와 함께 황해도 해주를 꼽았다.

조선시대에는 어업은 주로 바다에 설치해놓은 어살 등을 이용했는데, 어살은 서해안처럼 간만의 차이가 심한 지역에 싸리나무나 대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물고기를 잡는 장치다. ‘살’은 화살처럼 가늘고 곧은 나무라는 의미로 한자로는 전(箭)이라고 쓴다.

청어는 주로 청어살(靑魚箭)을 이용해서 잡았다. 바닷가에 이 청어살을 설치한 곳이 많았는데, 여기에는 무거운 세금이 부과됐다. 이 가운데 못 쓰게 되거나 고기가 잘 잡히지 않더라도 세금을 피할 수 없었으므로, 조선 후기에 이 문제는 여러 가지 세금의 폐단 가운데 하나였다.

소설가 김동리는 “내 고향은 경주다. 경주에는 관메기라는 것이 있었다. 청어 온 마리를 배도 따지 않고 소금도 치지 않고 그냥 얼말린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동안 인생 반백년에 한식은 말할 것도 없지만, 양식·왜식·중식, 갖가지 요리도 다 먹어왔어도 관메기회나 관메기죽 이상으로 맛있는 것을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수필을 쓴 시기는 1967년이다.

김동리는 청어 얼말린 것을 ‘관메기’라고 했는데, 요즈음 ‘과메기’를 말하는 것이다. ‘얼마르다’는 얼어가면서 차차 조금씩 마르는 것을 말하는데, 대관령이나 진부령의 황태덕장에서 명태를 말리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다만 황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명태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낸 다음 말리지만, 과메기는 청어를 통째로 말리는 것이 다르다. 현재 시중에서 판매하는 과메기는 대가리를 자르고,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한 다음에 건조한 것이다.

20세기 이전 문헌에서는 ‘과메기’라는 말 확인 안 돼

생선은 빨리 상하므로 예로부터 여러 가지 보관방법이 개발됐다. 청어도 예외가 아니어서 소금에 절이거나 말려서 장기 보존이 가능하도록 했다. 근래에 과메기는 술안주로 각광을 받고 있는데, 과메기가 이렇게 전국적으로 알려진 시기는 극히 최근이다. 필자는 1990년 무렵 경주에서 이 과메기를 처음 먹어봤는데, 이때의 과메기는 꽁치를 말린 것이었다. 그때까지 과메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먹어본 일도 없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꽁치로 만든 과메기였으므로, 청어 과메기는 더더군다나 알 수 없었다.

20세기 이전의 문헌에 ‘과메기’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했고, 말린 청어는 관목(貫目)이나 건청어(乾靑魚)라고 했다. 19세기 조선 최대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부엌의 살창에 청어를 매달아서 연기를 쐬어 상하지 않게 한 것을 연관목(煙貫目, 훈제 관목)이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관목(貫目)이라는 말은 건청어(乾靑魚, 말린 청어)를 말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정조 때 경상도 영일현(현재 포항시 영일군)에서 조정에 바치는 물품 중에 여러 가지 마른 생선이 있는데, 여기에는 건대구나 건문어와 함께 관목청어(貫目靑魚)가 들어 있었다. 현재도 과메기는 포항이 주요 생산지이니, 마른 청어는 조선시대부터 현재 영일만 지역이 유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청어에 관한 과거의 기록에 ‘고추장에 관목 찐 것’이 나오는지 찾아봤지만 끝내 볼 수 없었다. 20세기 후반 수십 년 동안 우리나라 바다에 청어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이런 음식의 맥이 끊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205호 (2022.04.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