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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2)] ‘황조가’ 노랫말처럼 살다 간 고구려 유리왕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결혼동맹으로 경제·군사 원조 받아 소서노 세력 이탈 공백 메워
불화 속에 태자 죽이고 쓴소리하는 공신 내쳐 정치적 고립 자초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인 유리왕 (BC 19~AD 18)은 ‘황조가’ 노랫말처럼 살다 갔다.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카메라에 포착된 꾀꼬리 가족.
가슴에 뭔가 북받치면 사람들은 노래로 풀곤 한다. 노래에는 인간을 북받치게 하는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다. 개중에 외로움은 인생의 본질을 이루고 노래와도 잘 어울리는 정서라고 볼 수 있다. 한국사에도 나온다. 먼 옛날 고구려에 외로움을 노래한 임금이 있었다. [삼국사기]에 그 노랫말과 뒷이야기가 실려 있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 / 암수 서로 정답구나. / 외로워라 이 내 몸은 / 뉘와 함께 돌아갈꼬.” 고구려 2대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다.

유리왕 3년(기원전 17) 겨울에 왕비 송씨(松氏)가 세상을 떠났다. 왕은 후처로 화희(禾姬)와 치희(雉姬) 두 여자를 들였다. 화희는 골천 사람의 딸이었고, 치희는 한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둘은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며 임금의 총애를 다퉜다. 보다 못한 유리왕이 양곡 땅에 동궁과 서궁을 짓고 화희와 치희를 따로 뒀다.

사건은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나간 사이에 벌어졌다. 두 후처가 대판 붙은 것이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으며 모진 말을 퍼부었다. “한나라 집안의 비첩(婢妾) 주제에 무례하기 그지없구나.” 비천한 첩이라는 모욕에 치희는 부끄럽고 한스러워 궁을 뛰쳐나갔다. 가출해서 본가로 돌아간 것이다. 유리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쫓아갔다. 하지만 치희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왕은 터덜터덜 혼자 돌아가는 길에 나무 아래서 휴식을 맛보며 고단한 심신을 달랬다. 때마침 황조(꾀꼬리)가 짝을 지어 주위를 날아다녔다. ‘하물며 꾀꼬리도 저렇게 암수 서로 정다운데, 임금은 의지할 사람도 없이 외로이 돌아가는구나.’ 북받치는 마음에 노래가 동했다. 유리왕은 꾀꼬리에 빗대어 처지를 한탄했다.

‘황조가’는 비류수를 따라 흐르며 고구려 사람들의 마음을 적셨다. 그런데 노래를 가만히 음미해보면 여인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기색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유리왕은 자신이 품고 사는 외로움을 노래한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일국의 군주로서 그이에게 숙명처럼 드리워진 불화와 고립을 노래의 호흡 속에 담은 것이다.

유리는 아버지 없이 태어나 자랐다. 주몽은 임신한 아내 예씨를 두고 부여를 떠났다. 졸본(卒本, 중국 랴오닝성 환런)에 이르러 과부 소서노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우고 승승장구했다. 그사이에 예씨와 유리 모자는 외로움을 삭이며 고생길을 걸었다.

어린 시절 유리는 마을의 천덕꾸러기였다. 소년은 어느 날 장난으로 물 긷는 아낙의 항아리를 깨고, 아버지가 없어서 못되게 군다는 말에 서러움을 토로한다. 어머니 예씨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버지 주몽이 남쪽 나라의 왕이 됐다고. 그리고 주몽이 후일을 기약하며 남긴 수수께끼를 전했다. “일곱 모가 난돌 위의 소나무 밑에 어떤 물건을 감춰뒀으니, 만약 아들을 낳거든 찾게 하시오. 그걸 갖고 오면 내 상속자로 인정하겠소.”

부러진 칼 들고 아버지 찾아간 유리


▎경북 포항시 호미곶 광장에서 열린 한민족 축전에 참가한 한 시민이 대형 삼족오(三足烏) 연을 날리고 있다. 삼족오는 태양 안에서 산다는 세 발 달린 상상의 까마귀로 고구려의 상징이다. / 사진:연합뉴스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유리는 산골짜기를 샅샅이 뒤졌다.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밑’이라면 그 물건을 산에 감췄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날이면 날마다 산을 오르내리면서 소년은 뭘 했을까? 고대 그리스의 목동이 음유시인이었듯이, 부여의 산골짜기를 누빈 소년도 노래를 지어 불렀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자연 속에서 즉흥적인 감정이 일면 사람은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훗날 ‘황조가’를 남긴 건 이런 내력 덕분이리라.

세월이 흘러 유리는 드디어 수수께끼의 물건을 찾아냈다.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밑’은 집에 있는 일곱 모 주춧돌 위의 소나무 기둥 밑이었다. 거기서 부러진 칼을 찾은 아들은 어머니를 대동하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유리가 들고 온 부러진 칼을 주몽이 갖고 있던 칼 조각과 맞춰보니 하나의 칼이 됐다. 그것은 고구려 왕의 상속자임을 입증하는 부절(符節)이었다.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유리는 하루아침에 고구려 태자로 거듭났다.

아버지 덕분에 임금이 됐지만, 유리왕은 정치적인 불화와 고립을 피할 수 없었다. 주몽에게 배신당한 소서노와 두 아들이 고구려와 결별하고 남쪽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졸본의 신하와 백성도 따라나섰다. 그들은 원래 소서노의 신민(臣民)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유리를 섬길 이유가 없었다. 졸본은 고구려가 일어난 도읍지다. 유력자와 신민들이 빠져나간 궁성에서 새 임금은 외로움에 몸부림쳤다.

유리왕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즉위 이듬해에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송양은 예전에 비류국의 왕이었는데 주몽과 치열한 힘겨루기 끝에 고구려에 복속한 자다. 비록 나라를 잃고 투항했지만, 그는 다물도의 주인이 돼 옛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몽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이 세력가를 고립무원에 빠진 젊은 왕은 등에 업어야 했다.

그 시절에 동맹을 얻는 가장 확실한 길은 결혼이었다. 유리왕은 아버지의 강력한 경쟁자와 결혼동맹을 맺어 소서노의 빈자리를 메꾸고자 했다. 물론 노회한 세력가는 이것저것 간섭하며 왕권을 억눌렀을 것이다. 임금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권세를 부렸을 것이다. 굴욕적이지만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힘이 생길 때까지는 섶에 눕고 쓸개를 씹을 작정이었다.

화희와 치희는 결혼동맹 은유


▎북한 평양직할시 역포구역에 있는 동명왕릉 전각 내부 벽에 그려진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벽화.
‘황조가’에는 신생국 임금이 부닥친 냉엄한 정치 현실이 깔렸다. 이 노래가 실린 [삼국사기] 유리왕 3년 왕비 송씨의 죽음으로 인해 그가 또다시 위기에 빠졌음을 알려 준다. 왕과 다물후 송양의 관계가 소원해졌을 게 뻔하다. 유리왕은 후원 세력을 더 확보하기 위해 얼른 새장가를 갔다. 결혼동맹으로 후처를 두 명이나 들였다. 그의 처지가 얼마나 급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후처들의 출신과 이름이 흥미롭다. 골천 사람의 딸 화희(禾姬)와 한나라 사람의 딸 치희(雉姬)다. 이름에 ‘벼 화(禾)’ 자와 ‘꿩 치(雉)’ 자를 썼다. 실제 이름이 아니다. 아마 출신 세력을 상징하는 이름일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은유의 암호가 걸려 있다. 그 암호를 풀고 실상을 추리해보면 어떨까?

화희는 벼농사를 크게 짓는 부족의 여인이었을 것이다. 골천은 그해 유리왕이 이궁(離宮)을 지은 곳이다. 이궁은 왕이 순행을 나가 임시로 머무는 거처다. 그는 경제력 있는 농경 부족을 찾아가 충성 맹세를 받고 부족장의 딸을 후처로 삼았을 것이다. 임금이 결혼을 잘하면 나랏일을 도모할 밑천이 생긴다.

치희는 꿩 잡는 수렵과 관계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사냥꾼의 딸은 아닐 것이다. 당시 수렵은 군사 훈련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한나라는 옛 한사군 중에 고구려와 인접해 있던 현도군일 가능성이 크다. 왕은 현도군의 무장 세력과 손잡고 후처를 들이지 않았을까? 군사 원조를 받아 왕권을 튼튼히 한 것이다.

유리왕은 화희와 치희를 얻어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부유한 농경 부족과 강력한 무장 세력의 힘을 빌린 것이다. 고구려는 아직 신생국이다. 곳간을 채우고 외침을 막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경제와 국방이 받쳐줘야 나라가 잘 돌아간다. 두 건의 결혼동맹으로 고구려는 생명줄을 잡았다. 유리왕도 숨통이트였다. 이제 임금 노릇 좀 할 수 있으려나.

문제는 두 후처의 사이가 무척 나빴다는 것이다. 동궁과 서궁에 따로 거처할 정도이니 꼴도 보기 싫을 만큼 미웠나 보다. 유리왕과 손잡은 두 동맹 세력이 견원지간이었다는 뜻도 된다. 골천의 농경 부족과 현도군 무장 세력이 노상 헐뜯고 싸웠으리라. 왕은 걱정스러웠다. 저들이 꾀꼬리처럼 정답게 지내야 고구려가 펄펄 날아오를 텐데 이를 어쩐다?

화희와 치희는 임금의 총애를 다퉜다. 치희를 ‘비천한 첩’이라고 불렀으니 후처로 먼저 들어온 여인은 화희였을 것이다. 나는 첫째 부인이고, 너는 둘째 부인이라는 것이다. ‘대국’ 한나라 출신이라 콧대 높은 치희가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골천 부족과 현도군 세력도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였다. 동맹 간의 불화에 왕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유리왕은 골치가 아팠는지 기산으로 사냥을 나가 7일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중재해야 할 임금이 자리를 비우자 동궁과 서궁은 정면으로 충돌했다. 결국 치희와 현도군 사람들이 폭발했다. 결혼동맹을 깨고 본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왕은 그들을 쫓아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노래를 지어 부르며 쓰린 속을 달래는 수밖에.

쓴소리 못 참고 창업공신을 내치다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는 무용총. 특히 여러 명의 무용수와 악사가 등장하는 무용도는 가무를 즐긴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
유리왕 스스로 불화와 고립을 자초하는 일도 많았다. 재위 22년(서기 3)에도 질산에서 사냥하며 5일 넘게 자리를 비웠다. 보다 못해 대보(大輔) 협보가 임금의 허물을 간했다.

“왕께서 최근에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평안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치안을 비롯해 국정을 부지런히 돌봐야 할 때입니다. 그럼에도 말 타고 사냥 나가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허물을 고쳐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정치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질 것입니다. 신은 선왕의 위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원로대신의 쓴소리였다. 유리왕은 전해에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國內, 중국 지린성 지안)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백성들이 고역을 치른 터라 민생을 세심히 살펴야 했다. 새 도읍이 아직 어수선해 치안에 각별히 유념해야 했다. 이런 시기에 임금이 사냥을 다니느라 자리를 오래 비우다니 허물이 아닐 수 없다.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은 법이다. 그러나 유리왕은 노발대발하며 협보의 관직을 박탈하고 장원 관리인으로 보내버렸다. 협보는 오이·마리와 함께 주몽의 고구려 건국을 곁에서 도운 창업공신이다.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할 때 동행해 산 넘고 물 건너 졸본에 이른 고생담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바른말을 경청하기는커녕 숙부 같은 원로대신을 내쳤다. 아버지의 위업은 그렇게 빛이 바래가고 있었다.

분한 마음에 협보는 남쪽으로 떠났다. 온조왕이 다스리는 백제를 찾아간 것이다. 구름을 벗 삼아 길을 가면서 늙은 신하는 지난날을 회고했다. 소서노가 비류·온조와 졸본의 신민들을 거느리고 떠났을 때 그는 고립된 유리왕을 감싸며 주몽의 뜻을 이어 나갔다. 돌이켜보면 모두 덧없는 일이었다. 유리는 자꾸만 아버지의 체취를 지우려고 했다. 선왕의 도읍을 버리고 국내로 옮긴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젠 고구려가 낯설게 느껴졌다.

왕좌에 오래 앉아 있으면서 유리왕은 오만하고 포악한 면모를 드러냈다. 한번은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왕이 탁리와 사비에게 쫓게 했다. 두 사람은 돼지를 찾아내자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의 힘줄을 끊었다. 유리왕이 듣고 화를 냈다. “하늘에 제사 지낼 희생을 어찌 상하게 했는가?” 그는 애써 돼지를 찾아온 두 사람을 구덩이에 던져넣어 죽였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19년’).

얼마 후 왕이 병에 걸려 드러누웠다. 무당이 기도를 올리더니 고했다. “탁리와 사비의 혼령이 원통하다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유리왕은 어쩔 수 없이 혼령에게 사과해야 했다. 이 소문은 금세 퍼져나갔다. 덕을 잃은 임금에게 실망해 신하와 백성들이 떠났다. 국왕 스스로 자초한 불화요 고립이었다. 신생국 고구려는 흔들리고 있었다. 주변국들이 호시탐탐 침략할 기회를 노렸다.

열패감에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


▎건국 당시 고구려의 도읍지로 졸본성이 있던 환런(桓仁)의 오녀산성에서 바라본 만주 대륙.
유리왕 23년(서기 4) 봄 고구려에 새로운 희망이 떠올랐다. 임금의 둘째 아들 해명이 16세 나이로 태자가 된 것이다. 3년 전에 맏이인 도절이 죽어 차남이 후계자 자리를 승계했다. 해명 태자는 힘이 세고 용감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구려의 첫 도읍 졸본에 머물면서 불과 몇 년 만에 민심을 사로잡았다.

황룡국의 왕이 소문을 듣고 해명 태자에게 강한 활을 선물했다. 황룡국은 고구려를 위협하는 강국이었다. 그 왕은 당기기 어려운 활로 해명을 시험하고자 했다. 태자는 저들이 고구려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했다. 그는 활을 잡아당겨 부러뜨리고는 “이 활은 굳세지 못하다”고 깎아내렸다. 보고를 받은 황룡국 왕은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었다. 유리왕 27년(서기 8) 정월의 일이었다.

해명의 당돌한 행동은 유리왕의 노여움을 샀다. 안 그래도 나라 사람들의 시선이 태자에게 쏠리는 바람에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들이 자기가 버린 옛 도읍 졸본에 자리 잡고 주몽의 재림이라고 칭송받는 것도 거슬렸다. 해명과 비교해 자신이 초라하고 옹색한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태자가 황룡국의 왕을 깎아내린 것을 빌미 삼아 유리왕은 터무니없게도 아들을 제거하리라 마음먹었다. 나라를 위태롭게 했다는 명분을 세웠지만 그 독심의 실체는 열패감에서 비롯된 광기였다.

유리왕은 일단 황룡국 왕의 손을 빌려 해명 태자를 죽이기로 했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였다. 왕이 직접 손을 썼다가는 나라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우회로를 택한 것이다. 비정한 아버지는 황룡국에 밀서를 보내 죄를 범한 불효자식을 죽여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차도살인지계는 먹히지 않았다. 태자를 불러들인 황룡국의 왕은 위풍당당한 태도에 반해 오히려 예를 갖춰 대접했다.

유리왕은 부글부글 끓었다. 이렇게 된 이상 본인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3월 왕은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렸다. “나는 도읍을 옮겨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의 기틀을 굳건히 했다. 너는 나를 따르지 않았을뿐더러 굳센 힘만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다. 자식으로서 불효막심한 일이 아닌가. 너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28년’)

임금의 청천벽력 같은 명령에 태자의 신하들은 난리가 났다. 주군에게 이것은 따를 수 없다고 한목소리로 간했다. 하지만 해명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정색했다. “아버지의 뜻을 어찌 거역한단 말인가!” 그는 떳떳하게 자결을 택했다. 창을 땅에 꽂고 말을 달려 가슴에 품었다.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해명 태자의 죽음은 나라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신민이 모두 등을 돌려 왕은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자기를 망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고 했던가. 유리왕은 신민들의 따가운 시선에 위협을 느끼고 도읍을 떠나야 했다. 두곡에 이궁을 짓고 거기 머물렀다. 스스로 자초한 불화로 임금은 완전히 고립됐다. 아들을 죽인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다. 신생국 고구려 또한 부여의 침공을 받아 망할 뻔했다. 고구려를 구한 건 유리왕의 셋째 아들 무휼이었다. 어린 왕자는 매복으로 침략군을 무찌르고 태자가 돼 나라의 실권을 틀어쥐었다. 그가 바로 훗날 고구려의 전성기를 여는 3대 대무신왕이다.

유리왕은 재위 37년(서기 18) 두곡의 이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쓸쓸한 최후였다. 광기에 사로잡혀 친아들도 죽이고 충신도 쫓아버렸다. ‘외로워라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유리왕은 노래를 되뇌며 눈을 감았다. 불화와 고립의 시간이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가수는 노래를 따라간다는 말이 있다. 유리왕은 ‘황조가’ 노랫말처럼 살다 갔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생활역사연구소 소장.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205호 (2022.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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