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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74)] 나라를 구한 난세의 재상 서애(西厓) 류성룡 

선조의 명나라 도피 막고 민심 안정시켜 임란 수습 

이황에게 배우고 실리 중시, 이순신과 권율 발탁하고 부국강병 실천
노비도 공 세우면 벼슬 내려 신분차별 철폐, 파직 뒤 '징비록' 저술


▎서애 15대 류창해 종손이 병산서원 입교당에서 낙동강 건너편 병풍 모습 암벽을 가리키고 있다. / 사진:송의호
1592년(선조 25) 4월 30일. 새벽 어가(御駕)는 한양 도성 백성의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아침도 거른 채 빗발 속 온종일 북으로 움직였다. 그날 저녁 어가는 임진강을 건넌 뒤 5월 1일 겨우 동파관(東坡館)을 출발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직전 열린 급박한 어전회의를 전하고 있다. “이날 아침 상(上, 임금)이 대신 이산해와 류성룡을 불러 가슴을 두드리며 일렀다. ‘이모(이산해)야 류모(류성룡)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신하들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도승지 이항복이 나섰다. “어가가 의주에 가서 머물다 팔도가 모두 함락되면 바로 명나라에 가서 호소할 수 있습니다.” 선조도 그 답을 기다렸다는 듯 “내부(內附, 망명)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라며 아예 나라를 포기할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전시 사령관 도체찰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강경하게 반대했다. “안 됩니다. 어가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이항복에게 다시 말했다. “지금 관동과 관북 등지 여러 곳이 그대로 있고 호남에서 충의로운 인사들이 곧 벌떼처럼 일어날 텐데 어떻게 경솔히 나라를 버리자는 의논을 내놓는가.”

3월 18일 비 내리는 날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을 방문했다. 충효당은 난세에 나라를 구한 재상 서애 선생의 종가다. 솟을대문 왼쪽에 ‘國泰民安(국태민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다)’ 입춘 첩이 붙어 있다. 솟을대문과 마주한 사랑방에 류창해 종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가 끝나고 1591년 일본이 조선에 보낸 국서에 등장한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치러 가니 길을 내달라)’ 이야기가 나왔다. 서애는 임진왜란이 일본의 정명가도 요구를 조선이 거절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봤다. 조선은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려다 일본의 침입을 받았으니 명은 조선에 파병할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명나라는 결국 파병했다. 서애의 판단은 옳았다. 덕분에 급한 불은 껐다.

훈련도감 설치, 속오군 조직… 부국강병 실천


서애는 피란 길 개성에서 영의정에 임명됐다. 그러나 어가가 평양에 이르렀을 때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는다. 수차례 난관을 겪은 그는 한양 수복 후 다시 영의정에 복직하며 장기전을 대비한다. 그는 왜적을 물리치려면 무엇보다 민심 수습이 먼저라고 봤다. 그러자면 가난한 양민일수록 과중한 세금에 허덕이는 조세 제도의 혁신이 시급했다. 서애는 조세 부과 단위를 가호(家戶)에서 토지 면적의 다과(多寡)로 바꾸고, 수많은 가짓수 공납을 쌀 하나로 통일하는 공납 폐단 시정에 앞장섰다. 이는 훗날 대동법으로 이어진다.

1593년 1월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되찾았다. 그때쯤 명나라는 일본과 화해하는 강화(講和)에 나선다. 서애는 왜군을 추격하자고 주장했지만, 명나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주국방이 절실했다. 서애는 병서를 연구해 중앙에 포수·사수 등 직업군인을 양성하는 훈련도감을 신설했다. 당시 양성한 군인은 2000명에 급여는 하루 쌀 2되. 조선의 재정은 그만큼 빈약했다. 그의 꿈은 부국강병이 됐다. 지방에는 속오군(束伍軍)을 조직했다. 속오군은 양민에다 양반과 천민까지도 편입시키는 일종의 국민개병제였다. 서애는 “천민이라도 적의 머리 셋을 가져오면 모두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외쳤다. 이러한 사상은 많은 농민이 의병에 참가해 큰 성과를 올리도록 하는 등 민심을 돌려놓았다. 공을 세우면 천민 신분을 면제하는 ‘면천’은 궁극적으로 신분 차별 철폐의 계기가 된다. 인재 등용도 혁신했다. ‘널리 인재 등용을 청하는 계(廣取人材啓)’에서 “요즘 세상에 사람을 등용하면 반드시 문벌을 미리 논하는데, 문벌로 과연 적을 칠 수 있겠느냐”며 “오직 실용적인 재주 있는 사람을 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쟁으로 파직된 날, 이순신은 노량해전서 최후


▎서애가 임진왜란 뒤 어머니를 모시고 [징비록]을 저술한 하회마을 부용대 옆 옥연정사. / 사진:송의호
서애는 조선군의 전투력 강화와 함께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략을 수립한다. 바다를 지켜 왜군의 군수품이 서해를 통해 육지로 전달되는 것을 막으면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다. 서애는 바다를 지키기 위해 정읍현감 이순신을 알아보고 전라좌수사로 전격 발탁했다. 이순신은 뛰어난 작전으로 제해권을 장악했다.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단숨에 평양까지 진격하고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은 이순신이 바다를 장악해 적의 보급로를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류창해 종손은 “[징비록]에 70여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그중 이순신 이야기가 8가지나 된다”며 “서애 선조는 일찍이 이순신 장군의 능력을 알아보신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선은 곡창인 호남과 호서를 지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길을 연다.

육지에서 서애는 들판을 피해 산성을 쌓아 저항하는 전략을 세웠다. 산성을 활용한 대표적 승전이 행주대첩이다. 권율은 군사 2800여 명을 이끌고 왜군 3만여 명을 상대로 격전 끝에 대승을 거뒀다. 육지에서 전세를 뒤집는 결정적 계기였다. 권율 역시 서애가 발탁한 장수였다. 서애는 이렇게 실사구시로 군사와 전략에 밝았다. 종가에는 전란 당시 서애가 사용한 갑옷과 투구가 전해 오다 지금은 한국국학진흥원에 맡겨졌다. “본래는 칼도 있었는데 구한말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증조부께서 충효당 뒤뜰에 묻었다고 해요. 최근 일대를 조사했지만 그 칼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사랑방을 나와 충효당을 돌아봤다. 마루로 오르는 섬돌 옆에 작은 보조 마루가 덧대어 있다. 안내판이 보였다. “1999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방문 시 편의를 위해 설치한 마루.” 충효당은 당시 여왕의 방문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오랜 전란이 끝나갈 무렵 서애를 끌어내리려는 당쟁이 시작됐다. 1598년(선조 31) 사헌부 지평 이이첨이 먼저 서애를 탄핵했다. 명나라로 가는 사신을 자청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명분이 약했다. 그러자 북인(北人)은 다시 근거 없는 주장을 제기한다. 전쟁을 일찍 끝내지 못한 것은 서애가 강화를 주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주화오국(主和誤國, 적국과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망쳤다)’이다. 사헌부도 선조가 서애와 생각이 다른 것을 간파하고 가세했다. 그해 11월 19일 선조는 “류성룡을 파직시키라”고 명한다. 북인의 공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파직이 아닌 삭탈관작시키라는 것이다. 영의정 자리만이 아닌 임관 자체를 말소하라는 요구였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그 배경을 이렇게 분석한다. “서애에 대한 북인의 공격은 서애의 전란 극복 정책에 대한 양반 사대부의 불만을 대변한 것이다. 이들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서얼이나 천민을 등용하거나 면천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조선은 이렇게 혁신이 중단되면서 44년 뒤 병자호란을 겪고 마지막엔 일제 식민지가 되고 만다.

서애가 파직된 날 공교롭게도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순신은 전사했으나 조선 수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은 죽음으로써 7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파직당한 서애는 한양을 떠나 고향 하회마을로 돌아왔다. 충효당을 나와 서애가 임진왜란 수습 뒤 만년을 보낸 옥연정사로 향했다. 하회마을을 나가 광덕을 거쳐 낙동강 암벽 부용대 위로 길이 나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옥연서당 편액이 보였다. 서애가 35세에 터를 잡고 10년 걸려 완성한 건물이다. 당시 절벽 한쪽에 터는 잡았으나 가팔라서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승려 탄홍이 벼랑에 축대를 쌓아 집터를 만든 뒤 재물을 모아 10년 만에 완공했다. 옥연서당은 [징비록]의 저술 공간이 된 것은 물론 파직된 서애에게 위안을 줬다.

하회마을에서 만년 보내며 '징비록' 정리


▎서애의 종가인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방문한 집이기도 하다. / 사진:안동시
종손이 눈앞으로 펼쳐진 낙동강 건너 하회마을 한곳을 가리켰다. “저기 높은 건물이 원지정사입니다. 선생께서 35세에 지었는데 마을 안에 있어 조용하게 공부하는 데는 불편했답니다.” 다시 오른쪽을 가리켰다. “저기 서쪽 언덕을 서애(西厓)라 부르며 자호(自號)로 삼으셨지요.” 서애는 전란 동안 거의 만나지 못한 어머니와 형을 모시고 옥연에서 도리를 다하려 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징비록}을 정리해 63세 여름에 마무리했다. 서당 앞 소나무는 당시 선생이 손수 심었다고 전해진다.

1605년 7월 대홍수로 안동부가 물에 잠겼다. 하회마을도 물난리가 나서 옥연서당 죽간문이 떠내려갈 정도였다. 거기다 맏아들까지 죽는 우환을 당한다. 서당에 있던 자료는 부용대 높은 곳으로 긴급히 옮겨졌다. 서애는 직후 하회에서 20여㎞ 떨어진 학가산 자락 서미리로 들어간다. 이듬해 그곳에 세 칸짜리 초가 농환재(弄丸齋)를 지었다. 그는 이듬해 초가에서 66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옥연을 돌아본 뒤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병산서원을 찾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9곳 중 한 곳이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을 가운데 두고 옥연서당과 반대편에 위치한다. 병산서원으로 들어갔다. 좌우로 기다랗게 이어진 만대루(晩對樓)는 낙동강 건너편 병산과 넉넉히 마주하고 있었다. 만대루 풍광은 이름 그대로 햇살이 드는 늦은 오후가 제격이다. 서원 강당은 입교당(立敎堂)이다. 병산서원은 서애가 31세에 안동 풍산읍에 있던 문중 교육공간인 풍악서당을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 그 시작이다. 그 뒤 서애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를 중심으로 사당 존덕사(尊德祠)를 지으면서 서원으로 바뀌었다.

종손이 병산서원 운영 방식을 설명했다. “여기서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후학들이 하루 전날 서원에 들어와 함께 공부하고 해 뜰 때 향을 피우며 선생의 학덕을 기립니다. 지금도 전일 입재를 지키는 서원은 도산서원과 병산서원뿐일 것입니다.” 탬플스테이처럼 서원스테이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코로나19로 한동안 운영이 중단됐지만 그동안 서애함 승조원이 40명씩 돌아가며 1박 2일 병산서원에서 서애 정신 등을 배웠다.

서애 류성룡은 1542년(중종 37) 경북 의성 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으로 강직한 사람이었다. 류성룡은 4세에 글을 읽기 시작해 6세에 [대학]을 공부하고 행동거지가 어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8세에 [맹자]를 읽다가 “백이(伯夷)는 눈으로 나쁜 색을 보지 않았으며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대목에 이르러 크게 감동해 평생 백이의 인격을 흠모한다. 9세에 [논어]를 읽고 16세에 향시에 합격했다.

류성룡은 19세가 되던 가을, 관악산 궁벽진 암자에 들어가 밤낮으로 독서만 했다. 어느 날 밤이 깊었는데 암자에 벽을 쿵쿵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근 연주암 스님이 짐짓 도적을 흉내 내 류성룡의 담력을 시험한 것이다. 류성룡은 못 들은 척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계속 글을 읽기만 했다고 전해진다.

400년 후에도 유효한 서애의 통합 정신


▎국보 132호로 지정된 임진왜란의 전말을 기록한 [징비록]의 첫 페이지. / 사진:한국국학진흥원·풍산류씨서애파문중
다음 해 그는 한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춘추]를 읽었다. 류성룡은 처음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는 더 깊은 가르침을 얻기 위해 21세에 퇴계 이황을 찾아간다. 그는 도산서당에서 수개월 머물면서 퇴계로부터 성리학의 수양 원리서인 [근사록(近思錄)]을 배웠다. 그가 퇴계의 고제(高弟)로서 성리학을 잇는 계기가 된다. 학봉 김성일과 동문수학하면서 평생지기가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류성룡은 총명하고 박학했다. 퇴계는 그를 한번 보고 기특히 여겨 “이 사람은 하늘이 냈다”면서 훗날 큰 인물이 될 것을 알아봤다.

서애는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25세에 외교문서를 관리하는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처음 벼슬길에 들어선다. 이후 성절사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상주목사,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 대사헌, 예조·형조·병조·이조 판서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왜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 좌의정에 올라 조정의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일본이 침공할 조짐을 명나라에 보고하도록 했다.

서애는 어떤 자리에 있든지 명분보다는 시급한 현안 해결에 매달렸다. 그럴 때마다 서애는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었다. 여러 의견을 듣고 설득하면서 모든 문제를 국태민안(國泰民安)에 맞춰 통합하려 했다. 400년을 뛰어넘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나라를 이끄는 첫 번째 방책일 것이다.

[박스기사] 서애의 피·땀·눈물로 쓴 징비록 - 국난을 극복한 경륜의 지혜, 국보로 지정

[징비록(懲毖錄)]은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 겸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 남긴 전란의 기록이다. 국내외 정세와 전란의 실상, 전후 상황 등이 나온다. 국난을 극복한 경륜의 지혜도 담겨 있다. [징비록]은 국보 132호로 지정됐다. 서애가 쓴 책의 머리말(自序)을 소개한다. 이재호의 국역을 참고했다.

“아아! 임진년의 화(禍)는 참혹했다. 수십 일 만에 삼도(三都, 서울·개성·평양)를 지키지 못했고 팔방이 무너져 임금께서 파천했는데, 그러고도 우리나라가 오늘이 있는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다. 또 선대 여러 임금의 두터운 은덕이 백성과 굳게 결합돼 백성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임금께서 중국을 섬기는 정성이 명나라 황제를 감동케 해 우리나라를 구원하기 위한 군대가 여러 차례 출동한 덕분이다. 이러한 일들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위태로웠을 것이다.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懲]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毖]’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나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대한 책임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어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전원에서 목숨 붙여 구차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님의 너그러운 은덕이 아니겠는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 진정되어, 지난날 일을 생각하니 그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을 붙이고 살아갈 수 없다. 이에 한가한 틈을 이용해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바, 임진년(1592)부터 무술년(1598)까지 일을 대강 기술하니 이것이 일정 정도 되고, 또 장(狀)·계(啓)·소(疏)·차자(箚子)·문이(文移)와 잡록(雜錄)을 그 뒤에 붙였다.

비록 보잘것없지만 모두 당시의 사적(事蹟)이므로 버리지 않고 두어, 이것으로 내가 시골에 살면서도 성심으로 나라에 충성하려는 간절한 뜻을 나타내고, 또 어리석은 신하가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나타내도록 할 것이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205호 (2022.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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