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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의 핫피플 & 아트(1)] 픽셀 작품으로 메타버스 전시회 연 황규태 

디지털 사진의 최소 단위인 픽셀을 직조한 사진가 

리얼리즘 대신 이중노출·몽타주·콜라주 등 ‘메이킹 사진’ 몰두
한국 대표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로 일찍 ‘NFT 아트’ 뛰어들어


▎황규태는 ‘포스트모던 사진’의 논의가 본격화하기도 전에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이미지를 가공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구축했다.
황규태는 한국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다. 그는 신문사 사진기자로 출발했다. 놀랍게도 ‘포스트모던 사진’의 논의가 본격화하기도 전에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이미지를 가공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구축했다. 특히, 1960~1970년대 리얼리즘 사진이 주류일 때 한국 사진계의 풍토와는 달리 이중노출, 몽타주, 콜라주, 필름 태우기 등 ‘만드는 사진(making photo)’으로 이른바 ‘주관적 사진’을 탐구하며, 한국 현대사진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대학 다닐 무렵 초현실주의 사진가인 제리 율스만(Jerry N.Uelsmann)의 포토몽타주 사진을 보고 영향을 받은 것도 원인 중 하나다.

황규태는 어느 날, TV 화면을 루페(Lupe, 확대경)로 들여다보다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수많은 점과 색을 보게 된다. 이후 TV 화면, 컴퓨터 모니터 등을 접사 촬영해 크게 확대하는데, 이것이 사진적인 ‘픽셀(Pixel)’ 작업의 시작이다. 디지털 사진은 1980년 대에 빠르게 접목했고, 2000년대 이후 직접 촬영한 필름을 스캔해 픽셀을 확대하고, 원하는 모양과 색이 나올 때까지 반복 확대하는 방식이 본격화된다. 픽셀은 디지털 사진에서 가장 작은 화면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다. 그는 이 작은 픽셀 점의 행과 열로 추상이나 구상적인 형태를 직조한다. 러시아의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가 그린 극한의 미니멀한 하드에지와는 또 다른, ‘실재’이되 ‘실재’ 같지 않고, ‘사진’이되 ‘사진’ 같지 않은 시지각적 감각 경험을 제공한다. 이것이 황규태 특유의 경쾌하고도 날선 픽셀 화법이다.

박상우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황규태는 세계 사진사 최초로 1973년에 컬러로 개인전을 한 사진가다. 또 앞서 밝혔듯이 국내 리얼리즘 사진이 보편적인 추세였을 때, 다양한 실험기법으로 사진 영역을 확장했던 보기 드문 작가다. 한때 미술의 변방으로 취급 받아온 사진이 2000년대 이후 예술의 주류로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은 황규태 사진가와 같은 원로작가들의 역할이 컸다.

“한 알의 모래알에서 우주를 본다”고 했던 작가는 이제 우리에게 ‘작은 사각형 픽셀’을 통하여 무엇이 보이는가를 묻고 있는 듯하다. 어느 분야나 ‘선도하는 자’와 ‘따르는 자’가 있기 마련인데 그는 늘 한발 앞서 가는 작가다. 최근 ‘NFT 아트(Non-Fungible Token Art)’ 메타버스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어 새로운 이정표가 기대된다. 황규태 사진가를 만났다.

193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 당시 ‘사진예술’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을 시절인데 사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고등학교 다닐 때 사진반 활동을 하면서 접하게 되었다. 동국대학교 정치학과는 서울대 미대 시험을 봤다가 떨어져 아무 학과나 가게 된 곳이다. 그래서 전공 공부보다 학교 신문 기자를 하면서 사진을 더 열심히 찍으러 다녔다. 대학 졸업 이후 작가 활동을 할 때, 서울대 미대에서 시간 강사를 했는데 감회가 남달랐다.”

경쾌하고도 날선 픽셀 화법이 특징


▎황규태, [pixel]
대학 졸업 후 경향신문(1963~1965년) 사진기자로 입사했는데 기자로서의 경험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견습기자 시험을 보고 입사했다. 1960년대 한국 사회는 혼란과 변화를 겪는 시기였다. 데모가 많아 최루탄을 맞으면서 촬영하곤 했다. 3년 다녔는데 미국 가는 친구를 도와주다 덩달아 가게 되어 그만뒀다. 미국 갔을 때 흑인 폭동이 일어나 취재해서 경향신문에 보내는 등 명목상 미국 특파원 역할을 잠시했다. 당시 폭동 현장에서 찍은 불타는 모습은 작품으로 만들어놨는데 아직 발표는 못했다.”

1973년 신문회관(프레스센터)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초기의 작품 경향이 궁금하다.

“초기작은 환경과 심리에 관한 것이 많았다. 전시는 환경 문제를 이중노출, 몽타주, 콜라주, 필름태우기(burnography, 만레이의 ‘레이오그라피 따라 하기’) 방식으로 재현해 컬러사진으로 발표했다. 당시에 한국 사진계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만드는 사진’에 대한 이해와, 환경문제가 중요하게 인식되면서 뒤늦게 조명되고 있다. 나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한국은 1960~1970년대에 리얼리즘 사진이 강했다. 특히 스트레이트한 흑백 다큐멘터리 사진이 각광을 받았다. 이 시기에 컬러사진으로 ‘만드는 사진’을 선보였다.


▎황규태, [무제]
“한국에 있을 때 미군부대를 통해 들어온 잡지에서 초현실주의 사진가 제리 율스만의 포토몽타주 사진을 보고 영향을 받아 메이킹 포토를 시작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암실에서 흑백으로 작업을 한 반면에 나는 이중노출, 몽타주, 콜라주 작업을 컬러로 작업했다. 사진가로서는 세계 최초가 아닐까 생각한다. 1960년대는 미국 작가들 역시 극소수만 메이킹 사진에 관심을 갖던 시절이었다.”

한동안 [가짜가 아름답다](2006년), [꽃들의 외출](2013년) 등 ‘꽃’을 소재한 작품이 많았는데 어떤 내용이 담겼나?

“꽃을 소재로 진짜와 가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꽃을 가짜(조화)와 진짜(생화)를 섞어놓고, 관람자가 그것을 구분하도록 했다. 사실 내가 말하기 전에는 가짜와 진짜를 전혀 알 수 없다. 진짜보다 아름다운 가짜를 찍거나, 가짜처럼 진짜 꽃을 촬영했기 때문이다. 참(진짜)과 거짓(가짜)을 구분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다. 가짜가 만연한 사회 현상을 비꼬는 작업이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개최된 [사진 이후의 사진](2014년)은 40여 년의 작품세계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대규모 전시였고, 한국 사진계에 많은 반향을 불러왔다.

“스트레이트한 사진이 아니라 모두 메이킹 사진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맥락이었다. 엄밀하게는 ‘포스트 포토그래픽(post-photographic)’이다. 몽타주 작업 역시 환상적인 몽타주가 아니라, 만든 다큐멘터리 작업이다. 사진의 특성상 한 장으로밖에 찍을 수밖에 없다. 하고자 하는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여러 장을 몽타주해 표현한 것이다.”

“픽셀이 모여 사진이 된다”


▎황규태, [venus의 여행]
2017년의 [PIXEL] 전시를 보고, 많은 이가 황규태 작가의 대표작을 ‘픽셀’로 꼽는다. 원색의 픽셀을 그대로 드러낸 미니멀한 형태였다. 이 전시 이후에도 픽셀 작업은 변화를 거듭하며 진화하고 있다. 최근 발표 된 픽셀의 재현방법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사진적인 사진의 픽셀 작업은 1990년대에 처음 시작했다. 이때는 모티브 자체를 찍은 극히 사진적인 픽셀이다. 주로 사진 이미지에서 채집하거나 텔레비전과 컴퓨터 모니터에서 발견한 무수한 픽셀을 가지고 작업했다. 러시아 미술가 카지미르 말레비치가 손으로 그린 그림과 나의 컴퓨터 픽셀의 미니멀 하드에지를 비교해볼 수 있다. 나는 만들지 않고, 의미 있는 픽셀을 취사선택했다. 말레비치 이후, 포스트 하드에지라고 생각한다. 말레비치의 사각형과 나의 사각형 사이엔 100여 년 세월의 강이 흐른다. 최근과 같은 픽셀 작업은 컴퓨터를 구입한 2000년대부터다. 확대된 픽셀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진적인 사진의 픽셀에서 많이 벗어난 작업이다. 건축의 기초가 벽돌을 쌓는 것에서 시작되듯이 픽셀이 모여 사진이 된다. 사진의 원천까지 파고들어간 작업이다.”

가장 최근에 전시한 [짝사랑 Pixel AI Pixy](2022년) 연작은 통속적인 이성 간의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 같진 않다.


▎황규태, [heart]
“평소 내가 잘하는 농담 레퍼토리 중 하나가 ‘짝사랑’이다. 사실 짝사랑의 관념은 남녀 관계에서 쓰는 말인데 좀 더 확대해석한 작업이다. 내가 좋아하지만 할 수 없는 것, 갖고 싶지만 소유할 수 없는 것, 욕망에 관한 것들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짝사랑이 있다. 나의 짝사랑은 돈이다. 돈을 제일 좋아하는데 돈이 안 들어와서 최고의 짝사랑이 돈이다. 사람들은 어느 면에서 돈이 제일 중요한 것인데 가장 천한 것으로 비하시킨다. 사실 돈 때문에 싸우면서도 돈 때문이 아니라고도 한다. 오래전 작업 [가짜가 아름답다]의 작품 내용의 연속이기도 하다.”

“NFT 아트는 시대의 흐름”


▎황규태, [pixel cell 봄놀이]
‘NFT 아트’에 일찌감치 도전했다. 얼마 전 [PIXEL PIXIE(픽셀의 요정, 장난, 유희, 유모어)](2021년)로 솜니움 스페이스와 크립토복셀의 메타버스에서 36점이 관객과 만났다. 그리고 스페이스 55 안종현 대표의 기획으로 [Pixel Archive](2022년) 역시 메타버스를 통해 선보였다. 어떤 작품들로 구성했는지와, 메타버스에 승선한 소감이 궁금하다.

“시대의 변화에 호응하면서 시대에 맞게 이미지를 보이고 싶다. 어느 작가나 시대에 앞서고 싶은 것은 공통된 욕망일 것이다. 픽셀 작품으로 몇 차례 NFT 아트를 진행했다. 보는 디스플레이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데 360도 VR로 보면 스펙터클하다. 지금 전시 중인 [Pixel Archive]는 디지털 세상의 근원에 대한 전시를 기획과 평론이 들어간 첫 번째 전시다. 600평 되는 3층 규모에서 50점 이상을 관람할 수 있다. 처음 TV 브라운관을 찍었던 1994년부터 2022년까지의 픽셀 작품을 총망라해서 볼 수 있다. 그래서 픽셀 아카이브다. 현재 한 달 반가량 전시 중인데 5000명가량 관람했다. 이 중에 외국인이 대다수라는 점이 흥미롭다.”

사진의 대중성과 시장성 측면에서 NFT 아트는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반면, 이 시대 팝아트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는 ‘NFT 아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피력했고, 높은 작품 가격 역시 거품이라고 보는 우려도 많다. 어떻게 전망하는가?


▎황규태의 NFT 아트, 메타버스 작품이다.
“몇억씩에 팔리기도 하고,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NFT 작품에 투자를 한다. 사실 형체가 없다. 그래서 ‘봉이 김선달’ 같다. 시도는 하고 있지만 NFT 아트의 미래 전망까지 바라보는 눈이 없다. 현재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할 뿐,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다’라는 것은 없다. 다만 NFT 아트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는?

“아무래도 한국 와서 첫 개인전을 했던 1973년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사진전이다. 그 당시엔 한국에 전혀 없던 새로운 형식의 사진전이었기 때문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지금은 ‘만드는 사진(making photo)’이 보편화되어 인식이 바뀌었지만 당시 1세대 사진가들뿐 아니라, 한국 사진계 대부분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 유행이나 주변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고, 주관적인 사진 작업을 메이킹 방식으로 계속 작업했다. 다행히 해외에서는 현대사진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경향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로 잡지(1974년 [파퓰러 포토그래피], 1974년 [애뉴얼], 1979년 [35㎜ 포토그래피] 등)에 소개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항상 새로운 것에 관심 두고 작업


▎황규태, [Muse, 2011]
한국 2세대 사진작가로 살아온 50여 년 세월은 결코 짧지 않다. 현대사진에서 가장 주요한 쟁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시대를 앞설 수 있는 창작이다. 앤디 워홀과 뒤샹도 그렇고 예술사에서 볼 때 내용이든 형식이든 ‘처음’ 시도한 예술가를 거론한다. 예술가란 무엇이든 앞서야 된다. 시대도 앞서야 하고, 개념도 앞서야 한다. 그래서 힘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사진에서 내가 개념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남의 개념을 인용해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이미지를 가지고 개념화하고 시각화해야 한다.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배운 것, 본 것, 경험 등이 답이다. 역사에 남겨질 만한 작품은 이론적으로 공부만 한다고 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 같다.”

장수한 사진가의 작품 경향을 몇 마디로 함축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작가 자신이 생각해봤을 때 황규태는 어떤 작가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황규태의 작업실, 그는 노름꾼이 노름에 미치고 빠지듯 사진가도 그런 재미가 있어야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 사진:조정화
“한 번도 생각해보질 않았다. 나를 뭐라고 할 수 있겠나. 그냥 나는 사진작가다. 내 작업에 대해서도 지금은 ‘사진이다’ 혹은 ‘사진이 아니다’라는 논의는 관심 밖에 있다. 내 작업이 그림으로 불리든, 옵아트로 불리든 내가 좋은 대로 한다. 사진가 혹은 사진의 정의는 후대에서 결정할 문제이고,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그저 항상 새로운 것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할 뿐이다.”

사진을 취미로 하고 있거나 프로 사진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호기심이 가장 중요하다. 사회, 과학, 예술 등의 모든 분야에서 호기심이 없으면 발전하기 어렵다. 나의 픽셀 작업도 궁금증 때문에 발견했다. 사진을 루페로 들여다보면 뭐가 보일까 하는 호기심에서 봤더니 작은 픽셀들이 현란하게 들어 있어 시작하게 되었다. 남들이 이미 한 것이나 어떤 화려한 결과를 목표로 하지 않고 사진 자체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사진작업은 노름꾼이 노름에 미치고 빠지듯 그런 재미가 있어야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 조정화 -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순수사진으로 석사 학위를, 조형예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몇 차례 개인전을 열고, 광주비엔날레 등 다수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다. 단국대, 상명대 등에서 20여 년 간 강의하면서 [월간사진], [포토닷], [디지털카메라매거진], [미술세계], [월간중앙] 등에 예술 관련 연재와 기고 글을 써오고 있다. 저서로는 [그래서 특별한 사진 읽기](2020년)가 있다.

202206호 (202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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