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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3)] 유행가로 돌아보는 6·25 전쟁 

분주하고 고단한 피란민의 일상… 그래도 내일의 시간표는 짜야지 

‘단장의 미아리고개’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까지 3년간의 전쟁 실상을 노래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전쟁의 시계 멈춰 피난 생활 청산하고 귀향


▎유행가는 시대의 산물이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의 유행가들도 그러했다. 1950년 12월 한국전쟁 당시 끊어진 대동강 다리를 건너던 피란민들.
유행가는 시대의 산물이다.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이 꿈에 그리거나 가슴 아파하는 뭔가를 건드렸을 때 노래는 들불처럼 번져 국민가요가 된다. 시대의 풍파가 거셀수록 유행의 강도는 세진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의 유행가들도 그러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삼팔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했다. 유행가는 전쟁의 주요 장면들을 관통하고 있다. 한국인은 어떤 노래를 부르며 시름을 달래고 다시 일어섰을까?

남침과 납북의 한 깃든 ‘단장의 미아리고개’


▎한국인의 애창곡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작사한 반야월의 친필. / 사진:국립한글박물관
“미아리 눈물 고개 임이 넘던 이별 고개 /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 당신은 철삿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가수 이해연이 1956년에 발표한 ‘단장의 미아리고개’(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다. 미아리고개에 단장(斷腸),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6·25의 한(恨)을 투영하고 있다. 서울의 북쪽 관문인 이 고개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철삿줄로 꽁꽁 묶여 뒤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끌려간 사람들은 또 누구일까?

1950년 6월 27일 밤 국군의 미아리 저지선에서는 맹렬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서울 시민들은 귀를 막고 두려움에 떨었다. 새벽에는 한강 인도교가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끊어졌다. 피난에 나선 무고한 인명이 대거 희생됐다. 이윽고 날이 밝자 서울은 딴 세상이 됐다. 그 생생한 목격담을 역사학자 김성칠이 꼼꼼하게 일기에 남겼다.

“포성이 뜸해지기에 밖을 내다보니 낙산 위에 늘어섰던 포좌(砲座)가 간 곳이 없다. 미아리고개로 자동차보다도 크고 육중해 보이는 것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다. 저것이 대포알을 맞아도 움쩍하지 않는다는 이북의 탱크가 아닌가 싶다. 전찻길엔 이상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떼 지어 행진하고 있다. 밤 사이 세상은 아주 뒤집히고야 만 것이다.”

6월 28일 소련제 T-34형 탱크가 줄지어 넘어온 미아리고개는 그 후 민간인들이 북으로 끌려가는 길목이 됐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 정권은 먼저 정치인과 명사들을 잡아갔다. 서울에는 김규식·조소앙 등 독립운동과 민족통합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 머물고 있었다. ‘남행열차’를 타지 못한 국회의원도 60여 명이나 됐다. 북한은 선전전에 이용하기 위해 그들을 차례차례 평양으로 데리고 갔다.

6·25 전쟁 당시 납북 피해자는 8만 명 이상으로 드러났는데, 전쟁 발발부터 서울 수복까지 3개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끌려갔다. 공무원·의사·변호사·교육자 등 사회지도층 인사가 다수 포함됐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지고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미아리고개는 아비규환이 됐다. 고개 인근에 살던 주민의 증언이다.

“끌려가던 사람들이 하도 많아 어림잡아 헤아릴 수도 없었지요. 손목을 묶을 쇠사슬이 모자라 소 끄는 밧줄로 엮어 끌고 갔고, 뒤처진 사람들은 구덩이에 몰아넣고 학살해 부근의 산마다 시체들이 즐비했었지요.” ([중앙일보] 1990년 6월 21일)

미아리고개는 그렇게 눈물 고개, 이별 고개가 됐다. 미군 기밀문서에 따르면 1950년 10월 평안남도 대동군의 한 언덕에서 납북 공무원 2000여 명이 한꺼번에 학살당했다고 한다. 대다수 납북 피해자는 전쟁통에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전우야 잘 자라’, 낙동강 방어선 딛고 북으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 꽃잎처럼 사라져간 전우야 잘 자라.”

‘전우야 잘 자라’(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는 1950년 9월 서울 수복 직후에 나온 진중 가요다. 작곡가 박시춘은 육군 문예 중대에서 활동했고, 이 노래는 국군의 애창가요로 자리매김했다. 정식 군가는 아니지만, 반격에 나선 국군의 애환과 기상이 잘 담겨 있다.

국군은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다가 미군 참전과 유엔 원조로 기사회생했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지휘하는 유엔군 사령부가 세워지고 국군도 연합군의 일원이 됐다. 8월 1일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피란 수도’ 부산을 둘러싸고 북쪽으로 약 135㎞, 서쪽으로 약 90㎞에 이르는 네모꼴 방어선이 완성됐다.

연합군은 힘을 모아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했다. 전선마다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혈전이 벌어졌다. 시체가 쌓였지만 치울 수 없어 시체를 방패 삼아 싸울 지경이었다. 그 사이에 부산항을 통해 병력과 화력 지원이 이뤄졌다. 반면 북한군의 공세는 미군의 폭격으로 보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차츰 무뎌졌다. 전쟁의 흐름이 바뀌고 있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마침내 반전의 승부수를 던졌다. 인천상륙작전이었다. 9월 15일 연합군 함정 261척, 병력 7만5000명이 인천으로 밀고 들어갔다. 동시에 낙동강 방어선의 국군과 미군도 총공세로 전환했다. 노랫말처럼 전우의 시체를 넘어 앞으로 나아갔다. 낙동강을 박차고 추풍령(2절), 서울(3절), 삼팔선(4절)으로 진격했다.

9월 28일 서울 수복에 성공하자 유엔군 사령부는 일단 삼팔선에서 진격을 멈추기로 했다. 중국이 삼팔선을 넘으면 참전하겠다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중국과의 확전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북진통일을 부르짖어온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단독으로 삼팔선을 돌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0월 1일 강원도 양양에서 국군 제3사단 23연대가 삼팔선을 넘어섰다(이날을 1956년부터 ‘국군의 날’로 삼았다). 이튿날 맥아더도 삼팔선 돌파를 명령함으로써 연합군은 일제히 북진을 개시했다.

국군은 10월 19일 미군과 함께 평양을 점령한 데 이어 압록강까지 거침없이 치고 올라갔다. 이때 가장 많이 부른 노래가 ‘전우야 잘 자라’였다고 한다.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와 같이 걷는 길이었다. 비장하면서도 가슴 뿌듯한 행군이었다. 10월 25일 국군 제6사단 7연대가 드디어 압록강 연안 초산을 점령했다. 강물이 군용 물통에 담겨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30일 평양역 광장에서 10만 군중을 앞에 두고 연설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라고 외쳤다.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또 다른 반전을 맞고 있었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군이 몰려온 것이다.

흥남 철수 실향민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굳세어라 금순아’는 1953년 가수 현인이 독특한 창법으로 불러 실향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악극 [굳세어라 금순아]의 한 장면.
1950년 12월 함경남도 흥남 부두, 피란민들이 그물망에 매달려 미국 선박에 기어올랐다. 삭풍이 매섭게 몰아쳤지만, 떨어지는 사람들이 속출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죽기 살기로 올라갔다. 북새통에 밟혀 죽고, 물에 빠져 죽고, 가족과 생이별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극적인 장면은 국민가요를 탄생시켰다. ‘굳세어라 금순아’(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는 1953년 가수 현인이 독특한 창법으로 불러 실향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 목을 놓아 불러 보았다 찾아를 보았다 /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흥남 철수는 1950년 12월 연합군이 중국군에게 밀려 퇴로를 차단당하자 해상으로 탈출한 작전이다. 11월에 맥아더 사령부 직속의 미군 제10군단은 함경도 방면에서 국경으로 진군해 중국군을 궤멸시키기로 했다. 미군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 국군 제1군단이 작전에 투입됐다. 하지만 미군은 장진호 부근에서 적의 포위망에 갇히고 말았다. 중국군 제9병단 산하 7개 사단이 에워싸고 맹공을 가했다. 제10군단 지휘부는 부득불 후퇴 명령을 내렸고, 미군은 영하 30도가 넘는 혹한 속에서 악전고투 끝에 흥남으로 빠져나왔다.

얼마 전만 해도 승승장구하며 평양을 찍고 압록강에 이른 연합군이었다. 어째서 전황이 역전됐을까? 동상에 시달리고 병기마저 얼어붙는 혹한의 날씨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적의 전투력을 얕본 게 패인이었다. 6·25 당시의 중국군 하면 흔히 인해전술을 떠올리지만, 병력과 화력은 연합군이 우위였다는 게 훗날의 분석이다. 그들의 무서움은 다른 데 있었다.

중국군은 꽹과리와 피리, 함성으로 천지를 진동시켜 연합군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심리전을 구사했다. 인해전술이 아니라 허장성세였다. 연합군은 혼비백산해 전투 의욕이 저하됐다. 유격전도 악몽이었다. 중국군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니 연합군은 쉬지도 못하고 피로가 쌓였다. 이 심리전과 유격전은 중국공산당이 장개석 군대를 몰아붙일 때 쓴 전법이었다. 연합군은 공포심과 피로감이 극에 달해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철수 작전에 들어간 것이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흥남에서 철수한 것은 10만여 명의 병력뿐만이 아니었다. 피란민 수십만 명이 밀려들었다. 공산당 치하에서 살 수 없어 탈출하려는 사람들, 미군이 원자탄을 투하한다는 소문에 몸을 피하려는 이들이 부두를 가득 메웠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구원의 그물망을 잡으려 했다. 이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함선 132척이 동원됐다. 미국 상선 매러디스 빅토리호도 참여했다. 정원 2000명을 한참 초과해 1만4000여 명을 태운 배는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란민들을 내려줬다. 2014년에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가 매달린 그 배다.

“막순아! 정신 똑똑히 차리라. 놀러 가는 게 아이다. 오라바이 손 꽉 잡아라.”

‘전선야곡’, 고지전 병사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


▎1950년 12월 흥남 철수 작전 당시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라탄 피란민들의 모습. 흥남 철수 작전은 1950년 12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포위되자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10만5000명의 군인과 9만1000여 명의 피란민, 차량 1만7500여 대, 화물 35만t을 193척의 함대에 싣고 거제 장승포항으로 철수한 작전이다.
영화 속 소년은 등에 매달린 여동생에게 고함쳤다. 하지만 아수라장 속에서 남매는 잠깐 사이에 손을 놓치고 말았다. 황망한 이별이었다. 부산에 정착한 덕수에게는 흥남 부두에서 잃어버린 막순이가 가슴에 박힌 못이었다. 남매는 1983년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서 극적으로 상봉한다. 전시 고아로 미국에 입양된 여동생을 만나고서야 덕수는 그 한 맺힌 못을 뽑아낼 수 있었다. 노모도 비로소 편안히 눈을 감았다.

‘피란 수도’ 부산에 달이 뜨면 실향민들은 영도다리 위로 모여들었다. 난간을 붙잡고 하염없이 달을 쳐다보았다. 두고 온 고향산천이, 헤어진 가족이 눈에 밟혔다. 피난길에 얼어 죽고, 굶어 죽고, 폭격 맞아 죽은 이들이 가슴 저렸다. 누군가 노래를 흥얼거린다. 한 사람 두 사람 따라부른다. 웅성웅성 노랫소리가 커진다. “금순아 굳세어다 오 / 통일의 그날이 오면 / 손을 잡고 웃어보자 /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2절)

1951년 1월 4일 중국군이 남진해 서울이 다시 넘어갔지만, 3월 이후 연합군이 총반격에 나서 기어코 서울을 되찾았다. 한때 미군을 한반도에서 빼고 한국 정부와 주요 인사들을 해외로 피신시키는 계획을 수립할 만큼 전황이 비관적이었으나, 중국군 또한 물자 보급이 끊기고 군사 작전에 차질이 생기면서 연합군이 삼팔선까지 밀고 올라간 것이다.

만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려던 맥아더 사령관은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한 트루먼 대통령과 충돌한 끝에 4월 11일 해임됐다. 후임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는 화력을 총동원해 적을 최대한 살상하는 작전을 펼쳤다.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북한 땅은 폐허가 됐다.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북한과 중국은 휴전 의사를 타진했다. 미국 또한 전쟁에 대한 국민 지지가 곤두박질친 데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만 어부지리를 보는 상황이라 출구가 필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쟁을 멈추기 위한 회담이 성사됐다.

열흘간 24차례 주인 바뀌었던 백마고지


▎한국전쟁 당시 열흘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이 벌어졌던 백마고지. 육군 제30연대 1대대 장병들이 백마고지를 탈환한 뒤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를 부르고 있다.
정전회담은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25개월이나 지리멸렬하게 이어졌다. 전쟁을 중단하겠다며 회담을 열었지만 조금만 수틀려도 결렬되기 일쑤였다. 그 사이 전선에서는 수많은 청년이 목숨을 잃었다. 휴전되기 전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삼팔선을 따라 뺏고 빼앗기는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에 심신이 지친 병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시름을 달랬다.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 정한수 떠 놓고서 이 아들의 공(功) 비는 /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 아 쓸어안고 싶었소.”

‘전선야곡’(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은 1952년 가수 신세영이 내놓자마자 시대를 대표하는 곡으로 떠올랐다. 판문점에서는 정전회담이 열리고 있었지만, 고지전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백마고지의 경우 열흘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 끝에 국군 제9사단이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자고 일어나면 전우가 쓰러지고 시체가 쌓이는 나날이었다. 장병들은 정전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고지전은 기약 없이 계속됐다.

긴장이 흐르는 참호에서 보초를 서며, 보이지 않는 적군에게 총구를 겨눈 채로, 병사들은 ‘전선야곡’을 나지막이 불렀다. 뺏고 빼앗기는 한 치의 땅은 일개 병사에게 별 의미가 없다. 꿈길이나마 내 고향 내 집에 이르면 긴장감에 막혔던 숨통이 잠시 트인다. 달빛 아래 정화수 떠 놓고 아들의 생환을 비는 어머니가 보인다. 아, 흰 머리가 눈부신 어머니를 쓸어안고 싶다. 병사가 이를 악물고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이 노래에 담겨 있었다.

한편 1951년 1.4 후퇴를 전후해 민간인들도 대거 피난길에 올랐다. 중국군이 물밀 듯이 밀고 내려온다는 소문에 앞다퉈 남쪽으로 향한 것이다. 그들은 부산 등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집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중부 이남 지역민들은 연합군의 반격으로 곧 귀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선에서 가까운 서울, 경기, 강원 주민들은 절망적인 시간이 길어졌다.

‘피란 수도’ 부산은 인구 100만 명을 넘어섰다. 판잣집이 산비탈·하천변·공터를 뒤덮었다. 피란민의 일상은 분주하고 고단했다. 여명이 희뿌옇게 밝으면 아버지는 날품팔이 일거리를 얻기 위해 부두에 나가고, 어머니는 무작정 시장 바닥에 좌판을 깔고 장사에 나섰다. 먹고 살기 어려워도 교육은 계속됐다. ‘피란 학교’가 만들어졌다. 부산역을 주름잡는 구두닦이 소년도, 집안일 도맡아 하는 또순이 소녀도 학교는 꼬박꼬박 나갔다. 오늘 죽도록 힘들어도 내일의 시간표는 짜야 한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은 포기할 수 없다.

희망 품고 집으로 가는 길, ‘이별의 부산정거장’


▎한국전쟁 당시 부산 국제시장. 1953년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피난살이하며 싹튼 사랑의 슬픔을 노래한 곡이다. / 사진:조갑제 닷컴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전쟁의 시계가 멈추고 서울로 환도가 이뤄졌다.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위태롭게 흔들리던 피난 생활도 작별을 고해야 할 때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 잘 가세요 잘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여 / 경상도 사투리의 아가씨가 슬피 우네 / 이별의 부산정거장.”

1954년에 나온 ‘이별의 부산정거장’(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은 가수 남인수가 불러 크게 히트했다. 음반 10만 장이 불티나게 팔렸다. 이별의 애틋한 노랫말과 달리 리듬은 뭔가 설레고 경쾌하다. 피난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건 심장 뛰는 일이었다. 쿵작쿵작, 경쾌한 리듬은 바로 그 희망찬 심장박동이었다.

정거장에서 작별한 ‘경상도 사투리의 아가씨’는 설움도 많았지만 그래도 잊지 못할 ‘피란 수도’ 부산이었다. 판잣집을 뒤로하고 기적이 운다. ‘희망열차’ 타고 귀환하는 사람들에게 부산도 아쉬운 듯 화답한다. “고향에 가거든 잊지 말고 / 한두 자 봄소식을 전해주소서.”(2절)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생활역사연구소 소장.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206호 (202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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