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선비 정신의 미학(75)] 이 땅에 유학의 씨앗 뿌린 홍유후(弘儒侯) 설총 

이두(吏讀)로 경전 풀이하고 가르치다 

고승 원효의 아들로 태어나 유학 받아들여, 통일신라 충효정신 뒷받침
국학 설립 앞장서고 ‘화왕계’로 왕에게 간언, 올해 문묘 배향 1000주년


▎향사 봉행 등 도동서원을 사실상 이끌어나가는 경산지역 유림. 오른쪽부터 천기찬 전 자인향교 전교, 이주로 전 도동서원 원장, 추성구 도동서원 원장. / 사진:송의호
"봄날 꽃의 왕 모란이 꽃들 위에 군림해 있다. 꽃들은 다투어 궁궐로 가 화왕(花王)을 뵙는다. 절세미인 장미가 아양을 떤다. ‘첩이 일찍이 왕의 큰 덕을 흠모해 찾아왔으니 행여 버리지 않으시면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하겠나이다.’ 이때 베옷 차림 할미꽃이 화왕에게 곁에서 일하기를 청한다. 할미꽃은 요염한 여자에게 현혹되지 말라고 간언한다. 그러나 화왕은 현란한 자태의 장미에 빠져 할미꽃의 충언을 듣지 않는다. 할미꽃이 다시 왕에게 분연히 아뢴다. ‘예로부터 왕이 요염한 여인을 가까이하면 충언을 멀리하여 마침내 패망을 부르지 않은 적이 드뭅니다. 서시(西施) 같은 요희(妖姬)가 나라를 뒤집고 맹자 같은 현인이 뜻을 얻지 못했습니다.’ 할미꽃이 곁을 떠나려 하자 왕도 그제야 잘못을 깨닫고 사과했다. 감동한 신라 신문왕은 ‘이를 교훈으로 삼도록 하라’며 이 이야기를 들려준 설총에게 높은 벼슬을 내렸다.”

[삼국사기]에 실린 통일신라 설총(薛聰, 654~661년 출생, 사망 연도 미상)의 글이다. 이 산문은 16세기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에도 ‘풍왕서(諷王書)’라는 이름으로 수록돼 있다. 설총은 우화를 통해 간신을 멀리하고 충신을 가까이해야 나라가 바로 서며, 향락을 멀리하며 도덕을 지킬 것을 아뢰고 있다. 후대에 이 글이 ‘화왕계(花王戒)’라 불리는 까닭이다. 강수·최치원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불리는 설총이 남긴 거의 유일한 글이다.

4월 18일 1300년을 훌쩍 뛰어넘는 유학자 설총의 흔적을 찾아 경북 경산시 남산면 삼성현문화박물관을 찾았다. 이 지역이 배출한 3성현 원효·설총·일연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간이다. 문화박물관 황종현 학예사의 안내로 설총실을 관람했다. 신문왕이 설총의 화왕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조각상이 보였다.

불교가 성행했던 신라 시대에 유학은 어떤 위치였을까. 이 땅의 유학은 신라에서 이미 싹을 틔우고 있었다. 신라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유교 덕목을 중시했다. 화랑의 세속오계에 그 정신이 배어 있다. ‘임금을 충성으로 섬겨라(事君以忠)’ ‘어버이를 효도로 섬겨라(事親以孝)’ 등이다. 중국 수나라에 유학한 원광법사는 충·효라는 유교 가치관을 화랑의 정신으로 내세운 것이다. 신라는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고 새로운 세상을 다스릴 이념으로 왕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유학을 받아들였다.

아버지 원효와 달리 유학 파고들어


682년 신문왕은 국학(國學)을 설치하고 유학을 가르쳤으며 관리 선발에 유교 경전을 활용했다. 삼국통일 뒤 정치 체제가 정비되자 원활한 지배를 위해 유학 중심 정치이념이 요구된 것이다. 국학은 신라의 고유한 언어와 역사·풍속·신앙 등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또 당나라 의례 등을 참고해 공자 등을 기리는 문묘(文廟) 제례도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설총은 아버지 원효와 달리 불교 아닌 유교를 선택했다. [삼국유사] 기록으로 미뤄 보면 국학 설립 당시 최고 책임자인 경(卿)에는 강수나 설총 같은 인물이 임명됐을 가능성이 있다. 국학은 신라의 최고 교육기관인 동시에 관리 양성 기관이었다. 설총은 국학에서 경전을 가르쳤다. [논어]와 [효경]을 비롯해 [예기] [주역] [상서] [춘추좌씨] [문선] 등이었다. 교과 과정은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충과 효를 강조하는 경학이 주가 되고, 거기에 문학이 덧붙여졌다. 유가의 덕목이 담긴 [논어]와 [효경]은 필수과목으로 중시됐다. 통일신라는 이후 788년(원성왕 4) 경전을 상·중·하 수준별로 나눠 시험 치는 독서삼품과라는 유학 인재 등용을 제도화한다.

문화박물관에는 설총이 완성한 이두(吏讀)를 현대인에게 설명하는 공간이 있었다. 삼국시대 우리는 말은 있으나 고유한 문자가 없었다. 한자는 중국의 언어여서 글과 말이 달라 신라는 관리나 학자 등 지배층만 한문을 쓰고 일반 백성은 글을 쓰지 못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말을 한자로 쉽게 적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훈민정음 창제에 영향을 미친 설총의 이두


▎삼성현문화박물관 설총실에 전시된 화왕계를 상징화한 조각상. / 사진:송의호
신라는 당나라와 협력해 삼국을 통일한 뒤 중국식 제도를 많이 받아들여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다. 어려운 한문으로 된 유교 경전을 일반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는 신라 현실에 맞는 문자가 필요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 이두였다. 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訓,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것이다. 한자를 한국어 어순에 따라 고치고 여기에 토(吐, 조사)를 붙였다. 한자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없던 하급 관리는 공문서를 쓰면서 이두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설총은 완성된 이두로 유교 경전을 해석했다. 그의 경전 해석은 고려 후기 주자학이 들어올 때까지 절대적이었다.

[삼국사기]는 설총이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해독하여 후학을 가르쳤으니 지금도 배우는 자들이 그를 종주로 삼는다”고 기록했다. 또 [삼국유사]는 “지금도 해동에서 명경을 업으로 하는 자들이 전수하여 끊이지 않는다”고 적었다. 설총은 어려운 유학 경전을 읽기 쉽게 이두로 해석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삼국사기]가 최초로 기록된 12세기 중반은 물론 [삼국유사]가 간행된 13세기 후반까지 설총의 학문이 통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승휴는 또 [제왕운기]에 “큰선비 설총은 이두를 지어내 속언(俗言)과 향어(鄕語)로 과문(科文)과 예서(禮書)를 통했다”고 적었다.

황종현 학예사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이두를 언급한 대목을 소개했다. 설총 사후 700년이 지난 1444년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는 최만리의 상소를 보고 일갈한다. “옛날 신라 설총이 이두를 만든 뜻은 백성을 편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냐. 그러나 빌려와 쓴 글자인 이두로는 표현이 매끄럽지 못하고 의미도 정확히 전달되지 않았다. 이두가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들은 설총은 옳다면서 군상(君上)이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세종은 이두의 한계를 지적하고 훈민정음 창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두는 이렇게 훈민정음 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학자들은 이두가 훈민정음 창제 이후 공존하다가 근대 초기 한글이 보편화한 뒤 사라졌다고 보고 있다. 설총이 완성한 이두는 우리 문자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삼성현문화박물관을 나와 홍유후(弘儒侯) 설총을 기리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을 찾았다. 문화박물관에서 동남쪽으로 1.6㎞ 떨어진 경산시 남산면 하대리 지척에 있다. 도동서원을 이끌어가는 유림 셋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동서원은 본래 도동재(道東齋)로 불렸다. 건물은 재실이던 강당과 홍유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등 두 동이 전부다. 그러나 작아서 더 정감이 갔다.

강당 마루 벽면에 연륜을 말하는 빛바랜 기문이 빼곡히 걸려 있다. 가운데 기문 아래 액자엔 공문이 들어 있다. 천기찬 전 자인향교 전교가 설명했다. “성균관은 2010년 도동재를 도동서원으로 승격시켰습니다. 공교롭게도 서원 이름이 한훤당(김굉필) 선생을 모신 달성 도동서원과 같지요. 그래서 간혹 이곳으로 잘못 오는 방문객도 있습니다.”

강당 뒤편 위패를 모신 사당 경모사(景慕祠)로 올라갔다. 위패에는 ‘弘儒侯薛先生(홍유후설선생)’이라 쓰여 있다. 유학을 널리 알렸다는 시호다. 홍유후는 1022년(고려 현종 13) 문묘에 배향됐다. 문묘는 공자와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우리나라 문묘는 714년(성덕왕 13) 처음 설치돼 조선 시대 성균관과 각 지방 향교에 들어섰다. 문묘에 모셔진 우리나라 유현은 모두 18위다. 18위 중 첫 위가 바로 홍유후 설총이다. 설명환 경주·순창 설씨 대종회장은 “올해 선조의 문묘 배향 1000년을 맞아 뮤지컬 화왕계와 학술대회 등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100년도 장구한데 1000주년이라니 놀랍다. 사당 앞뜰에 자리를 깔고 예를 표했다.

사당 왼쪽에는 홍유후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그 옆으로 선생의 가묘(假墓)가 꾸며져 있다. 설총묘는 경주 보문동에 자리한다. 예로부터 진평왕릉 동쪽 보문리에 있다고 전해져 왔다. 알려진 대로 설총은 출생 과정이 비범하다. [삼국유사]에 기록이 나온다. “원효는 어느 날 미친 듯이 거리에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무열왕이 노래를 듣고 말한다.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현인이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동방 18현 맨 윗자리로 문묘 배향


▎도동서원의 설총 신도비와 가묘, 그리고 뒤쪽으로 사당인 경모사가 보인다. / 사진:송의호
이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궁리가 칙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는데, 벌써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 만나게 됐다. 원효는 물속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 궁리는 그를 요석궁으로 인도해 옷을 말리게 하니 원효는 그곳에 머물게 됐다. 공주는 과연 아기를 배어 설총을 낳았는데, 설총은 나면서 총명하여 경서와 역사책을 널리 통달했다. 그는 신라 10현 중 한 분이다.”

설총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석공주는 무열왕 김춘추의 딸이다. 공주의 전 남편 화랑 김흠운은 전사했다. 설총은 신라 신분제인 골품제에서 6두품 아버지와 진골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설총은 평생 6두품으로 살았다. 그가 만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감산사 불상 조상기’에는 벼슬이 나마(奈麻)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마는 골품제 17등급 중 11번째 등급이다.

설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은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설화에 따르면 요석공주는 원효의 고향인 경산에 와서 설총을 낳아 길렀다고 한다. 원효의 생가터인 초개사에서 멀지 않은 유곡동 지름골에서 설총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무열왕 외손으로 평생 6두품


▎국보 81호인 감산사 미륵보살상(왼쪽)과 아미타불상(국보 82호). 설총이 불상 뒷면 조상기(造像記)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도동서원을 나와 동쪽으로 설총로를 거쳐 16㎞ 떨어진 반룡사에 들렀다. 원효가 창건했다는 구룡산자락 사찰이다. 절 입구에 내력이 적혀 있다. 642년(선덕여왕 11년) 백제는 대야성(합천)을 함락시킨다. 신라 국경은 원효의 근거지 압량(경산)으로 축소됐다. 이때 압량 도독으로 온 사람이 김유신이다. 김유신은 압량에 군사훈련장을 만들고 군사를 모집해 대야성을 되찾았다. 김유신은 당시 대중교화로 민심을 파고들던 원효를 만난다. 김유신의 도움을 받아 진골로 처음 왕위에 오른 무열왕은 삼국통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민심의 결집이 절실했다. 원효를 끌어들인 배경이다. 무열왕은 백제를 정벌하면서 구룡산 고개를 넘었다. 그래서 고개에 왕재[王峴]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반룡사 대웅전 오른쪽 산길에 왕재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설총이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기록이 분명치 않다. [삼국사기]에는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배웠다고 하나 알 수 없다”고만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삼국유사TV’를 운영하는 정호완 대구대 명예교수는 “[홍유후선생실기]에 따르면 신라에 귀화한 당나라 태학사 방지(方智)가 스승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설총을 둘러싼 이야기는 역사보다 설화로 더 많이 남아 있다.

설총은 신라가 통일국가의 기반을 닦는 시기 이두를 완성하고 유교 경전을 풀이하며 나라를 이끌 인재를 가르쳤다. 아버지 원효가 난해한 불교 교리를 쉽게 풀어 대중을 교화했듯 설총은 유교 경전을 우리말로 풀어 널리 전했다. 또 왕에게 쓴소리를 서슴지 않는 선비정신의 전통을 세웠다.

[박스기사] 설총의 아들 설중업은 일본과 인문 교류 - 한문학 대가 담해삼선과 나눈 詩, '속일본기'에 남아

원효의 아들은 설총이며, 설총의 아들은 설중업(薛仲業)으로 전해진다. 경북대 이동주 연구교수에 따르면 설중업은 왕명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귀국 후 고선사에 서당화상비를 세운다.

설중업은 아버지와 나이 차가 많다. 무열왕 재위 연간(654~661) 태어난 설총은 58~65세를 살았다. 설총이 50세에 설중업을 낳았다고 보면 일본으로 사행한 779년 아들의 나이는 69~79세 고령이다. 나이로 보아 설중업이 설총의 막내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열전에는 그를 원효의 포손(抱孫)이라 했다. 포손은 제사를 모시는 손자라는 뜻이다. 설중업은 맏이일 가능성이 있다.

당시 일본 사행은 견당사 일행이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하자 일본 측이 편의를 제공하면서 입경이 이뤄졌다. 사신 접대는 국가 의례인 빈례로 진행된다. 사신의 노고를 치하하고 작위가 주어진다. 음주 가무와 함께 시를 지어 화답한다. 설중업은 그곳에서 한문학의 대가 담해삼선(談海三船)을 만났다. 그는 승려로 있다가 환속한 신분이다. 담해삼선이 설중업이 포함된 신라 사신의 연회장에 참석한 것은 그곳이 인문 교류의 장이기 때문이었다.

담해삼선은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을 감명 깊게 읽은 뒤 저자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던 사람이었다. 사모하던 원효의 혈육 설판관을 만나 희열을 느끼며 그 감동을 시로 남겼을 것이다. 개연성이 높은 추론이다. 당시 설중업 일행의 일정은 [속일본기(續日本記)]에도 기록이 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206호 (2022.05.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