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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자본주의와 문화 | 물질문명의 파노라마(18)] 예술과 자본주의, 근대의 동행 

소프트파워,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다 

피렌체 오페라에서 태동한 예술 시장, 네덜란드의 초상화·튤립 광풍으로 이어져
美 할리우드 영화와 음반으로 대중문화 전파, 고급예술은 클래식과 미술로 유지


▎2014년 잘츠부르크 음악 축제에서 오페라 [일트로바토레]의 한 장면. / 사진:위키피디아
예술과 자본주의, 얼핏 들으면 공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예술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영혼에 감동을 선사하는 영역인 반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물질적 필요를 위해 생산 활동을 보장하는 경제체제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를 ‘얼음처럼 차가운 이기적인 계산’이라고 지적한 이유이며, 실제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동물적 본능과 계산하는 지적 능력을 이윤 추구로 인도한다.

하지만 예술과 자본주의는 모두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반영한다. 물론 동물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멋진 몸짓을 한다. 하지만 인간처럼 아름다움 그 자체를 추구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노력을 하진 않는다. 또 동물은 인간처럼 무한의 자본을 축적하려는 허망한 노력을 하면서 일생을 낭비하지는 않는다. 예술과 자본주의는 둘 다 단기적 필요를 넘어 무한의 경지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실제 자본주의와 예술의 역사는 서로 긴밀하게 얽혀있다. 중세 말기 유럽의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처음으로 자본주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근대 예술의 역사가 태동했다. 권력과 부와 종교가 하나로 뭉쳐 있던 상황에서 자본과 예술이 독자적인 터전을 성공적으로 마련하고 독립했기 때문이다. 왕이나 귀족의 전유물이던 부와 예술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통해 부르주아나 대중으로 점차 확산해 나가기 시작했다.

오페라와 부동산


▎렘브란트의 1641년 작품 [액자 속의 소녀]. 17세기 네덜란드의 초상화 유행을 반영한다. / 사진:위키피디아
말하자면 평등한 근대를 향한 여정에서 자본주의와 예술이 동행했다는 뜻이다. 21세기에 자본주의는 부의 불평등을 상징하게 됐지만, 초기 자본주의는 돈을 통해 특권을 뛰어넘을 수 있는 해방을 의미하는 제도였다. 중세의 신분 사회는 아무리 ‘금수저’라도 귀족사회에 동참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신분의 장벽 대신 구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유롭게 왕족 행세를 할 수 있는 문호를 개방했다. 그리고 왕족 행세의 첫 관문은 바로 예술이었다.

인류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예술을 발전시켰다. 권력 집단은 물질적인 부도 독점했기에 의식주 모든 영역에서 풍족한 자원을 활용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재료를 아끼지 않는 미식(美食)을 발전시켰고, 화려하고 다양한 옷을 수시로 갈아입었으며, 웅장한 집에 살았다. 물론 권력 집단은 사치스럽게 물질적 풍요를 과시하는 게 아니라 예술을 통해 자신들이 고귀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기독교 문명의 사랑, 서구 기사도에서의 명예, 유교 문화에서 강조하는 덕(德) 등은 저마다 추구하는 지향이 달랐지만 예술은 이 모든 가치를 강조하고 장려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지배자들은 예술을 통해 사회의 가치를 드높이고 대중과 소통하면서 베푸는 모습을 보였다.

1600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그 시대의 가장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종합예술이 탄생했다. 프랑스 국왕과 피렌체 메디치가의 결혼 행사를 기념해 오페라라는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화려한 무대를 꾸민 뒤 가수들이 시적인 가사를 노래로 부르고 음악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형식이었다. 다만 오페라는 초대받은 왕족과 귀족만 제대로 구경할 수 있는 행사였다.

그로부터 37년 뒤 같은 이탈리아의 부르주아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산 카시아노(San Cassiano) 오페라 전용 극장을 개관했다. 입장권을 산 사람이라면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라도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예술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후 100여 년 동안 베네치아에는 15개의 오페라 전용극장이 문을 열었다. 그만큼 귀족이 특권을 누리던 문화생활에 부르주아들은 목말라 있었다.

요즘 오페라 하우스와 같은 문화 시설은 공적 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 베네치아에서는 오페라가 얼마나 인기였는지 매우 높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부동산 투자처로 각광을 받을 정도였다. 이후 18~19세기 유럽에서 오페라 하우스는 대도시의 얼굴이라고 할 정도로 유행하면서 인기를 누렸다.

오페라가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주역인 부르주아가 선호하는 음악 장르였다면, 초상화나 풍경화는 네덜란드 자본가들이 열광하던 미술 장르였다. 17세기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이었던 암스테르담에서는 부동산 열풍이 불었다. 당시 네덜란드 부르주아들은 주택을 경쟁적으로 장식했는데 그림값이 집값의 절반 정도에 해당했다.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이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es Vermeer)와 같은 위대한 화가가 부상할 수밖에 없는 예술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 희귀하고 아름다운 모양의 튤립에 투기하는 열풍인 ‘튤립 마니아’도 동시대인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자본주의와 미를 추구하는 열망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광기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클라크 게이블(레트 버틀러 역)과 비비안 리(스칼렛 오하라 역). / 사진:위키피디아
자본주의 초기 소수의 부르주아가 풍요의 혜택을 누렸다. 마찬가지로 소수의 부르주아만이 오페라극장을 왕래하거나 거실에 초상화와 풍경화를 걸었다. 문학은 처음부터 약간 다른 특징을 보였다. 오페라나 연극, 발레 등은 현장에서 연주자, 배우, 무용수가 직접 공연했다. 미술은 독보적인 작품을 독점적으로 소장해야 가치가 있다. 하지만 책은 인쇄술의 발달로 찍어낼 수 있게 되면서 특수한 문화 영역이 됐다. 근대 민족주의를 분석한 베네딕트 앤더슨은 “소위 프린트 자본주의(Print Capitalism)가 하나의 언어로 묶인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고 강조했다. 책은 문화이자 상품이었다. 앞서 살펴본 베네치아는 오페라뿐 아니라 인쇄와 출판 분야에서도 유럽의 수도 역할을 했다. 하지만 대중적 출판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다양한 언어로 나뉜 유럽 대륙과 비교해 미국은 영어로 통합된 거대한 문화권이자 시장의 기능도 담당했다. 베스트셀러라는 표현이 미국에서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35년 미국 뉴욕의 맥밀런 출판사는 마가렛 미첼이라는 무명 여성작가의 첫 소설을 출간했다. 이 소설은 1년 만에 1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는 새로운 형식의 자본주의였다. 산업혁명을 통해 부상한 자본주의란 과학과 기술을 활용하는 생산 기법을 동원하고 다수의 노동자가 힘겹게 재료나 상품을 만들어낸 뒤, 전국 상점을 통해 판매하고 유통하는 구조였다. 반면 출판 자본주의는 작가가 자신의 골방에 틀어박혀 상상의 나래를 펴는 개인의 정신세계가 가치 창출의 핵심이었다. 출판 자본주의만큼 아이디어가 부를 창조하는 모델은 찾아보기 어렵다.

출판 자본주의의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등장한 주역이 영화 산업이다. 17세기 오페라가 당시의 혁신적인 종합예술이었듯 20세기 영화는 기존의 연극과 소설과 음악과 춤을 결집한 새로운 장르였다. 소설이란 개인이 쓴 이야기를 개별적으로 읽는 형식이다. 영화는 개인이 쓰고 회사가 만들어 대중이 즐기는 특수 상품이다.

현대 자본주의와 예술의 가장 대표적인 조합은 미국에서 생성된 영화 산업이다. 1939년 개봉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새로운 시대를 연 상징적 작품이다. 캘리포니아의 할리우드는 이때부터 세계인이 꿈꾸는 영화 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했고, 미국 소프트파워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영화는 처음부터 많은 자본을 동원하는 산업으로 시작했다. 기존의 공연 예술은 무대와 객석을 갖춘 하나의 멋진 극장이면 족했으나 영화를 여러 극장에서 동시에 상영하기 위해선 다수의 극장 네트워크를 보유하는 편이 유리했다. 초기 영화 산업 회사들은 직접 극장을 운영했다. 20세기 폭스, MGM, 파라마운트, 워너, RKO 등 1930년대 5대 영화 제작사는 모두 극장 체인을 보유했다.

예술 자본주의의 신세계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일곱 난쟁이를 소개하는 월트 디즈니. / 사진:위키피디아
영화 제작도 점점 많은 자본을 요구했다. 1927년 워너사가 제작한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는 50만 달러를 투자한 결과물이다. 또 극장에는 고가 스피커 등 오디오 시스템이 필수가 됐다. 고대 로마의 마차 경주가 등장하는 [벤허]나 남북전쟁 장면을 찍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각각 4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이 들었다.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가운데 이 규모의 자금을 투자한다는 것은 소수 자본가만의 특권이었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영화 산업도 위기를 맞게 되면서 뉴욕의 은행들이 주요 제작사를 인수했다. 리먼 브라더스, 체이스맨해튼, 뱅크 오브 아메리카 등 월스트리트의 은행들이 돈 가방을 들고 할리우드에 나타났다.

영화의 성공 여부는 투자 능력 못지않게 감독의 연출 실력이나 배우의 인기가 중요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은 촬영을 시작한 뒤 감독을 두 번이나 갈아치웠다. 또 MGM사 전속인 클라크 게이블이라는 인기 배우를 남자 주연으로 캐스팅하기 위해 독립 제작을 포기하고 MGM의 투자를 허용해야 했다.

예술의 산업화를 극단적으로 추진한 사례가 월트 디즈니다. 자존심 강한 감독이나 변덕 심한 배우를 모두 피할 수 있는 제작 방식이 등장한 것이다. 1928년 등장한 ‘미키 마우스’는 디즈니가 부모이자 주인이었다. 디즈니는 1938년 개봉한 [백설공주]를 제작하기 위해 300명의 애니메이터를 동원해 200만장의 그림을 그리게 한 뒤 25만장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이들 그림은 모두 손으로 그려 색칠한 것으로 디즈니사는 대형 미술 공장이라 불릴 만했다.

게다가 디즈니는 캐릭터 사업의 원조이기도 하다. 계약을 통해 미키 마우스의 이미지를 판매함으로써 시계, 인형, 음식, 연필, 공책, 식기, 액세서리 등 다양한 용품에 영혼과 상혼을 동시에 불어넣었다. 코네티컷의 잉거솔 워터버리(Ingersoll Waterbury) 시계사는 1933년부터 2년간 200만 개의 미키 마우스 시계를 판매할 만큼 디즈니 캐릭터는 인기 만점이었다.

TV와 안방극장

유성영화가 미국에서 대중적 인기를 끌며 예술의 자본주의화를 주도하던 시기에 또 다른 변화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전파를 통한 라디오 기술이 발전하면서 방송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영화가 이미지와 소리를 종합한 제품이었다면 라디오는 소리를 수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게 전달하는 기기다. 라디오가 미국에서 대중적 관심과 인기를 끌게 된 것은 1921년 국제 복싱 시합 덕분이었다. 당시 미국 헤비급 챔피언 잭 뎀시와 프랑스 챔피언 조르주 카르팡티에의 시합이 미국 저지시티에서 열렸다. 현장 관객만 9만 명이었지만, 더 많은 사람이 미국과 프랑스 주먹의 대결에 동참할 수 있도록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 미국 라디오 회사)는 극장이나 뉴욕 타임스퀘어 등에 경기 중계 시설을 설치했다. 덕분에 뎀시가 4라운드에 카르팡티에를 KO로 물리치는 순간을 복싱 팬들은 생동감 있게 경험할 수 있었다.

라디오는 미국인들의 생활필수품으로 등장했다. 특히 야구경기를 비롯한 스포츠는 물론 다양한 음악이 미국 가정 깊숙이 파고들었다. 1920년대 미국의 라디오 판매량은 수백만 대에 달했고, 농촌의 경우 전기가 없는 지역이 많아 배터리를 부착한 라디오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말하자면 전기가 들어와 전등을 켜기 전에 라디오가 먼저 미국 시골 가정으로 침투했다는 뜻이다. 라디오 수신기가 미국 전역에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미국은 전국이 함께 호흡하는 사회가 됐고, 같은 음악의 리듬에 춤추는 나라가 됐다. 대중음악이 탄생한 것이다.

소리만 전달하는 라디오의 한계를 극복한 것은 1947년 TV가 등장하면서다. 영화관이 큰 스크린이라면 TV는 집안에서 볼 수 있는 작은 스크린이었다. 1950년대 미국은 TV가 포함된 개인 주택 판매가 유행이었다. 1955년 미 전역에 2600만대의 TV가 보급됐다. TV는 영화와 다른 특성을 지녔다. 영화가 대규모 투자로 두 시간의 비싼 구경거리를 제공한다면, TV는 공짜인 대신 일상적으로 즐겨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안방극장에 드라마가 등장하게 된 계기다. 1951년 시작한 [루시를 사랑해](I Love Lucy)는 보통 사람의 일상을 스크린에 옮겨 놓은 시트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복싱이 라디오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것처럼 미식축구와 TV는 시너지를 일으키며 발전했다. 미식축구는 폭력적이고 부상이 많아 야구만큼 자주 경기를 개최할 수가 없었다. 현장 입장권을 주로 판매하는 스포츠 경제에서 불리한 수익 구조다. 그러나 TV 중계를 통한 관람은 경기가 너무 많은 것보다 오히려 적절한 간격을 두는 편이 유리하다. 미식축구 챔피언을 결정하는 슈퍼볼 게임이 열리는 날은 미국에서 독립기념일,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와 함께 4대 축제가 될 정도로 중요한 ‘국경일’이 됐다.

미국의 영화 산업이나 라디오, TV 등은 세계를 향해 확산해 나갔다. 자본의 집중적 투자가 필요한 영화 산업에서 미국의 거대한 시장과 할리우드라는 생산 기지는 확실한 비교 우위를 제공했다. 반면 유럽이나 일본 영화는 대중성보다 예술성을 살려 국제적 생존을 모색했다. 유럽의 칸, 베네치아, 베를린 3대 영화제가 미국의 아카데미에 비해 예술성을 높이 평가받는 배경이다.

유럽, 특히 프랑스는 ‘영화는 예술 분야라 일반적인 시장의 법칙을 그대로 적용해서는 곤란하다’는 논리를 개발했다. ‘예술이란 한 나라의 정신에 속하므로 보호해야 마땅하다’며 자유무역의 적용 대상에서도 제외해야 한다는 원칙을 주장해 왔다. 그 결과 TV에서 국내 또는 유럽 영화를 특정 비중 이상 방영하도록 강제하고 있으며 영화 산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문화적 상품이며 가격 경쟁력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인도의 뭄바이에서는 발리우드(Bollywood, 봄베이+할리우드)가 거대한 힌두 영화 메카를 구성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도 날리우드(Nollywood, 나이지리아+할리우드)가 생겨났다.

라디오와 TV는 음악이나 무용, 연극, 드라마, 영화 등을 저렴한 가격에 즐기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소유권을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자본주의 정신은 컬렉션이라는 형식으로 공연 예술 분야까지 마수를 뻗쳤다. 1948년 LP, 즉 롱 플레이라는 음반이 시장에 나오면서 판을 수집하는 아마추어들이 등장했다.

소유와 향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구세주)]는 역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미술품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창조적 파괴의 원칙에 따라 LP 다음으로 1960년대에는 카세트테이프, 1980년대부터는 콤팩트디스크(CD)가 출현했다. 컬렉션이 형성될만하면 주기적으로 또 다른 매체가 등장해 기존의 컬렉션을 고물로 만들어 버린다. 이처럼 모든 음향을 디지털화하는 데 성공한 21세기에 들어서자 LP가 다시 유행하는 기현상도 나타났다.

영상 시장에서는 1970년대 표준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유럽의 필립스가 개발한 VHS와 일본의 베타맥스가 비디오 시장을 지배하기 위한 경쟁에 나선 것이다. VHS가 결국 표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일본 제조업체들이 영상 장비 산업에서 VHS라는 유럽의 기술을 더 잘 활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카세트테이프나 비디오테이프는 모두 음악과 영상을 즐기는 동시에 자신의 소리와 이미지를 녹화할 수 있었기에 일기와 같은 가족생활의 기록 장치로 활용됐다.

음반이나 영화처럼 대중적 예술이 현대 자본주의와 함께 발전을 거듭했다고 해서 전통적 엘리트 예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술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기존의 유럽이나 미국뿐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 같은 신흥 부국의 부호들이 컬렉터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희귀성의 원칙에 따라 국제 시장에서 인정받은 작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기 마련이다.

고급 예술 시장을 지배하는 두 경매회사는 모두 영국에서 출범한 크리스티(Christie’s)와 소더비(Sotheby’s)다. 전자는 프랑스 명품 재벌 피노 그룹에 속하며 후자는 미국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2017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살바토르 문디]는 산유국 아랍 에미레이츠의 아부다비 왕가가 4억5000만 달러에 구매해 미술 작품의 가격 신기록을 세웠다. 한국의 대표 재벌 삼성도 예술 컬렉션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세계시장의 큰손으로 활약했다.

예술과 자본의 세계 지도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클래식 음악은 여전히 고급 예술의 정점을 형성한다. 베를린과 빈 필은 교향악단의 최고봉으로 활약하며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축제는 세계 클래식 음악계 최고 실력자들의 연중행사다. 밀라노는 여전히 오페라의 중심이고 런던, 뉴욕, 파리는 클래식 음악계의 주류다. 경제발전이 궤도에 오른 동아시아 국가들도 클래식 음악의 중심으로 서서히 진입하는 모양새다. 일단 피아노가 대중적 인기를 끌며 일본의 야마하나 한국의 삼익과 영창, 중국의 펄리버(Pearl River Piano, 珠江) 등은 악기 제조업 분야에서 클래식 음악의 세계로 접근했다. 현재 중국에는 4000만 명의 피아노 인구가 있으며 펄리버는 연간 10만대 생산능력을 자랑하는 세계 1위 피아노 업체다. 다수의 노력은 소수의 훌륭한 연주자를 낳고 시간이 지나면 지휘자가 탄생하기도 한다. 도쿄, 서울, 타이베이, 베이징에는 국제적 수준의 음악당들이 건설됐다. 다만 아직 세계적 오케스트라나 음악 축제, 콩쿠르가 나오진 못했다.

한국은 노래, 드라마, 영화 같은 대중예술에서 K팝, K드라마, K무비 등의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다. 역사적 뿌리와 전통이 족보처럼 작동하는 서구 중심 엘리트 예술과 비교해 대중적 장르는 훨씬 개방적이고 집중적인 노력으로 단기간에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예술과 자본주의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 손잡고 걸어온 동반자다. 인류사의 권력자들이 예술을 통해 자신들의 폭력적 지배를 포장하고 미화했던 것처럼, 자본가들 역시 돈벌이가 수전노의 집착이 아닌 위대한 문화적 가치를 향한 발걸음임이라고 증명하려는 듯하다. 이런 현상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무관심의 이익]에서 설명했다. ‘물질적 이익에 초연한 태도가 오히려 더 큰 사회적 이익을 안겨준다는 역설이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기본’이라는 통찰이다. 자본주의 정신이 널리 지배하는 오늘날까지 ‘돈이 나의 목표’라는 자본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이며 성공한 사업가일수록 예술에 투자하거나 박물관을 세우는 까닭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2206호 (202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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