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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15)] 바다에서 시작된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 

‘객관적이면서도 불편부당’의 역사관을 제시하다 

특정 국가·정파·이념과 관계없이 기록한 인류 최초의 학자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탄생하면서 역사라는 학문도 등장


▎헤로도토스 전신상. / 사진:유민호
2800년 전 스토리다. 무대는 고대 그리스 에게해 동부 이오니아 지방(현재 터키 아나톨리아)이다. 리디아(Lydia)의 왕 칸다우레스(Candaules)는 자신의 부인을 정열적으로 사랑한다. 신에 대한 숭배나 신앙에 가까운 애정이다. 어느 날 자신의 최측근이자 상담역인 기에스(Gyges)를 불러 ‘왕비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몸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얘기하다가 기묘한 제안 하나를 하게 된다. 기에스에게 왕비의 벌거벗은 모습을 직접 보라는 요청, 아니 요구다. 왕비 몸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면서 침실 옆 비상문에 숨어서 관찰하라는 것이다. 기에스는 왕의 황당한 제안을 ‘즉각’ 거부한다. 그러나 칸다우레스는 거의 강제로 기에스를 침실로 몰아넣는다. 절대 나쁜 의도가 없다는 점도 반복·강조한다. 기에스는 할 수 없이 왕비의 침실 옆 비상문에 숨어 기다린다. 나중에 들어온 왕은 왕비에게 옷을 벗도록 유도한 뒤 밖으로 나간다. 나체의 왕비는 아무것도 모른 채 혼자 머문다. 침대에 올라가려다 가볍게 바닥에 미끄러진다. 몸을 아래로 내리는 순간 얼떨결에 비상문에 숨은 기에스를 발견한다. 그러나 왕비는 모르는 척하면서 침대 안으로 들어가 잠을 잔다.

왕비는 다음 날 자신의 시녀를 기에스에게 보낸다. 간밤의 상황을 조사·확인한다.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배후에 칸다우레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왕비는 부끄러움과 불명예로 치를 떤다. 현대인에게는 대수롭지 않겠지만 고대인이 느끼는 수준은 상상 이상으로 무겁고 강하다. 왕비는 기에스에게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말한다. 첫째, 왕비의 벗은 몸을 본 죄로 자살이나 처형을 선택하라. 둘째, 불경스러운 명령을 내린 칸다우레스를 죽이고 새로운 왕이 된 뒤 왕비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죽음과 삶이란 극단의 선택만 있을 뿐 중간은 없다. 죽음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고 권력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기 위해 왕을 죽일 것이다. 기에스는 왕비의 도움으로 왕을 살해한다. 그러나 신하들 사이에서 기에스의 행적이 드러나면서 반발이 일어난다. 기에스와 왕비는 칸다우레스의 황당한 생각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고 항변한다. 결국 신의 오라클(Oracle), 즉 신탁(信託)에 따라 잘잘못을 판단하자는 결론에 도달한다. 신의 이름을 빌린 신관들의 판결이 내려진다. “신은 기에스를 용서한다. 그러나 기에스의 후손이 언젠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짧게 압축한 스토리지만 기원전 8세기에 나타난 ‘실화’에 기초한 기록이다. 그리스 출신 역사철학자 헤로도토스(Herodotus)의 저서 [역사(The Histories)] 1장에 등장하는 첫째 얘기다. 헤로도토스는 역사학자 대부분이 공인하는 ‘역사의 아버지’다. 칸다우레스 스토리는 헤로도토스가 역사의 아버지로 등장하면서 발굴한 첫째 기록이다. 자랑에 눈이 먼 비상식적인 왕, 불명예를 당한 왕비의 복수, 쿠데타를 통한 권력 탈취, 후손으로 이어지는 천벌. 1996년 제작된 안토니 밍겔라(Anthony Minghella) 감독의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를 기억할 것이다. 감독상을 비롯해 수많은 아카데미상을 받았지만 원래 스리랑카 출신 작가 ‘마이클 온다취(Michael Ondaatje)’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문학평론가들은 온다치의 소설을 헤로도토스의 칸타우레스 스토리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본다. 헤로도토스가 남긴 인류 초유의 고전(古典)인 [역사]의 첫 장면은 수천 년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의 영혼을 뜨겁게 만든다.

5년 전 한국에서 ‘역사=완장’이었다


▎보드룸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고대 그리스 극장. / 사진:유민호
‘역사’라는 단어는 한국 정치 무대에 등장하는 필수 키워드 중 하나다. 보통 ‘전통’이라는 단어도 따라붙지만 지난 5년간의 문재인 정권을 보면 철저히 분리해 사용된 듯하다. 평균 한국인이 볼 때 전통이란 단어는 긍정적 요소가 많은 이미지로 떠오른다. 역사는 어떨까? ‘잊지 말자’라는 동사와 함께 ‘청산’이라는 단어로 직행할 것이다. 한국에서 언급되는 역사라는 단어 속에는 뭔가 어둡고 부정적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언제부턴가 ‘역사=과거사’로 표현하면서 한층 더 음흉한 이미지로 굳어져버렸다. 긍정적으로 볼 만한 ‘어제’가 거의 없다. 굳이 찾자면 세종대왕의 한글이나 이순신의 한산대첩, 멀리 보면 광개토왕·을지문덕·강감찬 정도다. 기묘하게도 ‘잊지 말자, 청산’으로 시작되는 부정적 역사관의 대부분은 ‘처벌과 응징’으로 낙찰된다. 지금도 가끔 등장하지만 5년 전 인기 유행어였던 ‘적폐’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21세기와 20세기를 무대로 한 한국 역사 곳곳이 적폐 대상으로 떠오르면서 난도질당했다. 언뜻 보면 ‘역사=전과 기록’으로 느껴진다. 당시 상황을 되돌려보면 ‘역사=완장’ 그 자체였다. 완장을 차는 즉시 적폐 여부를 결정하고 처벌로 들어갔다. 역사를 언급하지만 선과 악을 나누는 명분에 불과하다. 객관적·실증적 토론은 아예 없다.

유교 종단에 따르면 한국에는 1000만 명의 유교 신자가 있다고 한다. 완장을 찬다면 한국 인구 5분의 1인 유교 신자를 ‘한순간’ 적폐로 몰아세울 수 있을 것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근거다. 선언에 참가한 33인 가운데 당대의 유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조선 독립=조선왕조 해체’로 보면서 유학자 모두가 불참했다. ‘조선=이씨·조선=유학’이 식민지 이전 한반도의 정치 구도다. 새삼스럽게 103년 전 역사를 들먹이며 어제를 탓한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무모·무지한 것인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400여 년 전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 샤일록을 냉혈한으로 묘사한 윌리엄 세익스피어를 반유대주의자이자 적폐로 몰면서 무덤 속 시체에 소금을 뿌리는 식이다. 그러나 그 같은 황당·무모·무식한 완장은 지금도 버젓이 한반도 역사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인류사에서 ‘역사’라는 단어가 처음 탄생한 것은 기원전 430년이다. 헤로도토스가 남긴 책 [역사]가 탄생하면서 역사라는 학문도 인류 문명 문화사의 핵심 중 하나로 등장한다. ‘역사(History)’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 ‘히스토리아(Historia)’를 어원으로 한다. ‘지식 지혜를 탐구하는 행위, 현지 연구 조사’가 히스토리아의 원래 의미다. 현장에 기초한 구체적이고도 학문적 활동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헤로도토스가 책의 이름을 [The Histories]로 한 것도 현지 연구 조사를 통한 지식·지혜·탐구의 결정판이기 때문이다. 연구 영역은 과거만 아니라 미래의 영역도 가능하다. 지혜 탐구와 현지 조사는 어제 만이 아닌 오늘과 내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벌어진 역사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적폐청산 완장 칼춤을 헤로도토스가 본다면 과연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하다.

역사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에 임하는 출사표에 해당될 듯하지만 헤로도토스는 책의 서문에서 왜 자신이 [역사]라는 책을 쓰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 이 책은 나, 헤로도토스가 행한 지식과 지혜 추구의 결과에 해당한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람들이 남긴 사건들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책을 쓴다. 특히 그리스인과 비(非)그리스인 사이에 벌어진 중요하고도 특출한 업적들을 남기기 위해 기록한다. 책 속의 여러 내용 가운데 특히 중요한 부분은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사이에 벌어진 적대감의 이유와 배경에 관한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


▎신의 이야기를 인간의 역사로 바꾼 헤로도토스. / 사진:유민호
헤로도토스가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학자들 대부분이 인정하는 것으로 ‘객관적 기술에 기초한 불편부당 사관’이 핵심일 듯하다. 미리 단정(Judgement)하거나 편견(Prejudice)과 고정관념(Stereotype)으로 대하지 않는다. 제3자 입장에서 열린 눈과 마음으로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다. 그 같은 자세를 바탕으로 현장의 목소리에 주목한 것도 헤로도토스의 위대한 업적이다. 직접 역사의 현장에 가서 현지의 얘기에 주목했다. 자신의 귀에 어긋난다고 해도 가감 없이 그대로 실었다. 이집트의 ‘날개 달린 뱀’에 관한 얘기는 좋은 증거다. 아랍인들로부터 들은 얘기로, 이집트 사막에 자기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뱀들이 있다고 [역사]에 기록돼 있다. 여기저기 날아다니면서 인간에게도 피해를 주는 뱀이라고 한다. 비록 본인도 믿지 않지만 남의 얘기를 들은 뒤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헤로도토스는 책의 서문에서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이 남긴 중요하고도 특출한 업적을 기록한다’고 말했다. 헤로도토스와 같은 피(血)인 그리스만이 아닌 페르시아 나아가 이집트·인도·아프리카인의 장점도 남기겠다고 말한다. 서문에서 ‘적대감’이란 표현이 나오지만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을 의미한다.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서의 주된 테마는 기원전 5세기 펼쳐졌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다. 세계사 시간에 등장하는 마라톤 대평원에서의 그리스의 승리, 페르시아 대군에 맞선 스파르타 용사 300인,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얘기의 출처가 전부 헤로도토스의 책 [역사]에 있다. 헤로도토스는 이들 전쟁사를 그리스와 페르시아 양쪽 모두의 관점에서 기록한다. 특정 국가·지역·민족·정파·이념과 관계없이 역사를 기록한 인류 최초의 학자가 바로 헤로도토스다.

‘객관적이면서도 불편부당의 역사관’은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기본자세다. 상식적으로는 통하는 말이지만 실제 역사를 객관화해 풀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피·땅·이념·이해관계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내로남불’은 인간이 갖는 본능 중 하나다. 한국에서 들어볼 수 없는 얘기지만 ‘왜 을사오적이 나라를 팔아먹었던가’에 대한 ‘역적의 변명’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을사오적을 찬양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을사오적을 무조건 증오하고 멀리할 마음도 없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을사오적=단죄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사리사욕과 친일에 놀아나다가 나라까지 팔아먹었다는 것이 을사오적의 전부다. 당대만이 아닌 후대에도 연좌제에 걸려 얼굴도 못 들고 살아가는 판이다. 일본인이 보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암살했다. 한국의 영웅이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건국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세운 최악의 테러리스트로 본다. 그러나 일본 역사는 안중근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테러리스트라고 비난도 한다. 반면 이토를 왜 암살했는지에 대한 얘기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물론 안중근 개인의 품격과 삶에 대한 부분도 거론된다. 과연 일본이 안중근을 좋아해서 관심을 갖는 것일까? 헤로도토스가 2500여 년 전에 제시한 ‘객관적이면서도 불편부당의 역사관’이 배경에 있다.

필자가 자주 인용하는 말이지만 “인식한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To perceive is to suffer)”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구(警句)가 있다. 휘황찬란하고 듣기 좋은 소리만이 아닌 척박한 현실과 자신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정할 때에야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을사오적의 입을 통해 조선 집권 세력의 무능과 위선이 눈앞에 펼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황당한 궤변을 동원해 일본 식민지에 동의한 이유를 줄줄이 제시할 가능성도 많다. 대부분은 듣는 사람을 부끄럽고 우울하게 만드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입을 봉한 뒤 애국주의 완장과 더불어 적폐 캠페인에 나서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교훈은 고통에서 시작된다. 미국 남북전쟁 역사를 보면 패자인 남부군의 명분과 정의도 분명히 실려 있다.

그리스 지성사 공급원이었던 이오니아 지방


▎헤로도토스 두상. / 사진:유민호
구체적으로 헤로도토스가 어떤 식의 ‘객관적이면서도 불편부당의 역사관’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자. 책에서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왕인 크세르크세스(Xerxes) 1세를 핵심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다. 기원전 486년부터 기원전 465년까지 통치한 왕이며, 그리스 침략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잭 스나이더(Zack Snyder) 감독의 2006년도 영화 [300]을 기억할 듯하다. 영화 속에서 크세르크세스는 인디언추장 같은 분장에 잔인한 독재군주로 묘사돼 있다. 그리스인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왕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모두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귀(耳)의 권력자’인 동시에 시심(詩心)이 풍성한 지성적 인물이자 뛰어난 군사전략가로 추앙하고 있다. 그리스를 공격하기 위해 바다를 건널 때 “이렇게 많은 군인이 있지만 100년 뒤에는 아무도 살아 있지 않을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와 전선에 나서는 첫째 아들을 빼달라는 신하의 얘기를 듣자마자 신하를 죽이고 아들도 반 토막 내서 살해한 뒤 성 밖에 걸어뒀다는 일화가 [역사] 속에 등장한다.

헤로도토스의 고향은 그리스 당시 이오니아 지방의 하리카르나수스(Halicarnassus)다. 지금의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 보드룸(Bodrum)이다. 리디아의 왕 칸다우레스가 살던 곳에서 가깝다. 그리스 철학가나 사상가를 언급할 때 범하기 쉬운 오류지만 얘기의 중심을 아테네에 두면서 펼쳐나가는 경향이 강하다. 인류 최초의 폴리스(Polis)로 개개인에 의한 직접 민주주의 공화제를 성취한 곳이란 점에서 아테네가 그리스 문명 문화의 중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테네를 빛낸 철학·사상·예술·문학과 같은 지성적 활동의 출발점은 ‘결코’ 아테네가 아니다. 당시 아테네에서 배편으로 이틀 정도 걸리던 에게해 동쪽 이오니아 지방이 그리스 전체 지성사를 지탱한 최대의 공급원이었다. 역사 서사시 [일리아드(Iliad)]의 호메로스(Homeros)를 시작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분석한 탈레스(Thales), 가로·세로·수직선으로 이어진 인류 최초의 계획도시를 창안해 낸 히포다무스(Hippodamus)를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 지성인의 고향이 바로 이오니아 지방이다.

터키 보드룸에서 만난 헤로도토스 조형물


▎보드룸의 명물 풍차. / 사진:유민호
아테네는 이들 이오니아의 지성인들에게 자유의 바람을 제공하면서 창조적 활동을 장려했다. 21세기 기준으로 본다면 기발한 아이디어와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에 모인 세계 각국의 창업자들에 비견될 수 있다. 자신의 나라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캘리포니아가 제공한 글로벌 창업 무대를 통해 세계로 나아가는 식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주변 모든 나라에 문을 열었다. 아테네가 주도한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에 가입한 도시국가 시민들의 아테네 출입과 활동도 가능했다. 반대로 아테네의 경쟁자인 스파르타는 외부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이오니아 지방의 지성인들은 아테네의 자유로운 공기를 맛보면서 새로운 창조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할리카르나소스 출신 헤로도토스도 그중 한 명이었다.

보드룸에 들른 것은 지난 4월 중순이다. 곧바로 헤로도토스 흔적 찾기에 나섰다. 보드룸은 에게해를 낀, 인구 18만 명의 해상관광 도시다. 도시 건물 전체가 흰색으로 장식돼 있다. 그리스 관광지에 온 것과 똑같다. 아직 봄인데도 도시 전체가 뜨거운 열기로 메워져 있다.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흥미로운 조합이지만 10달러 선의 수영복 판매상 앞에 근엄한 얼굴의 헤로도토스 조형물이 들어서 있다. 헤로도토스는 보드룸을 상징하는 도시의 캐릭터다. 조형물을 제외할 경우 보드룸에 남은 2500여 년 전 헤로도토스의 흔적은 ‘단 하나도’ 없다.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는 문화인류학의 한분야인 ‘민족지(民族誌: Ethnography)’로서도 유명하다. 현장의 목소리로 들으러 직접 방문하는 과정에서 현지인의 캐릭터는 물론 ‘지형·지리·지세’에도 주목하게 된다. 지형·지리·지세는 한국식으로 얘기하자면 풍수(風水) 정도로 비쳐질 듯하다. 그러나 운명론적 차원과 무관하다. 크게 보면 21세기 지형학적(Geopolitik) 차원의 얘기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녹아 있다. ‘민족지’ 관점이지만 필자 역시 헤로도토스 고향의 지형·지리·지세를 파악하고 싶었다. 2500년 전 상황에다가 그리스인이 아닌 터키인으로 채워진 곳에서 ‘무슨 헤로도토스’냐고 되물을 듯하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고 했던가? 바다는 그 어떤 변화나 허세도 전부 포용한다. 육지와 달리 바다, 특히 에게해와 지중해 주변의 변화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유튜브 비디오나 인터넷 사진으로 문화와 역사를 분석하는 것이 대세인 듯하다. 그러나 뜨거운 여름철 돈을 내고 길게 줄을 선 뒤 만나는 루브르 건물 안에서의 그리스 조각과 손가락 하나로 조작되는 디지털 작품은 전혀 다르다. 수천만 화상으로 먼지까지 잡아내는 화질의 디지털 작품이라도 어두운 박물관에서 만나는 진짜를 따라갈 수 없다.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의 비밀’이라고 할까? 어떻게 해서 헤로도토스는 객관적 역사관과 현장 중심의 연구에 나설 수 있었을까? 헤로도토스가 청년기까지 보낸 삶의 현장이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보드룸 곳곳을 헤매면서 알게 된 ‘헤로도토스의 비밀’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됐다. 첫째, 개방된 환경이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85년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할리카르나소스(보드룸)는 페르시아 지배하에 있었다. 그리스 땅을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가 점령하면서 이민족 지배하에 들어갔다. 헤로도토스는 어릴 때부터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동시에 경험하면서 성장했다. 그러나 페르시아를 적으로 보면서 증오하지 않았다. 그리스인으로서 페르시아가 가진 장점에 주목하고 반대로 그리스가 가진 약점에도 관심을 가졌다. 양쪽을 전부 객관적으로 보면서 자란 문화적 환경이 [역사] 탄생의 배경이다.

둘째는 여행이다. 헤로도토스는 당대 그 어떤 사람보다도 여행을 많이 한 인물이다. 아테네와 수많은 그리스 폴리스들은 물론 마케도니아·인도·이집트·레바논·북아프리카까지 직접 다녀왔다. 물론 현장의 목소리를 전부 책에 기록했다. 지금도 어려운데, 어떻게 2500여 년 전에 그런 대장정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히스토리아, 즉 지혜의 추구라는 ‘역사’의 원래 의미에 충실했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더불어 당시 대제국으로서 이란·메소포타미아·아랍·이집트·북아프리카를 지배한 페르시아의 영향도 결정적 이유였을 것이다. 페르시아 지배하에 자랐지만 대제국 페르시아의 장점을 ‘몸으로’ 습득한 인물이 바로 헤로도토스다.

바다 건너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이 여행으로

반쯤 부서진 모습으로 남아 있지만 그리스 야외 극장은 보드룸의 명소 중 하나다. 중세 십자군 보급기지로 활용됐던, 바닷가 보드룸성(城)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유물이다. 추측하건대 헤로도토스도 그리스 극장에 들렀을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면서 그리스의 비극 드라마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지난 5년간의 한국을 되돌아보면 열등감·짝사랑·사대주의로 점철된 우물 안 개구리들의 세상으로 느껴진다. 혁명운동으로 바쁜 탓인지 바다를 넘어선 지식·지혜·추구와 무관한 시간이기도 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가 이전에 여행가로 와닿는 인물이다. 바다 건너 미지의 세계에 대한 어릴 때의 꿈이 여행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가 ‘역사의 아버지’의 탄생으로 나타난 듯하다. 헤로도토스의 책 [역사]는 바로 바다에서 시작됐다. 청산이나 응징을 위한 ‘전과 기록’이 아닌 도전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진리 추구의 운동장이 바로 헤로도토스의 [역사]이자 바다다. 역사가 바다, 바다가 바로 역사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206호 (202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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