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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중의 뮤지컬 오디세이(12)] 발레리노를 꿈꾸는 소년의 분투 '빌리 엘리어트' 

“그저 한 마리 나는 새가 되는 거죠, 마치 전기처럼요” 

생계 위해 싸우는 탄광촌 사람들 속에서 꿈을 찾아가는 소년의 스토리
복잡다단한 사건 사이 등장하는 춤 장면, 자연스럽게 판타지로 형상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발레리노를 꿈꾸는 소년의 이야기다. 2000년 개봉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동명 영화를 뮤지컬로 바꿔 2005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됐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LG아트센터에서 국내 초연된 지난 2010년의 일이다. 8개월간의 장기 공연을 하다 보니 제작진이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빌리 역을 맡은 아역 배우들이 공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훌쩍 커버린 거였다. 주인공 빌리는 발레리노를 꿈꾸는 열 살 소년이다. 실제 열 살 소년이 발레를 비롯해 노래와 연기 실력을 모두 갖추기란 쉽지 않다. 이런 재주꾼을 뽑기 위해 개막 1년 전에 치밀한 오디션을 실시해 4명을 최종 선발했다. 선발 당시 기준은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키 150㎝ 이하의 소년’이었다.

4명 모두 그 기준을 통과해 발탁됐지만, 그중 두 명이 1년 만에 12㎝가 커버렸다. 변성기가 시작돼 목소리가 달라진 아이도 있었다. 한창 성장기의 아이들이라 당연한 일이었다. 제작사는 난감했다. 아이들의 키를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임시방편으로 바지 길이를 늘여 공연하기도 했지만 결국 대타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2005년 [빌리 엘리어트]의 런던 웨스트엔트 오리지널 초연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원작 영화에서 주인공 빌리 역을 맡아 전 세계를 감동하게 한 제이미 벨을 무대에 세우라는 팬들의 요구가 빗발쳤지만, 그 역시 훌쩍 청년이 돼버렸다. 팬들의 바람은 이뤄질 수 없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발레리노를 꿈꾸는 소년의 이야기다. 2000년 개봉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동명 영화를 뮤지컬로 바꿔 2005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됐다. 영화에서 메가폰을 잡은 달드리 감독이 다시 연출을 맡고, [라이온 킹], [아이다]의 엘튼 존이 음악을 만들었다. 대본과 노랫말은 리 홀이 썼다.

[빌리 엘리어트]는 수많은 뮤지컬에서 안무의 일부로 활용됐던 발레를 전면에 내세웠다. 다재다능한 주인공 소년을 뽑기가 쉽지 않지만 공들인 만큼 보람은 있었다. 런던은 물론 브로드웨이, 일본에서 빅히트했고, 국내에서도 2010년 이후 끊임없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여기, 춤에 소질 있는 한 소년이 있다. 그런데 집안이 매우 어렵다. 뒷바라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소년은 과연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빌리 엘리어트]는 ‘영국병(病)’이란 말이 회자됐던 1980년대 대처 총리 시절, 폐광 위기에 처한 영국 북부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열 살 소년 빌리는 정부의 정책에 맞서 노조 투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아버지와 형, 그리고 치매 증세가 있는 할머니와 살고 있다.

리얼리즘 드라마… 80년대 영국 탄광촌 배경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한 장면. 학교에서 돌아온 빌리가 혼자 방에 들어가 로열 발레학교에서 온 통지서 결과를 확인하고 있다.
아빠의 강요로 권투 연습을 하던 빌리는 어느 날 운명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체육관 한 귀퉁이에서 진행되던 발레 수업에 우연히 끼게 되고, 이내 그 매력에 빠져든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아들을 심하게 꾸짖는다. 먹고살기도 힘든 마당에 발레는 언감생심이기 때문이다. 집안 형편상 발레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빌리도 잘 안다.

그러나 토슈즈가 빌리를 자꾸 부르는 걸 어쩌겠는가. 이때 숨은 조력자가 나타난다. 발레 선생 윌킨슨 부인이다. 소년의 재능을 간파한 윌킨슨 부인은 빌리에게 런던의 로열 발레학교 입학시험을 추천하며 수업료를 받지 않고 발레를 가르쳐준다. 꿈에 부푼 빌리는 아빠 몰래 윌킨슨 부인과 차근차근 오디션 준비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주요 화두 중 하나는 ‘공정’이다. 이 공정이 주요 이슈로 떠오르는 데 큰 역할을 한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2010년대 초반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공정 사회’에 대한 관심과 담론이 폭발했다. 그런데 이 샌델 교수의 지적 뿌리는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정의론(正義論)’이다. 샌델 교수의 강의는 롤스의 정의론을 쉽게 풀어낸 것이었다.

롤스가 생각하는 세상의 정의는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 가정환경이나 피부색, 능력 등 선천적인 조건에 영향을 받으면 안 된다. 둘째,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므로 결과의 불평등은 인정한다. 단, 재능 있는 사람이 시장에서 벌어들인 이득은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사회 공동체에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차등의 원칙’이다. ‘기회는 공평하게, 배분은 차등 있게’가 핵심이다.

롤스의 이론에 의하면 빌리에게는 발레를 할 기회, 최소한 오디션에라도 나갈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가정환경이 어렵다는 이유로 소년이 발레를 포기하는 것은 불공정하다. 왜? 빌리의 집안 형편은 그의 노력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선천적으로 부여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100m 달리기라면 뛰고 싶어하는 사람에 뛸 기회는 주어야 한다는 게 롤스의 생각이다. 일등을 하건 꼴찌를 하건 말이다. 대신 빌리가 유명한 발레리노가 돼 돈을 많이 번다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제2, 제3의 빌리를 위해서 생활이 곤란해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재산을 희사할 ‘양심의 의무’는 있다.

환상적인 안무로 스토리의 완급 조절


▎〈빌리 엘리어트〉의 최고 매력은 아름다운 발레다. 1970년대 밥 포시가 독창적인 안무로 〈피핀〉과 〈시카고〉를 만들었듯, 〈빌리 엘리어트〉는 발레가 최고의 시각적 무기다. / 사진:신시컴퍼니
빌리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발레리노가 돼 돈을 많이 번다면…’은 훗날의 일이다. 그에 앞서 발레를 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은 빌리에게 어떻게 ‘기회의 평등’을 제공할 것인가. 도대체 누가 나서야 할까? 중앙 정부가? 지방 공공기관이? 아니면 발레 단체가?

[빌리 엘리어트]는 이렇게 생계를 위해 싸우는 탄광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꿈을 찾아가는 소년의 스토리를 그린다. 리얼리티가 강한 까닭에 드라마가 진지하다. 뮤지컬에서 드라마가 무겁다는 것은 단점이 될 수 있다. 소극장 뮤지컬도 아니고, 불특정 다수의 관객을 끌어 들어야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는 대극장 뮤지컬은 어쩔 수 없이 판타지의 요소가 필요하다.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발레가 이 역할을 한다. 스토리가 무거워졌다 싶으면 무대에 환상적인 안무가 펼쳐져 완급을 조절한다.

이 작품에서 발레는 빌리의 꿈이다. 미래의 지향점이자 힘든 현실의 탈출구다. 잇달아 벌어지는 복잡다단한 사건 사이에 등장하는 춤 장면은 자연스럽게 판타지로 형상화된다. 안무가 피터 달링은 클래식과 모던 댄스, 발레와 탭 댄스를 자유롭게 오가며 아름답고, 따스하고, 코믹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명장면으로 꼽히는 ‘전기(Electricity)’를 비롯해 빌리가 미래의 빌리와 함께 추는 2막 초반의 2인 무 ‘드림 발레(Dream ballet)’는 몸으로 쓰는 한 편의 시(詩)다. 함께 발레를 배우는 소녀들의 코믹 연기와 군무도 앙증맞기 그지없다.

오디션이 다가오는 가운데, 노조에 대한 정부의 압박은 거세지고 빌리의 형 토니는 시위 도중 부상을 당한다. 이 와중에 윌킨슨 부인은 빌리의 집을 찾아와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빌리가 가족 몰래 발레 수업을 받아왔다는 사실에 아버지와 형이 격하게 화를 내자 빌리는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발레를 허락했을 거예요!”라며 반항한다.

이에 격앙된 아버지는 “네 엄마는 이미 죽었어!”라고 맞받는다. 이때 빌리는 자신의 분노를 격렬한 춤으로 표현한다. ‘앵그리 댄스(Angry dance)’ 장면이다. 빌리의 분노는 발레를 반대하는 아빠와 자신을 조롱하는 형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세상의 ‘불공정성’에 대한 항의가 깔린 듯하다. 소년의 몸짓은 “나는 단지 발레를 하고 싶을 뿐인데, 왜 할 수 없는 걸까요?”라며 울부짖는 듯하다.

6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크리스마스가 다시 왔다. 마을회관에서 파티가 끝나고 홀로 남은 빌리는 흐르는 음악에 맞춰 혼자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앵그리 댄스’ 이후 처음이다. 마침 회관에 온 아버지는 이 장면을 목격한다. 그렇게 말려도 발레에 정신을 쏟고 있는 아들을 본 순간 아버지는 깨닫는다. 발레만이 아들을 탄광촌에서, 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아버지는 노조 투쟁 대열에서 빠져 회사 업무에 복귀한다. 아들을 런던으로 보내기 위해 돈을 모으기 위해서였지만, 노조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아버지는 토로한다. “우리는 이미 끝났지만 빌리는 아니야, 빌리를 이렇게 끝나게 할 순 없어!”

결국, 빌리에게 ‘기회의 평등’을 제공한 이는 혈육인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빌리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빌리를 위한 모금 운동에 동참한다. 아버지의 희생과 윌킨슨 부인의 도움, 또 이웃들의 십시일반으로 빌리는 그렇게 원하던 발레를 할 수 있게 된다. 존 롤스가 원한 답은 아니었겠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빌리 엘리어트]에 흐르는 정서는 우리와 참 많이 닮았다. 우리 부모 세대들이 다 비슷했다. 빌리의 아버지처럼 자식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다.

빌리는 마침내 기회를 얻는다. 대망의 오디션을 보러 런던으로 떠난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곡 ‘전기(Electricity)’가 이때 펼쳐진다. 그토록 갈망해왔던 오디션 무대에 선 빌리가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활화산처럼 뿜어내는 순간이다.

자식 위해 희생하는 부모… 우리와 닮은 정서


▎지난해 10월 [빌리 엘리어트] 프레스콜 행사에서 주요 장면을 시연하고 있는 출연진. 앞줄 가운데가 빌리 역을 맡은 배우 김시훈이다. / 사진:연합뉴스
하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조명 아래에서 빌리는 춤을 춘다. 한들한들 봄바람처럼 빌리의 몸은 무대를 휘젓고, 관객들은 모두 숨을 죽인다. 극장 안의 모든 시선은 무대 위 한 소년으로 집약되고, 시간은 잠시 숨을 멈춘다. 블랙홀이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 듯, 객석의 모든 시선을 쭉 빨아들인다.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흡인력. 빌리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시선이 따라 움직인다. 침을 꼴딱 삼키며 다음 장면을 기다린다. 그리고 터지는 열광적인 박수…. 꿈의 무대에 선 소년과 그 소년의 꿈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객석의 마음이 어느새 하나가 된다. 뮤지컬에서 이런 느낌을 두세 번 경험하면 묘한 중독성이 생긴다. 대사나 노래를 넘어, 춤과 몸짓에 넋이 빠지는 황홀경은 더욱 강한 흡인력이 있다.

심사위원이 춤을 출 때 어떤 느낌이냐고 묻자 빌리는 대답한다. “내 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에요, 마치 몸에 불이라도 붙은 느낌이죠. 전 그저 한 마리의 나는 새가 되는 거죠, 마치 전기처럼요.” 몸이 전기가 돼 춤을 추는 느낌은 도대체 무엇일까.

[빌리 엘리어트]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과 정, 휴머니즘이란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작가 리 홀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세대는 이전 세대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해줬듯이 미래의 세대가 더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헬렌 켈러가 장애를 극복하고 교육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설리번 선생의 헌신적인 도움 덕분이었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미국 영화 [코다(CODA)]는 [빌리 엘리어트]와 비슷한 기승전결로 이뤄져 있는데, 노래 재능을 갖고 있지만, 현실에 갇혀 있던 소녀가 음악 선생의 열정 덕분에 인생을 찾게 된다. 역시 대처 정부 시절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풀 몬티(The Full Monty)]도 [빌리 엘리어트]처럼 갈등의 휴머니즘적 해결을 시도한다.

간절히 꿈꿨던 빌리,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움직이다

[풀 몬티]는 영국 남부 셰필드에서 현대화와 구조조정으로 제철소가 문을 닫으면서 해고당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그들이 낸 아이디어는 계급 투쟁이 아니라 놀랍게도 스트립쇼 무대에 서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은 차가운 사회적 차원이었지만 대응은 따뜻하고, 코믹하고, 인간적이다.

오랜 투쟁으로 마을의 상황은 점점 열악해지는 가운데 런던에서 빌리에게 편지가 온다. 편지를 뜯어본 아버지는 “떨어졌네”라며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그러나 형이 주워 확인해보니 합격이었다. 그날 노조는 정부에 완패를 인정하고 현장 업무에 복귀한다. 빌리에게는 승리의 날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패배의 날이다. 흐뭇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진다.

[빌리 엘리어트]의 최고 매력은 아름다운 발레다. 1970년대 밥 포시가 독창적인 안무로 [피핀]과 [시카고]를 만들었듯, 1980년 초연된 [42번가]가 화려한 탭댄스로 만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듯, [빌리 엘리어트]는 신체의 아름다움을 활용한 춤, 그중에서도 발레를 최고의 시각적 무기로 내세웠다. 요란한 특수효과와 스펙터클을 앞세운 블록버스터 시대에 인간의 몸짓이라는 ‘고전적’ 방식으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무대 예술의 정공법을 선택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됐지만, 빌리에게는 중요한 게 하나 있었다. 꿈을 향한 간절한 의지였다.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루 코엘류의 말처럼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 빌리 역시 간절히 꿈꿨기에 마침내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런던으로 간 빌리는 이후 어떻게 됐을까? 혹시 존 롤스의 희망대로 세계적인 발레리노가 돼 자신처럼 불우한 환경에 있는 어린 새싹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 김형중 - 공연 칼럼니스트. 연세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20년 넘게 공연 담당 기자로 일했고 한국뮤지컬대상과 청룡영화상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무대예술의 경이로움을 글로 풀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쓴 책으로 [우리시대 최고의 뮤지컬 22]가 있다.

202206호 (202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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