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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4)] 임시정부 국호와 체제 결정한 임시의정원 

군주국 그림자 지우고 ‘대한민국’으로 민국 지향 

‘한성임정’의 집정관제를 신한청년당의 국가 체제에 근거한 총리제로 개정
임시의정원, 투표 거쳐 안창호·이동녕 대신 이승만을 초대 국무총리로 선임


▎2019년 4월 10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 기념식에서 제1회 회의가 재연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1919년 4월 10일 저녁식사 후 임시의정원이 성립된 때부터 다양한 자료들이 작성됐다. 대한민국 국회도서관은 임시의정원 관련 자료들을 수집해 1974년 [대한민국임시의정원문서(大韓民國臨時議政院文書)]를 발간했다. 이 자료집은 총 3편으로 구성됐다. 제1편에는 임시헌법과 건국 강령 등 임시의정원에서 제정한 각종 헌법을 수록했다. 제2편에는 임시의정원에서 개최한 각종 회의 내용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제3편에는 임시정부의 행정 관련 서류 등을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제2편에 수록된 임시의정원 회의 기록은 의정원 자체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전반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검토해야 할 자료다. 임시의정원회의 기록은 속기록, 의사록, 비밀 회의록, 전원위원회의록, 기사록(記事錄-의정원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만 기록)의 다섯 종류로 돼 있다. 특히 기사록 중에서도 1919년의 6회분 기사록은 임시의정원 성립, 임시정부의 국호와 체제 결정, 임시헌법 제정 등에 관한 기본 정보를 싣고 있기에 특별히 중요하다.

예컨대 1919년 4월 10일 자의 임시의정원 기사록 ‘제1회집(會集)’은 임시의정원 성립 후 임시정부의 국호와 체제, 임시헌법 등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자세히 알려준다. 1919년 4월 10일 밤 11시께 임시의정원 성립 후 조소앙은 정식의장 1명을 선출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김대지는 정식의장 말고 임시의장 1명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식의장을 선출할지 아니면 임시의장을 선출할지는 임시의정원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당시 임시의정원이 명실상부 민족 전체를 대표한다고 규정하면 당연히 정식의장을 선출해야 했다. 반면 그렇지 않다고 규정하면 임시의장을 선출해 당분간만 임시의정원을 지도하게 하다가 진정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지도자를 정식의장으로 선출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면에서 조소앙은 당시의 임시의정원을 명실상부 민족 전체를 대표한다고 규정했던 반면 김대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임시의정원까지 성립한 상황에서 임시의정원이 민족 전체를 대표한다고 규정하는 것이 당연했다.

임시의정원을 민족 전체의 대표로 규정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동휘(왼쪽부터)· 이동녕·손정도· 안창호 선생.
이에 이광수는 정식의장 1명, 부의장 1명, 서기 2명을 선출하자고 제안했다. 이광수는 임시의정원이 민족 전체를 대표한다는 차원에서 정식의장 1명뿐만 아니라 부의장 1명과 서기 2명도 선출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광수의 제안이 가결됐다. 그러자 여운형이 투표 방법으로 무기명단기식(無記名單記式-각자 무기명으로 1인 추천)을 제안해 가결됐다. 투표 결과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에는 손정도 목사, 서기에는 이광수와 백남칠이 당선됐다. 당시 참석자 중 이동녕은 최고 연장자였다. 이론의 여지 없이 의장에 당선될 수 있었다. 부의장에 당선된 손정도 목사는 현순 목사를 이어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다가 상해로 왔다. 현순 목사와 함께 기독교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손정도 목사가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됐다는 사실은 당시 임시의정원 참여자의 다수가 기독교 세력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서기로 선출된 이광수와 백남칠은 3·1운동을 전 세계에 홍보하기 위해 상해 프랑스 조계에 마련됐던 임시사무소의 핵심 인력이었다. 이광수의 [나의 고백]에 따르면 백남칠은 중국 남경 금릉대에서 유학하던 중 3·1운동 소식을 듣고 상해로 왔다고 한다. 백남칠은 타이프라이터에 능숙해 상해 임시사무소의 문서 작성을 도맡다시피 했다. 현순 목사의 [현순 자사(自史)]에 따르면 임시정부를 조직할 당시 몇몇 청년이 권총과 곤봉을 가지고 와 한편으로는 참여자를 보호하고 한편으로는 참여자를 위협해 공정한 조직을 성립하게 했다고 한다. 그 청년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백남칠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광수의 [나의 고백]에는 ‘한위건이라는 청년이 며칠 전 서울에서 왔다. 그는 경성 의학전문학교 학생으로서 학생 운동의 간부로 있다가 나온 열렬한 청년이었다. 그는 백남칠과 같이 문에 지켜 서서 마치 문지기 모양으로 가만히 있더니 모인 이들의 의견이 통일이 되지 못해 어떤 분 하나가 “나는 가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 것을 보고 한위건이 문을 막고 발을 구르며 “못 나가십니다. 정부 조직이 끝나기 전에는 한 걸음도 이 방에서 못 나가십니다. 지금 국내에서는 수많은 남녀 동포들이 피를 흘리고 감옥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동포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시면 밤이 아홉이라도 이 자리에서 정부를 조직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하고 눈물을 뿌리고 외쳤다. 한 군의 이 말은 일동에게 깊은 감동을 줬다’는 내용이 있다.

상해임정 조직 후 ‘한성정부’ 등 통합키로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의 3남 인제씨가 공개한 상해임시정부의 첫 헌법 ‘대한민국임시헌장’의 친필 초고.
한편 임시의정원의 정식의장, 부의장, 서기를 선출한 직후 최근우는 임시정부 문제를 토의하자고 제안했고 이 제안이 가결됐다. 그러자 백남칠은 본국에서 조직된 임시정부는 부인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한양에서는 몇몇 임시정부가 암중으로 모색되고 있었다. 조선민국정부, 신한민국정부, 한성정부 등이 그것이었다. 만약 이들 한양의 임시정부를 인정한다면 상해에서 또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백남칠은 한양에서 암중모색 중인 임시정부는 모두 부인하고 상해에서 새로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무엇보다도 한양에서 암중모색 중인 임시정부도 나름대로 대표성과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데, 상해의 임시의정원이 무슨 자격으로 그 임시정부들을 부인할 수 있느냐는 논란이었다. 이에 따라 한양에서 암중모색 중인 임시정부를 인정하느냐 부인하느냐를 놓고 장시간 격론이 벌어졌다. 신용하 교수의 [조소앙의 사회사상과 삼균주의(한국학보 104호, 2001)]에 따르면 당시 여운형은 ‘대독립당(大獨立黨)’을 조직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며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했지만 조소앙은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임시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치열한 내부 논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조소앙이 나서 상해임시정부의 소재만 표명하고 관제와 국무원은 별도로 의결하자고 제안하게 됐다. 조소앙의 제안은 한양에서 암중모색 중인 임시정부를 인정하되 별도의 상해임시정부를 조직한 뒤 훗날 임시정부들을 통합하면 된다는 타협안이었다. 이 같은 조소앙의 타협안이 가결됐을 때 시간은 자정을 넘어 4월 11일 새벽이었다.

4월 11일 새벽에 논의한 첫째 안건은 서기의 자격에 관한 문제였다. 즉 서기는 임시의정원의 의원 자격을 갖는지 아니면 단순한 서기인지에 관한 문제였던 것이다. 아마도 이 문제는 서기 백남칠이 “본국에서 조직된 임시정부를 부인하자”고 제안해 장시간 논쟁을 일으켰는데, 서기 백남칠이 임시의정원에서 발언하는 것이 정당한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제기로 야기된 듯하다. 만약 서기가 의원 자격을 갖게 되면 의정원 회의에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이고 반대로 의원 자격 없이 단순 서기 역할만 한다면 발언권이 없기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한진교가 서기도 의원 자격을 갖고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제안해 그대로 가결됐다. 이에 따라 서기로 당선된 이광수와 백남칠 역시 의원 자격으로 공식적인 발언권을 갖게 됐다.

뒤이어 조소앙이 국호, 국가 체제, 각료 등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자고 제안해 가결됨으로써 의정원 의원들은 잠을 자지 않고 회의를 계속하게 됐다. 그런데 당시 회의 참여자들은 아무런 자료 없이 임시정부의 국호, 국가 체제, 각료 등에 관한 문제를 토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신한청년당 주도로 작성된 국호, 국가 체제, 각료 명부 등이 있었고 여기에 더해 한성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의 국호, 국가 체제, 각료 명부 등이 있었던 것이다. 회의 참여자들은 이 두 자료를 참조하면서 상해임정의 국호, 국가 체제, 각료 등에 관한 문제를 토의했던 것이다.

먼저 신한청년당 주도로 작성된 국호, 국가 체제, 각료 명부 등에 관해 이광수는 [나의 고백]에서 ‘나는 이봉수를 서울로 들여보내고 “열흘 내 돌아오라”고 말했다. 이봉수의 임무는 천도교의 정광조거나 정광조도 잡혀가고 없거든 남아 있는 천도교의 중심인물이거나 김성수, 송진우거나 현상운이거나 그들 중 하나를 보고 정부 조직에 관한 33인의 의사를 들어오는 일이었다. 그리고 만일의 준비로 새 나라 이름과 내각의 직제와 사안인 각원 명부 하나를 만들어 가지고 가게 하였으니’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에 의하면 1919년 4월 1일께 상해의 이광수 등 신한청년당에서 이봉수를 한양으로 들여보냈는데, 그때 ‘새 나라 이름’, ‘내각의 직제’, ‘각원 명부’를 작성해 보냈다. 여기에 언급된 새 나라 이름은 당연히 상해임정의 국호고 내각의 직제는 상해임정의 국가 체제이며 각원 명부는 상해임정의 각료 명단이다. 당시 상해임정의 국호, 국가 체제, 각료 명단을 작성한 주체는 신한청년당이 당연한데, 그중에서도 조소앙이 핵심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신한청년당원 중 최고의 법률 지식을 자랑한 사람이 바로 조소앙이기 때문이다.

한성정부 등의 자료 참조해 상해임정 국호 등 토의


▎3·1운동 정신을 구현해 민족자주정부를 수립했던 1919년 4월 23일 한성임시정부 선포문과 당시 국민대회 취지문의 원본이 1986년 상해임시정부 수립기념일(1919년 4월 13일) 67돌을 앞두고 처음 공개됐다.
일본 메이지대 법학부에서 유학한 조소앙은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과 1919년 2월의 ‘대한독립선언서’를 주도적으로 작성했다. 따라서 1919년 4월 1일께 신한청년당에서 이봉수를 갑작스레 한양에 들여보낼 때 새 나라 이름, 내각의 직제, 각원 명부를 급조할 수 있었던 인물은 조소앙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조소앙이 새 나라 이름, 내각의 직제, 각원 명부를 급조했다고 해도 그것은 최종적으로 신한청년당원들의 검토와 합의를 거쳤을 것이 분명하므로 크게 보면 신한청년당에서 결정한 새 나라 이름, 내각의 직제, 각원 명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초한 인물이 바로 조소앙이었기에 1919년 4월 10~11일 있었던 상해임정 토의를 조소앙이 주도할 수 있었다고 이해된다.

한편 임시의정원 기사록 제1회집(會集)에는 ‘한성에서 조직된 임시정부’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여기에 언급된 한성에서 조직된 임시정부는 이른바 한성정부를 지칭한다고 이해된다. 하지만 한성정부가 세상에 공포된 시점은 1919년 4월 23일이므로 상해임정이 토의되던 4월 11일 새벽 상황에서는 공식적으로 공포된 한성정부가 아니라 당시 암중모색되던 한성정부 관련 정보라고 이해된다. 아마도 한성정부 관련 정보는 1919년 4월 1일께 한양으로 갔다가 1919년 4월 10일 상해로 돌아온 이봉수가 가져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1919년 4월 11일 새벽 상해임정의 국호, 국가 체제, 각료 등을 토의하던 임시의정원 의원들은 조소앙이 기초한 신한청년당의 상해임정 자료와 함께 한성정부 자료를 참조하면서 토의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대한제국으로 망했으니 대한민국으로 일어서자”


▎임시의정원 마지막 의장인 홍진 선생의 손자며느리 홍창휴씨가 2019년 4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장 접견실에서 문희상 당시 의장을 통해 임시의정원 관인을 기증하고 있다. 이 관인은 임시의정원 수립부터 광복 이후 1945년 8월 22일까지 공식 문서에 사용됐다. / 사진:연합뉴스
상해임정의 국호, 국가 체제, 각료 중에서는 제일 먼저 국호가 토의됐다. 국호는 신석우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동의(動議)했고, 이한근의 재청(再請)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결정됐다.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이처럼 쉽게 합의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한성정부를 비롯한 한양의 임시정부 국호 그리고 조소앙이 기초한 상해임정의 국호 때문으로 짐작된다. 당시 한양에서 암중모색 중이던 한성정부를 위시해 조선민국정부, 신한민국정부 등은 모두 군주국이 아니라 민국을 지향했다. 한성정부 역시 공식적인 국호는 ‘대조선 공화국’으로서 민국을 지향했다.

조소앙은 이미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에서 주권재민을 선언했고 1919년 2월에는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했으므로 1919년 4월 1일 이봉수를 한양으로 들여보낼 때 기초한 새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작명했을 것이 확실하다. 이 같은 대한민국은 한양에서 암중모색되던 한성정부를 위시해 조선민국, 신한민국과 달랐기에 상해임정의 새 나라 이름으로 적당했다. 이런 배경에서 신석우는 상해임정의 국호로 대한민국을 동의했다고 이해된다. ‘대한’은 안창호의 ‘대한신민회’ 등에서도 사용됐고 대한제국으로 망했으니 대한민국으로 일어서자는 면에서도 합당했다. 이렇게 결정된 상해임시정부의 국호 대한민국은 반만년 한국사 중 최초로 공포된 민국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국호 결정에 이어 국가 체제가 토의됐다. 이와 관련해 임시의정원 기사록 제1회집(會集)에는 ‘“관제(官制)에 입(入)해 집정관제(執政官制)를 총리제(總理制)로 개(改)하자”는 최근우의 동의와 이사근의 재청이 가결되고’라고 해 원래 집정관제로 제안된 국가 체제를 총리제로 개정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광수의 [나의 고백]에서는 조소앙이 기초한 국가 체제를 ‘내각의 직제’라고 해 내각제 또는 총리제로 설명했다. 따라서 임시의정원 기사록에 언급된 집정 관제는 조소앙이 기초한 국가 체제가 아니라 바로 한성정부의 국가 체제를 지칭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1919년 4월 23일 공포된 한성정부의 국가 체제는 집정관 체제로서 이승만이 집정관 총재였다. 그러므로 집정관제(執政官制)를 총리제(總理制)로 개(改)했다는 것은 한성정부의 집권관제를 조소앙이 기초한 신한청년당의 국가 체제에 근거해 총리제로 개정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국호, 국가 체제가 수월하게 합의된 것에 비해 누구를 국무총리로 할지에 대해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임시정부의 국가 체제를 총리제로 결정했기에 최고 권력자인 국무총리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무총리 문제에서부터 정파 간 권력 투쟁이 노골화됐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임시의정원 기사록 제1회집(會集)에 ‘국무총리는 한성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인 이승만으로 선거하자는 신석우의 동의와 조완구의 재청이 유(有)한 후 신채호가 이승만은 전자(前者)에 위임통치(委任統治) 및 자치문제(自治問題)를 제창하던 자이니 그 이유로써 국무총리로 신임키 불능하다는 변론이 유(有)한 뒤 국무총리도 별도로 선거하자는 신채호의 개의(改議)와 한진교의 재청이 가결된 후에’라는 기록이 있다.

최고 권력자 ‘국무총리’ 결정 두고 논쟁 일기도


▎임시의정원의 태극기. / 사진:연합뉴스
이에 의하면 상해임정의 초대 국무총리는 한성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인 이승만(실제 한성정부에서는 집정관 총재)으로 선거하자는 신석우의 동의와 조완구의 재청이 있었지만 신채호의 강력한 반대로 부결됐다. 당시 신채호는 이승만이 상해임정의 국무총리로 부적합한 근거로 위임통치와 자치문제를 제시했다.

신채호가 언급한 위임통치는 1919년 3월 3일 이승만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요구한 조선의 위임통치 청원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조선을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시킨 후 당분간 조선을 위임통치하고 조선은 자치를 하게 해달라고 청원했던 것이다. 당시 무력 투쟁을 주장하던 신채호는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은 독립 의지가 없는 사람”이라며 “그런 사람은 국무총리 자격이 없다”고 격렬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현순 목사의 [현순 자사(自史)]에는 ‘신채호가 총리로 추천된 인사, 즉 이승만, 박영효, 이상재 등을 반대하고 박용만을 추천하니 그때 청년 중 현창운이 골계적으로 신채호를 추천하매 회중이 제성대소(齊聲大笑)하매 신 씨 발노이주(發怒而走)했다’는 내용이 있다.

결국 국무총리 후보자 3명을 추천해 무기명단기식(無記名單記式) 투표로 결정하자는 조소앙의 특청(特請)에 따라 이승만, 안창호, 이동녕 3명을 대상으로 투표한 결과 이승만이 초대 국무총리에 당선됐다. 이승만은 신석우와 조완구의 추천을 받았고 안창호는 여운형의 추천, 이동녕은 신석우의 추천을 받았다. 그 외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재무총장에 최재형, 교통총장에 문창범, 군무총장에 이동휘, 법무총장에 이시영이 선임됨으로써 상해임정의 국호, 국가 체제, 각료 등이 모두 결정됐다. 그때 시간이 1919년 4월 11일 오전 10시였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207호 (20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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