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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76)] 상해 임시정부를 이끈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 

나라 잃은 지도층의 의무 오롯이 보여줘 

99칸 ‘임청각’ 종손으로 성리학 공부하다 의병 조직하고 계몽운동
나라 망하자 재산 처분해 가족과 만주로 망명, 독립투쟁하다 순국


▎석주 이상룡의 증손 이항증 씨가 임청각 벽면에 걸린 독립운동 선조들의 건국훈장을 가리키며 공적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강산/ 오백년 선비의 풍도를 지켜왔네/ 문명이 무엇이기에 노회한 적 불러들여/ 꿈결에 느닷없이 온전한 나라 버렸나/ 이 땅에 그물 쳐진 것을 보았으니/ 어찌 대장부가 제 한 몸 아끼랴/ 고향 동산아 슬퍼 말고 잘 있거라/ 훗날 태평성세가 되면 돌아와 머물리라”

5월 17일 경북 안동시 법흥동 ‘독립운동의 산실’ 99칸 집 임청각을 찾았다. 우물방 마루에 한시 ‘거국음(去國吟, 나라를 떠나면서)’ 시판이 보였다. 칠언율시의 끝에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이란 이름이 있었다. 시를 지은 이는 임청각의 종손으로 1911년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자며 이 땅을 떠나 만주로 간 후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을 펼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의병 지도자와 계몽운동가들은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석주 선생도 1910년 12월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의 독립운동 기지건설 추진 계획을 접한 뒤 처남 김대락과 함께 망명을 추진했다. 조상을 모실 제사에 필요한 가산만 남기고 재산 대부분을 처분해 독립운동자금도 마련했다. 이날 선생의 증손인 이항증 씨가 안내를 위해 서울에서 내려왔다. 그는 증조가 만주로 가면서 가족에게 보인 엄정함을 먼저 소개했다. [석주유고]에 관련 기록이 전한다.

1911년 만주 유하현으로 들어가면서 길잡이를 맡은 아들이 관헌에게 걸린 뒤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선생은 아들에게 “콜럼버스가 작은 배를 타고 위험을 무릅쓰며 대서양을 건너지 않았다면 지금의 미국은 없었다”며 역경 없이 나라 찾는 법이 없으니 다른 길을 찾으라고 잘라 말한다.

독립유공 증서 빼곡하게 내걸린 임청각


만주로 들어가 10년이 지났다. 한번은 독립 청년동맹원들이 집에서 열린 회의에서 손자 이병화를 대표로 선출했다. 그러자 손자가 놀라 사양한다. “나는 죽음을 겁내는 게 아니다. 다만 조부모와 부모는 양대 독자로 모두 연로하다. 타국에서 시중들 사람은 나 하나뿐이니 다음에 맡겠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선생이 손자를 불러 꾸짖는다. “나라를 찾겠다는 사람이 조부모 걱정을 해서야 어찌 성공할 수 있겠느냐? 내 걱정은 내가 할 터이니 구국에 헌신하라.” 그는 대의 앞에서 자식을 싸고돌지 않았다.

증조의 일화를 들려주던 이항증 씨가 일어나 마루와 붙어 있는 사랑방을 안내했다. 천지의 기운이 모여 정승 여럿이 난다는 우물방이다. 석주가 태어난 공간이었다. 이어 이씨는 우물방 오른쪽 군자정(君子亭)으로 안내했다. 99칸 집으로 불리는 이 가옥의 별당형 정자이다. 돌계단을 올라 군자정 마루에 들어서니 ‘臨淸閣’(임청각) 편액이 남쪽 벽면 대들보 아래에 걸려 있다. 글씨는 퇴계 이황의 친필로 전해진다. 임청각은 군자정의 별칭이면서 99칸 집의 이름이기도 하다. 1519년(중종 14) 낙향한 이명이 건물을 처음 지었으며, 1767년 이종악이 고친 뒤 그림으로 남겼다.

임청각은 내부 벽면 장식이 좀 다르다. 농암 이현보 등의 시판 등에 더해 임청각이 배출한 독립지사의 훈장과 훈장증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독립장’ ‘애국장’ 등, 훈격도 상당한 등급이다. 임청각의 독립운동 서훈자는 석주를 비롯해 부인 김우락, 아들 준형, 손자 병화, 손부 허은, 동생 상동·봉희, 조카 형국·운형·광민, 종숙 승화 등 11명이나 된다. 유서 깊은 종가 임청각은 3대에 걸쳐 가족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투쟁한 것이다.

1911년 1월 50대 석주가 가족을 이끌고 압록강 건너 만주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한 뒤 한 일은 무엇일까. 당시 행적은 권상규가 지은 행장(行狀)에 남아 있다. 그는 먼저 중국옷을 입고 현지인과 섞였으며 이름을 이상희에서 이상룡으로 고쳤다. 그리고는 한인이 토지를 임차하고 중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했다. 그와 함께 김대락·이회영·이동녕 등과 내무·농무·재무 등 자치조직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한 뒤 대표를 맡았다. 경학사는 낮에는 농사와 상공업으로 경제를 일으키고 밤에는 중국어 강습 등 교육으로 독립 기반을 다졌다. 이상룡은 이어 하니허에 신흥학교를 설립한 뒤 한인 자제를 모아 민족문화와 군사 등을 교육한다.

만주에서 압록강 넘어가 일제 기관 습격


▎안동 99칸 양반 가옥을 대표하는 임청각의 모습. 일제강점기 마당 앞을 관통하던 중앙선 철로는 모두 걷혔고 원형 복원이 진행 중이다.
이상룡은 그 뒤 광업사(廣業社)를 설치해 개간을 통한 논농사로 경제적 자립에 힘을 기울였다. 만주 들판에 논이 들어선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1913년에는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인 만주가 조선의 뿌리임을 밝히는 [대동역사]를 썼다. 또 서간도의 교포 자치조직 부민단(扶民團)을 지도했다. 부민단은 3·1운동 이후 한족회로 발전한다.

임청각에는 만주 독립군 기지건설 당시 벽돌·기왓장 등 이 가문의 피땀을 보여 주는 작은 야외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당시 고국에서 들려온 3·1운동은 자극제가 됐다. 1919년 4월 석주는 유하현에서 서간도 지역을 규합해 마침내 독립전쟁을 수행할 군정부를 수립한다. 소식을 듣고 상해 임시정부 측이 요청한다. 서간도의 군정부를 임시정부 산하 조직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는 받아들였다. 1920년 3월 서간도에는 드디어 군정부와 한족회가 통합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만들어졌다. 이상룡은 최고책임자인 독판으로 선출돼 이때부터 서간도의 무장 독립운동을 이끄는 지도자가 됐다.

첫 사업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 설립이었다. 서로군정서는 1920년 5월부터 10~20명씩 유격대를 편성해 압록강 너머 평안도 지역 경찰 주재소와 세관 등 일제 기관을 습격했다. 당시 활동은 1924년 지은 ‘고향을 생각하며(思故鄕)’라는 시에 남아 있다. “삼원포에 가장 먼저 군정부를 세우고/ 각 단체 서로 이어 기치를 수립했다/ 장창이 대숲을 이루고/ 북소리에 압록강을 건넜네/ 왜적들 몰래 되놈 관리에 뇌물 써/ 숨죽이고 몰래 가 일곱 고을 보루를 습격했다”

그러나 중국 각지 독립운동단체는 임시정부 승인 등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석주는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시정부는 그해 3월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꾼다. 1925년 7월 이상룡은 위기에 봉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갈 지도자로 전격 추대됐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사상 대립과 파벌 싸움은 이어진다. 이상룡은 통합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1926년 2월 임시정부 국무령 직을 사임하고 만주 화전현으로 돌아왔다. 근심과 울분은 병이 됐다. 1932년 석주는 이역에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순국했다. 석주는 숨을 거두면서 아들에게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가족들은 그 뜻을 받들어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군자정 오른쪽 방형의 연못을 지나면 언덕 위에 임청각 사당이 자리해 있다. 사당에는 본래 여느 종가처럼 4대 신주가 모셔졌다고 한다. 그러나 석주는 만주로 떠날 때 마지막으로 고유제를 올린 뒤 조상 신주를 모두 땅에 묻었다. 나라가 없어졌는데 사당만 지킬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때부터 임청각 사당에는 봉안된 신주가 없다.

성리학 벗어나 서양 근대사상 받아들여


▎중국 망명 시절의 석주 이상룡. 그는 현지인과 섞이기 위해 불편한 중국옷을 입었다. / 사진: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이상룡은 1858년 임청각에서 이승목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이다. 고성 이씨는 15세기 이후 안동의 유력한 양반 사족이었다. 이상룡은 퇴계학의 적통을 계승한 류치명의 제자인 김도화‧김흥락 등으로부터 유학을 배웠다. 김흥락은 이상룡의 조부 이종태의 처남으로 이상룡의 학문과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상룡은 조부의 뜻에 따라 18세에 김흥락 문하에 들어가 평생 스승으로 섬겼다.

이상룡은 1886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성리학에 전념했다. 그 무렵 개화(開化) 정책이 추진된다. 이상룡은 전통이 쇠퇴하는 것을 우려해 1890년 임청각에서 향음주례를 열고, 1898년에는 향약을 시행하기도 했다.

1894년 동학농민항쟁과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청각에서 수십 리 떨어진 산골 도곡에 은신한다. 이상룡은 거기서 병법을 공부하고 연발식 활 연노(連弩)를 제작한 뒤 시험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안동에도 의병진이 조직됐다. 중심은 이상룡의 외숙인 권세연 등이었다. 이상룡은 임청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조부가 세상을 떠나 이상룡은 의병에 참여할 수 없었다. 대신 마음을 다해 도왔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이상룡은 마침내 의병을 조직한다. 이상룡은 매부 박경종과 함께 1만5000금을 내고 이규명의 1만금, 남세혁의 20두락으로 군자금을 마련한 뒤 차성충을 의병장으로 삼아 군사를 모으고 무기를 장만했다. 이들은 가야산을 근거지로 1908년 거병을 준비했으나 기밀이 탄로 나 일본 군대의 기습을 받은 뒤 끝났다.

이상룡은 의병 투쟁에 실패한 뒤 자신이 시국 흐름에 어두웠음을 크게 뉘우친다. 오합지졸로는 일본군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그는 성리학 대신 서양 근대사상을 받아들이는 결단을 내린다. 사상 전환 뒤 류인식·김동삼 등이 1907년 건립한 협동학교에 참여하면서 안동지역 신교육운동을 이끌었다. 1909년에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면서 교육과 실업의 진흥을 통해 자강력을 키우자고 주장했다.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그는 일제 침략에 침묵하거나 일진회와 연합하려는 대한협회 본부의 친일 성향을 비판하면서 대한협회가 국권 회복운동의 중심이 될 것을 요구했다.

“민족 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 개탄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임청각의 종손 이상룡은 망명에 앞서 가까운 친지를 불러 계획을 알리고 자기 대신 가문을 잘 이끌 것을 당부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임청각을 안동의 명승으로 꼽았다. 임청각은 조선 시대 양반 가옥 중 큰 규모에 속한다. 석주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아름다운 집과 재산을 내놓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 풍찬노숙을 자원했다. 일제는 1941년 집주인이 망명하고 친인척이 항일투쟁을 일삼는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개통했다. 임청각은 집 앞으로 방음벽이 설치되는 등 경관이 크게 훼손됐다.

선생 사후 그토록 염원한 광복은 드디어 이루어졌지만, 국권 회복이 임청각의 영광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독립투사 한 사람이 나오면 삼대가 망한다는 말처럼 선생의 어린 자손들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증손 이항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의탁할 데가 없어 3년간 고아원에 맡겨졌다. 그는 “매국노가 나라 팔아먹은 돈으로 산 땅을 광복 후에도 인정해 후일 매국노의 손자·증손자가 재판을 통해 찾아갔다”며 “민족 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라고 어이없어했다.

임청각이 영광을 되찾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광복 45년이 지난 1990년 이상룡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서울현충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됐다. 임청각을 찾은 날 국토교통부를 출입하는 중국·일본 등지 외신기자들이 방문했다. 석주는 평생을 의병 조직, 계몽운동, 독립군 활동 등 오로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한 선비였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임청각을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명명했다. 임청각은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발맞춰 복원에 들어갔다. 80년간 임청각 앞 낙동강 경관을 가로막던 중앙선 철로는 모두 철거됐다. [더 타임스] 칼럼니스트 마크 어빙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의 건축 1001’에 임청각을 소개했다. 다시 임청각의 선비정신과 본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박스기사] 석주의 외아들 이준형도 죽음으로 절개 지켜 - 일제 변절 강요받자 피의 유서 남기고 자결


▎아버지 순국 뒤 귀국한 외아들 이준형은 [석주유고] 정리를 마친 뒤 일제의 변절 요구에 유서(사진)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 사진: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석주 이상룡에게는 외아들 동구 이준형(1875~1942)이 있었다. 동구는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을 이끌고 1911년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망명한 뒤 경학사·서로군정서 등에 참여하며 조국의 독립에 온 힘을 쏟았다. 1932년 부친이 순국하자 그는 고향 안동으로 돌아와 구국운동을 이어갔지만, 공적은 거목에 가려져 있다.

동구는 귀국 뒤 일제로부터 변절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그는 송기식 등과 [석주유고]를 정리한 은신처인 안동 돗질에서 1942년 ‘아들 대용은 보아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유서의 대강은 이렇다. “일제 탄압은 더욱 가혹해지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하게 될 뿐이다 (…) 내가 자결하는 것은 참된 도리를 알게 하려는 뜻이다 (…) 너는 다만 관대(寬大)·공평(公平)·정직(正直) 여섯 글자로 삶의 비결을 삼아라. 나는 평생 수치스러운 일이 많았으니 명정(銘旌)은 ‘치재(恥齋)’라고 씀이 옳다.”

동구의 손자 이항증은 “유서는 서거한 지 반세기가 지나 집을 정리하다 발견됐다”며 “유서에는 선혈 흔적이 아직도 선명하다”고 말했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역사가의 시간]이란 자서전에서 석주 집안의 고난과 희생이 정작 역사책에는 몇 줄로밖에 표현되지 못하는 역사 기록의 ‘인색’함을 개탄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207호 (20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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