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Home>월간중앙>사람과 사람

[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41)] 80년대 복싱 챔프 ‘작은 들소’ 유명우 

“36연승, 세계 타이틀 17회 방어 한 경기 한 경기 목숨 걸었죠” 

막강 체력 앞세워 후반 소나기 펀치… 다운 한 번도 안 당해
경량급 라이벌 장정구와 붙었다면? 맞대결 안 한 게 천만다행


▎경기도 부천시 중동에 있는 버팔로 복싱짐 링에 올라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유명우 대표. 뒤에 걸린 건 유명우의 세계 타이틀매치를 알리는 포스터다. / 사진:전민규 기자
한국 복싱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대, 경량급에서 세계적인 선수가 동시에 나타났으니 ‘짱구’ 장정구(59)와 ‘작은 들소’ 유명우(58)다. 장정구는 1983년 WBC(세계권투평의회)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이 된 뒤 15차 방어에 성공하고 1988년에 타이틀을 자진 반납한다. 유명우는 1985년 WBA(세계권투협회) 주니어플라이급 타이틀을 따낸 뒤 17차 방어까지 성공했으나 18차 방어전에서 일본의 이오카 히로키에게 져 벨트를 내준다. 그러나 1년 뒤 리턴 매치에서 설욕에 성공하고, 한 차례 방어전을 치른 뒤 명예롭게 은퇴한다. 프로 통산 전적은 39전 38승 1패 14KO승. 36연승과 세계타이틀 17차 방어는 아직 국내에서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장정구가 화끈한 복싱을 구사하는 천재형이었다면 유명우는 강철 체력과 빈틈없는 디펜스, 소나기 펀치를 갖춘 노력형이었다. 둘의 맞대결을 염원하는 팬들이 많았으나 끝내 링에서 만나지는 못했다.

스캔들 하나 없는 모범적 생활로도 유명했던 유명우는 은퇴 후 식당 사업으로 꽤 재미를 봤다. 음식점을 정리한 뒤에는 버팔로 프로모션을 차려 후배들의 세계무대 진출을 돕고 있다.

경기도 부천시 중동에 있는 버팔로 복싱짐에서 유명우 대표를 만났다. 체육관은 깔끔한 그의 성격을 닮은 듯 환하고 깨끗했다.

버팔로 프로모션 차려 후배 복서 키워내


▎1985년 12월 8일 유명우가 WBA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 조이 올리보(미국)를 2-1 판정으로 꺾고 챔피언에 오르는 순간.
복싱 체육관 중에서 이렇게 밝고 깔끔한 곳은 처음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복싱이라는 게 ‘헝그리 스포츠’라는 인식이 오래되다 보니 좀 어두침침하고 청소도 안 하고 그런 분위기를 연상하기 쉬운데, 지금은 선수만 육성하는 게 아니고 대중이 많이 오시기 때문에 이제 좀 변해야 해요. 체육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좋은 느낌을 받아야 오래 다닐 수 있겠죠.”

요즘 하시는 일은?

“식당 하던 건 다 정리했고요. 지금은 선수 키우는 프로모션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제가 키우는 신보미레 선수가 미국 가서 WBC 여자 슈퍼페더급 세계챔피언 벨트를 따왔습니다. 저희 프로모션 소속 여러 선수가 챔피언의 꿈을 키우면서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 체육관은 아들이 운영하고 저는 가끔씩 선수들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해주고 있죠.”

여기는 어떤 분들이 주로 오시나요?

“대부분 일반인이죠. 학생, 직장인, 요즘은 여성분도 많이 와서 운동합니다. 프로 복서는 극히 적어요. 복싱이 생활 스포츠로 자리 잡으면서 그 속에서 선수를 키워내는 건 쉽지 않죠. 옛날엔 맨주먹 하나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세상에 이름을 알리려고 하는 젊은이가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잖아요. 요즘은 학교폭력이 심각해져서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아요. 자기방어도 하고 체력을 키우면 공부하는 데도 도움이 되니까요.”

코칭법도 달라졌겠습니다.

“옛날에는 기본기부터 시작해서 오랜 시간 기초를 다지는 운동을 했는데 요즘 그러면 재미없다고 안 나와요. 즐겁고 재미있게 운동을 하면서 체중도 뺄 수 있도록 맞춰가면서 훈련을 시키죠. 옛날 선수처럼 시키면 운영이 안 돼요.”

중1 때 복싱에 입문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복싱이 너무 멋있었어요. 저는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어도 막내로 귀여움 받으면서 컸는데, 당시 무하마드 알리·조지 포먼·조 프레이저 등 전설적인 미국 헤비급 복서들의 경기 중계를 많이 했잖아요. 그런 거 보면서 복싱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결정적으로는 우리 홍수환 형님 4전5기 경기를 보고 ‘역시 남자는 저거야. 복싱을 해야 해’라면서 챔피언의 꿈을 키웠죠.”

‘기본기는 유명우’라고 할 정도로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게 된 배경은 뭡니까?

“당시에 좋은 선배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체육관 가면 선수 지망생들이 몇백 명씩 운동을 했어요. 식당에서 일하고 구두 닦고 하면서 맨주먹 성공을 꿈꿨죠. 좋은 선배들 운동하는 거 보면서 장점을 제 걸로 많이 만들었어요. 저는 챔피언 된 뒤에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꿈을 이뤘으니까 이게 전부인 줄 알았더니 새로운 시작이더라고요. 1년에 한 번씩 강한 선수와 의무방어전을 해야 하고, 내가 상대를 고른다고 해도 세계 랭킹에 올라 있는 선수들은 챔피언과 기량 차이가 거의 없어요. 정말 땀을 많이 안 흘리면 링 위에서 피를 많이 흘리게 생겼더라고요.”

경기 앞두고 10㎏씩 감량, ‘산고’와 맞먹어


▎1986년 11월 30일 유명우가 WBA 주니어플라이급 3차 방어전에서 마리오 데마르코의 턱에 펀치를 꽂아넣고 있다.
당시 세계 타이틀매치는 3분 15라운드였는데, 유명우 선수는 후반으로 갈수록 상대를 더 몰아붙이는 걸로 유명했죠. 그런 강한 체력은 어떻게 만든 겁니까?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힘들어요. 겉으로 티를 안 내는 거죠. 똑같이 힘드니까 누가 링 위에서 더 많이 참느냐가 승부를 결정하죠. 15라운드에 쉬는 시간 합치면 딱 1시간 시합을 하는 건데, 7∼8라운드 지나면 준비를 많이 했어도 체력이 바닥나요. 훈련량이 많으면 고비를 넘기고 10라운드 이후에 자신도 모르게 체력이 다시 나오는 거고. 15회전 되면 본능으로 정신력으로 버티는 거죠.”

그는 프로 통산 아마추어까지 포함해 단 한 번도 다운을 당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물었다. 유 대표는 “저는 경량급인 데다 한 방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펀치력이 없어요. 그래서 소나기 펀치라고 하는 연타를 때리고 또 가드를 견고하게 해야 된다는 선생님 말씀을 철석같이 지켰어요. 수비에 치중을 많이 했죠”라고 말했다.

딱 한 번, 한 방 맞고 다운되겠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캔버스에 상체를 대본 적은 없다고 한다. “다운이란 건 정타를 맞는 순간 기절하는 거거든요. 십여 년 프로 생활하면서 정타를 안 맞을 순 없잖아요. 그렇지만 충분히 훈련을 하고 링에 올라오면 하체가 받쳐줘서 버틸 수 있는 겁니다. 그만큼 하체가 중요하니까 매일 아침 로드워크를 빼먹지 않았죠.”

“유명우는 다 좋은데 펀치가 약하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죠. 그런데 38승 14KO승이면 경량급으로서 그렇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렇죠. 제가 KO승이 나오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아무리 가격을 해도 상대가 다운이 안 되고 제 주먹만 아프더라고요. 나중에 복싱에 눈을 뜨고 국제 게임을 많이 하면서 KO가 나오기 시작했죠. 타이밍을 잘 잡아서 보디 블로(몸통 공격)를 하니까 KO가 나오더라고요. 보디를 정통으로 맞으면 견디지 못하거든요. 경량급의 김태식, 중량급의 박종팔·백인철 같은 선수는 타고난 강펀치죠. 뼈대 자체가 우리와 달라요. 저 같은 선수는 물 펀치죠. 한 방에 가면 얼마나 편해요. 하하.”

36연승과 세계 타이틀 17차 방어는 국내에서는 아직 깨지지 않고 있죠?

“국내는 선수층이 얇다 보니까 그렇긴 해도 어차피 기록은 깨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잖아요. 좋은 후배가 나와서 깨줘야죠. 세계 타이틀매치는 한 번 한 번이 전쟁을 치르는 겁니다. 3∼4개월에 한 번씩 방어전을 치렀고, 1988년에는 네 번이나 했어요. 가장 힘든 게 감량이죠. 저도 매번 10㎏ 정도 감량을 했는데 그걸 산고(産苦)에 비유하잖아요. 체중을 빼면서 체력은 끌어올려야 하니까요. 20대면 돌도 씹어 먹을 정도로 식욕이 왕성할 때인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힘을 써야 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10년을 할 수 있었죠?

“먹고살려다 보니까 다 하게 되더라고요(웃음). 챔피언 되니까 또 챔피언에 걸맞은 상황이 만들어지니까 안 할 수도 없는 거예요. 20대 후반으로 가면서 방어전 횟수가 늘어가고 나이도 먹어가니까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제가 18차 방어전에서 질 때도 그전보다 준비를 많이 안 하고 요령으로 하다 보니까 체력이 뒷받침이 안 돼서 타이틀을 뺏긴 거거든요.”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우리나라 선수는 딱 두 명, 유명우와 장정구다. 당대에는 “두 선수가 맞대결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맞대결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지금도 복싱 팬 사이에서는 ‘가상 대결’이 끊이지 않는다.

만약 전성기의 유명우와 장정구가 붙었다면 어느 쪽에 돈을 걸라고 권하시겠습니까?

“정구 형과 정식 시합은 안 했지만 스파링 연습 경기는 많이 했어요. 제가 정구 형 스파링 파트너 출신이거든요. 그 형은 천부적인 싸움꾼이에요. 시합 안 한 게 천만다행이죠(웃음). 그때도 통합 타이틀전을 해야 한다는 말이 많았어요. 그런데 소속 프로모션이 다르기도 했고 국내 선수끼리 빅 매치에서 대전료나 중계권료를 맞출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어요. 제가 굳이 피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맞대결이 성사되지 않았죠. 돈을 건다면 장정구 선수한테 걸어야죠. 팬들은 초반에 승부가 나면 장정구가 유리할 거고 후반 가면 제가 유리할 거라고 하는데 링에서 벌어지는 일은 마지막 공이 울리기 전까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어요. 어차피 우리 게임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답게 우리 선배님이 이긴다고 해야죠. 하하. 사실 제가 홍수환 선배님 보고 운동을 시작했지만 제일 좋아하는 분은 장정구 선배님이거든요.”


▎2017년 2월, 가수 김장훈(가운데)의 기획사가 장정구(오른쪽)와 유명우의 맞대결을 독도에서 열겠다며 찍은 기념사진.
한국 복싱계 사분오열 안타까워


▎유명우(왼쪽)가 WBA 주니어플라이급 18차 방어전 상대 이오카 히로키(일본)와 대전 조인식을 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오카 선수와의 18차 방어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연승이 36경기에서 중단됐고 무패로 은퇴하겠다는 계획도 무산됐잖아요. 심정이 어땠습니까?

“그때는 벨트를 잃은 게 아니라 세상을 다 잃어버린 느낌이었어요. 방어전 횟수가 쌓이다 보니까 언젠가는 링에서 내려와야 되잖아요. 20차 방어를 하고 벨트를 자진 반납한 뒤 명예롭게 은퇴하겠다고 나름대로 계획을 짰는데 그게 다 틀어져버린 거죠. 그렇게 강한 선수가 아니어서 제가 준비만 잘했다면 문제없었을 텐데 상대를 좀 얕보고 힘든 준비 과정을 요령으로 넘기다 보니 체력이 안 받쳐줘서 적지에서 완벽한 승기를 잡지 못한 겁니다.”

어쨌든 판정에 논란이 있어서 WBA가 리턴 매치를 명령했고, 절치부심해서 복수에 성공하셨죠?

“거의 1년 만에 리벤지 매치가 성사됐는데 그사이에 몸 푸는 차원의 논타이틀전을 한두 번 하자고 저희 매니저나 선생님이 말씀하셨는데 ‘그건 의미가 없고 할 마음도 없다’고 딱 잘랐죠. 이오카 선수가 두 차례 방어전에서 지지만 않으면 저랑 하게 됐는데 다행히 벨트를 뺏기지 않고 제 걸 보관해놓고 있더라고요(웃음). 3∼4개월 쉬고 다시 하려니까 너무 힘들어서 돈도 벌고 명예도 얻었는데 그만둘까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일본 선수한테 타이틀 팔아먹었다’는 얘기가 자꾸 들려서 도저히 이렇게 끝나면 안 되겠더라고요. 진짜 독한 마음을 먹고 ‘죽여버리겠다’는 심정으로 준비를 했죠.”

이오카 선수와는 그 후에도 만났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복서들은 말로는 전쟁이라고 하지만 경기 끝나면 서로 껴안고 ‘고생했다’고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그 친구가 오사카에서 체육관을 하고 있는데 세계 챔피언도 많이 배출하고 아주 잘나가고 있어요. 조카가 4체급 세계 챔피언을 석권했다고 하더라고요. 오사카에서 국제 경기가 있으면 만나서 옛날 얘기 하면서 맥주도 한잔합니다.”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겸손한 선수로도 유명했습니다. 한 자동차 회사에서 승용차를 제공하겠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버스를 몰고 계신데 내가 어떻게 승용차를 몰겠냐”며 사양했다는 일화가 있네요?

“그런 사실이 있었고, 그 후에 많이 후회했죠(웃음). 그때는 지하철이나 버스 타고 다니는 게 편했어요. 방어전 횟수가 늘어날수록 알아보는 사람도 많고 운동하는 데 불편하고 힘들고 하니까 차량을 하나 구입해 보조 트레이너와 같이 타고 다녔죠. 첫 차가 코란도 패밀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버지는 일제시대부터 운전을 하셨던 분이라 버스도 몰고 개인택시 운전도 하셨어요.”

88년에 ‘파이트머니’로 10만 달러 받아


▎1990년 11월 2 10일 유명우가 WBA 주니어플라이급 16차 방어전에서 사용한 글러브. 경기 장소와 상대, 결과까지 기록해놓았다. / 사진:전민규 기자
타이틀 방어전 횟수가 늘어나면서 파이트머니도 계속 올라갔어요. 한 해 3억8000만원을 받은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1988년에 그 정도 받은 걸로 기억합니다. 한 게임에 10만 달러 넘게 받았으니까요. 그걸로 저축도 하고 부동산도 사놓고 했습니다. 은퇴 후에는 특별한 기술도 없고 하니까 요식업 같은 데 관심이 좀 생기더라고요. 과외로 좀 했는데 의외로 잘됐어요.”

가족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취미로 즐기는 건?

“제 아내는 초등학교 동창입니다. 아이들은 남매를 뒀죠. 아들은 복싱도 하고 축구도 했는데 복싱 스파링 하는 거 보는데 속이 터지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쪽으로 좀 하라고 말렸죠. 지금은 이곳 체육관 운영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딸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마음 맞는 사람들과 골프 하는 게 큰 즐거움입니다.”

“레전드 될려면 목숨 걸어야”


▎유명우 대표가 현역 시절 소나기 펀치를 퍼붓던 왼쪽 주먹을 쭉 뻗어 보이고 있다. 그는 “펀치력이 약해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 사진:전민규 기자
한국권투위원회(KBC) 사무총장을 두 번 하셨는데 둘 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셨어요.

“아, 정말 쉽지가 않더라고요. 선수로서는 제 스스로를 잘 운영했는데 단체를 이끌기에는 부족함이 많았고, 행정 경험도 없어서 한계를 절감했죠. 정상화를 못 시키고 나왔는데 그게 제일 안타깝죠. 선수가 없으면 협회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 협회가 사분오열돼 복싱 관련 기구가 4∼5개가 있는데 하나로 통합되지 않으면 한국 복싱이 살아날 수 없어요. 일본 쪽을 보면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때는 단합이 딱 되니까 지금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거잖아요. 미국은 프로풋불 스타디움, 영국은 프리미어리그 팀 경기장에서 10만 명이 넘는 관중을 모아놓고 프로복싱 경기를 할 정도로 복싱이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질문. 레전드가 되려면 꼭 필요한 게 뭔지 물었다. 그는 ‘목숨을 거는 것’이라고 답했다. “저는 사각의 링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항상 전쟁이라고 표현하거든요.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 거예요. 저는 고3 때 프로 데뷔해 4라운드를 뛸 때부터 한 경기 한 경기 목숨을 걸고 했어요.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이겨야 한다, 진짜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요.”

※ 정영재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튜브 방송국인 중앙UCN의 대표를 겸하고 있다.

202207호 (2022.06.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