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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비닐하우스·판잣집에 사는 독립유공자 후손들 

“나라 위해 싸워도 예우 못 받는 한 광복은 미완” 

이해람 월간중앙 인턴기자
“재산 쏟아붓고 고문당하며 희생으로 나라 찾았지만 남은 건 가난뿐”
기초생활수급비로 버티는 독립유공자 후손들… “보훈 제도 개선 절실”


▎7월 9일 대구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자택에서 만난 독립유공자 후손 이수경씨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조상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지만,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 사진:이해람 인턴기자
1945년 8월 15일, 36년간 지속된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된 기쁨을 감추지 못한 백성들이 태극기를 들고 너도나도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날을 ‘빛을 되찾았다’, ‘주권을 회복했다’는 의미로 ‘광복(光復)절’이라고 부른다. 그로부터 77년이 지난 지금, 해방을 일궈낸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빛을 되찾은 채 살고 있을까? 대구에서 만난 독립유공자 후손 이수경(68)씨의 답은 “아니다”였다.

지난 7월 9일, 기자가 방문한 이수경씨 집 안방에는 태극기와 함께 조부 이만준(1888~1971)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만준 선생은 그의 아버지 이원춘(1871~1936) 선생과 함께 1919년 3월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이씨의 어린 시절 기억에는 3·1절을 기념하기 위해 밤새 태극기를 만들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했다. 이씨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가진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 인해 넉넉했던 재산은 금방 동이 났고, 이씨 가족은 이후 풍족한 생활과는 멀어졌다. 이씨는 “지금도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 자긍심이 있지만, 이렇게 누추하게 사는 것이 때로는 부끄럽고 서러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형편이 이러한데도 이씨는 광복회 대구남구지회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유공자 어르신을 돕는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씨에 따르면 대구 지역에 거주하는 80~90세가 넘은 고령 후손들의 경우, 돌봐줄 가족도 없어 좁고 허름한 방에서 라면과 빵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다. 여름은 에어컨 없이 견뎌야 하고, 겨울은 낡고 냄새나는 기름보일러만으로 버텨야 한다. 안방엔 환한 LED 조명 대신 백열전구가 천장에 달려 있고, 빠져나갈 줄 모르는 습기 때문에 벽에는 곰팡이가 눌어붙어 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청소와 빨래 등을 감당하기 어렵기에 집은 점점 더러워지고, 부족한 영양과 취약한 위생으로 이들의 건강도 악화해가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자원봉사자들이 방문하면 “독립운동가 후손인데 이렇게 살아서 부끄럽다”고 토로한다.

“독립유공자 인정받은 후손, 전체의 10%뿐”


▎독립유공자 이정오 선생의 외손녀 안모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 낡고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거주하고 있다. / 사진 제공:흥사단 독립유공자후손돕기본부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77년이나 지난 과거를 다시 언급하는 것이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이씨는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77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국민들이 이미 우리를 잊었을까 두렵다”면서 “그래서 후손들이 아무리 어렵게 살고 있어도, 도움을 요청하기가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이씨는 “현재 민간 차원에서 기부금을 모아 최소한의 먹거리를 전달해드리고 있지만, 모든 (독립운동가 후손) 어르신들을 돌봐드릴 수 없고, 도움의 질도 매우 부족하다”며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지원이 확대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라남도 목포시에 사는 독립유공자 후손 안모씨도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기초생활수급비로 생활하고 있다. 안씨는 1929년 11월부터 1930년 3월까지 이어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이정오(1910~?) 선생의 외손녀다. 안씨의 외조부인 이정오 선생은 지난해 3월, 광복된 지 76년이 지나서야 대통령 표창을 받아 공식적으로 독립유공자가 됐다. 그러나 안씨는 여전히 흐린 형광등 불빛 아래 군데군데 벽지가 뜯어진 낡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보훈단체 인사들과 자원봉사자들에 따르면,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다양한 사정으로 가난의 굴레에 빠진다. 독립운동가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재산을 쏟아붓거나 일제 군경의 갖은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이춘재 흥사단 독립유공자후손돕기본부 상임대표는 “특히 해외로 나갔다가 해방 이후 돌아온 독립운동가들은 귀국해서도 삶의 터전을 되찾지 못했다”며 “그렇게 시작된 가난으로 그 후손들은 교육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고, 계층 이동도 불가능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독립유공자를 찾아내고 이들을 예우하는 제도를 지속해서 확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빈곤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경로를 통해 취재한 결과 현행 보훈연금 제도의 한계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광복 이전에 사망한 독립유공자에 대해서는 손자녀까지, 광복 이후 사망자는 자녀까지 연금이 지급되는데, 형제가 여럿이어도 그중 한 명에게만 연금이 지급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보훈 관련 전문가들은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현행 보훈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태열 한국보훈포럼 회장은 “광복 이후 사망한 독립유공자 후손도 손자녀까지는 연금을 보장해야 한다”며 “그렇게 해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일이 더는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3년 동안 제자리 맴돈 주거 개선 사업


▎흥사단 독립유공자 후손돕기본부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대한의 보금자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독립유공자 탁영의 선생 후손의 집. / 사진 제공:흥사단 독립유공자후손돕기본부
이춘재 대표도 “특히 극빈층에 해당하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는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더불어 현재 독립운동가 15만 명 중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손은 약 1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꼬집었다. 이 대표는 “이들이 국가 지원을 받으려면 스스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임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70세 이상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자료 입증이 힘든 것이 사실”이라며 “그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닐하우스나 판잣집에서 사는 독립유공자 후손도 적지 않다. 국가보훈처가 7월 12일 발표한 ‘2021년 국가보훈대상자 생활실태조사’에 따르면 해당 조사에 응답한 독립유공자 후손 446명 중 15명(3.4%)이 비닐하우스, 판잣집, 비거주용 건물 등 불안정한 주거환경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독립유공자 가구 전체로 확대하면, 7366명 중 200여 명이 누추한 주거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비닐하우스와 판잣집 등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만 살펴보면, 2018년 조사 때와 같은 수치로 나타났다. 3년 동안 특별한 개선사항이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주거보장 상태를 직접 파악할 수 있는 지표인 최저주거 기준을 살펴보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거주 인원에 비해 방 개수가 적거나 면적이 좁은 경우, 지하·반지하·옥상에서 거주하는 경우가 최저주거 기준 미달 가구에 속하는데, 방 개수가 부족해 최저주거 기준에 미치지 못한 독립유공자 가구는 18%로 확인됐다. 이 가운데 면적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가구가 1.6%인데, 응답자의 2.5%가 지하·반지하·옥상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 못한 가구는 0.2%다. 독립유공자 약 30명이 지하, 130명이 반지하, 15명이 옥상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독립유공자 거주 실태를 조사한 국가보훈처 연구진은 “주거 불안정을 경험하고 있는 보훈대상자를 먼저 찾아내고 지방자치단체, LH공사, 주택협동조합 등과 협업을 통해서 임대주택 등에 우선 거주하게 하거나 더 나은 주거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대책을 기다리는 데 그치지 않고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민간단체도 있다. 흥사단이 대표적이다. 흥사단이 꾸린 독립유공자후손돕기본부는 현재 독립유공자 후손의 노후주택을 고쳐주는 ‘대한의 보금자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탁영의(1922~2009) 선생의 며느리와 친손자가 거주하는 강원도 정선의 주택을 1호 사업으로 선정해 주거개선 작업을 진행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탁 선생은 강제 징집당했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호부대 토교대(土橋隊)에 입대해 활동한 독립유공자다. 흥사단의 도움과 손길이 닿은 뒤, 낡은 벽돌집이었던 탁씨 집 외관은 한결 깔끔해졌고 지저분했던 벽지도 하얗게 단장됐다.

흥사단, 후손돕기본부 꾸려 지원 나서

이갑준 흥사단 독립유공자후손돕기본부 국장은 “독립유공자 후손을 돕는 일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역사를 바로 세우고 사회정의를 이어가기 위해 독립유공자 후손 돕기 사업을 계속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흥사단은 앞으로 독립유공자 후손 세 가구의 집을 더 수선할 계획인데, 다음 행선지는 앞서 목포에 사는 안씨의 집이다. 이춘재 대표는 “국가에 헌신한 사람들을 위해 예우를 다하는 게 우리 사회의 의무라고 본다”며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교육 기회를 얻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독립유공자가 제대로 대접받는 사회가 될수록 그 후손들도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운 독립유공자 김용기(1901~1983)의 손자인 대학생 김모씨의 사례가 그렇다. 김씨는 어릴적부터 아버지에게 독립유공자인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고 했다. 그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 국가를 위해 일하고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할아버지를 존경하기 때문에 나라에 보탬이 되는 경찰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꿈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이런 대학생 김씨를 칭찬하며 “가난 때문에 남의 도움받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는 사실까지 숨기는 학생들도 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조상들처럼 성장할 수 있도록 나라가 후손들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 이해람 월간중앙 인턴기자 haerami0526@naver.com

202208호 (202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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