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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77)] 벼슬 대신 자신을 탐색한 경당(敬堂) 장흥효 

산림에 묻혀 ‘경(敬)’ 지극 실천하며 퇴계학 지평 넓혀 

퇴계의 직전(直傳) 제자 김성일·류성룡·정구를 스승으로 모셔
[경당일기] 남기며 제자이자 사위인 이시명에게 학문 계승해


▎장성진 종손이 경당고택 사랑채에서 선생의 경(敬) 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류선생은 김 선생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말 채찍 잡는 일을 하기 바랐으나 하지 못했다’고 했다. 김 선생은 류 선생을 칭찬하기를 ‘나의 사표(師表)이시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서로 존경하고 겸양했다.”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을 찾아 차례로 가르침을 받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가 두 스승을 지켜보고 남긴 언행록이다. 서애는 학봉이 타는 가마를 몰겠다며 존경심을 나타냈고, 학봉은 서애를 모범이 될 만한 인물로 삼았다는 뜻이다. 경당은 산림에 묻혀 퇴계 이황의 고제(高弟, 덕망 높은 제자)인 학봉과 서애를 연이어 모시며 퇴계학을 체득한 뒤, 다음 세대에 온전히 물려 준 도학자로 통한다.

6월 18일 경당의 흔적을 찾아 경북 안동시 서후면 종택을 찾았다. 봉정사 방향으로 길을 들어서면 먼저 오른편에 학봉종택이 나타난다. 거기서 1.5㎞를 더 들어가면 경당고택이 나온다. 장성진 종손을 만났다. “고택은 본래 학봉종택과 더 가까운 광풍정 앞에 있었습니다.” 제자와 스승은 지척에 살았다. 고택이 지금 위치로 옮긴 것은 불과 60년 전이라고 한다.

[경당선생별집] 연보에 따르면 장흥효는 12세에 아버지 뜻을 따라 학봉 문하에 들어갔다. 학봉은 장흥효의 단정하고 진중한 몸가짐을 보고는 “이 사람은 배움에 마음을 정했으니 훗날 크게 될 것”이라고 알아봤다. 경당은 학봉 언행록에 덧붙였다. “하루는 김 선생이 당상(堂上)에 앉아 계셨는데 흥효가 발길 가는 대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꾸중하셨다. ‘첫 발자국을 뗄 때 마음이 첫 발자국에 가 있어야 하고 두 번째 발자국을 뗄 때 마음이 두 번째 발자국에 가 있어야 마땅하다.’” 경당은 학봉으로부터 22세에 [주자서절요]를 배우는 등 17년간 가르침을 받았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날마다 적다


학봉과 경당이 돈독한 사제가 된 것은 가까운 거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당의 외할아버지와 학봉의 장인은 형제 사이였다. 즉 경당의 어머니와 학봉의 부인은 사촌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두 사람은 서로 보완적인 학문 관계가 된다. 대구교대 장윤수 교수는 “경당은 초기에는 학봉으로부터 많은 학문적 영향을 받았지만 학봉은 생애 대부분을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제자가 그다지 많지 않다”며 “학봉의 학문과 정신은 제자 경당을 통해 체계화되고 후학에 전승돼 명망을 유지했다”고 분석한다.

경당은 ‘敬(경)’ 글자를 거처하는 곳에 크게 써 붙이고 호를 삼았다. 경당은 매일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한 뒤 의관을 갖추고 사당에 문안드린 다음 주자(朱子) 화상(畫像)에 나가 절했다. 물러나 서실에 들어가면 종일토록 꼿꼿이 앉아 책을 읽었다. 그는 깊이 생각해도 터득하지 못하는 게 있으면 한밤중이라도 불을 켜고 그것을 글로 써 두었다. 또 곁에 공책을 놓아두고 무릇 자신이 말한 것과 행동한 것을 적은 뒤 날마다 연마한 걸 점검하며 스스로 공부 수준을 살폈다.

산림의 평화는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일거에 무너졌다. 29세 경당은 그해 4월 아버지를 모시고 재산현으로 피난했다. 그곳에서 11개월을 보냈다. 안타깝게 그 시기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듬해 3월 경당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달 뒤 큰일을 당했다. 4월 29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공교롭게도 같은 날 스승 학봉도 진주성에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보름이 지나 다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모친상 열흘 뒤엔 전염병이 돌아 다시 우애가 남달랐던 아우를 떠나보냈다. 경당은 천등산 아래 부모를 장사 지내고 3년 여 묘살이를 했다. 상복을 입은 동안 그는 마을 어귀에도 나가지 않았다.

종손의 안내로 고택 사랑방에 들렀다. 벽면에 ‘연원정맥(淵源正脈)’이라 쓴 액자가 걸려 있다. 퇴계학을 정통으로 이었다는 증표다. 사랑채 오른편 뒤로 대나무 길을 지나 고택의 사당에 들렀다. 사당 가운데 불천위 경당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경당은 별세 직전 창릉참봉에 제수됐다. 시호는 없다. 불천위 양쪽으로 신주가 하나씩 있다. 종손은 4대 봉사 대신 이제는 부모와 조부모 2대만 모신다고 설명했다.

안빈낙도 휴식처, 제월대의 풍광


▎광풍정(앞)과 제월대.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같은 경당의 가르침이 배인 공간이다. / 사진:송의호
사당을 나와 종손은 한 곳을 더 안내했다. 고택 뒤로 채마밭을 지나니 아담한 후원(後園)이 나타났다. 채마밭도 후원도 잡초 하나 보이지 않는다. 종손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산기슭에 조성된 잔디 후원은 영화까지 찍었을 정도로 작은 명소가 되었다. 그는 부지런함과 책임감으로 경당 선조의 문집 국역 등 종가의 숙원사업을 해냈다. 종손은 그곳에서 자신의 역정을 이야기했다. 20년 전쯤 그는 한 대학병원에서 갑상선 종양 진단을 받고 치료 불가 판정을 받았다. 병원은 퇴원을 요청했고 겨우 항암 주사만 맞으며 머리가 빠지고 피골이 상접하는 등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였다. 그때 그가 마음을 다스릴 겸 시작한 게 잔디 가꾸기 등 후원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그 일을 하면서 놀랍게도 건강이 회복됐다. 종손은 “조상의 음덕으로 병이 나았다”고 말했다.

경당과 서애의 만남은 학봉의 죽음 이후 이뤄진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 서애는 북인(北人)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탄핵당한 뒤 고향인 안동 하회로 귀향했다. 경당은 이 시기 36세에 다시 서애의 문하에 들어간다. 그는 1607년 서애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9년간 그 아래서 학문을 닦았다. 경당은 퇴계의 또 다른 고제인 한강 정구의 가르침도 받았다. 경당과 한강의 만남은 한강이 안동부사로 부임하는 1607년 이뤄진다. 당시 경당은 이미 유림의 명망을 얻는 학자였지만, 마흔을 넘긴 나이에도 다시 한강의 제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7년의 배움.경당은 이렇게 퇴계의 3고제 학봉·서애·한강으로부터 배웠으며 또한 이들의 깊은 인정을 받는다. 경당이 퇴계학을 정통으로 이었다는 적전(嫡傳)이란 평가를 듣는 까닭이다.

경당고택을 나와 광풍정(光風亭)에 들렀다. 서후면 소재지를 지나 학봉종택 덜 미쳐 오른쪽 언덕에 들어선 정자다. 정자 오른편에 이완재 영남대 명예 교수가 내력을 적은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일대는 경당이 태어나고 학문을 닦고 후진을 기른 공간이다. 광풍정은 본래 경당이 지었다. 이곳에는 경당이 정자를 지은 내력을 알리며 친구 최현에게 부탁한 기문 ‘경당기(敬堂記)’가 걸려 있다. 최현은 경당기에 “당신은 왜란 중에도 뜻한 바에 변함이 없었으며 가난하되 그 뜻이 더욱 굳건했다”고 적었다. 현재의 광풍정은 1838년(헌종 4) 지역 유림이 다시 지은 것이다. 단아한 광풍정 뒤편 산기슭에는 바위벽 제월대(霽月臺)가 우뚝하다.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풍광이다. 광풍정과 제월대는 서로 짝을 이룬다. 광풍과 제월은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이다.

무남독녀는 퇴계학 전승의 밭 일궈


▎경당과 이 지역 절의지사 배상지· 이종준의 위패가 함께 모셔진 경광서원. / 사진:송의호
광풍정 뒤로 경사 50도가 넘는 가파른 산길을 겨우 올라 바위벽 위에 세워진 제월대 정자에 올랐다. 눈앞에 검제 마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제월대 정자 건물은 세워진 지가 오래지 않다. 본래는 바위 앞에 ‘敬堂張先生霽月臺(경당장선생제월대)’라는 글자만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광풍정이 경당학단의 강학처라면 제월대는 안빈낙도하는 휴식처라고나 할까.

경당은 17세기 초반 지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였다. 그는 평생 경(敬)이란 화두를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 1961년에 나온 [경당급문제현록]에는 제자 221명의 이름이 실려 있다. 경당은 45세 이후 제자를 받아들였으며 학봉과 서애 사후 경북을 대표하는 학단을 이뤘다. 경당은 제자를 그 자질에 따라 가르쳤다. 가르칠 때는 순서가 있어 반드시 먼저 읍하고 사양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을 익히게 했다. 인성을 우선한 것이다.

외손 이휘일은 행장(行狀)에 “선생은 책이라면 읽지 않은 게 없었다”며 그러면서 “‘홀로 잠자리에 있을 때도 이불이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구절을 강조했다”고 썼다. 충신(忠信)과 속이지 않는 것도 강조했다. 제자들은 스승의 교육방침에 따라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가 되기보다 자신을 닦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다. 주목할 제자는 석계 이시명이다. 석계는 경당의 딸로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남긴 정부인 안동 장씨의 남편이다. 석계가 경당의 사위가 되는 뒷이야기가 종가에 전한다. 당시 석계는 1남 2녀를 둔 홀아비였고 정부인은 경당의 무남독녀였다. 경당이 어느 날 석계에게 딸의 혼처를 알아봐 달라고 당부한다. “혼반(婚班)은 어느 정도 성씨가 돼야 하는지요?” “재령 이씨 정도면 손색이 없겠네.” “인품이나 학덕은?” “자네 정도면 되겠지.” 석계가 마침내 눈치를 챈다. “소인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까” “…어찌 그리 내 마음을 아는가?”

장씨 부인은 재취(再娶)로 들어가 일곱 아들을 모두 훌륭한 학자로 키웠다. 첫째 아들 이상일과 둘째 아들 이휘일은 외할아버지 경당으로부터 직접 배웠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은 영남 남인의 영수가 된다. 갈암은 아버지와 형 이휘일을 통해 경당의 학통을 잇는다. 갈암은 경당이 이은 퇴계학맥을 ‘퇴계학파’로 정립하는 중심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학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퇴계학통은 갈암에서 갈암의 셋째 아들 밀암 이재로 이어지고 다시 밀암의 외손자 대산 이상정으로 내려간다. 경당은 이렇게 산림처사로 퇴계학맥 전승의 중추적 역할을 해냈다.

광풍정을 나와 경당을 배향한 4㎞ 거리 경광서원(鏡光書院)으로 향했다. 비포장 좁은 길로 이어져 찾기가 쉽지 않았다. 서원 덜 미쳐 ‘경광서당’ 자리가 있다. 경당이 임진왜란 이후 머무르며 강학하던 서당이다. 1608년(선조 41) 경당은 이 서당의 당장(堂長)을 맡아 유생들에게 새로운 각오로 공부할 것을 촉구한다. “서당이 세워진 것은 오래지만 임진 년 섬 오랑캐가 갑자기 소란을 일으킴에 온 나라 사람이 피난을 간 사이 서당이 무너져 글 읽는 소리가 그친 지 16년이 되었다. 1607년 권호문 선생이 새로 지었는데 옛 모습 그대로다. (…) 배우는 이들을 위해 생각한 것은 45세 이하엔 각각 글 읽는 정도에 따라 외우기 공부를 시키려 한다. 만약 외우기를 끝내지 못하면 20세 이하엔 회초리로 벌을 주고….”

임란 이후 교육 재건에 헌신

서당 위쪽 경당서원에 들렀다. 사당 경현사(景賢祠)에는 경당과 이 지역 출신 절의(節義) 지사 배상지·이종준의 위패가 함께 봉안돼 있다. 강당은 숭교당(崇敎堂)이다. 경당서원은 1686년(숙종 12) 문을 연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200년 뒤 훼철됐다. 1972년 유림은 서원을 다시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발길이 끊긴 듯 경내엔 잡초가 무성했다. 서원 옆 재실은 폐가가 돼 있었다.

경당고택과 학봉종택이 있는 서후면 금계마을에는 최근 100억원을 들여 학봉역사문화공원이 새로 조성됐다. 학봉종택에서 도로 건너 산기슭에 자리해 있다. 광풍정에서도 지척이다. 여기엔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로 전장을 누빈 학봉의 충의와 애민을 기리는 임란역사관 등이 꾸며져 있다. 경당의 두 번째 스승 서애는 임란왜란 당시 도체찰사로서 전란을 수습한 최고사령관이었다.

경당의 두 스승 학봉과 서애는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막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산림에 은거하던 29세 경당이 백척간두 국난을 맞아 충을 실천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 1년여 피난을 가 당시 감회만 시 한 수로 남아 있다. “산창(山窓)에 잎 떨어지니 가을은 바야흐로 저무는데/ 산골 물 졸졸 흐르며 밤낮으로 울어대네/ 앉아서 탄식하노니 쓸모없는 이 부유(腐儒, 썩은 유생)는 만리 오랑캐를 평정한 반생(班生, 후한의 명장)을 그릴 뿐이네.”

그가 쓴 일기도 임란 시기는 사라졌다. 아쉬운 대목이다. 그는 대신 임란 이후 교육 재건에 헌신했다. 도학자로서 경당은 큰 자취를 남겼다. 그는 남의 나쁜 점을 듣게 되면 입 밖으로 낸 적이 없고, 남의 좋은 점을 보면 반드시 즐겨 칭찬했다.

[박스기사] 정치적 기록 남기지 않은 산림처사의 표상 - 국학진흥원, '경당일기' 국역… 학문 생활의 고뇌와 즐거움 담겨


▎경당이 자신이 공부한 내용과 의례·풍습 등을 매일 기록한 [경당일기].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경당 장흥효는 20여 년에 걸쳐 일기를 썼다. [경당일기]는 후대에 필사된 채 전하지만 지금은 많은 부분이 사라졌다. 경당의 5세손인 장세규는 1852년 당시까지 전해 온 일기를 모아 상·중·하 3권으로 간행했다. 상권은 1590년(선조 23)에서 1613년(광해군 5)까지 기록이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 해당한다. 상권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종가가 기탁한 [경당일기]를 2012년 국역했다.

[경당일기]는 학문 생활의 고뇌와 즐거움이 들어 있는 학자의 공부일기 성격이다. 경당 자신의 수행과정과 독서록, 제자들을 가르친 방법과 내용, 교재 목록 등이 적혀 있다. 한 부분을 보면 이렇다. “1615년 을묘년(광해군 7) 7월 1일 병오 [주역] 서문을 읽었다. 6일 신해 안성지 군과 [중용장구]를 강구하였다.” 공부 이외에 경당의 동정과 각종 제사와 질병, 장사(葬事)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집안과 마을의 풍속도 적혀 있다. 또 사위의 급제 소식을 기뻐하고 계실(繼室)이 연달아 딸을 낳자 실망한 마음도 담겨 있다. “해시(亥時)에 딸이 태어났다. 아들 낳기를 바라는 마음 지극한데 아들을 낳지 못했으니 속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그래도 뒷날을 기약하며 허전한 마음을 달랠 뿐이다.”(기해년 10월 8일) 그러나 산림처사답게 정치적인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208호 (202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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