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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대화] 원고지 1만9000장의 집념, '완역 설문해자' 펴낸 하영삼 교수 

“‘이모(李某) 교수’를 ‘이모(姨母) 교수’로 착각한 이유 있다” 

박성현 월간중앙 지역전문위원
“한자에 담긴 어원과 문화적 함의 이해 못 하는 이 늘어나”
“4차산업혁명 시대 한자는 현재 뛰어넘는 획기적 사고 가능케 해”


▎[완역 설문해자]의 역자 하영삼 경성대 교수는 “한자가 만들어진 연원을 따르다 보면 생각하는 힘이 길러진다”고 강조했다. / 사진:하영삼 교수
어원(語源)이란 옛날 사람들이 어떤 단어에 관하여 처음으로 정립한 생각이다. 쉽게 말해 단어의 원천이다. 일본의 영문학자인 와타나베 쇼이치는 “어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가지 불순물과 지엽적 때인 배경이 어우러지면서 처음의 뜻이 모호해지는데, 어쨌든 그 시작을 되짚어보면 가장 순수한 의미를 확인해볼 수 있다”고 어원에 대한 해석을 붙였다.

경성대 한국한자연구소가 최근 펴낸 학술총서 [하영삼 교수의 완역 설문해자]도 한자의 어원을 규명한 역작이다. 이는 중국 고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를 한국어로 완전히 번역한 책으로 크라운판 5000쪽을 훌쩍 넘길 정도로 방대하다.

먼저 [설문해자]란 서기 100년쯤 중국 동한(東漢) 때의 학자 허신(許慎)이 저술한 책이다. 총 9833자를 수록한 인류 최초의 한자 어원사전이다. 당시 허신은 서로 다른 문자의 형체를 통해 한자의 뿌리를 찾고자 했다. 또 글자의 본래 형체를 통해 원래의 의미를 파헤쳤다. 그래서 지난 2000년 동안 중국에서 고전을 해석하는 도구이자 바이블로 활용됐다.

이 책을 한글로 완역한 하영삼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는 [설문해자]를 일러 “궁극적으로 만물의 근원과 이치를 규명한 책”이라며 “개인적으로는 학문적 첫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이라고 말했다.

하 교수는 서른을 갓 넘긴 소장 학자 시절인 1991년 수교 전의 중국을 학술대회 참여차 찾은 적이 있다. 당시 [설문해자]의 저자인 허신 묘소를 참배하면서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겠다는 다짐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0년부터 이 책 번역에 들어가 최근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20여 년 학문 연구의 결정판인 셈이다.

이런 방대한 작업에 임할 때의 마음가짐은 어떨까 궁금하다.

“모든 학문에는 기댈 근거가 있어야 한다. 유가 연구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이 있고, 도가 연구에 노자와 장자, 불교 연구에 불경, 기독교 연구에 성경이 있듯, 한자 연구에서 가장 기초가 되고 중요한 책이 [설문해자]이다. 1900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한자학의 이론적 틀이 여기서 마련됐고, 또 가장 방대한 어원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기댈 근거를 마련한다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

200자 원고지로는 분량이 얼마나 되나?

“총 5300여 쪽의 분량을 한글 문서정보에서 환산해보니 1만8965매가 나온다. 200자 원고지 1만9000매 정도다. 책이란 한 권에 합쳐져야 공부하는 이가 사용하기 편한데 분량이 너무 많아 부득이하게 4권(색인 별도)으로 나누었다.”

그 정도면 출판 전 원고 수정이나, 사전 인쇄본을 보는 것만으로도 녹초가 되고 남을 노동 같은데.

“양도 양이지만 무엇보다 고문자 ‘폰트’ 때문에 큰 고생을 했다. [설문해자]는 진시황 문자 통일 당시의 서체인 소전(小篆)체를 표제자로 했고, 그 당시 존재하던 다양한 이체자(異體字)를 보존하고 있다. 한글 시스템 속에서 각종 고문자 구현하는 게 어려웠고, 또 이를 하나하나 찾아 확인하는 작업도 손이 많이 갔다. 개별 한자를 해설한 사전적 성격의 책이다 보니 한번 보고 나면 진이 빠져 더는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동료 교수의 교정 작업이 큰 도움을 주었다.”

제작 과정에 곡절도 많았겠다.

“제가 속한 세대는 컴퓨터에 약하다. 이 책은 방대한 분량의 한글과 한자, 고대(古代) 한자 등이 마구 뒤섞여 있다, 컴퓨터를 옮길 때나, 워드파일에서 한글 파일로 전환할 때마다 폰트가 바뀌곤 했다. 이를 일일이 찾아서 속성을 주고 고쳐야 했다. 또 정확성을 기하고자 모든 표제자에 일렬번호를 부여했고, 9833자에 3종 색인(한글 독음, 부수, 총 획수)을 넣었다. 이 과정에서 파일이 몇 번이고 뒤섞이는 건 보통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파일을 잘못 덮어씌워 날아 간 경우도 적지 않다. 그 좌절감을 어찌 말로 설명하겠나. 엑셀 파일 프로그램에 더욱 익숙했다면 시행착오를 훨씬 줄였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대 한자 같은 경우는 제가 조판, 교정을 다 해야 한다. 그래서 아예 인쇄가 바로 가능하도록 원고를 30여 개의 PDF 파일 뭉치로 만들어 출판사에 보냈다.”

“모든 원고 손수 PDF 파일로 만들어”


▎지난 6월 부산 경성대에서 열린 한자어 DB 구축 사업 관련 학술대회에 참석한 연구자들. / 사진:하영삼 교수
20년에 걸친 집필 도중 좌절이랄까 극한의 상황에 놓인 적은 없나?

“그런 것은 없었다. 어차피 제 공부의 밑천으로 삼고자 한 작업이었고, 번역을 통해 한 글자 한 글자 그 의미를 더 깊게 새길 때 늘어나는 이해와 새로운 아이디어는 오히려 즐거움을 주었다. 연구에만 매진하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 때문에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하고 다시 또 중단하고 시작하는 일이 좌절이라면 좌절이었다.”

이 책에 특히 애착이 간 이유는?

“원래의 지향과는 달리 20대 초 대만에서 석사 유학을 하면서 한자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이후 중국이 개방되고 처음 방문한 곳이 [설문해자] 저자 허신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그때 ‘남조선’에서 온 한 청년 학자가 묘소를 참배하면서 다짐했다. 이 책을 꼼꼼하게 번역해 내 학문의 기초로 삼고, 또 한국 학계에 제공해 한 단계 높은 연구가 가능하게 하겠노라고. [설문해자]는 내게 첫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이다.”

한자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이 책에 환호했을 법하다. 그런데 일반인들에게 이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한자는 개인의 지적 역량을 끌어올리는 효율적인 지렛대와도 같다. 우리의 중요한 개념어들이 대부분 한자어이다. 한자어의 특징은 개념을 명확하게 해준다는 데 있다. 개별 한자 속에 담긴 어원과 문화적 함의를 이해하고, 그 어휘의 정확한 의미를 알 때 지식은 급성장한다. 한자는 공동체에도 중요하다. 대한민국에 문맹은 없지만, 문장의 의미를 읽지 못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이모(李某) 교수’를 ‘이모(姨母) 교수’로 순간 착각하고, 리포트를 ‘금일(今日)’ 내로 제출하라고 했더니 금요일로 오해했다고 하는 사례도 있다. 이런 상태로는 진정한 선진국에 들기 어렵다. 시민의 언어 실력이 고급문화를 향유하고 그런 수준에 도달했을 때, 그 문명은 진정한 선진 문명이 될 수 있다.”

한자가 지적 역량을 끌어올리는 이유


▎하영삼 경성대 교수는 “언어 측면에서 한글, 한문 하이브리드가 가능한 우리나라가 4차산업혁명 시대의 총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사진:하영삼 교수
사실 우리는 언어의 맥락과 법칙의 적용을 받으면서도 그 내막은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우리 주변에는 지천으로 한자가 널려있다. 내가 앉는 의자(倚子), 책상(冊床), 보는 책(冊), 찾는 사전(辭典), 듣는 음악(音樂), 사물이나 개념을 지칭하는 이 모든 명칭에 그것을 이름 짓는 메커니즘이 들어 있다. 때로는 사물의 특징을, 때로는 인식의 특징을, 때로는 사용자의 바람을 담았다. 이것을 이해할 때 의미는 더 효과적으로 각인된다. 예컨대 권력(權力)에는 ‘저울’과 ‘힘’이라는 단어가 들었다. 권력의 속성을 말해준다. 종횡(縱橫)은 되지만 거꾸로는 쓸 수 없다. 종적인 사회의 전통이 강하기 때문이다. 종(縱)에는 중심이라는 의미소가 들어 있지만, 횡(橫)에는 횡사(橫死)나 횡재(橫材)처럼 부정적인 의미가 스며있다. 이런 속성을 글자 속에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 한자의 특징이다. 이런 개념을 깨닫는다면 세상의 이치에 더 밝아지고 더 앞서갈 수 있다.”

기호로서의 한자의 제자(製字) 과정 원리와 연원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하는 힘과 상상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까?

“한자는 그림으로 그려낸 문자 부호이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하는 방식을 보자. ‘사랑’을 뜻하는 애(愛)는 머리를 돌리고 선 사람과 마음 심(心)을 그렸다. 즉 남을 되돌아보는 마음 그것을 사랑이라 정의했다. ‘공적인’ 개념은 또 어떻게 만들었을까? 원래 ‘자기 사(私)’자는 ‘사사 사(厶)’자에서 시작됐다. ‘厶’는 팔을 안으로 굽힌 모양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는 뜻을 담았다. ‘厶’를 깨부수는 것이 바로 ‘팔(八)’이다. 팔(八)은 어떤 물체를 두 쪽으로 나눠 놓은 모습이다. 그래서 나온 게 ‘공(公)’이다. 八이 厶를 누르는 모습이다. 존재하는 모든 한자는 각각의 배경을 갖는다. 글자가 만들어진 연원을 따르다 보면 생각하는 힘이 길러진다.”

지난 6월 말 경성대 한국한자연구소 HK사업단이 한자어 DB 구축 사업 관련한 학술대회를 개최했던데.

“한국에서 한자어 관련 연구로 정부 지원을 받는 경성대·단국대·한국교원대 세 연구소가 함께했다. 빅데이터, 협력, 공유가 4차산업혁명 시대 학문 연구의 중요한 키워드이다. 국내 관련 연구팀들의 DB 구축과 연구에서 협력하고 관련 노하우와 성과를 공유하여 더욱 효율적인 국가 자산으로 만들자는 취지였다. DB가 구축되면 협력과 공유 범위를 중국과 일본 등으로 확장할 것이다. 유럽에서는 동서양 문명 비교를 위한 다양한 한자어 DB 구축 작업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들과도 적극 협력해 글로벌 빅데이터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대한민국은 언어 하이브리드 국가”

4차 산업혁명에 한자가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다가올 미래의 경쟁력은 창의성과 문해력에서 나오리라 생각해본다. 특히 인공지능이 하지 못하는 창의적인 사고가 경쟁력의 관건이다. 한자는 글자 속에 구체적 사실을 이미지로 담고 있다.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유래와 쓰임새를 추적하고 유추하는 과정에서 창의력은 급성장한다. 더구나 지금 환경과는 전혀 다른 발생 당시의 모습까지 담고 있어 현재를 뛰어넘는 획기적 사고도 가능한 게 한자의 세계다. 한자 ‘日(일)’을 보자. 태양, 낮, 하루, 일본 등 여러 개의 뜻을 가진다. 일(日)에 붙어 확장돼가는 다양한 어휘들과 과정을 인간의 인지, 학습, 지식 구축에 연계한 딥러닝에 연결할 수 있다. 문자가 가지는 이런 인지 시스템은 인공지능 학습, 자동 번역 등에 활용되므로 한자는 미래 자산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한글과 한자를 함께 사용해온 대한민국은 세계를 선도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한글은 표음문자이고, 한자는 표의문자이다.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문명은 ‘음성 중심 문명’에 해당하며 추상, 논리, 분석, 이동 관련 사유가 발달했다. 표의문자를 사용하는 문명은 문자 중심 문명에 해당하며 구상, 직관, 종합, 정주 관련 사유에 적합하다. 서구는 표음문자, 중국은 표의문자 하나만 사용하지만 한국은 이 둘을 다 사용한다. 구상적이면서 추상적인, 직관적이면서 논리적인, 종합적이면서 분석적인, 정주성을 가지면서 이동성을 갖는 사유의 DNA가 우리 몸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언어적 측면에서 하이브리드가 가능한 우리나라는 4차산업혁명 시대의 총아가 될 것이다.”

내 인생의 한자(漢字) 하나를 꼽는다면?

“‘놀 유(遊)’자를 들고 싶다. 예전에 그러지 못했고 지금도 그러지 못하는, 그런 경지에 오르지 못한 아이러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놀면서 일하고 공부하는 것’, 공부가 일이고, 일이 노는 것이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한다. 공부와 연구가 어떤 사명이나 목적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즐거움을 주는 놀이여야 한다. 그렇게 되기에는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공부와 연구가 일상이 됐고, 그냥 생활인 정도에는 이른 것 같다.”

- 박성현 월간중앙 지역전문위원 park.sunghyun@joongang.co.kr

※ 하영삼 - 교수는 경남 의령 출생으로, 경성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 단장, 세계한자학회(WACCS) 상임이사로 활동 중이다. 부산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202208호 (202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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