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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미국 주도 공급망 재편 ‘칩4’, 한국 반도체의 활로는? 

전략무기(美)와 경제(中)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칩4’ 가입 시 중국 보복으로 한국 손실 위험, 참여 안 하면 공급망에서 소외
미국은 ‘칩4’ 이후 반도체 자국 내 자급이 목표, 기술 축적할 시간 많지 않아


▎2022년 5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방한 당시 윤석열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경기도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부터 찾았다. / 사진:연합뉴스
2020년 10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을 찾았다. 이 부회장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 ASML 본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ASML은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에 관한 독점 기술을 보유한 회사다. ASML의 EUV 기기는 5나노 이하 미세 회로 패턴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장비로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는 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 분야에서 대만 TSMC를 따라잡기 위해 ASML의 협조가 절실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TSMC는 ASML의 최대 고객사였다. TSMC는 삼성전자보다 앞서 2020년 5월 미국 애리조나주에 파운드리 공장 설립을 발표하며 미국을 우군으로 끌어들였다.

이를 두고 “미·중 사이에서 실리를 취하려는 삼성전자의 포지셔닝에 대응하기 위해 미·일·대만이 ‘반도체 3각 동맹’을 결성하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바로 이 시국에 이 부회장이 ASML을 방문한 것은 상징적이다. 아무리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최강자라 할지라도 미국과 그 우방국 기업들의 조력 없이는 언제든 무력화할 수 있음을 암시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공화당 트럼프에서 민주당 바이든으로 정권이 바뀐 뒤에도 ‘미국=원천기술(설계), 일본=소재·부품·장비, 대만=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 생산, 한국=메모리 반도체(혹은 파운드리) 생산’이라는 미국의 큰 그림은 유효하다. 이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중국의 자리는 없다. 바이든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 ‘칩4(미국·일본·대만·한국)’ 결성을 꾀하고 있다. 사실상 신(新)냉전 구도를 불사하며 시간이 아무리 걸리더라도 중국 경제를 고사시키겠다는 셈법이다.

2022년 7월 28일 미국의 반도체 제조장비업체 램리서치의 팀 아처 CEO는 컨퍼런스콜에서 내밀 한 이야기를 꺼냈다. “(미 상무부로부터) 중국으로의 수출 제한 조치가 14나노 이하 미세공정을 적용한 반도체 장비로 확대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종전까지 수출 제한 기준은 10나노 이하였다. 규제 범위를 더 확대한 것이다. 미국은 이미 ASML EUV 장비의 중국 반입도 금지했다. 겨냥한 타깃도 과거에는 SMCI 등 중국 반도체 기업으로 한정했다면, 이번에는 중국 내에서 운영되는 TSMC·삼성전자·SK하이닉스 공장까지 포함될 수 있다. 인력 이동을 통해 중국 회사로 기술이 유출될 개연성을 미국이 포착한 것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中 공장 어쩌나


▎2020년 10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네덜란드 ASML 본사를 방문해 EUV 장비를 챙겼다. / 사진:삼성전자
이런 연장선에서 추진되는 ‘반도체 동맹’ 칩4의 성격을 놓고 ‘중국 견제’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명분은 “한·미·일·대만 4개국 간 반도체 공급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 칩4가 가동되면 중국을 어떻게, 얼마나 자극할지 알 수 없다. 일단 지난 3월 제기된 칩4 이슈 전후로, 한국의 삼성전자·SK하이닉스, 대만의 TSMC 등은 “미국에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는 플랜을 속속 발표했다. 반도체 업종은 아니지만 현대자동차그룹(전기차·배터리)과 LG그룹(배터리) 등도 미국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미·중 패권 갈등이 상당 기간 진행될 것이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줄에 서겠다’는 기업들의 계산이 읽힌다.

소재·부품·장비에 치중하는 일본은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공장이 어디 있든 공급은 불변이기 때문에 칩4 가입에 따르는 부담이 적다. 대만은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방문 때 확인됐듯, 언제든 중국의 침공을 받을 수 있다는 안보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선택의 여지 없이 TSMC는 미국의 코드에 맞춰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칩4 가입에 따른 리스크가 가장 높게 측정되고 있다. 첫째, 한국 반도체 수출의 60% 이상을 중국(홍콩 포함)이 차지하고 있다는 냉엄한 현실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공장, 쑤저우에 테스트·패키징(후공정) 공장을 운영 중이다.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에 D램 공장, 충칭에 후공정 공장, 다롄에 랜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칩4가 본격화할수록 이들 기업의 중국 공장들은 레거시(구형 공정) 팹으로 노후화될 수밖에 없다. 상황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면 특히 중국 투자 비중이 큰 SK하이닉스의 타격이 클 것이라고 다수 전문가는 우려한다.

둘째,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법’이 실행되면 미국에서 생산된 반도체의 중국 수출이 금지된다. 법안에 따르면,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은 세액 공제 혜택을 제공받는 대신에 향후 10년간 중국에 반도체 투자를 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은 “미래 반도체 산업은 미국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칩4에 참여하더라도 한국의 가시적 이득은 잘 안 보이는 반면, 손실은 분명하다. 게다가 중국의 경제 보복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미 동맹을 동원하며 한국을 딜레마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는 비판적 견해도 존재한다. 이를 두고 양향자 국민의힘 반도체 산업경쟁력강화특위 위원장은 “미국은 이념과 안보동맹을 무기로, 중국은 경제와 시장을 무기로 우리나라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안미경중’ 시대의 종언


▎2022년 7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코로나19 확진으로 격리하는 와중에도 백악관에서 손을 흔들며 최태원 SK 회장의 투자에 감사를 표시했다. / 사진:연합뉴스
그동안 한국의 글로벌 생존 전략 축은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의 핵심 캐시카우에 해당하는 반도체를 경제가 아닌 안보 프레임에 넣는 순간, 상황이 급변했다. 미국이 반도체를 일종의 전략무기로 바라보는 이상 ‘안미경중’은 통할 수 없다.

칩4를 앞에 두고 한국은 ‘가입하면 큰 손실을 보겠지만, 가입하지 않으면 아예 망할 수 있는’ 곤경에 처해 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항변해도 중국은 ‘자국 반도체 산업을 질식시켜 몰락하게 만들겠다는 의도’로 칩4를 바라본다. 일각에서는 “단기적으로는 중국 반도체 수출이 막히고, 성장이 지체되는 만큼 한국에 이득”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실제 화웨이가 막히며 한국 반도체 기업이 반사 효과를 일시적으로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미국은 칩4 너머의 빅픽처를 구상하고 있다. 미국 영토 내에 반도체 산업 시설을 모조리 갖춰놓겠다는 포석이 그것이다. 지정학적으로 중국 영향권에 있는 대만 TSMC, 한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생산 시설을 미국 땅으로 옮겨놓겠다는 계획이다. 실제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약 22조3000억원)를 들여 파운드리 2공장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이미 텍사스주 오스틴시에도 파운드리 공장 2곳을 갖췄고, 두 도시에 향후 250조원 넘는 투자 계획까지 밝혔다. SK도 7월 말 최태원 회장이 직접 총 220억 달러의 미국 투자 의향을 밝히며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토니(최 회장의 영어 이름) 생큐”라는 말을 10번이나 들었다. 이 가운데 150억 달러(약 20조원)는 반도체 분야에 투입된다. 당시 코로나19에 재감염된 와중에도 바이든은 화상으로 최 회장과 면담하며 “이번 투자는 미국과 한국이 21세기 기술 경쟁에서 승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투자”라고 극찬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내 대규모 반도체 투자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미국의 우산 아래 사업을 영속할 수 있을 터다. 하지만 향후 몇 년 후 미국이 자국 내 반도체 설계와 생산 체계를 완성한 상황이 도래한다면, 그때에도 칩4 동맹이 유지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울러 이런 구도가 고착화할수록 한국은 미국의 외교 전략을 추종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놓일 것이다.

일단 윤석열 정부는 “(8월 말~9월 초로 예상되는) 칩4 예비회의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정부는 “국익을 최대한 반영하는 방향으로 예비회의에 응하게 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예비회의에 선제적으로 참석해 최대한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방향성을 끌어내겠다는 목표인 것이다. ‘반도체 동맹’이 아니라 ‘반도체 공급망 협력 대화’로 칩4를 규정하고 최대한 정치색을 빼겠다는 의도다. 그래야 ‘한국의 윤 정부가 미국에 경도됐다’는 중국의 의심을 무마하고, 설득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논란이 컸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대만 방문 직후 방한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을 만나지 않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설령 한국이 칩4에서 발을 빼거나 시간 끌기를 하려고 해도 미국의 답은 정해져 있다. 일본, 대만과 함께 ‘칩3’로 갈 것이다. 이러면 중국이 당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도 최신 반도체 공정 장비를 미국과 미국의 우방국으로부터 도입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반면 “한국이 칩4에 가입해도 중국이 보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중국은 한국 반도체 기업의 최대 수출처이지만,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한국 기업이 생산하는 반도체가 필요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미 2016년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태 때 한한령으로 보복 카드를 소진해버린 탓에 중국이 마땅히 꺼낼 타격 방편도 마땅찮다. 가령 중국이 반도체를 수입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중국의 수출도 타격을 입는다. 화장품, 엔터 등 한국산 소비재는 이미 사드 사태를 계기로 중국에서 거의 초토화된 상태다.

“中, 한국의 디커플링 대비하고 있다”


▎2022년 8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법’에 서명하며 중국 견제를 가시화했다. / 사진:UPI연합뉴스
이와 관련해 [짱깨주의의 탄생]의 저자인 김희교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는 “칩4에 대해 중국은 기본적으로 WTO 자유무역을 기본으로 삼는 글로벌 분업 시스템의 원칙을 어기는 불공정한 조치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칩4는 특정 국가(중국)를 원칙 없이 배제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예상되는 보복 수위에 대해 김 교수는 “아마도 군사·안보적 문제였던 사드 때보다는 강도가 낮은 대응이 나올 가능성이 높겠지만, 진행 방향에 따라서 중국산 반도체 소재·부품의 한국 수출 제한이나 요소수처럼 반도체와 무관한 다른 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러면 반중정서가 더 커지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김 교수는 “이미 역사상 최악 상태다. 오히려 호전될 수 있다. 지금까지 감정 차원의 문제였다면 (중국과 경제적 충돌이 발생한다면) 실익 차원의 문제로 전환될 수 있다”고 답했다. ‘현실’에 눈을 뜬다면 반중정서가 한국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체감할 것이란 기대다.

관세청에 따르면 8월 1~10일 중국 수출액은 8억9000만 달러 적자로 나타났다. 3개월 연속 대중 무역수지 적자도 1992년 10월 이후 처음이지만, 4개월 연속 적자도 유력한 상황이다. 김 교수는 대중 무역적자에 대해 “한국에서 디커플링을 계속 언급하니까 중국이 일정 정도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라는 색다른 해석을 내놨다. 단순히 중국의 코로나19로 인한 주요 도시 봉쇄나 경기 둔화 우려 탓만은 아니라는 관점이다.

8월 9일 박진 외교부 장관은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산둥성 칭다오에서 회담했다. 이 자리에서 왕이 외교부장은 “안정적이고 원활한 공급망과 산업망을 수호해야 한다”며 한국이 미국 주도의 칩4와 IPEF(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에 참여하는 것을 경계했다. 한발 더 나아가 중국의 [환구시보]는 6월 23일 “미국의 제재는 오히려 중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을 촉진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중국은 자국 내 반도체 공장을 계속 짓고 있고, 제재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반도체 장비 수입 1위 국가였다. 논란이 있지만, 중국 최대 파운드리 기업 SMIC는 7나노 공정 개발에 성공했다고 선전하는 등 ‘반도체 굴기’에 매진하고 있다.

불확실성에 휩싸인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

이 와중에 관세청은 ‘8월 1~10일 반도체 수출액(29억9100만 달러)이 전년 동기 대비 5.1% 감소했다’는 충격적 발표를 내놨다. 반도체 수출은 5월 14.2%, 6월 10.8% 증가했지만 7월 2.5%로 급감하더니 8월에는 마이너스가 될 위기에 몰려 있다. 이유는 한국의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의 수요 감소가 결정적이었다.

대만의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2년 3분기 D램 재고일수는 삼성전자 11주, SK하이닉스 10주, 마이크론 9주로 집계됐다. 건전한 재고일수가 4주인 점에 비춰볼 때 침체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 메모리 반도체 세계 3위인 미국 마이크론은 6월 30일 가이던스의 추가 하향을 발표했다. SK하이닉스는 2022년 7월 청주공장 증설 계획 보류를 공식화했다. 당초 메모리 반도체 수요 증가에 대비해 4조3000억원의 투자 계획이 마련됐지만 스톱된 것이다.

주식시장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가격이 ‘역사적 저점에 진입했다’는 시각이 나오고 있지만, 아무도 반등 시점을 단언하지 못한다. 삼성전자가 시스템 반도체에서 세계 최초로 출하한 파운드리 3나노 양산이 순조롭게 이뤄질지, 한국이 칩4에 참여해 미국과 동조할 때 중국의 보복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메모리 반도체 슈퍼 사이클 시점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등 변수가 쌓여 있다.

8월 4일 국민의힘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특위는 국가 첨단전략산업법과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담은 ‘반도체 지원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미국, 중국, 대만 등에 비해 정부 차원의 제도적 지원은 한참 미흡하다. 양향자 위원장은 “대만은 반도체 용수 확보를 위해 논에 물을 끊고 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여주시가 공업용수 지원에 협조해주지 않아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착공이 3년 이상 지연되고 있는 것이 한국 반도체의 실정이다.

-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202209호 (202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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