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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2)]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한 1816년 여름 이상기후와 공포문학 

화산 폭발이 일으킨 진짜 공포, 현실은 더 잔혹했다 

저온 현상으로 곡물 가격 급등, 유럽 대기근 불러와
‘19C 팬데믹’으로 지구촌 몸살, 조선도 콜레라 창궐


▎메리 셸리가 1818년 내놓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최초의 공상과학 작품 중 하나이자, 근대 공포물에 새로운 흐름을 안겨준 작품이다. / 사진:1931년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1816년을 맞이하는 유럽인들, 특히 영국인들은 매우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여년 가까이 영국을 괴롭힌 ‘악몽’ 같은 존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잊고 맞이하게 된 첫 새해였기 때문이다. 1년 전인 1815년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에 패배한 뒤 대서양 남쪽 먼바다에 잇는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됐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1816년은 이런 희망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그해 영국과 유럽은 유례없는 끔찍한 한파에 떨어야 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어려움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문화적으로는 예상하지 않은 ‘수확’도 거둘 수 있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다.

1816년 여름 메리 고드윈은 유명한 시인 퍼시 셸리와 함께 스위스로 밀월여행을 떠났다. 당시 퍼시 셸리는 24세의 유부남, 메리 고드윈은 19세의 싱글이었다. 이들은 남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스위스로 도피 여행을 떠났고, 제네바 인근에서 낭만파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조지 고든 바이런과 합류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그해 여름은 날씨가 매우 괴팍했다. 음산할 정도로 낮은 기온이 지속됐고 종일 비가 내려 해를 볼 수 없는 날이 며칠씩 이어지기도 했다. 또 시도 때도 없이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했다.

기괴한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2017년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은 여류작가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집필하는 계기가 된 1816년 여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사진:영화사 [찬란]
풍광이 아름다운 스위스에서 밀월을 즐기려던 메리는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영국에 편지를 보내 “거친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어”, “거의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비가 내려서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해”, “갑자기 번쩍하고 온 사방을 비추는 빛이 스치고 지나간 뒤, 다시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어. 그러고는 머리 위 어둠 속에서 무시무시한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어” 등 당혹스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당황한 것은 바이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대낮에도 어둡기 짝이 없거든. 점심때 벌써 닭들은 밤이 온 줄 알고 자러 들어가더군. 대낮에도 한밤중처럼 촛불을 밝혀야 한다네”라고 남겼다.

이런 우중충한 날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들은 6월 18일 파티를 열었다. 퍼시 셸리와 바이런의 만남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이날 밤 퍼시, 바이런, 메리 그리고 메리의 여동생 클레어, 바이런의 친구인 의사 존 폴리도리는 흥미로운 ‘게임’을 벌이기로 했다. 폭풍우와 변덕스러운 날씨로 집안에 꼼짝없이 갇혀있던 탓이었을까. 지루한 시간을 날려버릴 기괴하고 섬뜩한 기담을 하나씩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이날 분위기에 심취한 메리는 폭풍우가 치는 밤 한 과학자가 시체를 모은 뒤 전기의 힘으로 되살려 괴물을 만들어낸다는 스토리를 내놓았다. 이에 폴리도리는 사람의 피를 흡입하는 흡혈귀에 대한 착상을 소개했다. 이들이 보낸 기괴한 밤은 오랫동안 문학사가들의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했다. 혹자는 이들이 이날 어울려 마약을 했다고도 했고, 성적 쾌락을 탐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가 탄생한 밤이었다는 것이다.

이날 바이런과 퍼시 셸리는 메리의 이야기에 큰 매력을 느꼈고, 그녀에게 소설로 쓸 것을 권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818년 [프랑켄슈타인]이 세상에 나왔다. 다만 당시에 여성이 진지한 소설을 쓴다는 것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기에 익명으로 내놓게 됐다. 폴리도리 역시 이듬해인 1819년 흡혈귀가 등장하는 최초의 소설 [뱀파이어]를 내놓았다. 그리고 메리 고드윈은 퍼시 셸리와 불륜 관계를 마치고 정식으로 결혼했고 메리 셸리로 불리게 된다.

지구 평균 기온 0.7°C 낮아져


▎1931년 영화 [드라큘라] 포스터.
그런데 1816년 끔찍한 여름을 보낸 것은 스위스의 메리 셸리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훗날 연구에 따르면 이 해는 지구 평균 기온이 0.4~0.7℃ 낮아지는 심각한 기후 이상이 일어났다. 특히 여름 기온은 1766~2000년 사이에 기록상 가장 추웠던 해로 기록됐다. 그래서 1816년은 유럽 역사에서 ‘여름이 사라진 해’(Year without a summer)라고 불린다. 유럽 나라 대부분이 이상 저온, 폭풍우, 장마, 홍수 등을 겪었다. 연초부터 계속된 저온 현상은 농사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고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대규모 기근을 초래했다.

그해 5월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에서는 무장한 노동자들이 “빵이 아니면 죽음을(Bread or Blood)”이 적힌 깃발을 들고 봉기를 일으켰고,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프랑스도 계속된 장마로 곡물이 썩어버리는가 하면 와인 생산은 수백 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인도네시아 자바의 총독이었던 스탬퍼드 래플스는 이때 유럽을 방문했다가 충격을 받아 “걸어 다니는 해골 같은 사람들이 먹기에도 끔찍한 가축의 사체나 냄새가 고약한 쐐기풀을 게걸스레 먹어댄다. 길가에 버려진 음식물을 차지하려 동물들과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고 기록했다.

메리 셸리 일행이 여름을 보낸 스위스는 상황이 더욱 나빴다. 내륙 국가였던 스위스는 바닷길을 통해 다른 대륙과 통상이 어려웠기 때문에 더욱 힘든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해 8월엔 빵을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됐고, 이듬해에는 곡물 가격이 3배 이상 치솟아 굶주린 군중들이 빵 가게를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스위스에서 이들을 목격한 퍼시 셸리와 바이런은 “정신이 나간 듯한 아이들은 모두 병에 걸린 것 같았다. 대부분 등이 굽고 목이 부어 있었다”며 당시의 재앙 같은 상황을 묘사했다. 이런 충격적인 모습은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의 형상에도 반영돼 있다.

바이런은 [암흑](Darkness)이라는 시에 이때 받은 인상을 남겼다.

“빛나던 태양은 빛을 잃었고, 별들은 빛도 없고 길도 없는, 끝없는 우주 공간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네. 얼음처럼 차가운 지구는 달도 없는 허공에서 눈이 먼 채 제멋대로 선회하며 어두워져 갔네. 아침이 왔다가 갔네. 또 왔지만, 낮은 오지 않았네…. 인간들의 이마가 절망의 빛으로 무시무시한 모습이 된 것을 볼 수 있었네. 어떤 자들은 드러누워 눈을 가리고 울었네. 어떤 자들은 꽉 쥔 손 위에 턱을 괴고 미소를 지었네. 또 어떤 자들은 이리저리 서둘러 왔다 갔다 하며, 그들의 화장용 장작더미에 땔감을 보태며, 미칠 듯이 불안하게, 사라진 세상의 관을 덮어주는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네.”(시 [암흑] 중 일부)

이런 상황은 문학뿐 아니라 미술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영국 화가 존 컨스터블이 1816년 여름 신혼여행을 갔던 영국 남부 해안가에서 그린 [웨이머스 베이]라는 작품에는 화산재의 영향으로 하늘이 어두컴컴하게 그려졌다. 또한 영국이 자랑하는 화가 윌리엄 터너는 신비한 빛깔의 하늘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한데, 기후학자들은 탐보라 화산으로 인한 이상기후 때문에 하늘의 빛깔이 다양하게 바뀌었고 이것이 당시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본다.

당시만 해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연한 자연재해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약 150년가량이 지난 뒤 비밀이 풀렸다. 기후학자들은 지구 반대편 인도네시아 숨바와섬의 탐보라 화산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탐보라 화산의 폭발은 삼각형 모양의 산머리의 1600m 높이 부분이 통째로 날아가면서 지름 6㎞ 규모의 칼데라호를 남겼고, 용암은 주변 560㎞까지 흘러내렸다. 1만2000년 이래 최대 규모의 화산 폭발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정치·사회 변화까지 불러와


▎탐보라 화산 폭발의 규모는 20세기 최대로 꼽히는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의 6배에 달했다. 사진은 탐보라 화산.
그렇다면 탐보라 화산 폭발은 어떻게 유럽에 재앙을 안겼을까. 화산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산 분출물과 가스가 40㎞ 이상 치솟으면서 성층권에 도달했고, 이것이 에어로졸을 형성하면서 햇빛을 차단하고 지구의 기후 시스템을 교란했다. 기후학자들에 따르면, 이때 만들어진 화산 분출물은 50㎦에 달했는데, 이는 20세기 최대로 꼽히는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에서 만들어진 규모의 6배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 거대한 에어로졸로 인한 ‘우산효과’는 서서히 이동하며 약 3년 동안 지구를 이상저온에 시달리게 했던 것이다.

당시 이 변화를 심상치 않게 여겼던 영국의 기상학자 루크 하워드는 이상 기후 현상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그는 1816년 4~9월 강수일수가 130일에 달했고, 런던의 낮 평균 기온이 10℃(1807~1815)에서 3.3℃(1816)로 무려 6.7℃나 떨어졌음을 확인했다. ‘여름이 사라진 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서유럽 전역에서 곡물 생산이 급감해 예년보다 수확량이 75%가량 감소했다.

피해를 본 곳은 유럽만이 아니었다. 탐보라 화산 폭발은 인도양 일대 해수의 수온과 염도에도 변화를 가져왔고 이것은 동물성 플랑크톤의 급증과 이를 숙주로 삼는 콜레라균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홍수로 콜레라균으로 가득한 해수가 해안가를 덮쳤고 인도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미얀마, 태국 등 동남아로 퍼진 뒤 무역로를 따라 필리핀, 일본, 중국까지 확산했다.

그리고 조선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1821년 조선에 창궐한 괴질은 바로 이때 퍼진 콜레라가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것은 19세기 팬데믹으로 불린다.

“평양부(平壤府)의 성 안팎에 지난달 그믐 사이에 갑자기 괴질(怪疾)이 유행하여 토사(吐瀉)와 관격(關格)을 앓아 잠깐 사이에 사망한 사람이 10일 동안에 자그마치 10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의약도 소용없고 구제할 방법도 없으니, 목전의 광경이 매우 참담합니다…. 그 돌림병이 그칠 기미가 없고 점차로 퍼질 염려가 있어 점차 외방의 각 마을과 인접한 여러 고을로 번지고 있습니다.”([순조실록] 순조 21년 8월 13일)

탐보라 화산 폭발이 일으킨 나비효과는 유럽 사회의 정치·사회적 변화로도 이어졌다. 식량 부족과 사회 혼란을 통제하면서 유럽 각국 정부는 점차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화됐다. 코로나19로 세계 각국에 중앙정부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빅 브라더’의 징후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침해된다는 반발과 시위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던 것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209호 (202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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