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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6)]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무대로 등장하는 상해 

도산 안창호와 백범 김구, 상해로 가다 

미국 동포들에 독립의연금 모금하던 안창호, 임시정부 수립에 봉사하려고 상해로
김구도 황해도 안악에서 만세운동 지도하는 것보다 상해로 망명해 독립운동 계획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 앞줄 왼쪽 넷째가 초기 상해임정을 주도한 도산 안창호, 둘째 줄 맨 오른쪽이 백범 김구.
1919년 3월 9일 오전 11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중국 상해에서 날아온 전보 하나를 받았다. 전보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다.

‘상항 한인 안창호. 한인 3백만 명 독립단은 예수교회 3천과 천도교회 5천과 각 대학교와 모든 학교들과 각 단체들이 일어나 조직한 자라. 독립단은 3월 1일 하오 1시에 서울 평양과 및 그 밖의 각 도시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하고 대표자는 손병희, 이상재, 길선주 삼씨(三氏)를 파송하였오. 이승만 박사는 어디 있소? 회전하시오. 상해 특별대표원 현순.’

여기 등장한 ‘상항 한인 안창호’는 상항(桑港), 즉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가 수신자라는 의미다. 마지막의 ‘상해 특별대표원 현순’은 상해에 특별대표원으로 파견된 현순이 발신자라는 뜻이다. 즉 위의 전보는 중국 상해에서 현순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도산 안창호에게 보낸 것이다.

미국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이던 도산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을 지내다 특파원 자격으로 상해에 가게 된 도산 안창호 선생.
현순을 비롯한 개신교 지도자들은 1919년 2월 천도교 지도자들과 고종 인산일(因山日)인 3월 3일에 거국적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로 밀약하고, 그 사실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현순을 독립만세운동본부의 외교통신원 자격으로 상해에 파견했다. 1919년 2월 24일 밤 한양을 떠난 현순은 1919년 3월 1일 상해에 도착했다. 현순은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의 이광수와 협의하고 3·1운동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임시 사무소의 총무가 됐다. 임시사무소의 현순과 이광수는 3월 4일부터 3·1운동을 전 세계에 타전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3월 9일 상항의 안창호에게 타전한 것이었다.

현순은 안창호에게 타전한 전보에서 자신을 ‘상해 특별대표원’이라고 소개했는데, 국내 독립만세운동본부의 외교통신원이라는 호칭이 복잡해 ‘특별 대표원’으로 압축했던 것이다. 현순은 또한 국내 독립만세운동본부도 복잡해서 그냥 ‘독립단’이라고 했다. 현순은 아울러 33인이 확정되기 전인 2월 24일 한양을 출발했던 만큼, 독립만세운동의 대표자가 누군지 정확히 몰랐기에 손병희, 이상재, 길선주 3명을 대표자라고 했던 것이다.

손병희와 길선주는 뒤에 33인 대표에 속했지만 이상재는 포함되지 않았다. 다만 현순의 전보를 통해 1919년 2월 현순이 기독교 지도자들과 독립만세운동을 논의할 때 이상재가 핵심 지도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현순 전보에 따르면 ‘지난 3월 1일 오후 1시 모국 조선에서 3백만 독립단이 대한독립을 선언했다’고 했다. 이 내용은 정치적, 외교적, 재정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정치적 측면에서 본다면, 만약 3·1 독립만세운동으로 정말 독립이 될 경우, 신생독립국가의 권력은 일단 대표자로 지명된 손병희, 이상재, 길선주 3명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신생독립국가의 권력 향방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손병희, 이상재, 길선주 3명이 왜 대표가 되었는지, 그들의 권력의지는 어떤지, 그들이 구상하는 신생독립국가의 체제는 무엇인지 등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 외교적 측면에서 본다면, 당시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한 신한청년당에서는 다른 단체에서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는지 여부에 관심을 기울였고, 만약 보냈다면 어떻게 조정할지를 고민했다.

그런데 미국 동포들은 이승만과 정한경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모국 조선에서 3백만 독립단이 대한독립을 선언했다면,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는 대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문제 될 수 있었다. 현순이 안창호에게 타전한 전보에서 유독 이승만 박사를 지목해 ‘이승만 박사는 어디 있소? 회전하시오’라고 요구한 이유는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현순이 3월 15일 안창호에게 타전한 전보에서 ‘이승만 박사가 유럽에 갔는지요? 그의 번지를 알기 원합니다. 그이더러 유럽에 가기를 권고하시오.’라고 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즉 3·1운동 이후, 상해의 신한청년당은 그들이 파리에 파견한 김규식과 미국 동포들이 파견하려는 이승만이 공히 파리에 가서 서로 협력하며 운동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또 재정적 측면에서 본다면 모국의 3백만 독립단이 전국적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했다면 무수한 희생자가 발생할 것은 물론 막대한 운동자금이 필요할 것은 불문가지였다. 따라서 그 운동자금을 어떻게 마련하고 어떻게 후원할지에 대한 고려가 당연히 필요했다.

그것은 현순이 3월 15일 안창호에게 타전한 전보에서 ‘일본정부를 공격하는 동시에 5천여 명이 포획되었고, 5백여 명이 죽었고, 일본인 회사에서 일하던 한인들은 일시 동맹파공(同盟罷工)을 하며 한인들이 일본물건을 배척하니, 우리 내지의 정형이 사람과 돈을 아울러 요구합니다.’라고 하여 안창호의 대한인국민회가 사람과 돈을 지원해줄 것을 요구한 사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3·1운동을 외교·재정·정치적으로 두루 챙겨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2년 미국을 방문할 때 쓴 ‘집조’. 집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조선의 조정이 발급한 여권이다. / 사진:외교부
이 같은 현순의 전보 내용으로 본다면, 당시 상해의 신한청년단에서는 3·1독립만세운동을 주로 외교적인 측면과 재정적 측면에서 주목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현순의 전보를 받은 안창호는 3·1운동을 외교적인 측면과 재정적 측면은 물론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주목했다. 그것은 전보를 받은 후 보이는 안창호의 언행에서 잘 드러난다. 안창호는 전보를 받은 즉시 상해특별대표원 현순에게 답전을 보냈다. 뒤이어 파리 대표로 결정된 이승만 박사, 정한경 학사에게도 현순의 전보 내용을 알렸다. 또 특별히 서재필 박사에게 전보를 보내 이번 일에 나와 돕기를 요청했다.

안창호는 여기에 더해 3월 9일 오후 7시 30분에 한인예배당에서 국민회 중앙총회 임시협의회를 개최하고 ‘파리 평화회 파견 대표자 이승만, 정한영 양씨가 여행권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서재필 박사를 파견할 것. 만일 여행권 석 장을 얻을 수 있을 경우에는 서재필, 이승만, 정한경 3씨를 파송할 일’을 결의했다.

이런 일들은 이승만과 정한경 그리고 서재필이 상해 신한청년당의 파리 대표 김규식과 잘 협조하게 하려는 외교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안창호는 이승만, 정한경, 서재필에게 전보를 보낸 다음 북미, 멕시코 각 지방에도 전보를 보내 대한독립선언의 큰 소식을 널리 전했다. 그렇게 한 이유 중 하나는 모국의 3백만 독립단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서였다. 안창호가 3·1운동을 재정적 측면에서 고민한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에 의하면 안창호는 3월 13일 중앙총회 위원회 석상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 북미, 하와이, 멕시코에 재류하는 한인은 특별히 담부(擔負)한 책임을 깨달을 것이요. 특별한 책임이 무엇이냐 하면 미국에 있으므로 담부한 책임이올시다. 미국은 지금 세상에 가장 신성한 공화국으로 자유와 정의를 힘써 창도하니 장래 미국이 활동하면 우리에게 큰 관계가 있을 것이올시다.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널리 유세하며 각 신문잡지를 이용하여 여론을 불러일으키고 종교계에는 지금 한국교도의 악형 받는 참상을 널리 고하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기를 청구합시다. 재정공급이 또한 북미, 하와이, 멕시코 재류동표의 가장 큰 책임이올시다. 2천 5백만 민족이 다 일어난 이때에 우리는 대양을 격하여 내왕이 임의롭지 못함을 말미암아 몸을 바치는 대신에 재정공급의 중임을 담부하였으니 우리는 금전으로써 싸우는 군인으로 생각합시다.” ([신한민보] 1919년 3월 20일 자, 논설 ‘중앙총회장 안창호씨의 주견(主見)’-3월 13일 중앙총회 위원회 석상에서 위원회 서기 홍언 필기)위에 의하면 안창호는 미국의 한국 동포들은 안전한 강대국 미국에 있기에 특별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바로 미국 여론을 움직이는 것이고, 그다음으로 재정 공급의 중임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본다면 모국 조선은 물론 연해주, 만주, 중국의 동포들보다 미국 동포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또 여러 면에서 안전했다. 안창호는 그렇게 다른 곳의 동포들보다 부유하고 안전한 미국 동포들은 당연히 모국의 3백만 독립단을 위해 금전으로써 싸우는 군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안창호는 그런 생각에서 3월 13일에 중앙 총회장 명의로 독립의연금(獨立義捐金)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포고서를 공포했다.

“몸을 바치는 대신 재정 공급의 중임 져야”


▎2017년 8월 14일 미국·중국 등 해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40여 명이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방문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손자인 로버트 안씨가 역사관 내 옥사를 둘러보고 있다. 안창호 선생은 1932년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서울로 송환돼 이곳 형무소에 투옥됐다.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1) 이번 의연(義捐)은 독립의연이라고 이름할 일. 2) 중앙총회로서 북미, 하와이, 맥시코 각 지방에 출장소를 두고 수전위원(收錢委員)을 내어 중앙총회지부로 하여금 직접 의연을 모집할 일. 3) 북미, 하와이, 멕시코 재류동포는 전체가 독립의연의 의미를 지고 3월 이내에는 매명 평균 10원(미화) 이상을 내고 4월로부터는 무슨 벌이를 하든지 매삭, 매주일 혹 1년 수입의 20분의 1을 내게 할 일. (…)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 기원 4252년 3월 13일.([신한민보] 1919년 3월 20일, 중앙총회의 포고서)

위에 의하면 안창호는 북미, 하와이, 멕시코의 동포들은 개개인이 특별한 책무로써 독립의연금을 내게 하였는데, 그 액수는 3월 이내는 개인당 10원(미화) 이상, 4월 이후는 수입의 20분의 1이었다. 개개인으로 볼 때 적지 않은 액수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동포들은 국가에 세금을 내고 교회에도 십일조를 내는데, 여기에 더해 수입의 20분의 1을 독립의연금으로 내게 됐던 것이다. 20분의 1로 결정된 독립의연금은 일종의 모국 세금이라고 할 수 있다.

안창호는 미국 동포들이 이 정도의 재정적 부담을 책임져야 3백만 독립단이 금전적으로 안정이 되고, 나아가 임시정부 또는 신생독립국가가 성립될 경우에도 체제가 안정될 때까지는 미국 동포들이 재정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이런 조치를 취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조치들은 모두 3·1운동을 재정적 측면에서 후원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안창호는 이 외에도 3·1운동을 정치적 측면에서도 고민했다. 안창호는 3월 13일 중앙총회 위원회 석상에서 “(전략) 믿건대 맘을 넓게 가지고 강하게 쓰며 정을 뜨겁게 붓고 깊게 맺어 시기와 미움이 없을 것이요, 무서움과 두려움도 없을지니, 이왕으로부터 이승만 안창호가 어떠하다, 이대위 박용만이 어떠하다는 와언이 스스로 그치겠고, 따라서 지방에 있는 동포들도 서로 느끼며 사랑하여 정성을 기울이겠고”라면서 파벌적 정쟁을 그쳐야 한다고 호소했다.

수입의 5%를 독립의연금으로 바친 미국 동포들


▎지난 6월 26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백범 김구 선생 제73주기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황해도 안악 동산평에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던 백범 김구는 3·1운동 소식을 듣고 상해로 망명했다. / 사진:국회사진기자단
현순이 3월 9일 보낸 전보에는 3백만 독립단 대표가 손병희, 이상재, 길선주 3인으로 됐는데, 그것이 해외 동포들에게는 불만이나 시기, 질투의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손병희, 이상재, 길선주 모두 모국 안에 있는 인물들로서, 그들이 3·1운동을 주도해 정말 독립을 쟁취한다면, 그들과 함께 신생독립국가의 핵심 권력에 들어갈 해외동포 지도자는 누구일지, 또 궁극적으로 신생독립국가의 최고 권력을 누가 가질지를 놓고 암투와 경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안창호는 이런 우려에서 북미, 하와이, 멕시코의 동포들은 미래권력 때문에 시기와 미움으로 분열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하면서 그와 관련된 문제를 가장 폭넓게 또 현실적으로 고민한 지도자는 안창호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안창호의 고민에 따라 1919년 3월 15일 소집된 북미, 하와이, 멕시코 재류동포 전체 대표자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 재미 한인 독립운동 응원의 일체 행사는 전체 대표회 결의에 의하여 이행하며, 그 행정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일임함. 2) 중앙총회 사무부서를 확장하고 상무원을 증가하기로 함. 3) 중앙총회 예산은 우선 7만 6천 달러를 예산함. 4) 원동(遠東)과 구미 각지에 운동 경비 조달을 위하여 일반 동포에게 애국 특연금 수봉(收捧)을 실시함. 5) 서재필을 외교고문으로 임명하여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를 설치하고, 경비는 매월 8백 달러씩 지발(支撥)함.6) 원동에 대표를 파송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봉사하게 하고 미주와 하와이 각 지방에 특파원을 파송하여 민중 여론을 수습하며, 의사를 연락하여서 행동일치를 도모함(중략)(주요한, [안도산전서], 삼중당, 1963년, 193쪽)

안창호는 위의 제6조 결의에 따라 원동 특파원 자격으로 상해에 가게 됐다. 안창호는 1919년 4월 5일 수행원 정인과, 황진남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 그리고 5월 25일 상해에 도착했다.

황해도의 백범은 도산보다 40여 일 앞서 상해로

한편 3·1운동 당시 백범 김구는 황해도 안악 동산평(東山坪)에서 대지주 김용진 가문의 농감(農監) 겸 동산소학교(東山小學校) 교장으로 있으면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김구는 당시 상황을 [백범일지]에 자세히 기록했는데, 3·1운동 이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동산평에서 3·1운동 소식이 퍼지자 청년들은 김구를 찾아와 만세운동을 지도해달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김구는 “만세운동에는 참여할 마음이 없다”며 거절했다. “선생이 참여하지 않으면 누가 선창합니까?” 하고 묻는 청년들에게 김구는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 진행하여야 할 터인즉 나의 참, 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 했다고 한다.’

김구의 이 같은 언급으로 보아, 3·1운동 소식을 들은 김구는 안악에서 만세운동을 지도하는 것보다는 상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계획, 진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김구는 이런 판단에 따라 1919년 3월 29일 안악을 떠나 사리원으로 향했다. 사리원에 도착한 김구는 김우범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신의주행 기차를 탔다.

당시 기차 안에서 물 끓듯 하는 말소리는 만세 부르는 이야기뿐이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죽지 않고 독립이 되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우리 독립은 벌써 되었지요. 아직 왜가 물러가지만 않은 것뿐이니 전국의 인민이 다 떠들고 일어나 만세를 부르면 왜놈이 자연히 쫓겨나고야 말지요”라고 말했다. 이런 말들로 생각해보면 당시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독립만세만으로 독립이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구는 이런 희망찬 말들을 듣고 신의주역에 내렸다. 처음 김구는 기차를 이용해 중국의 안동현으로 가려고 했지만 일본 경찰이 엄중하게 검사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중국인 인력거를 타고 안동현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출발했다. 그리고 1919년 4월 10일, 김구는 드디어 상해에 도착했다.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한 5월 25일보다 한 달 보름 먼저였다.

상해에 도착한 김구는 전부터 상해에 가족을 이끌고 먼저 와 살고 있던 김보연의 집에서 숙식을 하게 됐다. 김보연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경신학교 출신으로, 평소 김구를 존경하며 따르던 청년이었다.

김구와 안창호는 이렇게 상해로 왔다. 안창호는 초기 상해임정을 주도한 지도자였고, 김구는 후기 상해임정을 주도한 지도자였다. 상해임정의 처음과 끝을 주도한 도산 안창호와 백범 김구가 상해에 도착함으로써, 상해임정은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무대가 될 준비를 마쳤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209호 (202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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