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6)] 조선시대 SNS, 요(謠) 

‘명판관’ 정조, 가짜 농요 간파해 살인 누명을 벗기다 

“밥 한 사발 때문에 남편에게 맞아 죽었소”… 정조, 농요 퍼뜨린 배후 의심
살인사건 3년 동안 네 차례 재조사… 가짜뉴스 조작범 밝혀내고 일벌백계


▎조선 제22대 왕 정조. 학문이 뛰어난 임금답게 옥사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명철한 판결을 내렸다.
"가장 극악한 것은 가짜로 농요(農謠)를 지은 일이다. 처음에 계교를 꾸밀 때부터 사람들을 미혹하려고 노래를 만들어 암암리에 마을 여자들에게 가르쳤다. 농요는 한 사람이 부르면 열 사람이 화답해 들판에서도 부르고 길에서도 유행하는 것이다. 감영과 고을에서 민심을 살피는 자들이 이 노래를 듣고 측은하게 여겨 사실인 양 받아들였다.”([심리록] ‘배천 조재항의 옥사’)

1783년 6월 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살인사건의 최종 판결을 내렸다. 아내 윤씨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3년간 옥고를 치른 남편 조재항은 무죄! 그를 모함해 극형으로 몰아간 이가원은 형신(刑訊)하고 먼 변방에 유배 보내게 했다. 이 판결문에는 임금이 크게 분노하고 경계한 대목이 있다. 마을에 나돌던 노래가 고발과 수사 과정에서 살인을 증명하는 결정적 근거로 쓰였다는 것이다. 정조는 왜 가짜 농요를 극악하게 여겼을까?

요(謠)는 백성의 노래를 말한다. 옛 위정자들은 요에 민심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백성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민(民)은 대부분 까막눈이라 이야기를 글로 전할 수 없었다. 먹고사느라 바빠 대화를 나눌 짬도 나지 않았다. 대신 백성은 일하면서 오가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자기 의사와 감정을 몇 소절 음악적 언어로 표현하고 서로 공유했다. 요는 오늘날 SNS 같은 매체였다. 소셜 네트워크 ‘송(song)’이었다.

농요는 백성이 농사지으며 부른 노동요다. 들일은 끝이 없다. 논밭에 주저앉아 김매다 보면 신세타령이 절로 나온다. 그리운 육친도 노래한다. 노랫 말이 된 소문은 들불처럼 번진다. 정조의 말마따나 “한 사람이 부르면 열 사람이 화답해 들판에서도 부르고 길에서도 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을 모함하려는 자는 백성의 노래를 이용하기도 했다. 가짜 농요를 지어서 퍼뜨리면 무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치면 가짜뉴스였다.

남편의 발에 차여 죽은 아내의 노래


▎조선시대 죄인 이송 장면. 목에 나무 널판으로 만든 칼을 씌워 끌고 갔다. 구한말 화가 김윤보의 [형정도첩].
“나는 억울한 원혼이오 / 밥 한 사발 때문에 / 남편에게 맞아 죽었소”

1780년 6월 황해도 배천에 괴이한 농요가 퍼져나갔다. 서글프고 처량한 메나리 곡조에 남편에게 맞아 죽었다는 아내의 사연이 실려 심금을 울렸다. 고을 사람들은 달포 전에 급사한 윤씨 부인을 떠올렸다. 장례를 치를 때만 해도 살인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뒤늦게 쑥덕공론이 일었다. 그녀의 원혼이 노래에 옮겨붙었다며 남편이 죽인 게 틀림없다고 수군댔다.

이는 배천군수 권중립의 귀에도 들어갔다. 아전과 사령들이 노래를 듣고 와서 고했기 때문이다. 이미 민심이 술렁이고 있었다. 지방 수령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조사를 벌이려면 고발이 필요했다. 때마침 이봉이라는 자가 관아에 달려왔다. 조재항이 아내 윤씨를 발로 차서 죽였으니 원한을 풀어달라고 청한 것이다.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은 아니었다. 이웃 마을에 사는 윤씨의 외삼촌 조환과 인척 이가원에게 듣고 대신 고발했다고 한다.

군수는 형방과 의생, 오작인을 대동하고 검험(檢驗)에 나섰다.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먼저 시체를 검사하고 사인을 밝혀야 했다. 조선시대 검험은 중국에서 들여온 법의학서 [무원록]의 지침을 따랐다. 이를 조선 실정에 맞게 고치고 보강한 것이 정조 재위기에 나온 [증수무원록]이다. 법의학에 조예가 깊었던 정조는 지방관들에게 철두철미한 검험을 요구했다. 임금에게 책잡히지 않으려면 수령들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천군수 권중립은 윤씨 부인의 시신을 파내게 했다. 매장하고 40일이 지난 터라 부패가 상당히 진행돼 있었다. 죽음에 이르게 한 상처를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검시를 맡은 오작인이 시체 썩는 냄새를 참고 이리저리 살펴본 끝에 겨우 단서 하나를 찾아냈다. 몸 뒤쪽에 등살이 뼈에 달라붙은 부위가 있었다. 지침대로 물을 흘려 씻어냈으나 떨어지지 않았다. 그 형태가 배나뭇잎이나 콩잎처럼 위는 넓고 아래는 좁았다. 권중립은 그것이 남편의 발에 차인 상처라고 판단했다. 사인을 뒷받침할 근거가 나온 셈이다. 다음은 용의자와 고발자의 진술을 들어볼 차례였다. 윤씨의 남편 조재항은 살인 혐의를 극구 부인했다. 마님이 계속 잠만 잔다는 어린 계집종의 말을 듣고 방에 들어가서 살펴보니 처가 이미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아내의 외삼촌 조환과 인척 이가원이 자신을 살인범으로 지목한 것도 납득이 안 된다고 했다. 두 사람은 급사한 처의 시신을 살펴본 친족이었다. 상처나 특이사항이 없음을 확인하고 자신에게 장례를 후하게 치르라고 했다. 뒤늦게 고발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명백한 증거 없이 소문만 무성한 죽음


▎조선시대 오작인이 시신에 물을 부으며 상처를 살펴보고 있다. 구한말 화가 김윤보의 [형정도첩].
조환과 이가원은 윤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경황이 없어서 시신을 신중히 살피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원통한 넋이 붙었다는 농요가 퍼져나가자 아차 싶었다고 한다. 그제야 알아보니 벌써 소문이 무성했다. 윤씨 부인이 새벽에 밥을 짓다가 부엌으로 달아나 피했다는 둥, 남편 조재항의 발에 차여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둥 살인의 정황이 떠돌았다. 윤씨의 시중을 들던 어린 계집종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용의자와 고발자의 진술은 엇갈렸지만 배천군수 권중립은 이미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그는 검험을 통해 결정적인 사인을 확보했다고 믿었다. 주변인 진술도 대부분 남편을 살인범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고을 분위기가 그러했다. 윤씨 부인을 가엾게 여기고 조재항의 만행에 분개했다. 권중립은 소문의 근원이라는 어린 계집종을 불러 쐐기를 박으려고 했다. 관아에서 높은 분이 자초지종을 캐묻자 아이는 겁에 질려 울기만 했다. 조씨 집안에서도 반발했다. 종이 주인에 대해 증언하는 것은 국법으로 금했기 때문이다.

배천군수는 여기에서 초검(初檢)을 마무리 짓고 황해도 감영에 보고를 올렸다. 조재항이 밥 한 사발로 인해 아내 윤씨를 발로 차서 죽게 했으므로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황해도 관찰사 조상진은 연안부사 이우배를 보내 복검(覆檢)을 진행하도록 했다. 관할지 지방관의 초검에 이어 이웃 고을 수령의 복검으로 살인사건을 신중히 살핀 것이다. 연안부사가 내린 결론도 다르지 않았다. 황해도 관찰사는 초검과 복검을 토대로 심리해 형조에 유죄 계사(啓辭)를 올렸다. 이 계사는 그러나 임금에게 강한 질타를 받고 기각됐다.

“조사 기록이 의심스러워 판결을 내리기 어렵다. 윤 여인의 등에 생긴 상처는 발로 찬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고발자들이 주장하는 말도 동네에 떠도는 소문에 불과하다. 게다가 소문의 근원이 법률상 캐물을 수 없는 어린 계집종에게 귀착되니 더욱 의심스럽다. 이 옥사는 수령들이 멋대로 헤아려서 지레 결단한 것이다. 초검관 배천군수 권중립과 복검관 연안부사 이우배를 엄히 추궁하고 다시 조사하라.”([심리록] ‘배천 조재항의 옥사’)

정조, 살인 판결 기각 후 재조사를 명하다


▎정조 재위기의 판례집 [심리록]. 각종 중대 범죄에 대한 심리와 판결을 기록했다.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심리록]은 정조 연간의 중대 범죄에 대한 심리와 판결을 기록한 판례집이다. 이 책을 보면 정조가 재판관으로서 얼마나 탁월한 역량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1780년 12월 정조는 이 사건의 판결을 내리는 대신 재조사를 명했다. 수령들이 옥사의 성립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은 검험과 진술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우선 사인으로 밝혀진 상처가 의심스러웠다. 발로 차인 상처는 둥글어야 하는데 검험에서는 위가 넓고 아래는 좁은 잎사귀 모양이라고 했다. 더구나 응당 나타나야 할 피멍이 보이지 않았다. 검안서에는 단지 “물을 부었으나 등살이 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차인 상처라면 그 아래에 피멍으로 변색한 부분이 나타나는 게 정상이었다. 안 보이면 또 다른 검험법을 써야 한다. [증수무원록]에 손가락으로 눌러 색깔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음에도 쓰지 않았다. 꼼꼼하게 검험하지 못한 것이다. 이래서는 사인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고발자들의 말도 의혹투성이였다. 윤씨 부인이 갑자기 죽었으니 외삼촌 조환과 인척 이가원이 석연찮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남편에게 장례를 후하게 치르라고 권유해놓고 달포 후에 다른 사람을 시켜 고발한 것도 석연치 않다. 정조는 ‘후한 장례’ 운운한 것이 은근히 뇌물을 요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는지 의심했다. 또 어린 계집종의 입에서 나왔다는 살인 정황도 말하고 전한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치 않았다. 국법상 신분과 나이 때문에 그 아이에게 캐물을 수도 없었다. 결국 진술이란 게 떠도는 소문에 지나지 않았다.

정조는 특히 이가원의 진술에 의구심을 품었다. 알고 보니 “윤씨가 남편의 발에 차여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말도, “새벽에 밥을 짓다가 부엌으로 달아나 피했다”는 말도 이가원이 듣고 공론화한 것이었다. 과연 어떻게 들었을까? 감영 조사에서 그는 “사랑채에 앉아 있다가 마당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가원은 “마당에 나가보니 이미 흩어져서 가버렸다”고 했다. 빙글빙글 돌리는 말이었다. 이 자는 뭔가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명판관’ 정조는 그 꿍꿍이를 끄집어내기로 했다.

가짜 농요를 퍼뜨린 의뢰인의 놀라운 정체


▎[증수무원록]은 조선 후기 살인사건 검험의 지침서였다. 중국에서 들여온 법의학서 [무원록]을 증보해 정조 재위기인 1792년에 간행했다.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하지만 국왕이 직접 옥사에 개입해 사건을 뒤집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재조사는 어디까지나 도백(道伯, 관찰사)과 수령의 몫이었다. 정조는 황해도 관찰사 조상진에게 옥사의 성립 요건이 부실하고 의심 가는 대목도 한둘이 아니니 각별히 유념하라고 당부했다. 이전 조사의 문제점들을 짚어주고 향후 심리 방향도 제시했다. 그러나 1781년에도 옥사는 진척이 없었다. 조상진은 정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는 이 사건을 수령에게 넘기고 스스로 조사하지 않았다. 형조에서 보고를 요구하면 수령에게 물어보고 예전 계본(啓本)을 베껴 아뢰었다. 당초의 검험과 진술에 하자가 없으니 조재항을 사형에 처하는 게 맞다는 입장이었다.

정조는 기가 막혔다. 이 옥사에는 마가 끼었다. 명석한 군주가 볼 때 부실하기 그지없는데 도무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혈이 막혀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퍼뜩 농요를 떠올렸다. 애초 살인의 소문은 농요가 들판과 길을 넘나들면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도백과 수령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 것도 바로 그 농요였다. 왕은 장악원에 일러 배천 고을의 농요를 채록해 불러보도록 했다.

“나는 억울한 원혼이오 / 밥 한 사발 때문에 / 남편에게 맞아 죽었소”

정조는 노래를 귀 기울여 듣다가 무릎을 쳤다. 원래 백성의 노래는 간결하면서도 은유의 묘미가 있다. 그런데 배천 농요는 너무 직설적인 데다 같은 구절이 자꾸 되풀이됐다.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느낌이었다. 혹시 누군가 지어서 퍼뜨린 게 아닐까? 왕은 장악원 전악을 불러 이 노래를 들려줬다. 가무 예인들의 우두머리이니 진위를 판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전악은 즉석에서 위작(僞作)이라고 아뢨다. 교묘하게 꾸미려다가 도리어 치졸함을 보이니 가짜가 분명하다고 했다. 옳거니, 꼬리를 잡았다. 정조는 형조에 은밀한 특명을 내렸다. 이 농요가 어떻게 고을에 퍼졌는지 탐문하라는 지시였다. 형조의 노련한 수사관들이 배천으로 출동했다. 얼마지 않아 들밥을 나르는 부녀자 몇몇이 실토했다. 배씨 성을 가진 여인이 쌀 한 됫박씩 나눠주며 노래를 가르치고 퍼뜨리게 했다는 것이다. 수사관들은 배씨 여인의 집에 찾아가 추궁했다. 그녀는 자기도 쌀 2말을 받고 의뢰를 받은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의뢰인은 놀랍게도 이가원의 아내였다. 드디어 막힌 혈이 뚫린 것이다.


▎조선시대 감옥 안 모습. 죄인들이 목에는 칼, 발에는 착고를 차고 있다. 구한말 화가 김윤보의 [형정도첩].
정조는 이가원이 조재항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기 위해 가짜 농요로 민심을 현혹했다고 봤다. 과연 농요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소문에 기댄 옥사를 성립시켰다. 이제 그자에게 무고 혐의를 두고 그릇된 옥사를 바로잡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이가원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형조에서 수사관이 나와 농요에 대해 캐묻고 다니자 그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자구책을 강구했다. 사람들을 끌어모아 추가 증언으로 맞선 것이다. 복덕·점렬·나막동 등 초검과 복검에는 없었던 이들이 살인사건의 증인이라며 쏟아져 나왔다. 우물가에서 살인의 내막을 들었다고 했다. 부엌에서 발로 차는 장면을 엿봤다고도 했다. 이가원은 그렇게 자신을 옥죄는 의심을 흩어버렸다. 농요로 전환점을 맞았던 옥사는 다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살인사건 재조사는 하염없이 늘어졌다.

일벌백계로 가짜뉴스에 경종 울린 정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예천통명농요. 농요는 고달픈 농사일의 백성의 애환이 담긴 들노래다. / 사진:국립무형유산원
1782년 7월 조재항의 동생 조재정이 임금의 거둥을 가로막고 격쟁(擊錚)을 벌였다. 징을 치면서 형의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다. 정조는 온갖 나랏일에 파묻혀 있었기에 살인사건 재조사가 지지부진함을 미처 알지 못했다. 왕은 형조에 이 옥사의 처결을 맡기고 이가원의 무고에 초점을 맞춰 심리하게 했다.

곧 형조의 문초가 시작됐다. 살인사건 증인들은 어리숙한 백성들이었다. 수사관들의 날카로운 심문에 허점을 드러냈다. 우물가에서 말을 나눴는데 누가 함께 물을 길었는지 헷갈렸고, 부엌에서 발로 차는 장면을 봤다면서 집 구조는 알지 못했다. 윤씨의 외삼촌 조환이 압박감에 사실을 털어놨다. 이가원이 자신을 사주해 조재항을 살인죄로 고발하게 하고 노래·소문·증언 등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윤씨가 급사했다는 연락을 받자 이가원은 가까운 인척(5촌)으로서 시체를 살피고 상처를 찾았다. 급사의 경우 특이사항이 있으면 죽은 사람의 친족이 관아에 신고하게 돼 있었다.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남편에게 후히 장례 지내라고 했는데 이는 은근히 뇌물을 요구하는 언사였다. 조재항은 차갑게 외면하고 돈을 주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가원이 살인을 꾸며 무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첫걸음이 가짜 농요를 퍼뜨려 고을 인심을 얻고 수령의 판단을 흐리는 것이었다.

“죄 있는 자는 도망갈 수 없고 죄 없는 자는 면하게 되었으니, 천리(天理)가 크게 밝아 속일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심리록] ‘배천 조재항의 옥사’)

1783년 6월 정조는 배천 살인 옥사의 최종 판결을 내리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이가원은 무고죄로 죽을 때까지 먼 변방에 유배됐고, 조환은 노역형을 받았으며, 쌀을 받고 협조한 이들도 경중에 따라 처벌이 내려졌다. 조재항은 마침내 살인 누명을 벗고 감옥에서 풀려났다. 임금이 3년 동안 네 차례나 조사를 명한 끝에 극적인 반전을 일궈낸 것이다.

거꾸로 보면 군주의 무고 의심과 방향 제시에도 불구하고 살인 옥사가 3년이나 지속된 셈이다. 조재항에게 불리한 정황도 만만치 않았다고 봐야 한다. [심리록]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정조가 최종 판결을 내리던 날 형조에서는 조재항도 벌을 줘야 한다고 아뢨다([정조실록] 1783년 6월 3일). 처형할 일은 아니지만 아내에게 뭔가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정조는 고집스레 이가원의 무고에 초점을 맞추고 조재항을 무죄 방면했다. 여기에는 법리를 뛰어넘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조선시대 군주는 성현의 다스림을 펴고 풍속을 교화하는 것을 가장 큰 사명으로 알았다. 가짜 농요로 민심을 현혹하는 것은 다스림을 교란하는 ‘극악한’ 풍속이었다. 교화를 위해 정조는 조재항을 억울한 피해자로 삼고 이가원을 일벌백계(一罰百戒)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가짜뉴스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209호 (2022.08.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