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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18)] 건물과 건축-인류 최초 건축의 원형을 찾아서 

튀르키예 하란의 고깔형 건축물 ‘쿰베트’… 6000년 전 진흙집의 원형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반이던 진흙과 의식주 전 영역의 공통 구도는 삼각형
지중해로 건너간 이슬람 건축 문화… 이탈리아 알베로벨로의 ‘트루로’가 증거


▎튀르키예(옛 터키) 하란의 진흙집은 10여 개 군집으로 이뤄져 있다. 메소포타미아 중류의 시리아로 가면 한층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커피, 부모와 다른 종교, 영화제, 주연보다 조연, 산지 직송 슈퍼마켓, 유기농 농산물, 인종의 다양성, 버락 오바마, 집에만 머물고 밖에 안 나가면 죄악감이 드는 심리, 웨스 앤더슨(Wes Anderson)의 영화, 아시아 여성, 비정부계 공익단체, 차(tea), 흑인 친구, 요가.’

2008년 출간된 [백인이 좋아하는 것(Stuff White People Like)]이란 책에 나오는 15개 리스트다. 책 속의 백인은 미국 도시권 청년을 지칭한다. 1978년생 크리스티안 랜더(Christian Lander)가 분석한 내용으로, 백인이 ‘의미 있는 가치’로 받아들이는 150개 리스트와 그 배경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150개 리스트를 보면 백인이 지향하는 세계와 인생관도 알 수 있다. 지극히 주관적인 책이지만, 당시 영미권에서 화제가 됐다. 21세기 새로운 가치관이 투영돼 있다는 점에서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크리스티안 랜더는 캐나다 국적에다, 백인과 아시아인의 중간쯤인 유대인 출신이다. 바둑이나 장기가 그러하듯 한 발짝 물러나보면 한층 더 잘 보인다. 당시 20·30대 미국인 대부분이 동의한 리스트란 점에서 신문·방송에서도 크게 다뤘다.

‘아시아 여성(Girls)’은 150개 리스트 중 하나다. 남성 중심 세계관의 결과겠지만, 백인들이 주목하는 아시아인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개인적 판단이지만, 아시아 여성에 대한 도시권 백인의 관심은 거의 ‘컬트 신앙’에 가까울 정도로 높다. 아시아 여자 친구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모두가 부러워한다. 미국에서 보면, 아시아 남성을 남편으로 둔 백인 여성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아시아 여성을 부인으로 맞이한 백인 남성은 적지 않다. 왜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시아 여성=순종형 현모양처’라는 식의 이미지가 가장 큰 배경일 것 같다. 반대로 ‘아시아 남성=가부장적 세계관에 근거한 무(無)취미의 고집쟁이’ 정도로 평가한다. 여담이지만, 그 같은 백인의 취향을 고려할 때 올여름 한국 걸그룹의 미국 진출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국 남성그룹은 일본·중국·동남아시아 등 아시아에서나 통하는 얘기다. 잘 알려져 있듯이, 중국은 한국 문화의 유입을 사실상 봉쇄하고 있다. 일본도 과거사 문제로 두꺼운 벽이 가로막혀 있다. 동남아시아는 비즈니스와 무관하다. 한국 시장은 수많은 아이돌 그룹에게 너무도 좁다. 결국 미국 진출이 유일한 해법이다. 아시아 여성에 대한 백인들의 뜨거운 관심이 한국 걸그룹이 미국에 진출하는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생각하는 건물과 건축의 개념

150개 리스트를 훑으면서 주목한 것은 ‘건축’에 관한 부분이다. 건축물·건축가·건축 공간에 대한 얘기를 즐기고, 관련된 지식이나 의견이 백인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라고 한다. 백인 지식인의 상징이자 증거로 볼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깊은 대화를 나누려면 중국계 건축가인 페이(I. M. Pei·貝聿銘)나 미국 건축의 아버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에 관한 식견 정도는 갖고 있어야만 한다. 크고도 화려한 건축 관련 책이 백인용 최고의 선물이라는 배경 설명이 실려 있다.

개인적 체험이지만, 백인들의 건축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다는 것은 평소에도 감지하고 있다. 유럽 여행지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현지 역사에 관한 1시간 내외의 투어가 있다. 작은 시골 마을이라도 역사투어가 ‘반드시’ 있다. 현지의 공기와 흐름을 이해할 최적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거주민들이 좋아하는 로컬 레스토랑이나 와인 노포(老舗)를 알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 참가한다. 투어 도중 항상 느끼지만, 미국 백인들의 경우 역사나 현장의 공기에는 거의 무심하다. 귀와 머리를 통한 투어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현지 고유의 역사적 건축물에 대한 관심은 ‘아주’ 강하다. 거의 건축공학도의 눈높이로 건축물을 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진도 찍고 세심하게 건축물들을 관찰한다. 따라서 다른 참가자들에게서 이탈해 항상 뒤처져 따라온다. 물론 주된 질문도 건축물에 관한 것이 많다. 건축 양식과 재료는 물론, 방음·방열·문양·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관심사가 다양하다.

한국인에게 건축은 특별한 주제이자 전문가만의 영역으로 처리되기 쉽다. 집의 평수나 가격에 관한 얘기는 넘친다. 비싼 가구나 인테리어, 나아가 화장실이 몇 개라는 식의 자랑도 일상적인 것 같다. 집의 구도와 동선, 지붕이나 바닥의 재료와 원형, 참고가 된 건축가나 집 전체의 분위기를 설명해줄 이미지에 관한 얘기는 극히 드물다. 백인들은 다르다. 남의 집에 가면 일단 그 집의 구도나 디자인, 특별한 문양이나 동선에 관한 얘기를 즐긴다. 사시사철 공을 들이는 정원에 대한 얘기도 필수다. 존경하는 건축가에 관한 얘기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10평(33㎡) 미만인 작은 사무실이라도 갖가지 의미와 가치가 투영돼 있다. 한국의 경우 크기나 돈으로서의 집인데 비해, 미국 백인들은 가치·개성·예술로서의 공간에 주목한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백인의 집은 자신을 표현할 소우주로서의 공간에 필적한다.

한국인과 백인의 집에 대한 관념은 ‘건물(Building)과 건축(Architecture)’이란 차원에서 비교해볼 수 있다.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건물과 건축은 전혀 다르다. 한마디로 말해 건물이 1차원, 2차원이라면 건축은 3차원, 4차원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허기를 채우는 밥이 건물, 미식과 역사로서의 요리를 건축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건물과 건축을 100% 흑백으로 명확히 나눌 수는 없다. 서로 공존하지만, 상대적으로 어느 쪽이 강한지에 따라 건물과 건축으로 나눌 수는 있다. 대부분 한국인의 집은 건물이다. 반면 백인에게 집은 건축으로 통용된다. 어떻게 다를까?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분석이 있겠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인간과 신의 관계에 관한 요소다. 건물은 당대의 인간의 편리한 생활에 맞춰진,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공간이다. 활용 가치가 줄어들거나 사라질 경우 가차 없이 폐기된다. 물론 이후에는 한층 더 크거나 높고 넓으며 화려한 공간이 들어선다. 5년 전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글로벌 헤비탯(거주지) 사진 전시회가 열렸다. 당시 흑백 사진 중 한국과 북한의 아파트에 관한 부분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둘 다 산 전체를 뒤덮은 고층 아파트 단지인데, 사실상 남과 북을 구별하기 어렵다. 민족적 동질성이 아파트 하나만 봐도 통한다고나 할까?

건물은 인간, 건축은 신이 기준점


▎하란의 진흙집 내부. 이탈리아 알베로벨로의 고깔형 집에 비해 좁은 공간이며, 간이 우물 시설이 없다. / 사진:유민호
건물이 인간에 무게 중심을 둔다고 할 때 건축은 신을 기준점으로 하고 있다. 인간의 편의를 넘어선, 신을 의식한 공간이 건축이다. 자연이 신의 창조물이란 점을 감안하면, 자연을 배려한 공간도 건축 영역에 들어설 수 있다. 신과 자연을 염두에 둔 결과겠지만, 결국 역사와 전통이란 차원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 신·자연·역사·전통으로 이어지는 형이상학 세계가 건축과 인간 욕구 여부에 따라 존폐가 결정되는 인스턴트 형이하학 공간이 바로 건물에 해당된다. 몽골 기마민족의 특징이지만, 말의 캐릭터에 맞추는 승마가 당연시된다고 한다. 말을 인간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말에 오르는 사람이 말의 행동과 캐릭터에 맞춰나간다는 의미다. 그래야 말이 가진 장점을 전부 발굴·발견해낼 수 있다고 한다. 편견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중국 베이징(北京)에서는 건축이라고 느껴질 공간을 단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크고 강하고 높고 넓은 것은 인정한다. 욕망으로 점철된 인간을 압도할 뿐, 신·자연·역사·전통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한국에도 적용될 듯하지만, 아무리 길어야 30년 뒤면 사라지고 다른 건물로 대치될, 인간 욕(欲)의 경연장이 베이징 풍경의 일상으로 느껴졌다. 말을 인간에게 맞춘 공간일 뿐이다. 당연하지만, 똑같은 공간과 구도, 구조하에서 자란 캐릭터에서 창조나 상상력은 멀고도 먼 얘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백인들은 집을 형이상학 소우주 속 공간으로 받아들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만든 뒤 유지해나가기 때문이다. 다른 인간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답을 찾는 과정에서의 공간이다. 건립 도중 자연환경을 고려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내면에 투여된 신과 만나게 된다. 일몰과 일출을 고려한 창문을 만들면서 신과의 접점을 찾아낸다. 자기 개성을 드러내면서 나만의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집 구조나 구도 어디 하나가 똑같지 않다는 의미다. 건축에 관련된 역사와 전통은 그 같은 과정의 결과물이다. 가족이 넘쳐 공간이 좁아진다고 해도 거기에 맞춰 생활하는 청빈한 삶이 당연시된다. 물론 성인이 되면 결혼해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새로운 집을 마련한다.

유지·보수가 건축의 기본 조건


▎이탈리아 알베로벨로의 고깔형 집 트루로. 튀르키예 하란의 고깔형 집보다 크고, 지하수가 집 안 곳곳으로 연결돼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반면 한국은 남이 지어준 아파트에 들어가거나, 남이 설계한 공간에 익숙하다. 과거 조선시대를 돌이켜 보면 남과 다른 집을 짓는 것 자체가 금기시됐다. 조선 왕조 궁궐의 크기나 형식은 중국에 의해 철저히 통제됐다. ‘미운 시어머니 욕하면서 닮아가는 며느리’란 말이 있다. 조선 권력자들은 중국에 당한 것 이상의 통제를 한반도 전체로 확대해나갔다. 하멜표류기에 나오지만, 지붕이나 대문 하나도 권력자의 허락 없이는 바꿀 수 없었다. 결국 방방곡곡 방 한두 칸이 전부인 초가집 일색으로 변해간다. 신을 의식한 건축은커녕 왕을 염두에 둔 건물만이 조선 역사의 흔적이다.

한국에서 100년 이상 된 건축물을 찾기는 극히 어렵다. 한국전쟁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유가 될 수 없다. B-29폭격기로 도심 전체가 불탄 도쿄에 가면 수백 년 된 건축물이 즐비하다. 세우는 것만이 아니라 유지·보수하는 것이 건축의 기본 조건이자 요소다. 미국 도시 외곽 주택가에 가보면 알 수 있지만, 수백년 역사에다 백인백색 구조와 구도인 집이 즐비하다. 유지·보수와 건축물과의 함수관계는 조립식 가구의 대명사 DIY(Do it yourself)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국인에게도 익숙하지만, 큰 재료는 제공하지만 작은 부분은 직접 행하는 이른바 ‘자작문화(自作文化: Self-made-culture)’의 상징이 DIY다. 인류 역사상 DIY가 처음 탄생한 곳은 고대 그리스라고 한다. 대량 생산된 석재나 목재를 개인별 용도에 맞춰, 다시 다듬어 구체화하는 공정이다. DIY를 상업적으로 본격화한 곳은 20세기 초 미국이다. 미국 내 건설 붐이 본격화하면서 가구에서부터 지붕·창문·창고 조립에 관한 DIY 제품이 쏟아진다. 스웨덴 이케아(IKEA)는 목재대국으로서의 장점과 북구 특유의 디자인 감각이 합쳐진 DIY의 대명사로 부상한다. 미국처럼 스웨덴도 스스로 집을 짓고 관리하는 나라다.

필자의 주관이지만, 고대 주거지 대부분은 건물이 아닌 건축으로 평가될 공간이다. 추위와 더위, 전쟁이나 동물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원시적 공간이기는 하다. 그러나 신을 찬미하고 두려워하는 건축으로서의 요소가 곳곳에 남아 있다. 세련된 도시형 성형미인에 맞선, 산속 시냇물에서 발견한 원석(原石)과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Puglia) 지역 곳곳에 흩어진 고깔형(型) 집은 필자가 아끼는 원석 건축 중 하나다.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난, 신·자연·역사·전통을 기반으로 한 공간이다. 풀리아 지방은 장화 모양인 이탈리아 지도에서 구두 아래 뒤축에 해당되는 곳이다. 알베로벨로(Alberobello)는 고깔형 집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명소다. 필자도 3번이나 들렀지만, 1년 내내 관광객이 들끓는 곳이다. 고깔형 집은 영어로 꿀벌 집(Beehive Houses), 이탈리아어로는 트루로(Trullo)라 부른다. 꿀벌 집이 그러하듯, 원통 삼각형 구도다. 흰색 석회암을 평평하게 자른 뒤 하나씩 쌓아가면서 원통 삼각형으로 만들어간다. 더위와 추위를 피할 거주지는 물론, 동물·농산물·와인을 보호·저장하는 장소로도 이용했다. 트루로 실내는 바로 옆의 집과 서로 연결돼 있다. 밖에서 보면 창문도 드문 폐쇄형 공간으로 느껴지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아주 넓다.

고대 주거지 대부분은 ‘건축 공간’

알베로벨로 트루로에 갔을 때 궁금했던 것은 ‘급경사 삼각형 구도’에 관한 부분이다. 집의 지붕이 뾰족한 원통형이다. 완만한 것이 아닌, 급경사 삼각형은 주로 이슬람과 메소포타미아의 상징으로 통한다.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오는 특유의 모자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통칭 프리지안 캡(Pyrigian Cap)으로 불리면서,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풍미했던 자유와 평등의 상징이던 모자다. 당시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혁명군의 상징이 붉은색 프리지안 캡이다. 그러나 프리지안 캡의 원형은 멀리 기원전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지는 즉시 금(金)으로 변하는 황금의 손을 가진 왕 미다스가 통치한 나라가 프리지아(Pyrigia)다. 지도상으로 보면 현재의 이슬람 문화권에 들어간 땅이다. 프리지아 유적과 유물의 대부분도 급경사 삼각형 구도다.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보듯, 삼각형 구도는 하늘로 연결되는 계단으로 해석됐다. 급경사 삼각형일수록 하늘에 가깝다. 고깔 형태는 그릇·무기·음식·의복·신발·주택에 이르는 의식주 모든 영역에서 접할 수 있는 공통 문양이자 구도다. 이미 7세기 이슬람이 퍼지기 전부터 튀르키예(옛 터키)·메소포타미아·페르시아·중동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된 전통 문양과 구도가 고깔 형태다. 이에 반해 그리스를 경계로 한 서부 유럽 가톨릭의 경우 고깔형 문양과 구도를 미개한 이교도의 문화로 생각하면서 배격하고 무시한다. 그렇다면 왜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 지역에 이슬람 흔적의 고깔형 집이 들어서 있을까?

답은 지중해의 역동성에서 찾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지중해라는 바다의 고속도로를 통한 문명·문화 교류다. 땅이 아니라 바다가 유럽 역사의 현장이다. 땅이 유럽의 주인공으로 나타난 것은 19세기 말 철도시대 이후다. 지중해 동쪽이나 남쪽은 전부 이슬람권 문화로 연결돼 있다. 지중해를 타고 건너온 건축 문화가 알베로벨로에 입식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탈리아 풀리아 지방은 원래부터 지중해 동쪽 끝 이슬람권과의 교류에 적극 나섰다. 같은 기독교 문화권인 에게해의 비잔틴제국과 접하는 과정에서 이슬람권 문명과 문화도 이탈리아 남부에 입식된다. 알베로벨로의 트루로는 교류의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확히 이슬람권의 어디가 트루로의 원형일까? 메소포타미아 상류 튀르키예 하란(Harran) 지역이 질문에 답이 될 땅이다. 이탈리아에서 동쪽으로 무려 2500㎞ 떨어진 고대도시인데, 기원전 6500년에 이미 등장한 유서 깊은 곳이다. 내전 중인 시리아 국경선까지 불과 8㎞ 떨어진, 살벌한 땅이다. 가는 도중 수많은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했다. 한때 영국과 독일 고고학 관계자들의 필수 방문지로 통했던 곳이지만, 시리아 내전의 어두운 그림자가 곳곳에 표류한다.

성(聖)과 영(霊)의 건축 쿰베트


▎프리지안 캡은 고깔형 문명 문화의 상징이다. 이후 프랑스 혁명 당시 시민군과 만화 ‘개구쟁이 스머프’에도 등장한다. / 사진:유민호
하란은 평야 한가운데 들어선 성곽도시다. 튀르키예 동부와 페르시아를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하류로 연결된 전략 요충지란 점에서 인류 역사의 여명기부터 등장한 곳이다. 하란은 서쪽은 유프라테스, 동쪽은 티그리스강을 마주한 메소포타미아 한가운데에 들어서 있다. 히타이트·바빌로니아·페르시아·아시리아·비잔틴·아랍·셀주크·십자군·오스만·터키·시리아·프랑스·영국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인종·민족·나라가 스쳐간다. 흔적만 남은 하란성곽을 뒤로 하고 남동쪽으로 3㎞ 내려가자 갑자기 고깔 형태 집들이 나타났다. 하란에는 현재 고깔형 집이 150여 개 있다. 사람이 사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동물용 우리나 농산물 저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가장 큰 규모의 고깔형 집에 다가가자 갑자기 아이들 수십 명이 나타났다. 대부분 시리아 난민의 자식이다. 아시아인을 처음 봤기 때문에 갑자기 몰려나온 것이다. 고깔형 집으로 가자 영어가 유창한 안내인이 나타났다. 필자의 기준이지만, 튀르키예에서 영어가 가능한 사람을 만난다면 시리아·크루드 출신으로 보면 된다. 시리아인으로 10여 년 전 망명해 정착했다고 한다.

“전염병에다 전쟁으로 인해 3년 이상 관광객이 끊어진 상태다. 최근에는 잠잠하지만,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시리아 쪽에서 포성이 거의 매일 들렸다.” 안내를 받아 집안으로 들어갔다. 먼지로 뒤덮인 예수와 성모 마리아 그림이 걸려 있다. 하란은 기독교·이슬람교·유대교 모두 인정하는 선지자 아브라함의 흔적이 밴 곳이다. 바이블에도 등장하지만, 신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번영과 번성을 약속한 무대가 바로 하란이다.

하란의 고깔형 집은 쿰베트(Kümbet)로 불린다. 대략 6000년 전부터 시작된 진흙집의 원형 중 하나로 통한다. 알베로벨로와 비슷하지만, 네 가지 점에서 크게 다르다. 첫째, 집 크기가 작다. 이탈리아의 거의 절반 정도다. 둘째, 이탈리아는 전부 한 군데에 집중해 있지만, 하란은 10여 개 정도의 군집이 사방팔방 흩어져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탈리아는 커뮤니티 전체, 하란은 가족이나 피(血)를 중심으로 한 단위로 추정된다. 셋째, 내부에 지하수가 흐르는 간이 우물이 없다. 이탈리아에는 마을 전체를 관통하는 지하수가 집 안 곳곳으로 연결돼 있다. 하란의 경우 영구적 거주지가 아니라는 의미다. 넷째는 재료다. 석회암을 사용한 이탈리와와 달리 100% 진흙으로 다진 집이다. 하란의 집이 진흙 재료인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관통하는 퇴적 진흙이 주택의 기본 재료다. 나중에 불에 구운 점토형 벽돌도 등장하지만, 하란을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문화의 기반이 된 것은 바로 진흙이다.

신과 인간을 조합한 신성한 공간


▎메소포타미아 서쪽의 유프라테스강 상류. 겨울이나 봄에 밀어닥치는 홍수가 강 주변에 진흙을 만들면서 고깔 형태 집들이 들어선다. / 사진:유민호
진흙은 인류 문명 문화의 기반이다. 바이블의 창세기에 나오지만, 신은 자신과 닮은 남성 아담을 창조한다. 진흙이 재료다. 신은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이브(하와)를 향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인간의 진흙 탄생설은 바이블만이 아닌, 이집트 신화나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을 만든 신은 프로메테우스다. 진흙으로 만들면서 생긴 정(情)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중에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다. 하란의 쿰베트는 햇볕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인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으로 느껴진다. 손가락으로 강하게 밀면 부서지는 약하고도 보잘것없는 공간이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욕(欲)과 속(俗)의 건물이 아닌, 성(聖)과 영(霊)의 건축으로 비쳐진다. 신과 인간, 나아가 메소포타미아 자연을 조합한 신성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추측건대 아브라함도 부인 사라와 함께 쿰베트에 머물던 중 신의 계시에 직면했을 것이다.

하란에 들어서면서부터 느껴졌지만, 설명할 수 없는 파워로 충만한 곳이다. 숙박이 가능한지 물어봤다. 식사를 포함한 1박 요금이 10달러이며, 목욕과 화장실 전용 공간이 따로 있다고 한다. 쿰베트에서의 기억을 영원히 새기자는 의미에서 하룻밤 묵기로 결심했다. 물론 신과 자연이 내리는 기운과 영혼을 체감하자는 것이 숙박에 나선 가장 큰 이유다. 안내인이 20여 마리분의 양털로 연결된 두꺼운 이불을 가지고 왔다. 감기를 방지하는 이불이다. 방문한 날의 낮 기온은 섭씨 30도 정도였지만, 밤이 되면 5도 정도로 떨어진다고 한다. 어둠이 깔리면서 초승달과 함께 밤하늘의 별이 나타났다. 실눈 같은 초승달이지만 상상 이상으로 밝았다. 메소포타미아는 보름달이 아닌 초승달을 한층 더 찬미한다. 출발·탄생·회개가 초승달의 상징적 의미다. 예수도 초승달 아래에서 태어났다.

흥미롭게도 초승달과 더불어 별들이 폭죽처럼 지붕 위로 쏟아졌다. 별의 숫자도 엄청나지만, 별 하나하나의 밝기도 특별하다. 달과 별의 신비로운 공존이라고 할까? 세상에서 최고의 부자가 된 느낌이다. 뉴욕 맨해튼의 펜트하우스 수천 개가 있어도 부럽지 않을 신비하고도 신성한 세계가 메소포타미아 전체에 펼쳐졌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209호 (202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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