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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중의 뮤지컬 오디세이(15)] 타락한 세상에서 빛난 꼽추의 영혼 '노트르담 드 파리' 

기독교적 구원에 바탕 둔 사랑과 욕망의 대 드라마 

빅토르 위고 원작소설을 극화한 프랑스 뮤지컬 대표 흥행작
극 이끄는 54곡에 엄숙한 시대에 내재한 인간의 욕망 담아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인간의 욕망을 금기시한 엄숙한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계급의 남자들이 한 여인을 두고 벌이는 암투와 진실한 사랑을 노래한다.
뮤지컬 하면 으레 미국 브로드웨이와 영국 웨스트엔드 작품만 봐오던 관객들 앞에 어느 날 낯선 프랑스 산(産)이 날아왔다. 2005년 2월 첫 내한공연을 펼친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였다. “어, 프랑스에서도 뮤지컬을 만드는구나”, “브로드웨이 뮤지컬과는 어떻게 다르려나?” 등 팬들의 궁금증은 증폭됐고, 작품을 본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무엇보다 ‘벨(Belle)’, ‘대성당들의 시대(Le Temps Des Cathédrales)’ 등 압도적인 음악의 힘이 관객을 매료시켰다. 프랑스어로 듣는 뮤지컬 넘버들은 관객들에게 샹송을 듣는 듯한 감흥을 안겨주었다. 여기에 역동적인 안무, 현대적인 세트도 한몫하며 찬사와 호평이 이어졌다. [노트르담 드 파리]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국내 초연은 대성공했다. 국내 뮤지컬 시장에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냈고, 프랑스 뮤지컬의 붐, 나아가 유럽 뮤지컬의 붐을 이끌었다.

국내 뮤지컬 시장에 거센 신드롬을 일으킨 [노트르담 드 파리]는 뤽 플라몽동 작사, 리샤르코시앙트 작곡, 질 마으 연출로 1998년 파리에서 초연해 대히트를 기록한 작품이다. 뮤지컬 앨범만 프랑스어권에서 1000만장이 팔렸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국내에서 흔히 프랑스 뮤지컬로 불리지만, 알고 보면 프랑스어 문화권인 캐나다 퀘벡의 프로덕션이 만든 작품이다.

원작은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스물아홉이던 1831년 발표한 동명의 소설로, 우리에게는 [노틀담의 꼽추]란 타이틀로 친숙하다. 타이틀인 [노트르담 드 파리], 즉 파리의 노트르담은 다름 아닌 노트르담 성당을 뜻한다.

[노트르담 드 파리] 외에 빅토르 위고의 또 다른 걸작 [레미제라블]이 있다. 한데 이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사람 클로드 미셀숀 버그가 작곡하고, 알랭 부브릴이 노랫말을 썼지만, 그 작품을 뮤지컬 빅4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는 영국의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였다. 매킨토시는 그냥 묻힐 뻔한 작품을 새롭게 다듬어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키워냈다. [오페라의 유령]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작가 가스통 르루가 쓴 소설을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매킨토시가 뮤지컬로 만들어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렸다. 둘 다 원작은 프랑스 소설이지만 런던에서 뮤지컬로 제작되어 영국 사람이 떼돈을 벌었다.

빅토르 위고 소설 바탕 프랑스 뮤지컬의 아이콘

프랑스로서는 자기네 할아버지들이 물려준 유산을 영국이 가로채(?) 세계적인 뮤지컬로 키워냈으니, 겉으로 대놓고 말은 못해도 속은 굉장히 쓰렸을 것 같다. 그래서 위고의 걸작인 [노트르담 드 파리]의 뮤지컬 버전만큼은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에서 이 뮤지컬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재미있는 점은 한참 시간이 흘러 2018년 위고의 또 다른 작품 [웃는 남자] 역시 뮤지컬로 재탄생했는데 제작사는 한국의 EMK였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대사 없이 54곡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 대규모 공연장에서 펼치는 콘서트 형식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이다. 콘서트 스타일이라 음악이 특화되어 있으며, 음악과 안무의 분리도 뚜렷하다. 배우들은 모두 가수이고, 코러스들은 전문 무용수다. 가수들은 열창하고 백댄서들이 열정의 춤을 추는 콘서트에 드라마를 얹은 형식이다. 이 형식의 장점은 말할 것 없다. 관객을 더 많이 앉힐 수 있다는 점이다.

언뜻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같은 록오페라와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 [수퍼스타]에선 코러스들이 합창은 물론 연기와 안무에 참여하는 반면, [노트르담 드 파리]의 무용수들은 오로지 춤에 주력한다. 현대적인 의상을 입고 다이내믹한 모던 댄스로 무대를 꽉 채운다. 확연한 분업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노트르담 성당을 상징하는 직사각형 모양의 대형 세트도 눈길을 끈다. 거대한 설치 미술 작품을 연상시키는 단순한 구조물이지만 장면에 따라 변형, 분리, 이동하며 드라마의 흐름과 함께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15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현대적인 안무와 콘셉트를 살린 세트 덕분에 지금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전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노트르담 드 파리]가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로미오와 줄리엣], [십계] 등 비슷한 스타일의 프랑스 뮤지컬들이 잇달아 내한 공연을 펼쳤다. 프랑스 뮤지컬 신드롬이 한동안 거세게 몰아쳤다.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과 [십계]는 [노트르담 드 파리] 만큼 관객을 끌어모으진 못했다. 음악과 작품의 완성도에서 [노트르담 드 파리] 만큼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국내에 가장 먼저 상륙했다는 선점 효과에 다른 비슷한 작품들의 부진이라는 후광이 더해져 프랑스 뮤지컬의 대표 아이콘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명곡 ‘벨(Belle)’로 대표되는 아름다운 음악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상징하는 단순한 구조물을 배경 삼아 현대적인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맞춰 다이내믹한 모던 댄스로 무대를 꽉 채운다.
좋은 뮤지컬의 첫째 조건은 음악이다. 사실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대성공 역시 리샤르코시앙트가 만든 아름다운 음악의 힘이 바탕이 됐다. 웅장한 서곡이 끝나면 거리의 시인이자 해설자인 그랭구아르가 등장해 ‘대성당들의 시대’를 부른다. 노트르담 성당의 벽에 새겨진 인간의 역사를 회고하며 무대에서 펼쳐질 사랑과 욕망의 드라마에 대해 노래하는데, ‘대성당들의 시대가 찾아왔어. 이제 세상은 새로운 천 년을 맞지~’로 번역되는 후렴부는 압권이다. 저음에서 고음으로 서서히 에너지를 끌어올리며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모든 것을 확 발산한다. [노트르담 드 파리]를 처음 봤을 때 이 곡을 듣고 ‘아, 이것이 바로 프랑스 뮤지컬의 힘이구나’란 생각이 번쩍 들었다. 초반에 완벽하게 기선을 제압당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일찌감치 무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대성당들의 시대’로 확 열린 마음은 쉬지 않고 이어지는 다채로운 음악들로 채워진다. 작곡가 코시앙트는 록발라드, 클래식, 탱고, 팝 등을 섞어 여러 인물의 캐릭터를 각기 다른 장르의 음악으로 형상화했다. 콰지모도의 순수함은 애절한 발라드로, 에스메랄다의 매력은 탱고로, 프롤로와 페뷔스의 욕망은 록으로 표현했다. 서정적이면서 감정의 깊이를 담은 코시앙트의 음악은 가슴 밑바닥을 툭툭 건드린다. 드라마를 따라 흐르면서도 하나하나 따로 떼어놓고 들어도 참 좋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음악적 에너지는 이 작품을 대표하는 히트 넘버 ‘벨(Belle)’에서 폭발한다. ‘벨’은 ‘아름다움(美, beauty)’이란 뜻으로 집시 에스메랄다를 가리킨다. 에스메랄다에게 넋을 빼앗긴 주교 프롤로와 근위대장 페뷔스, 꼽추 콰지모도가 함께 부르는 곡이다. 서로 다른 각자의 상황과 번민을 하나의 멜로디에 교차해 담았다. 에스메랄다를 가운데 두고 세 인물이 주위를 에워싸며 ‘벨’을 부르는 장면은 이 작품의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벨’과 ‘대성당들의 시대’는 [노트르담 드 파리]의 인기를 타고 수많은 갈라쇼에서 자주 불리는 인기 레퍼토리가 되었다.

위고의 대작들은 기독교적 구원을 바탕에 깔고 있다. [노트르담 드 파리] 역시 사랑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다. 집시 에스메랄다를 사이에 둔 세 남자, 주교 프롤로와 근위대장 페뷔스, 그리고 꼽추 콰지모도를 통해 사회적 신분과 영혼의 순수함은 꼭 비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에스메랄다는 한 떨기 야생화 같은 매력을 지닌 여인이다. 페뷔스가 처음 에스메랄다를 보는 순간, 무대 위에서 그녀를 비추는 한 줄기 조명은 뭇 남자들이 갖는 환상의 아우라이기도 하다. 대성당의 주교 프롤로는 신께 모든 것을 의탁한 성직자지만, 역시 에스메랄다를 보자 잊고 살아온 욕정이 무섭게 되살아난다. 근위대장 페뷔스는 약혼녀가 있는데도 일회성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녀에게 접근한다. 반면 성당의 미천한 종지기인 꼽추 콰지모도에게 에스메랄다는 구원의 여인이다. 순수한 사랑의 대상이다. 주교와 근위대장의 마음속에는 금지된 욕망이 꿈틀대지만, 종지기 꼽추의 마음엔 하느님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작가 위고는 이렇게 세 인물을 통해 노트르담 성당의 존재 이유를 진실하게 실천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탐색해간다.

프롤로는 콰지모도에게 에스메랄다가 마법을 부려 법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며 몰래 잡아 오라고 시킨다. 콰지모도는 어두운 밤 길거리에 숨어 에스메랄다를 잡으려 하지만 때마침 나타난 페뷔스에게 체포된다. 콰지모도는 큰 바퀴에 묶여 끌려 나온다. 몹시 갈증을 느낀 콰지모도는 “물 좀 달라”고 외치지만 들어주는 이가 없다. 이때 에스메랄다가 손수건으로 콰지모도의 얼굴을 닦아주고 잔에 물을 담아 마시게 해준다. 이 작은 행동 하나가 콰지모도에게는 큰 감동을 준다.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은 그의 영혼은 이제 구제받았다. 에스메랄다는 그에게 이제 삶의 의미이자 신앙이 되었다. 그러나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구해준 페뷔스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이때 흐르는 곡이 바로 ‘벨’이다. 콰지모도는 “아름다운 그녀를 바라볼 때면 난 마치 지옥을 걷고 있는 기분”이라고 괴로워하면서 “오 악마여, 단 한 번만 그녀를 만져볼 수 있게 해주오”라고 절규한다. 프롤로는 “너를 사로잡고 있는 악마가, 신을 향한 내 눈을 가리는가”라고 번민하며 “오, 단 한 번만 그녀를 나의 것이 되게 해주오”라고 욕망을 숨기지 못한다. 페뷔스도 “사랑이여, 신성한 결혼의 언약을 저버린 날 용서해 주오”라고 갈등하면서도 “그 누가 네게서 눈을 뗄 수 있을까”라며 힘들어한다.

집시 에스메랄다를 사이에 둔 세 남자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뤽 플라몽동(사진) 작사, 리샤르코시앙트 작곡, 질 마으 연출로 1998년 파리에서 초연해 대히트를 기록했다.
오페라를 보면 성악가들의 음색과 음정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이따금 열창하고 있는 가수의 캐릭터가 선인인지 악인인지, 바람둥이인지 사기꾼인지를 중요치 않게 여기는 순간이 오곤 한다. 드라마적 설정보다 성악의 테크닉에 먼저 반응하기 때문이다. 형식상 오페라와 비슷한 [노트르담 드 파리]도 그런 면이 있다. 명곡 ‘벨’에서 이런 상황은 절정에 이른다. 짐승처럼 절규하는 콰지모도의 거친 음색과 차분한 톤의 페뷔스, 고음역의 프롤로가 이루는 하모니가 환상적이다. 프롤로와 페뷔스의 고통도 절실하게 다가온다. 윤리적 관점을 떠나 ‘저들도 참 힘들기는 하겠다’는 연민(?)이 들 정도로 노래가 좋다.

에스메랄다가 페뷔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안 프롤로는 질투에 눈이 먼다. 둘의 데이트 현장에 나타나 탁자에 놓여있던 에스메랄다의 칼로 페뷔스를 찌르고 달아난다. 프롤로는 칼이 에스메랄다의 것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그녀를 체포한다. 심한 고문으로 유죄를 인정하게 한 뒤 교수형을 선고한다. 그 순간에도 에스메랄다는 페뷔스를 그리워하지만, 페뷔스는 이미 마음이 떠났다. 페뷔스는 약혼녀에게 에스메랄다의 마법에 걸려 잠시 정신을 잃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영혼에는 계급이 없다는 기독교적 평등주의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위해 자신의 운명을 내던진 꼽추 콰지모도의 순수한 사랑은 영혼의 순수함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기독교적 평등주의를 함축하고 있다.
집시의 우두머리 클로팽이 감옥을 습격해 에스메랄다를 구출해 성당으로 피신시키지만 페뷔스에게 진압된다. 페뷔스는 냉정하게도 교수대에 에스메랄다를 세운다. 에스메랄다를 찾아 헤매던 콰지모도는 성당 꼭대기에서 프롤로를 만나 분노에 휩싸여 그를 밀어 죽인다. 에스메랄다의 시체를 안고 절규하는 콰지모도. 죽어서도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맹세한다. 콰지모도가 짐승처럼 울부짖는 이 장면은 객석을 숙연하게 한다. 원작소설에서는 세월이 흐른 뒤 교수형을 당한 시신을 묻은 묘지에서 에스메랄다의 해골을 꼭 껴안고 있는 콰지모도의 해골이 발견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나도향의 대표작 가운데 [벙어리 삼룡이](1925)가 있다. 벙어리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뚫고 아씨를 구하러 집안으로 뛰어든다. 벙어리는 못된 주인 아들한테 심한 구박을 받으며 살아온 아씨를 마음속 깊이 연모해왔다. 동병상련의 처지였던 터라 벙어리의 마음은 더욱 애틋했다. 마침내 벙어리는 건넌방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있는 아씨를 발견하고 안아 올린다. 불길이 출구를 막아버리자 지붕 위로 올라가지만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퇴로가 없다. 결국, 두 사람은 그곳에서 한(恨) 많은 삶을 마감한다. 마지막 묘사가 강렬하다. ‘벙어리의 입 가장자리에는 행복스런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꼽추 콰지모도와 벙어리 삼룡이는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흉한 외모 안에 지닌 맑은 영혼, 한 여인에 대한 순수한 사랑. 사실 나도향이 노트르담의 꼽추 공연을 보고 영감을 얻어 쓴 게 [벙어리 삼룡이]였다고 한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한 인간이 고통을 딛고 구원의 여인을 통해 영혼의 승화를 경험하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괴테의 걸작 [파우스트]와 맥이 닿아있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파우스트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한 고상한 학자다. 세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콰지모도는 추한 외모를 지닌 천민이다. 빅토르 위고는 유식하지도 않고, 지체가 높지 않더라도, 영혼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인간의 영혼에는 계급이 없다는 기독교적 평등주의를 이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뮤지컬은 이런 위고의 사상을 강력한 음악으로 압축한 드라마에 담았다. 뮤지컬은 음악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바탕에는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철학이 있어야 함을 [노트르담 드 파리]는 실증한다.

※ 김형중 - 공연 칼럼니스트. 연세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20년 넘게 공연 담당 기자로 일했고 한국뮤지컬대상과 청룡영화상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무대예술의 경이로움을 글로 풀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쓴 책으로 [우리시대 최고의 뮤지컬 22]가 있다.

202209호 (202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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