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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획] 이후백 탄신 500년 기념 학술대회 성료 

“이상적인 관인(官人)상에 가장 근접한 인물” 

나권일 월간중앙 편집장
‘청련 이후백의 학문과 관료정신’을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는 한국계보연구회(회장 김학수)가 주관하고 연안이씨 청련공파도문회(회장 이철진)가 주최했다. 당초 이후백 탄생 500주년인 2020년 5월 개최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2년 넘게 미뤄졌다가 이날 개최됐다. 200여 명이 참석한 학술대회에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기조 강연자로 나서 이후백과 그의 가문을 전체적으로 조망했다. 강제훈 고려대 교수, 심경호 고려대 명예교수, 김봉곤 원광대 교수,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각각 발표에 나서 이후백의 시문을 재평가하고, 연안 이씨의 가풍과 그 계승 양상을 조명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의 축사와 이후백 선생을 척신세력에 맞선 강단 있는 신진사림으로 재조명한 강제훈 고려대 교수의 글을 요약해 싣는다. 두 편의 글은 이후백 선생을 이해하는 열쇠와 같다. [편집자 주]

▎청련 이후백 선생 탄생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박보균(둘째 줄 왼쪽 넷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병일(첫째 줄 오른쪽 첫째) 도산서원 원장, 박석무(첫째 줄 오른쪽 넷째) 다산연구소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 사진:연안이씨 청련공파도문회
공렴(公廉)을 실천한 청련 이후백 |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청련 이후백(李後白) 선생의 생애는 청렴, 공정, 통합의 전범이었다. 지금 시대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덕목을 모두 갖춘 완벽한 인격체, 공인의 삶을 살았다. 뛰어난 문장과 학식, 시대를 초월한 통찰력으로 영남과 호남, 노론과 남인의 대립과 갈등을 명쾌하게 해결하고 통합한 이상적인 정치가, 학자, 문인이었다. 그래서 이율곡과 송시열, 류성룡에게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은 유일한 경세가였다.

핵심 요직인 대사헌과 도승지, 이조·호조·형조 판서로 있으면서 털끝만큼도 사심이 없는 공평한 인사로 만인의 신뢰를 받았고, 평생 청빈하게 살아 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의 표상으로 존경받았다. 500년이 지난 지금도 감사원과 국민권익위원회에서는 선생을 대한민국 대표 청백리로 선정해 널리 알리고 있다.

선생은 명나라 실록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 권신 이인임의 후손이라고 잘못 적혀 있는 것을 선조의 주청사로 파견돼 200여 년 만에 바로잡았다. 을사사화 사후 정리를 파사현정(破邪顯正,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냄)의 원칙으로 마무리해 당쟁으로 비화하는 일을 막았던 것도 선생의 빛나는 공로다. 후세의 학자들은 “이후백 선생이 살아나신다면 조선의 사색당파가 사라질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공정 인사 실현됐으면 당쟁도 종식됐을 것”

위대한 경세가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공직자는 공정과 청렴이 본분이자 정치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청련처럼 공정한 인사정책이 실현되었으면 당쟁도 종식되었으리라는 동암 이발의 주장에서 나타나듯이, 그의 공정한 인사정책은 모든 벼슬아치에게 모범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학자이자 문인이던 청련이 바로 조선의 대표적인 공렴의 정치가였음을 그런 데서 알게 된다. 사후에 ‘文淸(문청)’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니 학자이자 문인이고 청백리였음을 만천하에 공포해준 증거였다.

이후백의 관직 생활과 그 의미 | 강제훈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사진:고려대학교
이후백은 을사사화기에 출사하여 부정적인 시대상을 굳건하게 버티어내었고, 한 걸음 나아가 이를 청산하는 시대적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처럼 자신의 소임을 수행했다. 을사사화는 명종 초년에 발생했고, 이후 시대의 그늘이 되었다. 이후백은 30대 중반 을묘왜변으로 무력한 조선의 역량이 민낯처럼 드러난 시점, 바로 그 현장이었던 강진을 배경으로 문과로 출신하였다. 이후 그가 맞닥트린 현실은 척신 이량(李樑)과의 충돌이었다. 을사사화를 일으킨 척신이 건재한 상태에서, 또 다른 척신의 발호가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와 충돌하였고, 관직 생활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정황은 극적으로 반전되었고, 그는 굳은 심지를 가진 신진의 관인으로서 명성과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문정왕후와 명종의 연이은 훙서, 선조의 즉위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을사사화의 피화인들이 대거 관계로 복귀하였고, 새롭게 출사한 신진의 사림계 인사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을 때, 이후백은 자연스럽게 이들을 대표하는 관인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여전히 고위직에는 명종 시대 척신 정치기에 성장한 관인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지만, 사림계 관인은 문소전 논쟁과 문묘종사, [국조유선록] 간행 등에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명종 시대를 부정하고, 유교적 사명감으로 시대가 일신되어야 한다는 사림계의 열망을 담고 있었다.

이후백은 도승지로서 선조를 권유하여 이황·기대승이 주도하는 흐름에 동조하여 활발히 활동했고, 조선이 중국과 구별되어 별도의 천명을 받은 국가이며, 유학의 도가 볼만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자부심을 명확하게 선언했다. 이조의 참판과 판서로서 이후백은 공정하고 청렴하게 임무를 수행하였고, 함경도의 외직에 배정되어서도 한 지역의 현안을 매듭짓는 등 선정으로서 치적을 쌓았다. 그리고 인종비 인성왕후의 사망으로 빚어진 정국 갈등 와중에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태도로 을사사화의 잔재를 청산하는 성과를 의욕적으로 이루어내었다.

을사사화 잔재 청산하는 성과 이뤄내

결론적으로 이후백은 을사사화로 대표되는 명종 시대의 그늘 속에서 관계에 진출하여 부정적인 현실에 타협하지 않았고, 선조 초반 이러한 과거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과거를 지워가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성취를 평가하고 이에 기반하여 다음 세대를 준비해가는 방향으로 과거를 청산하는 작업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그는 성리학적 이상을 내면화하여 정치적 현장에서 실천하고, 성리학적 학습에 기반하여 시대정신의 긍정성을 적확하게 인식하고 설득력 있게 평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관인상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었다.

- 나권일 월간중앙 편집장 na.kwonil@joongang.co.kr

202210호 (20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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