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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7)] 10월 유신에 얽힌 박정희와 신중현의 노래 이야기 

‘유신의 나라’에 신중현이 설 자리는 없었다 

신중현, 박정희 찬가 짓는 대신 ‘아름다운 강산’ 만들어 내놓았다가 미운털 박혀
‘긴급조치 9호’ 공표 뒤 222개 금지곡 쏟아져… 톱스타들 ‘마약 파동’으로 수감


▎1972년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박정희·육영수 대통령 내외. 박 대통령은 유신으로 행정·입법·사법을 아우르는 절대 권력을 틀어쥐었다. / 사진: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 실바람도 불어와 부풀은 내 마음 / 나뭇잎 푸르게 강물도 푸르게 / 아름다운 이곳에 내가 있고 네가 있네” 1972년 10월 신중현은 신곡 ‘아름다운 강산’을 발표한다. 이후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수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할 명곡이다.


▎신중현이 1960년대 초에 낸 기타 연주곡 앨범. 미8군 무대에서 그는 신들린 기타 솜씨로 ‘히키 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노래의 탄생에는 정치적인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그 무렵 신중현은 박정희 대통령 측으로부터 노래를 지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박정희 찬가’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신중현이 누구인가? 그는 1960년대에 그룹사운드 활동을 펼치면서 펄시스터즈·김추자·박인수 등 인기가수들의 곡을 썼다. ‘커피 한 잔’, ‘빗속의 여인’, ‘님은 먼 곳에’, ‘거짓말이야’ 등 발표하는 노래마다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한마디로 히트곡 제조기였다. 박 대통령 측에서 보기에 곡을 의뢰할 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상대는 군인 출신들이 눈알을 부라리는 박정희 정권이었다. ‘일개’ 음악인이 어디서 감히 토를 단다는 말인가. 그러나 신중현은 거절했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 ‘대통령 노래’를 만들라고 연락이 왔어요. 못한다고 했죠. 나는 음악하는 사람이지 정치가는 아니잖아요.”(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박정희 찬가’ 대신 그는 ‘아름다운 강산’을 내놓았다. 대통령이 아니라 이 강산과 여기 사는 사람들을 노래한 것이다. 신중현은 단지 하고 싶은 음악을 했을 뿐이다. 내키지 않는 음악은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청와대의 ‘윗분’들은 “어쭈, 요거 봐라” 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검은 찝차’가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유신의 그림자가 온 나라를 뒤덮으며 신중현의 앞길은 가시밭길로 변했다.

1972년 10월 17일 탱크가 서울 도심에 나타나 중앙청 앞에 멈춰 섰다. 삼엄한 분위기에서 박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고 연설문을 낭독했다. 유신(維新), 낡은 것을 뜯어고쳐 새롭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겨레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이룩하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정착하기 위해 비상조치에 들어간다고 했다. 먼저 국회를 강제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했다. 나아가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헌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 새 헌정질서를 수립하겠다고 했다. 수단은 물리력이었다. 저녁 7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10월 유신으로 절대 권력 틀어쥐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을 선포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내렸다. 총 든 군인과 탱크 앞을 어린 학생들이 지나가고 있다.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유신은 이미 예고돼 있었다. 박 대통령은 3선 개헌 끝에 나선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신민당 후보에게 고전하고, 이어진 총선에서 신민당에 개헌저지선을 훨씬 넘은 89석을 내주면서 장기집권에 빨간불이 켜졌다. 이듬해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일본과 중국이 수교 절차를 밟자 박정희 정권을 뒷받침해온 동북아 질서도 급격히 흔들렸다. 심지어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통보하고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고 했다. 국내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박 대통령이 비상조치를 강구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은 어떤 의미에서 유신의 신호탄으로도 볼 수 있다. 동북아의 긴장 완화 움직임은 남한은 물론 북한으로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국제적 고립을 피하고 정권을 안정시키려면 6·25전쟁 이후 적대 관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비전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남북한이 자주통일·평화통일·민족대단결 원칙에 합의하고 남북관계 개선과 조국 통일 촉진에 나선다는 성명을 발표한 이유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과 김일성 정권이 헌법을 뜯어고쳐 각각 유신 체제를 구축하고 유일 체제를 강화하는 명분이 됐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개정안은 계엄령 아래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반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론은 사전 검열을 받았고 대학은 문을 닫아야 했다. 일부 국회의원은 악질로 분류해 구금하고 고문했다. 신민당의 최형우 의원은 비상조치 이전 국회 질의에서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유신 음모를 따져 물은 바 있다. 그는 영등포 군부대에 끌려가 알몸으로 온갖 치욕스러운 고문을 당했다. 박 정권은 폭력적으로 반대를 틀어막고 대국민 홍보에 열을 올렸다. ‘10월 유신의 노래’가 전국 방방곡곡 나돌았다.

“10월의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 삼국통일 되듯이 남북통일 되어요 / 우리 몸에 알맞은 민주 나라 만들어 / 우리 모두 뭉쳐서 박 대통령 밀어요”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은 91.9% 투표율, 91.5% 찬성률로 통과됐다. 이제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간접선거로 뽑게 됐다. 국회의원은 73개 지역구에서 각기 2인씩 선출하고, 전국구 의원 73명은 대통령 뜻대로 임명하게 했다. 대통령이 구성하는 이 전국구 의원단을 ‘유신정우회’, 줄여서 ‘유정회’라고 불렀다. 공화당과 유정회를 합쳐 국회의원 3분의 2가 대통령 손아귀에 들어갔다. 대통령은 또 법관 임명권도 확보했다. 행정·입법·사법을 아우르는 절대 권력을 박 대통령이 틀어쥔 것이다.

1972년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 취임식이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4일 전 이곳에 대의원 2359명이 모여 박정희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에서 박정희 득표율은 99.9%를 기록했다. 취임식에서 박 대통령은 “우리의 역사와 전통과 현실에 가장 알맞은 정치 제도를 육성 발전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유신으로 사실상 종신 대통령을 보장받은 것도 그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정치’였다. 취임식은 이화여대 합창단의 ‘대통령 찬가’(박목월 작사·김성태 작곡)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1972년 12월 2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진행된 대통령 간접선거 투표 모습.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박정희 후보를 뽑았다.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장발·미니스커트 단속은 박 대통령의 뜻


▎1969년에 나온 김추자의 데뷔 앨범. ‘신중현 작곡집’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가난과 시련의 멍에를 벗고 / 풍성한 결실과 힘찬 건설의 / 민주와 부강의 푸른 터전을 / 이루려는 그 정성을 축복하소서 / 아아아, 대한 대한 우리 대통령 / 길이 빛나리라 길이길이 빛나리라”(2절)

유신은 국내외 정치에 국한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 깊숙이 개입해 국민의 삶을 통제하고 간섭했다. 대표적으로 장발과 미니스커트가 도마 위에 올랐다. 1973년 3월 새로운 경범죄 처벌법이 발효되며 집중단속이 이뤄졌다. ‘우리의 역사와 전통과 현실에 맞지 않는’ 서구의 퇴폐 문화로 지목한 것이다. 민족 문화 창달을 위해 정치 제도처럼 뜯어고쳐야 마땅했다.

장발 단속은 박 대통령의 뜻이기도 했다. 그는 유신 선포 이전부터 청년 세대의 장발 문화를 혐오했다고 한다. 군인 출신 대통령은 장발에서 사회 규범을 거부하는 히피족의 반체제 성향을 읽었다. 이런 저속한 외래 풍조에 물들면 사회 기강이 흔들린다고 봤다. 유신 이후에는 장발에 대한 대통령의 지시가 잦아졌다. 텔레비전 보다가 한마디 툭 던지면 아래서는 난리가 났다. 눈덩이 효과였다.

경찰들은 곤봉과 가위를 들고 사냥하듯이 거리로 나섰다. 옆머리가 귀를 덮거나 뒷머리가 옷깃을 덮는 청년들이 사냥감이었다. 젊음의 거리 명동, 여러 대학이 자리한 신촌, 재수생이 많은 종로 등지에서는 실랑이와 도주극이 자주 벌어졌다. 장발 청년들은 큰길 대신 뒷골목으로 숨어들어 경찰과 숨바꼭질을 벌였다. 붙잡히면 경찰서나 파출소로 연행됐는데 대부분 가까운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풀려났다.

미니스커트 단속은 시대의 진풍경이었다. 경찰들은 거리에서 미니스커트 입은 여성을 잡아 세우고 대자로 길이를 쟀다. 치마 밑단이 무릎에서 20㎝ 위로 올라가면 경범죄로 취급했다. 단, 무릎의 어느 지점에서 재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다. 눈금 보는 경찰 마음대로였다. 미니스커트가 ‘풍기문란’이라고 했지만, 남자 경찰이 치마 밑에 대나무 자를 대고 처녀 허벅지를 살피는 것도 ‘미풍양속’은 아니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발동으로 군인들이 고려대에 진입해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고 있다.
‘박정희 찬가’를 거절한 신중현은 유신 정권에 미운 털이 박혀 곤욕을 치러야 했다. 박 대통령은 히피족의 방송 출연을 제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장발한 록밴드는 그야말로 본보기였다. 몸을 사려도 모자랄 판에 신중현 밴드 ‘더 맨’이 TV에서 ‘아름다운 강산’을 불렀다. 리드보컬 박광수는 삭발했고, 멤버들은 머리핀으로 긴 머리를 걷어 올려 장발을 부각했다. 결국 신중현은 방송 활동이 어려워졌고, ‘아름다운 강산’은 방송계의 금기가 되고 말았다.

그의 입지는 날이 갈수록 좁아졌다. 유신 정권은 1973년 2월 방송법을 개정해 사전심의를 의무화하고 제재 규정을 강화했다. 그들이 볼 때 국민정신이나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것들은 방송할 수 없도록 했다. 음악의 경우 광란의 리듬이나 선율을 문제 삼았다. 신중현은 록을 기반으로 파격적인 실험을 거듭해왔다. 이런 방송 환경에서는 음악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인답게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 아름다운 그 모습을 자꾸만 보고 싶네 / 그 누구나 한번 보면 자꾸만 보고 있네 /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1974년 8월 ‘신중현과 엽전들’ 1집 앨범이 세상에 나왔다. 1973년에 터진 오일쇼크로 시장이 침체에 빠진 가운데서도 이 음반은 미친 듯이 팔려나갔다. 무려 100만 장을 돌파하는 전인미답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타이틀곡 ‘미인’은 온 국민이 따라 불렀다. 한 번 부르고 두 번 부르고 자꾸만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미인’ 열풍은 이듬해 중반까지 거세게 불어 동명의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신중현과 엽전들이 직접 출연한 영화였다.

또 이 앨범은 국악 5음계를 사용한 멜로디에 사이키델릭한 하드록과 그루브한 솔(Soul)을 접목함으로써 한국적인 록의 신세계를 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음악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명반으로 자리매김했다. 앨범 재킷 뒷면에 쓴 것처럼 ‘긍정적인 엽전 정신’으로 록을 넘어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꾼 것이다. 신중현은 이렇게 자신을 옥죄는 시련을 음악으로 이겨내고자 했다. 그러나 유신 정권은 그가 승승장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가요 긴급조치’의 태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1974~1975년에 발동한 긴급조치 1~9호는 유신 독재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것은 유신에 대한 각계각층의 저항을 억누를 목적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한 조치들이었다. 특히 1974년 4월 3일에 나온 긴급조치 4호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공산주의자들이 배후 조종한 조직사건으로 몰아 수많은 피해자를 낳았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사형을 선고받은 8인은 이듬해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다음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극심한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전격 처형한 ‘사법 살인’이었다.

1975년 금지곡 처분과 연말 대마초 파동


▎12월 신중현은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됐다.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활동이 금지됐다.
1975년 5월 13일에 공표한 긴급조치 9호는 그동안의 조치들을 집약한 결정판이었다. 유신 정권은 헌법 반대행위 금지(1호), 학생 집회 및 시위 금지(4호) 등을 넘어 헌법 논의 자체를 봉쇄해버렸다. 주권자인 국민이 유신헌법에 대해 입만 벙긋해도 잡아넣을 수 있도록 했다. 긴급조치 9호는 1979년 12월 8일 해제될 때까지 무려 4년 7개월이나 유지됐다. 이 조치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1000여 명이 기소됐고, 900명 이상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긴급조치 9호는 197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 전 분야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 여파는 곧 가요계에 불어닥쳤다. 1975년 6월 유신 정권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를 내세워 가요계 ‘정화’에 나섰다. 대중가요를 심의해 정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곡은 음반 판매, 방송 출연, 공연 활동을 모두 금했다.

1975년 한 해에만 222곡이나 금지곡이 쏟아져 나왔다. 6월 21일, 그해 발표한 가요 중에서 43곡(‘거짓말이야’, ‘댄서의 순정’ 등), 7월 4일 월북자 관련 가요 중에서 87곡(‘고향설’, ‘꼬집힌 풋사랑’ 등)이 금지 처분됐다. 이어 7월 9일, 1974년 발표한 가요 중에서 45곡(‘미인’, ‘그건 너’ 등), 10월 2일 1968~1973년에 나온 가요 중에서 47곡(‘유달산아 말해다오’, ‘사람 나고 돈 났지’ 등)이 예륜의 금지곡 처분을 받았다. 12월 11일에는 가수들이 속한 연예협회에서 자율금지곡이라며 5곡(‘왜 불러’, ‘고래사냥’ 등)을 추가하기도 했다.

숫자도 숫자지만 금지곡의 면면을 살펴보면 더욱 충격적이다.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당시 온 국민의 애창곡이었고, 송창식의 ‘왜 불러’는 그해 [MBC 10대가수가요제]에서 최고인기가요상을 수상했다. 유신 정권은 국민에게 사랑받는 노래들을 가차 없이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가사가 퇴폐적이라는 둥, 창법이 저속하다는 둥, 불신감을 조장한다는 둥 온갖 사유를 갖다 붙였지만 수긍하기 어렵다. 그냥 엿장수 마음이었다. 15곡 이상 금지 처분을 받은 신중현은 이 ‘가요 긴급조치’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사람들이 ‘미인’ 가사 중에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를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로 바꿔 부른답니다. 성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킨다는 거죠. 사실은 대학가에서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풍자하는 의미로 바꿔 부른 게 이유였다고 합니다.”(신중현,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금지곡은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가요 긴급조치’의 정점은 연말에 터진 대마초 파동이었다. 1975년 12월 3일 윤형주·이장희·이종용 등 당대 최고의 포크송 가수들이 ‘습관성 의약품 관리법’ 위반 혐의로 잡혀들어갔다. 뒤이어 신중현·김추자·박인수 등 신중현 사단의 핵심 멤버들도 같은 혐의로 연행됐다. 대마초를 피웠다는 것이다. 1977년까지 연예인 137명이 구속되거나 입건됐다. 김정호·정훈희·남진·장현·김세환·임희숙·김도향·조용필 등 톱스타들이 이 파동에 대거 연루됐다.

한국에서 대마초 관리가 법제화된 것은 1970년 대 초반의 일이다. 신중현은 1960년대에 대마초를 접했는데 간단히 조사받고 약식 기소돼 벌금형으로 종결한 바 있다. 유신 정권은 법제화 전에 끝난 일을 소급해 그를 구속했다. ‘대마초의 왕초’임을 자백하라며 남산으로 끌고 가 물고문까지 가했다고 한다. 신중현은 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풀려났다. 이제 음악 활동은 불가능했다. 연예협회에서 제명된 것이다. 무기한 활동 금지를 당했다. ‘박정희 찬가’를 안 쓴 대가는 혹독했다. ‘유신의 나라’에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백두산의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 한라산의 높은 기상 이 겨레 지켜왔네 / 무궁화꽃 피고 져도 유구한 우리 역사 / 굳세게도 살아왔네 슬기로운 우리 겨레”

군가풍 ‘나의 조국’으로 국민 총동원 도모


▎유신 시대에 고초를 겪었지만 신중현의 음악은 꺾이지 않았다. 그가 일궈낸 한국적인 록은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1976년부터 TV를 켜면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나의 조국’, 각하께서 몸소 지으신 곡이다. 톱스타들이 사라진 무대를 대통령이 차지한 것이다. 단조 5음계 트로트 선율에 병영에서 부르는 군가풍 노래다. 그는 사회 전체를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싶어 했다. 유신은 국민 총동원 체제였다. 백두산과 한라산, 무궁화꽃이 온 국민을 하나로 만든다. 박 대통령에게 노래는 하나 된 ‘우리’였다.

신중현은 박 대통령이 서거한 뒤인 1979년 12월에야 활동의 자유를 되찾았다. 금지곡들은 1987년 6·29선언 직후에 문화예술 자율화 명목으로 족쇄가 풀렸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전성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980년대 무대에는 한국적인 록대신 댄스곡과 발라드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신중현은 화려한 조명 뒤에서 묵묵히 기타를 연주하고 실험적인 곡을 만들어나갔다. 그에게 노래는 ‘삶’이었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210호 (20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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