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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79)] 실학을 개척한 ‘재야의 지식인’ 성호(星湖) 이익 

도학 바탕 위에서 경세제민(經世濟民) 파고들다 

명문가였지만 몰락한 南人 가문에서 출생, 경기도 안산에서 퇴계학 계승
농사지으며 실용에 눈 돌려 ‘성호학파’ 형성, 안정복·채제공 등 제자 배출


▎성호이익선생기념회 이효성 이사가 사당인 경기 안산 첨성사(瞻星祠) 앞에서 선생의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 사진:송의호
"겹이불을 덮고 탄(炭)을 땔 때는 천하에 추위로 떠는 사람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좋은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천하에 굶주림을 참는 자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몸이 안락할 때는 천하에 노역으로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만사가 뜻대로 되어 기분이 좋을 때는 천하에 원통하고 억울해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호사설(星湖僿說)] 제18권 경사문(經史門) 중 ‘백성을 제사 지내듯 부려라(使民如祭)’는 글의 한 대목이다. 18세기 재야 지식인으로 실학이란 영역을 개척한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 위정자를 향해 던지는 일갈이다. 책 이름 사설(僿說)은 잡다한 논설이란 뜻이다. 선생은 당시 풍족하게 사는 위정자들이 백성의 고통을 모른다고 진단했다. [성호사설]은 현재를 반추시킨다.

8월 18일 성호 선생의 자취를 찾아 경기도 안산으로 갔다. 고속철 광명역에서 50분 거리에 시립 성호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 책 [성호사설]을 펼쳐 놓은 금속 조형물이 관람객을 맞이했다. 성호는 문제 제기로 그치지 않았다. 대안을 제시했다. 위정자가 백성의 형편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백성을 가까이 하라(近民)’에서 이렇게 말한다. “때때로 유예(遊豫)하며 백성을 접하되 온화한 얼굴로 이끌어야 한다. 또 일을 구실로 백성을 찾아보되 친구처럼 반갑게, 부자 사이처럼 살갑게 한 뒤라야 아래에 있는 백성의 사정이 위에 전해지고 그들의 고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예란 위정자가 봄가을로 돌아다니며 백성이 밭 갈고 수확하는데 부족하거나 불편한 게 없는지 살피고 돕는 것을 말한다.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던 이효성 경희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그는 성호의 방계 후손이자 성호이익선생기념회 이사를 맡고 있다. 이 교수는 [성호사설] 이야기에 먼저 가문을 설명했다. “선생은 태어나 돌이 되기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둘째 형한테서 글을 배웁니다.”

성호 가문은 밖에서 스승을 찾아 글을 배우지 않고 족부(族父)와 가형(家兄)을 통해 익히는 가학(家學)의 전통이 있었다. 이 전통은 이조판서·대사헌 등 고위 관직에 올라 집안을 일으킨 이상의로부터 시작되었다. 성호의 증조다. 그는 가문의 중흥조로 시(詩)·서(書)에 뛰어났다. 가풍은 이어져 집안에는 빼어난 학자들이 잇따라 나와 나무가 자라 숲이 되듯 일가학림(一家學林)을 이뤘다. 이 교수는 “지금도 집안에 대학교수가 많은 편”이라고 덧붙였다.

연경에서 들여온 수천 권의 책


성호의 아버지 이하진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그러나 당쟁에 휘말려 귀양 가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몰락한 남인(南人)이었다. 아버지는 [성호사설]을 쓰는 바탕이 된 희귀한 서학 관련 등 방대한 책을 남겼다. 이하진은 축출되기 2년 전인 1678년 진향정사(進香正使)로 연경(燕京, 베이징)에 파견됐다. 그는 청나라 황제가 사신에게 하사하는 은과 비단으로 수천 권의 책을 사서 귀국했다. 이익은 1691년(숙종 17) 11세부터 둘째 형 이잠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이잠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유학의 경세치용(經世致用)을 동생에게 가르쳤다.

1705년(숙종 31) 이익은 책문으로 증광시 초시에 합격한다. 그러나 이듬해 형 이잠이 세자를 보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국문 중 장살로 숨진다. 고문치사였다. 이익은 둘째 형의 화를 지켜본 뒤 그때부터 안산 성호장(星湖莊)에 은거했다. 과거 공부도 포기했다. 셋째 형 이서가 스승이 됐다.

박물관에는 가화(家禍)의 아픔을 달랜 옥동금(玉洞琴)이 있었다. 이서가 부형의 죽음 이후 포천 옥금산 아래 살며 탔던 거문고다. “우리 집안을 비롯한 남인은 벼슬길이 끊기자 광주(廣州) 등 서울 인근으로 물러나고 (…) 권력에서 소외되니 농민과 다를 게 없어 자연스레 백성의 힘든 삶에 관심을 둡니다.” 이 교수가 보는 근기(近畿, 서울에서 가까운 곳) 남인이 실학으로 눈을 돌린 배경이다. 성호 가문은 이후 이가환이 옥사한 신유사옥을 거치면서 벼슬길로 나갈 수 없는 폐족(廢族)이 되다시피 한다.

다산, “성호의 글에서 깨달은 것이 많다”


▎안산시가 설립, 운영하는 이익의 학문과 실학사상을 소개하는 성호박물관. / 사진:송의호
성호는 안산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는 평민들과 지내며 ‘백성을 살리자’는 대장부의 뜻을 품고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연구했다. 다듬은 생각 중 하나가 토지공개념이다. 그는 성호사설 제7권 ‘인사문’에서 균전(均田)을 발상한다. “무릇 천하의 전지(田地)는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다. 백성들이 각각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차지하고 있는 것은 왕의 땅을 한때 강제로 점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본 주인이 아닌 것이다.”

[성호사설]을 연구한 강명관은 이렇게 해석한다. 토지 사유란 남의 땅을 한때 강점하는 것일 뿐이다. 잠시 세상에 머무르고 떠날 인간이 자연을 소유한다는 것은 실없는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토지는 원천적으로 사유할 수 없는 것이다.

선생은 해박한 지식과 체험을 바탕으로 [성호사설]과 [곽우록(藿憂錄)] 등 100여권 저술을 통해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그의 학문과 사상은 안정복·정약용 등으로 이어져 실학의 원류가 됐다. 훗날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은 “나의 큰 꿈은 성호의 글에서 깨달은 것이 많다”고 술회했다.

박물관을 나와 도로 건너 동산에 마련된 성호 묘소를 찾았다. 선생이 소나무에 둘러싸여 부인과 함께 잠든 곳이다. 이곳에는 본래 둘째 형 이잠을 비롯해 아들·손자 등 5위가 모셔져 있었다. 1977년 반월공단이 조성되면서 이들 분묘는 이장 공고된다. 그러나 성호 묘는 보존해야 한다는 지역사회와 학계의 요청이 거세 지켜질 수 있었다.

묘소 오른쪽에는 선생의 초상화와 신주를 모신 사당 첨성사(瞻星祠)가 있었다. 복건을 쓴 초상화의 발문이 벽면에 걸려 있다. 본래 포천에 있던 초상화는 한국전쟁 시기 소실돼 고증을 거쳐 제작한 뒤, 1989년 다시 봉안됐다는 내용이다. 신주에는 ‘朝鮮徵士星湖李先生’(조선징사성호이선생)이라 적혀 있다. ‘징사’란 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선비를 이른다. 사당 아래엔 방 두 칸에 가운데가 마루인 재실 경호재(景湖齋)가 있었다.

성호는 실학의 종장(宗匠)으로 통하지만 동시에 당대의 대표 도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도학적 기반은 퇴계 이황의 계승으로 드러난다. 퇴계는 도(道)를 한강 정구에게 전했고 한강은 미수 허목에게 전했으며, 성호는 미수에게서 이어받았다. 미수는 성호의 할아버지 이지안과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금장태 서울대 명예교수는 “성호는 일찍부터 퇴계를 자신의 학문적 근원으로 소중하게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는 청년 시절 퇴계를 사숙(私淑)해 29세에 도산서원을 찾아 관련 글을 남겼다. 이후 30년이 지난 59세에도 ‘도산도(陶山圖)’를 보며 존경하는 발문을 적었다.

성호는 이와 함께 퇴계학을 정밀하게 연구한 뒤 [이자수어(李子粹語)] 등을 남겼다. [이자수어]는 퇴계의 언행을 간추린 것이다. 서문에 그의 마음이 담겨 있다. “(공자로부터) 2000년이 지나 퇴계 이자(李子)가 태어나 육경을 따르면서 주자를 기준으로 삼았다 (…) 이제 다행히 이 땅에 태어난 사람으로 어찌 퇴계의 말씀을 전하고 퇴계의 행실을 행하여 한줄기 유교의 도를 붙들어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뒤늦게 태어나 제자가 될 수 없었지만, 단지 그의 글을 읽고 기뻐할 뿐이다.” 여기서 성호는 퇴계를 ‘이자(李子)’로 극진히 높여 공자와 주자를 계승하는 성현의 반열에 올리고 있다.

성호는 유교 경전도 새로 해석했다. 삼경과 사서(四書), [소학] 등은 글자마다 고증하고 구절마다 뜻을 찾아 [맹자질서(孟子疾書)] 등을 지었다. ‘질서(疾書)’는 터득한 바를 얼른 기록한다는 뜻이다. 또 [가례질서(家禮疾書)] [관의(冠儀)] 등 숱한 예서(禮書)를 남겼다. 성호는 이렇게 정주학과 퇴계학을 자신의 학문적 기반으로 계승하면서도 도학에 매몰되지 않았다. 당시 사회현실에 비추어 더 긴요한 것은 민생을 안정시키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즉 실학이다. 성호는 그런 방향으로 후진 양성에 몰두했고, 그의 학문과 사상은 학파가 됐다. 성호학파는 유교 경전을 연구하는 경학(經學)뿐 아니라 경제·천문·수학·지리·사학 분야에서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학풍을 보였다. 가문에 이용휴·이병휴·이가환 등이 있고 제자로는 안정복·윤동규·권철신·채제공 등이 있다.

퇴계를 공자 계승한 이자(李子)로 높이다


▎성호박물관 건너편 사당 첨성사에 봉안된 이익의 초상화와 신위(神位). / 사진:송의호
성호는 인품도 훌륭했다. 안내를 한 이효성 교수는 “선생은 대학교수들이 저술에서 잘 실천하지 못하는 제자의 공을 일일이 밝힐 줄 알았다”고 강조했다. [성호사설]은 일정한 주제가 없는 3007편의 방대한 글이다. 제자 안정복은 중복되는 것을 가려내고 보다 중요한 1332편을 추려 [성호사설유선]으로 편집했다. 제자의 그 역할이 기록돼 지금도 전한다.

또 작은 생명까지 소중히 여기는 휴머니스트의 면모도 글에 남아 있다. “더운 여름날 집을 짓는 공사를 벌여 옛집을 헐었는데, 기왓장 아래 오글거리던 수많은 참새 새끼가 모두 죽고 말았기에 차마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는 생각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제자 윤동규는 행장(行狀)에 “(성호는) 일가 중 혼인 시기를 놓친 사람에겐 혼주 역할을 하고, 굶주리면 구휼하고 병이 나면 반드시 문병했다”고 적었다.

성호는 아버지의 유배지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나 광주(廣州) 첨성리(瞻星里)에 은거하며 수도했다. 안산 성호박물관 일대다. 성호(星湖)라는 자호는 지명에서 유래한다. 평소 생활은 새벽에 일어나 사당에 배알하고 물러나 서실(書室)에 머물렀다. 그는 사우(士友)를 만나면 공손하게 절하고 “절은 예의 시작이니 무엇을 꺼려 행하지 않는가” 하였다. 도(道)로 들어가는 길은 경(敬)을 위주로 했다. 조정이 그 이름을 듣고 선공감 가감역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연로한 뒤에는 첨지중추부사가 내려졌다. 형제와 자식·조카들에겐 한결같은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다.

도학과 실학으로 18세기 조선에 르네상스 열어


▎이익 간찰. 선생의 초서체 글씨를 볼 수 있는 편지이다. / 사진:성호박물관
그는 비록 초야에 묻혀 있었지만, 이 세상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훌륭한 정치가 없었던 것은 과거의 폐해 등에서 연유한다”고 탄식했다. 그 차선책이 조광조의 현량과(賢良科)인데 시행하는 이가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물었다.

또 조선의 사서(史書)가 소략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는 걸 근심해 문인 안정복에게 부탁해서 구성 등을 정해 믿을 만한 책을 만들게 했다. 저술은 편저까지 더하면 수백 권에 이른다. 학문은 실제에 힘썼으며 예는 절약과 근검을 따랐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은 상층을 덜어 하층을 보태는 방식이었다. 모두 조리가 있어 시행할 만한 것들이다. 아들 이맹휴는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은 정랑에 이르렀으나 요절했다.

성호는 죽음을 앞두고 명정(銘旌)에 자신의 일생을 요약했다. “살아서는 천한 선비였는데 징사라 불렸고/ 농부로 지냈지만 장부의 뜻 품었다네/ 달빛 풍광을 마음대로 타고 날았으니/ 하늘 아래 어디인들 좋은 길이 아니었을까”

고종 때 문헌(文獻)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채제공은 “도를 품고 베풀지 못한 것은 한 시대의 불행이지만 책을 저술해 아름다운 혜택을 베풀었으니 백세의 다행”이라며 “어찌하여 함께 선생의 글을 읽지 않는가”라고 스승을 기렸다.

성호는 주자학과 퇴계학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실학적 관심과 사유의 방향을 개척한 유학자였다. 사상은 남녀관 등에서 일부 한계를 보이기도 하지만, 사민(四民)평등 신분관 등 여러 분야에서 근대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는 정치적 불운을 딛고 도학과 실학이란 두 바퀴로 18세기 이 땅에 르네상스를 열었다.

[박스기사] 오직 책만 탐한 검약의 실천가 - '서유기' '수호전'은 용납하지 않아

“음식의 바른 맛은 부귀하고 사치하는 사람은 모두 알지 못하니, 아는 사람은 우리뿐이다. 온종일 배고픔을 참다가 저녁이 돼 죽을 먹으면 그 맛이 엿처럼 달콤하니 이것이 바른 맛이다.”

제자 류경종은 [성호선생언행록]을 남겼다. 윤재환 단국대 교수는 “류경종이 직접 접한 성호 이익의 언행을 187화로 나누어 기록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여기서 성호가 가난한 삶을 견디기 위해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콩으로 만든 여러 음식도 나온다. “대두(大豆)는 죽을 만들기 좋고, 빨리 먹을 수 있는 청국장은 맛이 좋다. 또 콩나물은 무침이나 절인 반찬이 좋아 삼두회(三豆會)와 삼두가(三豆歌)를 만들었다.” 성호는 콩죽 한 사발과 된장국 한 그릇, 콩나물무침 한 접시를 삼두회라 불렀다. 시가도 지었다.

성호는 책만큼은 욕심이 있었다. 류경종이 빌려준 책을 돌려달라고 청하자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보려고 하는가, 아니면 혹 다른 사람이 빌려달라고 하는가. 하루아침에 보내려고 하니 마치 엄한 스승과 존경하는 벗이 내 곁을 떠나가는 것 같아 몹시 서글픈 생각이 든다.”

성호는 독서를 강조했지만, 읽어야 할 책과 관심 두지 않아야 할 책을 엄격히 구분했다. 그는 초목 이름은 많이 알았지만, [서유기] [수호전] 등과 같은 책은 일절 금했다. 특히 풍수에 관한 것은 누차 금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210호 (20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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