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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19)] 내륙 도시의 근간인 ‘도로의 원조’를 찾아서 

고대 모든 길은 크로에수스의 리디아 사르디아로 통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는 로열로드 흉내 낸 ‘복사 대제국’
‘로열로드’ 출발점, 기원전 7~6세기 번성했던 리디아 왕국으로 봐야


▎크로에수스의 사르디스 궁전이 들어섰던 산꼭대기. 거의 함몰된 상태로,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궁전의 산 정상까지는 도보로 약 2시간 걸린다. / 사진:유민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대제국 고대 로마를 찬미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말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는 표현과 더불어, 왜 로마가 인류 문명 문화의 선구자인지를 증명해주는 관용어이기도 하다. 사방팔방 뻗은 도로를 통한 인프라 건설 대국이 세계 대제국 로마의 실체이자 이상이란 의미다.

흥미롭게도, 생전의 로마인들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1000개의 도로가 사람들을 영원히 로마로 향하게 만든다(Mille viae ducunt homines per saecula Romam).’ 12세기 프랑스 신학자 알랑 드 리어(Alain de Lille)의 라틴어 시집에 등장한 말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관용어가 보편화한다. ‘로마 도로=사람·물자·문명·문화의 터전’이 행간의 의미다.

로마는 이른바 ‘황금의 이정표(Miliarium Aure um)’라는 도로 표지판을 상설화한 최초의 대제국이다. 로마의 중심인 ‘포로 로마노(Forum Roma num)’를 기점으로 로마 도량 1마일마다 대리석 기둥을 세웠다. 기원전 1세기 제정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는 황금의 이정표 관련법을 공표한다. 이후 대제국의 수많은 도로가 수도 로마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있지만, 로마 남쪽 아피아(Via Appia) 도로와 주변의 대리석 이정표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의 증거다. 당시 1마일은 좌우 왕복 1000개 보폭(歩幅)에 해당한다.

한반도 문명 문화사 전체를 통틀어 ‘역사적 전환점 10대 사건’을 꼽으라고 할 때 어떤 것이 떠오를까? 7세기 삼국 통일과 15세기 한글 발명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다. 필자의 경우, 한반도 최초의 초대형 건설 프로젝트였던 ‘경부고속도로’를 베스트 10에 넣고 싶다. 1970년 7월 7일 완성된, 서울 양재동에서 부산 구서동까지 428㎞에 달하는 한반도 대동맥이다. 착공한 지 2년 5개월 만에 완성된 도로로서 이후 보수와 확장을 되풀이하면서 대한민국의 발전사를 지켜왔다. 로마는 2000년 전에 전 세계로 통하는, 돌로 포장된 도로 건설에 들어갔지만 한반도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길다운 길이 없던 쇄국(鎖国)의 나라였다.

‘은둔의 나라(The Hermit Nation Corea)’는 조선이라는 국가를 한마디로 압축한 표현이다. 1882년 미국 목사 윌리엄 그리피스가 영어로 쓴 조선 안내서의 제목에서 유래된 말이다. 뭔가 겸손하고 차분한 이미지라고나 할까? 아침 해가 떠오르는 조용한 나라, 중세 수도승처럼 깊은 산속에서 정신 수양에 전념하는 평화의 분위기가 은둔의 나라라는 말속에 투영돼 있다. 외국에서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까? 외부 변화에 무심한 채, 문을 완전히 걸어 잠그고 살아가는 쇄국의 나라다. 세상 물정을 모르기에 곧 주변 강자에게 잡아먹히거나, 스스로 붕괴될 곳이란 의미도 갖고 있다. 그리피스 목사 역시 자신의 책에서 ‘조선이 곧 일본, 러시아, 중국 어딘가에 정복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21세기 현재 은둔의 나라로 통하는 곳은 북한, 벨라루스, 알바니아와 같은 곳이다.

로마의 도로는 폭 1~3m, 깊이 1m에 달하는, 21세기 아스팔트 이상의 단단하고도 튼튼한 길이다. 1인용 말이 아니라, 보통 네 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의 운행을 염두에 둔 도로다. 21세기 중형 트럭이 지나갈만한 내구성을 갖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로마 군인은 싸우는 용사인 동시에, 평시에는 도로와 다리 건설에 투입된 건설 기술자들이다. 현지인에게 도로 건설 방법을 알려주면서 이후 유지 보수도 함께 벌여나간다.

조선은 도로는커녕 마차가 지나갈 만한 제대로 된 길 자체가 없었다. 은둔의 나라의 특징이지만,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극도로 제한됐다. 다리도 거의 없고, 일직선의 탁 트인 평평한 길 자체가 드물었다. 말 자체도 드물고, 느린 소를 수송용 동물로 활용했다. TV 사극(史劇)을 보면 조선군 기병대의 모습이 등장하지만, 대부분 픽션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말을 사육하려면 관리자가 최소한 세 명 필요하다. 지방 관청의 경우 자급자족 원칙에 따라 군인뿐 아니라 말의 음식도 스스로 조달해야만 했다. 군인의 식량도 부족한데 말과 관리인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운 좋게 말이 몇 마리 있다고 해도 의도적으로 죽인 뒤 음식으로 재활용했다.

인류 문명 문화의 터전인 도로

길을 크게 낼 경우 외적이 침입하기 쉽고, 조선 왕실에 대한 반란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도 쇄국의 주된 근거다. 마을이나 도시를 개방할 경우 사람의 왕래가 활발해지고, 그 과정에서 권력자들의 통치력이 약화할 것이란 불안감도 도로 건설 원천봉쇄의 근본적 이유였다. 쇄국이 아니라 쇄민(鎖民), 쇄촌(鎖村)이 조선의 기본 구도였다. 결과적으로 상업과 무관한 나라가 된다. 21세기 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듯이 작은 마을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자급자족 가내수공업이 대부분이었다고 보면 된다. 경부고속도로는 그 같은 500년 쇄민, 쇄촌, 쇄국의 흔적을 한순간에 씻어낸 한반도 초유의 대사건이었다. 1904년 일본이 주도해 건설한 441㎞ 길이의 경부선 철도의 의미도 특별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인 스스로 집행하고, 한반도 번영 그 자체를 위해 창조된 경부고속도로야말로 ‘역사적 전환점 10대 사건’에 들어설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나라 안에서 통하는 도로로서만이 아닌, 바다를 넘어 세계로 나아가는 ‘정신적 도약대’로서의 경부고속도로다.

강(江)은 인류 4대 문명 발상지의 공통분모다. 풍부한 물을 기반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생활이 시작되고, 강을 오가는 배를 통해 물물교환이 이뤄진다. 물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의 사육에도 필수적이다. 4대 문명 발상지의 중심 도시는 항구를 낀 공간으로서 사방팔방 흩어진 산물의 보관창고 역할도 한다.

신전은 고대 도시의 핵(核)이다. 고대 신전은 신을 모시는 공간인 동시에 은행이나 창고 기능을 하는 공공 신탁 장소로 활용됐다. 신전이 크다는 말은 공공 신탁 업무도 활발하다는 의미다. 보관하고, 빌리고, 갚는 과정에서 부(富)가 집중되면서 도시 규모도 커지고 인구도 급증한다. 도시를 넘보는 외부 세력이 등장하면서 상비군이 나타나고 세금 징수도 시작된다. 인류 최초 철학자인 탈레스는 우주의 근본이 물이라고 말했다. 신화가 아닌 자연과학으로 우주를 논한 인물이지만, 사실 4대 문명 발상지에서 보듯 물은 우주뿐 아니라 인류 문명 문화의 기반이자 기폭제로 활용됐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이동의 기반이다.

인위적 노력이 필요한 ‘평평하고 넓은 도로’


▎황금 손 미다스 덕분에 사금이 사르디스 주변에서 채굴됐다. 미다스는 자신의 딸조차 황금으로 변하게 만든 뒤 슬퍼하다가 디오니소스에게 빌어 그 능력을 버렸다고 전해진다. / 사진:유민호
너무도 당연한 역사 법칙이지만, 인구가 늘어나면서 물을 낀 문명 발상지에 이어 땅을 기반으로 한 내륙도시도 등장하게 된다. 4대 문명 발상지에 버금갈 ‘인류 최초의 내륙 문명 도시’라 불릴 도시는 어디일까? 관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기준은 길, 즉 도로다. 강과 바다를 배경으로 배를 통한 이동이 아니라, 내륙의 땅을 활용한 교류다. 사실 길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마차나 동물 이동이 가능한 ‘평평하고 넓은 도로’는 인위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도로 건설 이후에 유지 보수도 필요하고 다른 지역과 연계해 도로 길이도 확장시켜나가야 한다. 도로의 행인을 노리는 산적이나 강도를 차단할 공권력도 필수다. 인류 역사상 그 같은 위업을 누가 최초로 창조해냈을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의 주인공 로마일 거라고 생각할 듯하지만 전혀 아니다. 로마는 선대(先代)에 이미 존재하던 ‘도로의 원조’를 흉내 낸 복사 대제국에 불과하다. 정답은 기원전 7~6세기에 번성한 리디아(Lydia) 왕국이다. 현재 튀르키예(옛 터키) 동쪽 아나톨리아 지방의 사르디스(Sardis)를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인데, 기원전 13세기부터 기원전 546년까지 800여 년간 지속된 고대왕국이다.

영어 관용어로 ‘크로에수스처럼 부자 같은(As rich as a Croesus)’이라는 표현이 있다. 리디아의 마지막 왕이면서 당시 전 세계 최고 부자로 통하던 인물이 크로에수스다. 흥미롭게도 세계 최고의 부자왕으로 추앙되던 중 멸망한 셈이다. 리디아의 멸망은 왕이 내린 단 하나의 판단 착오에서 시작됐다. 잊기 쉬운데, 돈은 인간 욕(欲)의 압축판이다. 욕은 사물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게 만드는 만악·만병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휴브리스(Hubris)’라는 말로 인간 욕의 한계를 갈파했다. 델피의 아폴로 신전 입구에는 경구(警句) 3개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 ‘넘치면 안 된다(nothing in excess)’, ‘맹세는 바보나 하는 짓이다(a pledge comes from folly)’. 휴브리스는 넘치면 안 된다는 의미를 가진, ‘오만과 자만에 기초한 신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로 통용됐다. 돈이 넘치면서 욕이 하늘을 찌르고, 결국 신의 교훈이나 경고도 우습게 대한다. 바로 휴브리스의 원론적 의미다. 기원전 6세기 최고 부자 크로에수스는 휴브리스의 결정판인 동시에 아폴로 경구를 무시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왕으로 추락한다.

기원전 559년 페르시아의 왕 사이러스(Cyrus the Great)가 현재 이란 동부의 실력자로 급부상한다. 당시 크로에수스의 리디아는 부자 왕국이자 지역 내 무역을 주도하던 최대 강국이었다. 동쪽에서 사이러스의 연전연승 소식이 퍼져 나가면서 크로에수스는 위기감에 빠진다. 아폴로 델피에 가서 신의 오라클(Oracle; 미래 예언)을 구한다.

돈이 모이는 곳에 도로가 있었다


▎로마의 대리석 도로는 사르디스의 로열로드에 연결된 문명 문화의 출입구다. / 사진:유민호
“만약 사이러스 공격에 나선다면 위대한 제국을 멸망시키게 될 것이다.” 크로에수스는 오라클을 듣는 순간 큰 웃음과 함께 기뻐한다. 자신의 군대가 나설 경우 사이러스의 패배도 아폴로가 약속했다고 확신한다. 곧바로 주변 동맹군과 함께 초대형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에 나선다. 기원전 547년, 크로에수스와 사이러스는 현재의 카파도키아 북부 평원에서 격돌한다. 결과는 무승부다. 크로에수스는 재결집을 위해 사르디스로 돌아온다. 뒤쫓아온 사이러스는 사르디스성을 완전 포위한다. 크로에수스의 성은 부자 왕국에 걸맞은 함락불능 철옹성으로 통했다. 그러나 작은 실수 하나로 단 하루 만에 사이러스에 정복된다. 성을 지키던 리디아 군인이 실수로 투구를 성문 밖에 떨어뜨린다.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투구를 쓴 채 성 위에 나타났다. 페르시아는 주변에 비밀통로가 있다고 보고 성 아래를 샅샅이 뒤졌다. 비밀통로를 찾아낸 뒤 곧바로 성안으로 진격해 점령한다. 크로에수스는 산 채로 체포된다. 아폴로의 오라클은 해석하기에 따라 180도 달라질 수 있다. 멸망할 위대한 제국은 사이러스가 아닌 바로 부자 왕의 리디아였다. 아폴로의 오라클을 거꾸로 해석한, 휴브리스의 대명사가 크로에수스인 셈이다.

‘휴브리스의 화신’ 크로에수스를 보면서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도로다. 크로에수스를 당대 최고의 부자로 만든 것은 사금(砂金)이다. 궁궐이 있던 사르디스 주변 강의 사금으로 동전을 만들었다. 사르디스 동전이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7세기 말, 크로에수스의 아버지 아리아테스(Alyattes)왕이 집권할 때다. 인류 최초의 발명품인 동전을 사용한 상거래가 사르디스 주변 내륙으로 뻗어나간다. 크로에수스는 아버지 덕분에 당대 최대 무역대국의 왕으로 급성장한다. 크로에수스는 아버지가 발명했던 불순물 포함 동전이 아닌, 99% 순도 금화를 창조해낸다. 금화 표면에는 사르디스의 상징인 사자의 모습을 새겨 넣는다. 지금도 사르디스 주변에서 가끔씩 출토되지만, 크로에수스가 만든 금화는 크로에세이드(Croeseid)라는 이름과 함께 엄청난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지만, 인류 최초의 금화는 지름 5㎜ 이하로 아주 작다. 완전히 둥근 형태가 아니라 굴곡이 심하고 조잡한 모습이다. 그러나 첫눈에 금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하지만 돈이 넘치면 길도 늘어나게 된다. 마치 단맛에 빠진 꿀벌처럼, 금화를 구경하고 얻으려는 사람이 사방팔방에서 몰려든다. 크로에수스 이전만 해도 금은 소수의 왕이나 부자만 소유하던 독과점 광물이었다. 보통 사람에게는 전설로만 떠돌던 귀중품이었다. 동전을 발명한 아리에테스 이래 불과 50여 년 만에 사르디스가 기원전 6세기의 뉴욕으로 변한다. 물건을 가득 실은 마차 운반용 도로가 동서남북 들어선다. 21세기 한국 상황에 비교하자면, ‘로또 대박’에 올라선 왕이 크로에수스였다. 부자 왕으로서의 격에 맞게 그리스 아폴로 신전이 있는 델피까지 가서 엄청난 기부금을 쏟아부었다. 아폴로의 오라클은 그 같은 ‘로또 대박 축제 분위기’ 속에서 나온 메시지였다. 휴브리스에 젖은 부자 왕의 마음은 오라클 발표 전에 이미 결정된 상태였다.

‘부자는 망해도 3대 간다’는 옛말처럼 크로에수스 금화가 남긴 번영의 흔적은 이후에도 장시간 글로벌 번영의 기반으로 활용된다. 바로 로열로드(Royal Road)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르디스에서 출발해 페르시아 수사(Susa; 현재 이란의 슈시 Shush)로 연결된, 무려 2700㎞에 달하는 도로다. 오늘날과 같은 포장도로는 아니지만 장애물 없이 평평하게 닦은 일직선 도로가 구축됐다. 말로 달려갈 경우 9일, 걸어서는 90여 일이 걸린 고대 문명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로열로드다.

로열로드 없이는 실크로드도 없었다


▎부자 왕 크로에수스의 최후. 페르시아 사이러스에게 포로로 잡힌 뒤 나무 화형을 당하던 중 아폴로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 사진:유민호
로열로드는 서방의 관용어로, ‘목적에 도달할 지름 길, 문제없이 이룰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는 의미다. 한자로 풀면 왕도(王道)에 해당한다. 그 유명한 로열로드의 출발점이 바로 기원전 7~6세기의 리디아다. 동전과 금화 덕분에 사르디스가 무역대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당대 최첨단 하이웨이가 등장한 것이다. 크로에수스가 통치할 당시 로열로드는 서쪽의 에게해로 연결된 것은 물론, 미다스 황금 손으로 유명한 북동쪽 골디안(Gordin)으로 뻗어갔다. 이후 동서를 가르는 2700㎞ 페르시아로 연결된 것은 리디아가 멸망한 뒤다. 새로운 정복자 페르시아가 금화 동전으로 채워진 부자 왕국의 힘을 동쪽으로 연결하면서 동서 하이웨이가 등장한다. 로열로드라는 말이 본격화한 시기이기도 하다.

폭 6m 정도인 길이 정비되고, 대략 25㎞마다 말을 빌려주는 식당 겸 숙소도 들어선다. 빠르고도 효율적인 페르시아의 통치 능력이 로열로드를 통해 확산된다. 로열로드는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도 격찬한 인류 초유의 최장 육로(陸路)다. 로열로드는 페르시아에 이어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 대제국을 통해 한층 더 확대된다. 인도와 중국으로 뻗어나간 실크로드도 로열로드로 연결된다. 로열로드가 없었다면 이후 탄생된 실크로드도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로열로드는 이후 13세기 몽골의 유럽 침략에도 활용된다. 칭기즈칸의 기동력은 몽골 파워의 상징이다. 하루에 무려 130㎞를 진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잘 닦인 도로에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시대보다 무려 500년 전에 나타난 글로벌 내륙 인프라의 출발점이 바로 크로에수스의 리디아다. 16세기 유럽 대항해 시대 이전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한 동서 육로 하이웨이의 출발점이 바로 사르디스였다.

서쪽 에게해에서 내륙 사르디스까지의 거리는 100㎞ 정도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고대 최대 항구도시였던 이즈미르(Izmir)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거리다. 크로에수스 당시 이즈미르도 사르디스로 연결된 로열로드의 일부였다. 현재 이즈미르와 사르디스 사이의 포장도로는 기원전 6세기 로열로드 흔적에 기초한 것이다. 내륙으로 들어가는데, 주변 전체가 온통 포도밭이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끝없이 들어서 있다. 로마 대제국 당시 사르디스는 주변 전체를 대표하는 지방정부의 수도로 활용됐다. 당시 사르디스의 주된 상품은 와인이었다. 사금 채취가 감소하면서 와인이 사르디스의 간판으로 떠오른다. 사실 지질학적으로 볼 때 와인과 사금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사르디스 풍경의 대부분은 마른 진흙으로 구성된 토양으로 채워져 있다. 단단한 바위나 농사용 토질과 다른, 뭔가 건조하고 약한 땅이 펼쳐져 있다. 사금을 채취할 수 있고 포도도 잘 자라는 토양인 셈이다. 진흙 성분의 땅이기 때문이겠지만, 사르디스 주변 산의 형세도 기묘하다. 약한 기반 때문에 산의 일부가 대폭 허물어져 붕괴 직전인 모습이 많다.

‘역사의 아버지’도 격찬한 무역 루트

2600년 전 세계 최대 부자 나라의 수도 사르디스는 뾰족한 산세(山勢)에다 반쯤은 함몰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로마 당시 건설된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이 사르디스성 아래에 들어서 있다. 초대형 규모 신전이다. 로열로드 덕분이겠지만 리디아가 망한 뒤에도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을 것 같다. 21세기 글로벌 풍경이지만, 돈이 충족되는 순간 갑자기 예술에 몰두한다. 부자라는 타이틀보다 예술가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한층 더 고상하기 때문이다. 21세기 베니스 비엔날레는 예술가로 변신한 글로벌 부자들의 ‘휘황찬란 이벤트’의 현장이다. 고대 부자들은 돈에 만족할 경우 신으로 옮겨갔다. 수많은 신전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고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사르디스 아르테미스 신전은 그 같은 당대의 분위기를 대변할 현장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다. 바로 사금 채취 현장이다. 크로에수스 당시 파크토루스(Pactolus)라고 불렸던 강인데, 황금 손 미다스와의 ‘특별한 연(縁)’이 깃든 곳이다. 미다스 황금 손에 의해 강의 모래가 금으로 변했다는 기적의 땅이 바로 파크토루스이기 때문이다. 미다스는 기원전 8세기 인물이다. 인류 최초의 ‘로또 대박의 화신’ 미다스에 관한 신화는 기원전 6세기 리디아 금화보다 200년 전에 나타났다. 황금 손이 없었다면 크로에수스와 리디아 금화도 없었을 것이다.

아르테미스 신전 옆 파크토루스강은 폭 3m, 깊이 50㎝ 정도인 하천이다. 상류라지만, 엄청난 부가 창출됐던 사금의 원천이라고 보기에 너무도 왜소하다. 고대 역사 현장에 갈 때마다 느끼지만, 강의 대부분이 개울이나 시냇물 정도에 그친다. 로마 종신 독재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건넜다는 루비콘(Rubicon)강에 가봤지만, 대략 폭 5m에 불과한 얕은 실개천이다. 고대인들의 강의 개념이 현대인과 다를까? 수천 년 단위의 역사를 고려해야만 한다. 메소포타미아와 유럽은 겨울에 비가 내린다. 산맥이 곳곳에 있기 때문에 비가 내리는 순간 엄청난 물이 일시에 아래로 밀려든다. 고대인의 강의 개념은 홍수에 직면한 넓은 강을 기준으로 한다. 바짝 마른 강이 아닌, 방파제는커녕 도시 자체가 드물던 고대 홍수기에나 만날 수 있는 하천을 강이라고 불렀다.

아르테미스 신전을 뒤로하면서 크로에수스가 머물렀던 산 위의 궁전에 올랐다. 뜨거운 태양과 함께 왕복 4시간이 걸리는 험준한 등정이었다. 진흙 성분이기에 미끄러지기 쉽다. 100m 급경사 절벽 상태로 남은 함몰 지형도 곳곳에 들어서 있다. 자칫하면 추락하기 쉬운 고난도 코스다. 꼭대기에 올라서자 흔적만 남은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5세기 이후 기독교 수도원으로 활용된 곳인데 크로에수스의 그림자는 ‘전혀’ 없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산 아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서로 이어진 길고도 긴 로열로드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펼쳐져 있다. 서쪽은 에게해, 동쪽은 페르시아, 인도, 중국으로 이어질 인류 최고(最古) 최대의 육로 무역 루트다. 모든 길은 크로에수스의 리디아 사르디아로 통했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210호 (20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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