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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4)] 삼국지 시대엔 왜 인구 3분의 1이 감소했을까 

잦은 전쟁에 한랭화로 인한 농업 위기도 한몫 

병사에게 먹일 군량 부족해지자 둔전(屯田) 시행해
한랭화·전란 영향으로 양쯔강 일대 강남 인구 증가


▎[삼국지연의]를 다룬 중국 CCTV 드라마 [삼국(三國)]의 배경 시대에는 기후가 한랭해지기 시작해 이전보다 곡물 생산량이 감소했다.
지금까지 통틀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취미가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 ‘컴퓨터 게임’을 들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것을 고르라면 바로 일본 코에이(光榮)사가 제작한 ‘삼국지’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어림잡아도 최소 3000시간 이상을 이 게임에 투자한 것 같다.

사실 이 게임의 인기는 어마어마하다. 1985년 ‘삼국지 1’이 출시된 이래 2020년 ‘삼국지 14’까지 출시된 장수 시리즈다. 그렇다면 20년 넘게 충성도 높은 마니아층을 확보한 비결은 무엇일까? 게임적 요소를 제외한다면 무엇보다 한·중·일 등 동아시아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는 [삼국지(三國志)]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우리가 통상 [삼국지]라고 부르는 것은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를 가리킨다. 유비·손권·조조 세 군웅을 중심으로 중국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2세기 말~3세기 초)까지를 다룬 이 작품은 수백 년간 스테디셀러로 군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비·손권·조조를 제외하고도 관우와 장비, 장판파에서 100만 명 대군에 둘러싸인 채 아두(유비의 아들인 유선의 아명)를 구하는 조운(조자룡), 신묘한 계책을 내놓는 제갈량 등 너무나도 많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해 장대한 서사를 펼쳐내니 이를 능가할 만한 문학작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계략과 음모가 수없이 등장하다 보니 도덕 정치를 지향했던 조선에서는 이를 백안시하기도 했다. 조선 20대 국왕 정조는 “나는 본래 잡된 책을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삼국지] 등과 같은 책도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정조실록] 23년 5월 5일). 하지만 그의 최측근인 홍국영조차 그와 정조의 만남을 “소열제(昭烈帝·유비)와 제갈공명의 만남도 이보다 대수롭지 않다고 하겠습니다”라고 비유했을 정도로 [삼국지]의 인기는 넓게 퍼져 있었다.

'삼국지' 시대에 한나라 때 인구의 80% 가까이 감소


▎지구 북반구의 기온편차를 나타낸 그래프를 통해 대략 3세기부터 기후가 한랭해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 자료:[세계사 속 중국사 도감]
최근에는 또 다른 비판적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소위 역사에서 ‘민중’을 강조하는 시각이 힘을 얻으면서다. 많은 영웅의 삶을 낭만적으로 그렸을 뿐, 당시 수많은 전투에서 병사로 끌려다녔을 일반 백성의 삶은 전혀 반영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시대야말로 일반인에게는 역사상 가장 비참한 시기 중 하나이며, 이들을 전쟁으로 내몬 유비·손권·조조 같은 인물을 영웅으로 그린다는 건 옳지 않다는 비판이 나왔다.

아주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통계를 보면 삼국시대로 재편되기 전 한(漢)나라의 인구는 5959만4978명이었다. 그런데 삼국시대 인구를 보면 위나라 443만2000명, 오나라 253만5000명, 촉나라 108만2000명이다. 전부 합쳐도 1000만 명이 안 된다. 이를 통일한 진(晋)나라의 인구는 1616만3863명이었다. 조금 회복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나라 때와 비교하면 20% 수준이다. 이것만으로도 삼국시대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제아무리 전쟁이 잦았다고 하더라도 인구가 80% 가까이 감소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 정도면 학살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래서 삼국~진 시대의 통계는 실제 인구 수치라기보다는 그만큼 행정력이 붕괴돼 있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한나라 때만큼 안정적으로 중앙 관료를 지방으로 파견해 정확한 인구를 파악하고 세금을 거둬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나마 위나라가 자리 잡은 중원은 비교적 한나라 때 시스템이 돌아갔지만, 촉나라가 들어선 파촉이나 오나라가 들어선 강동 지방은 지역 토호의 입김이 굉장히 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하나의 숨은 퍼즐이 있다. 그렇다. 바로 기후변화다. 도표는 지구 북반구의 기온 편차를 나타낸 그래프다. 대략 3세기부터 기후가 한랭해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기후가 한랭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전보다 곡물 생산량이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온이 내려가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부족해지고, 과거와 달라진 기후는 이전까지의 농사 경험 지식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시기는 이전보다 인구를 부양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따라서 [삼국지] 시대에 인구가 급감한 것은 각지의 군벌들이 벌인 수많은 전쟁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기후변화가 일으킨 농업 위기도 큰 몫을 차지했다.

농업 생산량이 줄어들고 인구 부양이 어려워지면 중앙정부로 흘러들어가는 세금도 급감할 수밖에 없다. 자신도 먹고살기 어려운데 세금을 강제하면 반란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한나라 말기가 혼란했던 것은 분명 십상시 같은 간신들의 전횡도 문제였지만, 이러한 기후사적 배경을 빼놓고는 완전히 설명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조조·제갈량도 어쩌지 못한 한랭화 여파


▎[삼국지연의]를 다룬 중국 CCTV 드라마 [삼국(三國)]에서 북벌을 추진하는 제갈량(가운데)의 모습. 제갈량은 기후 한랭화로 위나라가 대부분 점령한 화북 지역의 생산성이 극도로 낮아진 때야말로 공세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보고 북벌을 강행했다.
어찌 됐든 이런 시기가 되면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중앙의 통제력이 이완되고 제대로 된 법과 질서를 기대하기 어려워진다면, 소규모로 블록화하고 똘똘 뭉쳐 자력갱생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다. 반정부적 종교단체인 황건적 집단이 거대 정치 공동체로 발전하면서 그 서막을 알렸으며, 이들을 물리친다는 명분으로 파견되거나 일어선 군벌들이 황건적을 토벌한 이후 힘이 빠진 중앙정부를 대신해 각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됐다. 하북의 공손찬과 원소, 중원의 조조, 강동의 손권, 형주의 유표, 관중의 동탁과 마등, 그리고 서촉의 유장과 유비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과거에 고도로 개발된 곳일수록 군벌들의 먹잇감이 돼 전쟁터로 아수라장이 됐고, 안전을 담보하던 도시가 오히려 침략과 약탈의 대상이 됐다. 그래서 전쟁이 집중된 곳은 곡창지대가 발달하고 인구가 집중된 중원과 화북이었다. 이런 상황은 중원에 거주하던 많은 이가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유비를 만나 촉나라의 승상이 된 제갈량도 본래 고향은 서주(徐州) 양도현(陽都縣)이었다. 서주는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하고 비옥한 지역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그런데 조조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서주를 침공해 대대적인 약탈을 벌였고, 제갈량은 형주로 피신해 있다가 훗날 그곳에서 유비를 만나 의탁하게 된다. 오나라의 중신이 된 장소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서주 출신이었으나 황건적의 난을 피해 강동으로 내려갔고, 주유의 추천을 받아 손책을 섬기게 됐다. 하지만 제갈량이나 장소는 그나마 지식인 계급이고, 비싸게 팔아먹을 재주가 있었으니 상황이 나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병졸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지키고 정기적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기후 한랭화와 세금 수취가 곤란해진 이 당시에 병사를 배불리 먹일 만한 군량을 확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둔전(屯田)이었다. 군인들이 주둔하며 밭을 경작하는 시스템이다. 그것으로 미개발 지역을 개발하는 한편 군량을 자급자족하는 것이다. 한호의 건의를 받아 조조가 처음 시행한 것처럼 알려졌지만, 딱히 그랬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조조 외에도 이런 아이디어는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올여름에는 유럽과 아시아가 지독한 가뭄을 겪었다. 그러자 강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 나왔다. 중국 충칭시 양쯔강 유역에서는 약 600년 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각상 3개가 발견됐다. 그동안 물에 잠겨 있었지만, 가뭄으로 양쯔강의 수위가 15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유럽에서도 스페인 등에서 낮아진 수면 때문에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처럼 기후 변화는 예상치 않은 효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왕왕 있다. 3세기 한랭화에 접어든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7세기부터 한랭화 약해져 다시 통일 왕조


▎[삼국지 시대]의 실제 세력 영역. / 자료:시나닷컴
이 시기에 화북 지역은 한랭화와 전란이 겹치면서 이전 생산량을 회복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일각에서 제갈량의 북벌을 촉한의 국력을 갉아먹은 무리수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제갈량은 위나라가 대부분 점령한 화북 지역의 생산성이 극도로 낮아진 때야말로 공세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봤다. 만약 평화 공존기가 이어져 중원의 생산성이 회복되면 위와 촉의 국력 차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벌어져 중원 진출은 영영 불가능해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사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기는 했다.

어쨌든 화북 지대가 과거만큼의 생산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양쯔강 일대의 강남 지역이 특수를 누리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시대 오·월 그리고 초나라가 자리 잡았던 강남은 중원 입장에서는 변방 중의 변방으로 ‘중국’으로 받아들이는 것조차 꺼리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손견-손책-손권으로 이어지는 손씨 집안이 이곳에 완전히 정착하고, 황건적과 조조를 피해 많은 사람이 중원에서 이주하면서 새로운 개발이 시작됐다. 중원의 선진 농업기술로 무장한 이들은 강남의 생산력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어 삼국이 통일되고 진나라가 들어섰지만, 강남의 특수는 계속 이어졌다. ‘팔왕의 난’ 등 내란과 각종 부패로 국력이 쇠약해진 진나라가 북방 유목 민족에게 중원을 내줬기 때문이다. 한족들은 강남으로 이동해 진나라를 재건했는데, 중원에 있었던 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동진(東晉)이라고 부른다. 오나라 시대가 1차 개발이라면, 동진 시대는 2차 개발이었고 더욱 대규모로 본격화됐다. 아울러 중국은 통일 왕조가 들어서지 못한 채 수백 년간 남북조가 이어졌고, 남쪽과 북쪽에도 각각 여러 왕조가 난립했다.

중국의 한랭기는 7세기를 기점으로 약해졌다. 수백 년 이어진 한랭기에 적응한 데다 기온도 조금씩 따뜻해지면서 중앙정부는 다시 잉여 농작물을 확보하는 데 용이해졌으며, 지방 통제력도 강화됐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시 통일에 나설 차례다. 수·당이라는 강력한 통일 왕조가 들어서 확장에 나서게 된 배경이다. 특히 당나라는 한나라 이후 한동안 멈춰있던 서역으로의 진출을 활발하게 이어가면서 강력한 정복활동을 벌였으며, 이는 한반도의 삼국(고구려-백제-신라)에도 거대한 파도를 일으켰다.

※ 유성운 중앙일보 기자.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211호 (202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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