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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안진영 CNC커피 대표 

커피에 빠진 이 남자, 인생을 바꿨다 

나권일 월간중앙 편집장
신선하고 품질 좋은 커피 생두 찾아 중남미와 아프리카 고산지대 넘나들어
로스팅하고 이름 짓느라 밤새우기도… 커피로 사랑 주고받는 즐거움 ‘흠뻑’


▎CNC커피 사업장에서 안진영 대표가 포즈를 취했다. 안 대표는 커피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됐고, 인생의 깊은 의문이 해소됐다고 했다.
한국은 커피공화국이다.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워도 고급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 한 잔의 맛에 익숙해진 게 도시인의 일상이다. 그런 커피에 빠져 직업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결국엔 커피가 인생의 모든 것이 돼버린 사람이 있다. “커피를 알고부터 내 인생이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바뀌었어요!” 안진영(56) CNC커피 대표가 사람들을 만나면 꼭 하는 말이다.

그가 운영하는 커피 공장은 전북 익산시 왕궁면 국가식품클러스터 부지 안에 있다. CNC커피는 아프리카, 중남미 등 원산지에서 직수입한 생두를 공장에서 로스팅해 가공·판매한다. 그의 사업장은 커피 가공 공장이자 커피숍이고, 공원이자 박물관이다. 곳곳에 커피에 관한 감성적인 홍보 카피와 세계 여러 나라 커피 생두와 역사, 커피 관련 기자재, 문화용품 등을 전시해놓았다. 커피도 마시고 원두도 구매하고 체험도 할 수 있게 갖춰져 있다. 사업장 안에 짙게 밴 진한 커피 향기는 덤이다.

재스민 향 나는 하얀 커피꽃에 반하다

CNC커피라는 회사 이름은 그가 지었다고 했다. 커피콩을 따서 말리면 생두가 되고 볶으면 원두가 된다. CNC는 그 과정을 뜻한다. 커피콩(coffee cherry), 생두(Green bean), 원두(Coffee bean)에서 한 글자씩 따서 조합했다. 회사의 CI와 로고도 그의 아이디어다. 하얀 새가 커피 생두를 물고 있는 형상이다. “커피나무가 재스민 향이 나는 하얀 꽃을 피웁니다. 꽃말이 뭔지 아세요? ‘너의 아픔까지 사랑해’입니다. 감동적이죠. 칼라드리우스(Caladrius)라는 이름의 이 흰 새는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제가 만든 커피로 위로와 사랑을 주고자 합니다.”

커피 마니아가 됐지만 커피를 알게 된 지는 불과 6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연이 있을 법했다. 2016년,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힘들었던 그 시기에 커피가 위로가 됐다고 했다. 그는 ROTC 장교 출신이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근무했던 한 선배에게 우연히 커피 이야기를 듣게 됐다. “커피가 일상인 케냐 사람들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커피를 마신다고 하더라. 커피에서 사랑과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도대체 커피가 뭐길래? 당장 사무실에 들어와 인터넷으로 ‘커피’를 검색해봤다.” 그러다 EBS 다큐멘터리 영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단다. “네팔에 사는 5살짜리 꼬마 아인데, 비가 많이 오니까 키 작은 나무를 붙잡고 울더라. 그 나무가 커피나무였다. 그 집의 목숨이자 생명 줄이었다. 영상 마지막 부분에 ‘커피는 우리에게 희망이고 소망입니다. 우리 가족의 사랑입니다’라는 아이의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절친을 잃은 슬픔이 커피에 대한 광적인 열정으로 옮겨갔다. 뭔가 하나에 ‘꽂히면’ 물불 안 가리고 매달리는 그는 공장에서 먹고 자며 커피사업에 몰두했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커피에 빠진 뒤 서울에 올라와 커피 대학원 과정까지 이수했다. ‘살면서 무언가에 이렇게 열정을 쏟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일했다고 했다. 그가 ‘커피 세계지도’ 앞으로 안내하더니 일장 커피 연설을 시작했다. “커피는 적도 부근 고산지대에서 잘 자랍니다. 고급 품종인 아라비카는 고지대에서 자라고 카페인 함량이 적어요. 그에 비해 로부스타는 재배가 쉽고 낮은 곳에서도 잘 자라죠… 쌀로 비유하자면 드립 커피는 어머니가 장작불을 때서 지은 밥이고, 에스프레소는 전기밥솝으로 한 밥이라고 보면 됩니다.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면 그게 아메리카노 커피입니다….”

생두 구하려 고산지대 올랐다 목숨 잃을 뻔


▎안진영 대표는 신선한 생두를 찾아 케냐와 콜롬비아, 브라질 등 원산지를 찾아다녔다. 각 나라의 기후, 토양에 따라 커피의 질, 값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배웠다. 사진 가운데가 안 대표. / 사진:안진영
안 대표는 커피를 알아가면서 무엇보다 생두 확보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커피도 기호식품인데, 식품은 원료가 중요하잖아요. 밥도 묵은쌀로 하면 햅쌀보다 밥맛이 덜하죠. 금방 로스팅한 커피인데 작년에 수확한 것이라면, 쌀로 치면 묵은쌀이잖아요. 커피는 신선도와 퀼리티가 중요합니다. 커피 맛의 80%는 이 생두에 달려 있어요.”

그는 케냐와 콜롬비아, 브라질 등 원산지를 찾아다니며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종교를 배우고 알아가는 재미를 느꼈다. 각 나라의 기후, 토양에 따라 커피의 질, 값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배웠다. 고산지대 커피농장에서 농부를 만나 ‘커피 밭떼기’ 거래도 해보았고, 경매장에서 고급 생두를 알아보고 먼저 차지하는 행운도 맛봤다.

“일본 바이어들은 케냐, 자메이카, 파나마 농장을 찾아가 생두를 구한 뒤 연구원들이 밤새 신선하고 좋은 품질의 생두를 골라냅니다. 그러고는 다음 날 농장주와 가격을 흥정하며 협상에 들어가죠. 한마디로 퀼리티를 따지죠. 그런데 한국 바이어들은 대개 질보다 양입니다. 농부들 말이, 좋은 것에다 안 좋은 생두를 섞어줘도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일본은 가난한 커피 생산국에 일찍 자본을 투자해 인심을 얻었습니다. 좋은 생두를 골라내 자기들 맘대로 등급을 정합니다. 품질을 개선시킨 뒤 아주 소량으로 생산합니다. 그러면 비싸게 팔 수 있지요. 한마디로 장사할 줄을 알아요.”

그는 커피 원료의 중요성을 공유한 이들과 함께 4년 전 ‘KGA 한국생두협회’를 만들어 회장을 맡았다. 좋은 커피 생두를 구하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다니다 죽을 뻔한 위기도 겪었다고 했다. 2016년, 아라비카 커피를 구하려고 안데스산맥에 갔다가 사달이 났다. “토종 말을 타고 새벽에 1600m 고산지대에 올랐어요. 길이 작은 외길인데 내려오다 그만 말잔등에서 떨어졌지요. 허리와 다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데, 현지 의사가 다리 하나를 잘라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죽어도 안 된다고 했어요. 공포와 고통 속에 몇 번을 기절했는지 몰라요. 그때 생전 안 하던 기도를 하게 되더군요. 신이 계시다면, 제발 제 다리와 발이 붙어 있게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죠.” 다음 날, 기적처럼 발가락이 움직이더라고 했다. “이를 악물고 진통제를 먹고 견뎠어요. 귀국해서 국내 병원에서 진단해보니 척추 날개뼈 3개가 끊어졌다고 하더군요. 천만다행으로 수술이 잘돼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어요. 두 번 사는 인생이라는 생각에 더욱 봉사하는 마음으로 커피를 만들고 있습니다.”

커피 한 잔에도 의미와 재미있는 스토리 담아


▎안진영 대표는 커피 수입과 가공, 교육, R&D까지 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앞으로 화학과 의학까지 공부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가 지금까지 커피에 쏟아부은 돈만 수십억원이다. 그런데도 그의 회사 연매출은 수억원에 불과하다. 직원도 5명뿐이다. 하지만 그는 미래를 낙관했다. 그가 만드는 커피에 사랑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언젠가는 그 사랑을 알아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커피 한 잔에도 의미와 재미를 주고 싶어 드립 백에 일일이 스토리를 담고 이름을 지었다. 일례로 CNC커피 대표 브랜드인 ‘King’s Tear(왕의 눈물)’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담았단다.

“제가 ‘오얏꽃 필 무렵’이라고 이름붙인 커피는 케냐산입니다. 케냐에 ‘자카란다’라는 꽃이 있더라고요. 우리나라 오얏꽃과 비슷해요. 오얏꽃이 원래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꽃이었어요. 우리 역사의 아픔을 생각하며 이름 지었죠. ‘가베의 소망’은 에티오피아 커피입니다. 일본제국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처럼 에티오피아도 왕족이 살해당한 아픔의 역사가 있더라고요. 커피를 마시던 고종의 조선 독립 소망을 생각하면서 지었어요.”

그는 한번 입을 열면 막힘이 없는 달변이었다. 그의 얘기를 다 듣다가는 날이 샐 것 같았다. 그의 비전을 듣고 싶었다. “커피는 늘 혁신이 필요한 식품입니다. 그래서 R&D가 중요합니다. 이제는 우리도 미국 블루보틀 브랜드 같은 고급커피를 마실 때가 됐다고 봅니다.”

그는 조만간 직접 오프라인 매장을 열어 자신의 커피를 전국화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브랜드 이름은 ‘데미세븐(Demi7)’이라고 했다. 프랑스어 데미타세(Demitazza)에서 따온 말인데, 에스프레소를 담는 작은 잔을 일컫는다. 그는 여기에 커피의 7가지 덕목을 담았다고 했다.

“일반 커피 잔의 절반으로 만족하니 ‘계영배(戒盈杯, 술이 일정한 한도에 차오르면 새어나가도록 만든 잔)’가 따로 없지요. 겸손의 덕목입니다. 이 작은 잔에서 모든 커피가 다 나오니 제네시스가 아닙니까! 커피 잔에는 꼭 잔 받침이 따라오잖아요. 이건 동반(同伴)의 덕목이고요. 그리고 커피 잔은 다른 잔에 비해 두껍습니다. 높은 온도를 유지하려는 건데, 이게 희생입니다. 그런 식으로 7가지 덕목을 담았어요.” 얘기를 듣고 보니 그는 스토리텔링과 작명의 대가였다.

오프라인 매장 ‘데미세븐’ 열어 전국화 포부

그는 커피 수입과 가공, 교육, R&D까지 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앞으로 화학과 의학까지 공부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커피 브랜딩은 마치 폭탄주 제조와 같아서 비율과 조화가 잘 이뤄져야 하는데, 그러면 커피 성분도 잘 파악해야 되니까 화학 공부가 필요합니다. 커피의 카페인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도 다 연구해야 하니까 의학도 공부해야 하고요. 커피 문화를 보급하는 데도 힘쓰고자 합니다. 앞으로 커피는 식음료가 아니라 문화 산업으로 확산될 겁니다. 우리 공장에 한덕수 국무총리, 이낙연 전 총리가 다녀갔어요. 커피가 사랑이고 문화라고 얘기했더니 다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커피의 날 제정에도 앞장설 겁니다. 10월 1일은 국제커피기구(ICO)가 정한 커피의 날입니다. 이미 70개국이 커피의 날을 제정했는데,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터키만 가입했어요. 커피를 즐기고 알아야 문화강국입니다.”

안 대표는 커피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됐고, 인생의 깊은 의문이 모두 해소됐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를 단순히 커피 마니아로 칭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는 그의 사업이자 인생이자 종교와도 같았다.

“커피를 음미하는 행위에는 사람들을 연결하고 공동체를 결성하는 힘이 있다. 그 놀라운 위력에 나는 매료되었다.” 스타벅스 창립자 하워드 슐츠의 말이다. 그의 말을 변주한다면 안진영 대표의 커피에 대한 놀라운 열정에 매료된 이들이 앞으로 늘어날 것 같다.

-글 나권일 월간중앙 편집장 na.kwonil@joongang.co.kr / 사진 김성태 객원기자

202211호 (202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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