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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17) 남산 둘레길 산행....경이로움에 빠졌다 

 

좋은 산은 꿀맛 같은 오아시스, 청량음료 맛이 난다.

어떻게 저렇게도 예쁠까? 독야청청 지조 속에 군계일학 홍일점, 홀로 익어가는 저 단풍처럼 남산은 그냥 그런 산, 그런 둘레길이 아니었다. 다른 산과 확연히 다른 기풍과 지조, 멋과 아름다움이 잘 버무려진 고려청자 속 고상한 날개를 펼친 고귀한 한 마리 학처럼 품격 높은 향기가 흐르고 있었다. 역시, 대한민국의 중심 산이었다.


20여분 만에, 여러 작은 나무들로 우거진 수풀을 지나자 고매한 소나무 군락이 나왔다. 애국가 4절은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라고 노래하지만, 세월이 흘러 풍요와 평화가 이 땅에 깃들어서 그런지 어딘가 모르게 단아하고 세련된 인자한 할아버지, 군자의 멋이 풍겼다. 특히 속리산 정이품송 맏아들 소나무는 어버이 인품을 닮아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지만 요즘의 세태를 반영한듯, 솔직히 풍류와 멋은 조금 떨어졌지만, 키가 냅다 섹시하게 컸다.

허스키 보이스가 매력적인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 공원길을 걸을 때는... 비록 안개는 안 끼었지만, 그 찐한 맛을 한 움큼 담아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간 옛 추억을 생각하다 고개 들어 파란 하늘군과 하얀 뭉개구름양의 이팔청춘 아름다운 사랑놀이를 보고... 뜬금없이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가슴에 맺혔다. 아! 그립지만 가슴 시린 옛 추억들, 미련 많고 아쉬움만 남은 그 슬픈 사랑들을 모두 훨훨 날려 버리고 메마른 고목에 새순이 돌아 육십 청춘 헌 가슴이 다시 뛴다면 찐하고 찐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멋진 사랑만 나누리... 그렇게 그렇게 다짐도 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남산 동남방향 중턱에 오르자 아직 설익은 노랗고 붉은 나뭇잎을 간직한 파란 나무들이 넓은 인도를 따라 펼쳐졌고, 저만치서 남산의 어느 가을날이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더욱 깊어지기 전, 고단했던 지난날의 모진 비바람을 추억하고 노랗고 붉은 오색 찬란한 풍요로운 결실을 보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단풍나무들이 따스하고 온화한 태양 빛을 이불 삼아 편안하고 여유롭게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다가 인제는 돌아와 멋진 자식들을 장성시킨 후 편안하게 누운 내 누님을 닮은 꽃처럼... 가을이 그렇게 풍성하고 아름답게 원숙해지고 있었다.

정남향으로 들어서자 아기자기한 산속 연못들이 나왔다. 나름 아름다웠지만, 안타깝게도 고인 물을 갈아 주지 않아서 물 위로 떠올라 살겠다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예쁜 잉어들을 보면서... 코로나, 우크라이나 전쟁, 경기 침체에 휩싸인 서민들의 힘들고 고달픈 삶을 보는 듯하여 마음이 무겁고 착잡해졌다.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의 상황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배고픈 서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살겠다고, 자기 배만 채우는 위정자들에게 넌더리가 나지만 딱히 방도가 별로 없어, 그렇고 그런 것이 세상이라고 위로하며 살아왔는데…. 산행을 함께한 모임의 회장님이 오늘 밤 당장 해당 부서 인터넷에 접속해 잉어들을 살리겠다고 하니 참 신선하고 좋았다. 만시지탄이지만, 하찮은 일이라도 크게 눈을 뜨고 행동해야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멋진 멘트였다.


1시간쯤 걸은 후 일행들이 쉴만한 벤치가 보여 브레이크 타임을 가졌다. 요즘 가장 뜨거운 독재자 푸틴이 제일 먼저 메뉴로 올라왔다. 세상사는 항상 음과 양이 공존함을 알지만, 아무리 독재자 괴물이지만, 푸틴도 이성이 있고 심장이 뛰는 인간이자 러시아의 지도자인데... 자기는 물론 지구인들 모두가 멸망할 수도 있는 핵폭탄 단추를 누르고도 남을 놈이 아닐까 하는 걱정부터.... AI가 스스로 딥러닝하여 필연적으로 인간들보다 더 똑똑하고 지성을 갖춘 로봇을 만들어 인간들이 역으로 로봇의 노예로 사는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왠지 우울하고 씁쓸한 이야기를 하다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여전히 남산은 새롭고 볼거리가 많았다. 힐튼호텔 쪽으로 방향을 잡자 안중근, 이승만, 이시형 등 이 나라 영웅들의 동상이 나왔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지만, 더 훌륭하면 오래도록 썩지 않을 동상도 남길 수 있음을 깨달았다. 다음에 시간을 내어 꼼꼼히 훑어보고 그분들의 사상과 업적을 가슴에 새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북한산이 딱 보이는 전망대에서 번영스럽고 자랑스러운 멋진 서울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감회가 깊게 다가왔다. 한마디로 황홀했다. 불과 70여년 만에 6.25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10대 경제 대국이 됐다. 하찮게 여겼던 우리 문화들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 인류 문화를 선도하는 그 멋진 모습이 너무너무 뿌듯했다. 마치 하늘과 맞닿은 듯한 마천루 서울의 고층빌딩들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대단하고 멋진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실감하면서 참으로 감개무량해졌다. 그 순간 저 멀리 우주와 교신하고 있는 듯한 서울 남산타워가 더욱 웅장하게 눈에 들어왔다. 대한민국과 서울이 더욱 희망차고 멋진 모습으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내 가슴에 선명하게 낙인을 찍었다. 명실상부, 남산이 대한민국의 멋진 중심 산으로 다가왔고 마침내 그 매력과 향취가 화룡점정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딱 3시간 만에 출발했던 장소로 원점회귀, 남산 등산을 마친 후 역사의 숨결이 숨 쉬는 태극당에서 맛있는 빵을 사고 장충동 족발집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맛있는 원조 족발을 먹고, 멀리 강서구 발산역 눈물 서린 중년 여사장의 뚝배기 옻닭을 2차로 흥겹게 먹고, 행복한 산행을 모두 마쳤다. 참으로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산행이었다. 이렇게 멋진 친구들과 향기로운 산을 걷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니... 행복이 저절로 검은 가슴에서 꽃을 피웠다. 좋은 산은, 꿀맛 같은 오아시스다. 청량음료 맛이 난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0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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