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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5)] '흥부전'에서 흥부는 어떻게 9남매를 키울 수 있었을까 

소빙기로 기근 나자 한양에 사람 몰려… 맞벌이로 품 팔아 생계 이어갔을 것 

경신대기근에 놀란 조선, 한양에서 백성들에 적극적 구휼 정책
흥부가 가난했던 이유는 장자 장속제 따른 놀부의 부 독점 때문


▎흥부와 그 아내는 맞벌이로 품을 팔며 가정의 생계를 이어갔다. 사진은 영화 [흥부] 스틸컷. /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1960~1970년대 영화를 보면 시골에서 상경한 소녀들이 무작정 가방 하나 들고 서울역에 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입’ 하나라도 덜고 싶은 가난했던 사회의 한 풍경이었다. 농촌의 가족들은 학교도 보내지 않은 ‘딸’들이 스스로 제 살길을 찾아주기를 바랐고, 이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울로 갔다. 그래도 서울에 가면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만만한 직업은 식모였다. 학력도 기술도 필요 없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문턱을 거의 밟아본 일이 없는 이들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1960년대 서울에는 식모를 원하는 가정이 많았는데, 무려 50% 이상이 식모를 뒀다고 한다. 인건비가 매우 저렴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간단한 숙식을 제공하고 용돈 정도만 쥐여주면 식모를 하겠다는 어린 여성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1960년대 서울역에서 가방을 든 채 서성이던 소녀들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강북에 자리 잡은 주택에 식모로 가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17세기 조선에서 지방에 살던 누군가 무작정 상경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십중팔구 마포나 용산으로 갔을 것이다. 당시 경강(광나루~양화진)으로 불리던 한강 변 일대에는 돈과 사람이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가면 좋을 것 같다.

기근으로 조선 인구 1200만명 중 85만명 사망


▎1960년대 서울에는 간단한 숙식과 소액의 용돈을 제공하면 식모를 하겠다는 어린 여성들로 넘쳐났다. 사진은 서울 마포아파트로 보이는 실내에서 아이를 보는 식모로 추정되는 여성의 모습.
이 시리즈의 첫 화([킹덤: 아신전], 소빙기가 부른 나비효과)에서도 다뤘지만, 17세기는 소빙기(小氷期)가 동아시아를 강타했던 시기다. 기온이 낮아지고 기후가 예측하기 어렵게 불순해졌다. 지금 우리는 온난화를 걱정하지만, 사실 인류 역사에서 온난화가 문제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까지의 문제는 언제나 빙하기였다. 기온이 평균 아래로 낮아지면 농산물의 생산이 급감하고, 곡물값이 급등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경우 소위 ‘큰 정부’를 지향하면서 재정을 확장하고 각종 사회안전망을 만들지만, 이때는 17세기였다. 세금을 감면하는 게 그나마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정책적 지원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정부 세수가 감소하는 만큼 ‘큰 정부’ 같은 것은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대개 이것은 사회 상황을 악순환으로 만들어 모든 것을 뒤엉키게 했다. 이런 악순환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무너진 것이 명나라였다. 나중에 후금(청)이 중원을 접수하긴 했지만, 명확히 하자면 명나라는 이미 후금이 들어오기 전에 이자성 등이 일으킨 각지의 농민 반란으로 붕괴했다. 명나라는 아마도 17세기 소빙기가 무너뜨린 가장 유명한 왕조일 것이다.

국경을 맞댄 조선도 굉장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현종 시대 일어났던 경신대기근(1670~1671)은 조선을 붕괴 직전으로 몰고 갔던 거대한 사건이었다. 소빙기에 따른 전국적인 기근이 발생하면서 조선 인구 약 1200만명 중 85만명 가량이 사망했다. 유례없는 재난에 조선의 지도층은 당황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당장 급한 불을 꺼야 하는 만큼 구휼 정책을 실시했다.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게 하기 위해 관에서 비축하던 곡식을 꺼내어 나눠줬다.

이런 구휼 정책이 가장 적극적으로 시행된 곳은 당연히 한양이었다. 왕이 사는 도성에서 백성들이 굶어 죽는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북한이 아무리 힘들어도 평양만큼은 일상생활을 어려움 없이 누린다고 하는데, 이와 비슷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성난 백성들이 궁으로 몰려들지 않도록 적어도 수도만큼은 재난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방도 나름의 노력을 했을 것이지만, 중앙정부만큼 가용 자원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근대 시대라고 해도 이런 소문은 빨리 퍼지기 마련이다. “한양으로 가면 굶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금세 전국으로 퍼졌고,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기보다는 살길을 찾고자 했던 이들은 한양으로 향했다.

경신대기근뿐만 아니라 17세기 중후반은 소빙기로 내내 힘들었던 시기였다. 안동 권씨 족보를 분석한 한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에 따르면 15세기의 평균 자녀 수는 3.41~3.73명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전주 서씨 족보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2.5명으로 나타났다. 즉 조선 후기는 전기보다 인구 감소가 진행되던 시대였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이유 등으로 인해 이때 한양 인구는 되려 증가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효종 8년(1657)의 8만572명에서 현종 7년(1666) 19만4030명으로 급증했다. 이것은 한양에서 적극적으로 구휼책이 진행됐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양은 이렇게 각지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소화할 여력이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랬다. 비록 초기부터 정교하게 설계된 정책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입에 풀칠하려는 백성들, 한양으로 모여들어


▎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 실물 크기로 전시된 고려 시대 조운선.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대동법이 실시돼 조운선의 선적 규모가 크게 증가했다.
조선의 세금제도는 기본적으로 조용조(租庸調) 시스템이었다. 조(租)는 수확한 곡식에서 거두는 세금이고, 용(庸)은 노동력의 징발이다. 조(調)는 지방 특산품을 거두는 것이다. 그런데 17세기 조선에서는 고립제(雇立制)라는 제도가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바로 노동력을 징발하는 대신 돈으로 노동력을 고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중효과’가 있었다. 예를 들어 한양 종로에서 장사로 큰돈을 벌고 있는 김철수라는 사람에게 갑자기 청계천 정비 공사를 위해 보름간 와서 일하라고 하면 어떨까. 개인의 사업도 손해지만, 나라 입장에서도 상업 발달을 저해하면서 국가의 부를 깎는 셈이었다. 김철수 입장에서는 차라리 국가에 일정 금액을 바치고 장사를 계속하는 편이 나았다. 고립제가 정착되자, 각자가 생업에 종사하면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고립제를 통해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특히 각종 궁과 관청이 모여 있는 한양에는 일거리가 많았다. 구휼책이 아니더라도 이런 일자리를 얻어 입에 풀칠하려는 사람들이 한양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벌어진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대동법의 정착이었다. 여기서 대동법이나 그 도입 과정을 세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위에서 언급한 조용조의 세금 시스템을 쌀로 통일하고, 세금 부담액도 경감하는 정책이었다. 이전엔 여러 가지 반대로 좀처럼 시행하지 못하다가 소빙기로 인해 탄력을 받고 진행됐다.

대동법을 실시하자 전국에서 올라오는 조운선(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운반하는 배)의 선적 규모가 크게 증가했다. 이중 마포는 서해안과 한강 상류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전국에서 실어온 곡물과 서해에서 들여온 생선, 건어물 등의 해산물이 집하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배에서 짐을 하역하는 것을 돕는 임노동업이 발달했다. 이들은 일당으로 2전 5푼 정도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훈련도감 군인보다 나은 대우였다.

그래서 [흥부전]을 보면 흥부와 그 아내는 “시장 갓에 나무 베기, 곡식 장수의 역인(驛人) 서기, 각 읍주인들의 갓일 가기, 술밥 먹고 말짐 싣기, 닷푼 받고 말편자 박기, 두푼 받고 똥재치기, 한품 받고 비매기…” 등 각종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 나오는데, 조선 후기에는 이처럼 부부가 맞벌이로 품을 팔면 한 가정이 생계는 이어갈 수 있는 임시 노동직이 발달했다. 물론 흥부전의 주인공들은 자녀를 무려 9명이나 두는 바람에 그것만으로는 어려웠겠지만 말이다.

[흥부전]은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또 하나 던져준다. 바로 장자 상속제다. 흥부가 가난했던 이유 중 하나는 부모님의 재산을 형인 놀부가 모두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리학의 나라 조선도 전기에는 균분 상속제가 대세였다. 퇴계 이황의 아들 이준이 남긴 분재기(分財記)가 유력한 증거다. 이에 따르면 이준은 3남 2녀를 뒀는데, 재산을 비교적 차등 없이 나눠줬다.


자원 고갈로 땅 부족해지자 장자 상속제 심화

그런데 조선 후기가 되면 철저한 장자 상속으로 바뀌게 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일각에서는 성리학적 가치관이 뿌리를 내리면서 그렇게 바뀌었다고 한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사회가 바뀌는데, ‘이념’ 하나만으로 전통적인 상속 방식이 뒤집히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분명히 여기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는데, 그중 하나가 자원의 고갈이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 대부분의 평지뿐 아니라 황무지가 개간돼, 산간까지 개발할 정도로 땅이 부족해졌다. 그래서 땅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산에 들어가 화전(火田)을 일구고 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녀에게 균분 상속을 한다는 것은 재산이 분산돼 가문의 힘이 약화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쉽게 말해 이전에는 재산(토지+노비)을 각자에게 조금씩 나눠주면, 노비들을 이용해 황무지를 개간하는 등 재산을 늘릴 수 있었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그것이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시기부터 조선의 주요 가문들은 장자 상속으로 전환한다.

이것은 중세 유럽에서도 비슷하게 진행됐다. 아니 오히려 더 가혹하게 돌아갔다. 중세 유럽 사회가 안정되자 귀족 가문들은 맏아들에게 재산을 모두 물려주는 시스템으로 전환했다. 역시 가문의 힘을 약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재산 상속을 받지 못한 귀족의 둘째, 셋째 아들들은 사제가 되거나, 아니면 새로운 기회를 얻고자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거나,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향하곤 했다. 15세기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이끈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 엔리케가 대표적이다. 주앙 1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각종 정복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415년 북아프리카의 세우타 정복전에 직접 참전해 싸웠으며, 이후 아프리카 서해안에 많은 탐험선을 보내어 항로를 개척하기에 주력했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모색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혼테크’, 즉 여왕이나 외동딸인 공주와의 결혼뿐이었다.

이런 사정은 인기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서도 잘 나타난다. 아렌델 왕국의 여왕 엘사에게 접근하는 이웃 나라의 왕자 한스 웨스터가드는 1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신세다. 왕위는 고사하고 성 하나 얻기 어려웠을 그는 엘사와 결혼해 왕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찾아온 것이다.

다만 조선과 유럽의 차이가 있다면, ‘나라 밖’에 대한 인식이었다. 유럽에서는 나라 밖은 새로운 기회를 의미했지만, 조선에서는 ‘중원’ 아니면 ‘오랑캐’였다. ‘중원’이든 ‘오랑캐’든 조선인이 살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17세기 이후 두 세계는 극단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됐다.

※ 유성운 중앙일보 기자.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212호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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