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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21)] ‘반드시 봐야 할 곳’ 7대 불가사의 

신·자연·우주의 의미를 음미할 수단이자 목적이었다 

7대 불가사의 중 흔적 남은 곳은 이집트 피라미드 등 3곳뿐
2000여 년 전 출간된 ‘여행 지도’이자 미쉐린 가이드의 원조


▎기원전 1세기 세계 최대 인공 조형물로 통하던 튀르키예 에페소스 아르테미스 신전의 현재 모습. 왼쪽 언덕 위 건축물은 서기 5세기 들어선 기독교 비잔틴 대제국의 성벽이다. / 사진:유민호
글로벌 시대의 아이콘 중 하나로 미쉐린 레드 가이드(Michelin Red Guide)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서도 2016년부터 시작된, 세계 미식가를 바쁘게 만드는 연중행사 가운데 하나가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 발표다. 별 하나·둘·셋으로 레스토랑 수준을 매긴 미식 랭킹이 세계 주요 도시에서 주기적으로 공표된다. 한국에서도 지난 10월 ‘2023년 스타 레스토랑’ 28개를 선정해 공식 발표했다. 스타뿐만 아니라 대중적 취향이 짙은 저가의 빕 구르망(Bib Gourmand)을 포함해 총 176개 레스토랑이 2023년 한국 미쉐린의 주인공이다.

5년 전 한국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에 들른 적이 있다. 이후 갈 기회가 없었고, 특히 식사비용이 너무 고가여서 다시 찾지 않을 계획이다. 미쉐린의 원조는 프랑스다. 한국 스타 미쉐린의 식사비는 프랑스의 배 이상이다. 괜찮은 와인 하나 시키면 3배로 껑충 뛴다. 창조나 한식 퓨전, 와인과 김치의 조화도 좋다. 그러나 너무 비싸다. 앞으로 나아지겠지만, 전반적 수준을 봐도 아직은 프랑스나 이웃 일본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원조·원천을 이해하면 불편해진다. 유럽·일본의 미쉐린 레스토랑은 노부부나 청춘 남녀, 나아가 샐러리맨도 쉽게 접할 수 있다. 한국의 미쉐린은 일반인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세계’로 바뀐 듯하다.

미쉐린 레드 가이드는 자동차가 탄생할 당시 등장한 인류의 새로운 소프트 파워다. 1900년 프랑스에서 발간한 초판 3만5000부 이후 매년 세계 곳곳에서 출판하고 있다. 원래 용도는 레스토랑이 아닌 프랑스 숙박업소 안내서에서 출발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쉐린의 모기업은 자동차 타이어 제조사다. 당시 자동차는 물론 기차가 등장하면서 프랑스 곳곳에 관광 열풍이 불었다. 인상파 그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바다를 배경으로 한 중산층 부르주아다. 기차나 자동차로 교외 피크닉에 나선 당대의 신세대다. ‘피크닉=자유=풍요’로 해석되던 시대다. 그 전까지만 해도 바다 주변에서 깨끗한 옷차림을 한 파리지앵을 발견할 수 없었다. 교통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운 좋게 간다고 해도 머물 곳이 없었다. 미쉐린 레드 가이드는 그 같은 불편을 해결한 시대의 산물이다.

‘숙박 안내서’로 출발한 미쉐린 가이드

자동차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도로 상황은 엉망이었다. 운전 중 펑크는 물론 차량 고장 탓에 고생하기 일쑤였다. 미쉐린은 책을 통해 자동차나 타이어 수리점의 위치를 알려줬다. 프랑스 전 지역의 지도를 세분화한 뒤, 자동차 여행객이 머물 호텔이나 레스토랑의 정보를 삽입했다. 스타 레스토랑 선정은 관련 정보를 매년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이벤트 중 하나다. 원래의 랭킹 선정은 레스토랑이 아니라 호텔과 관련 식당에서부터 시작됐다. 자동차·여행·호텔·음식으로 이어지는 인류 초유의 문명 문화가 미쉐린을 통해 데뷔한 것이다. 한국식 미쉐린 탐사법이지만, 서울에 밀집한 176개 미쉐린 레스토랑 중 하나를 선택해 즐기는 식이다. 아마 미식에 기초한 국적별 선택이 대부분일 것이다. 프랑스나 유럽은 다르다. 도시에서 벗어나 멀리 떨어진 여행지의 호텔에 머문 뒤 저녁 내내 음식과 여행담을 즐기는 신세계 도전으로서 미쉐린 레스토랑이다. 미식 이전에 모험이다.

‘고대 7대 불가사의(Seven Wonders of the Ancient World).’ 역사나 여행에 관심이 있다면 귀에 익숙한 말일 듯하다. 기원전 2세기 그리스 역사철학가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가 처음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원래 ‘반드시 봐야 할 곳(Things to be seen)’이란 의미로 등장했지만,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고대 7대 불가사의란 말로 정착됐다. 이집트 피라미드와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등대, 이라크 바빌론의 공중 정원, 튀르키예 주변 에페소스 아르테미스 신전과 할리카르나소스, 그리스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과 로도스섬 청동상이 고대 7대 불가사의 주인공이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7대 불가사의 스토리는 2000여 년 전 출간된, 미쉐린 레드 가이드의 원조다. 공통 키워드는 여행이다. 여행을 통한 새로운 세계 탐사가 둘의 공통분모다. 그리스 시쿨루스가 7대 불가사의에 전부 들렀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당대 사람들이라면 시쿨루스가 묘사한 초대형 7개 인공 조형물 얘기를 듣는 순간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여행은 인간의 불타는 본능이다. 20세기 초 미쉐린을 대하는 순간 터져 나왔을 새로운 미 개척 드라이브 코스에 대한 동경은 그리스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7대 불가사의는 다리를 이용한 ‘눈과 정신’의 새로운 체험인 데 반해 미쉐린은 자동차를 통한 ‘혀와 머리’의 시간이란 부분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여행을 통한 인간의 행복과 품격 향상이란 점이 공통 가치이자 의미다.

아무리 여행 본능이라고 해도 “무려 2000여 년 전 7대 불가사의 방문이 물리적으로 가능했겠나”라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오늘날의 쾌적한 여행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다. 그리스 당시의 아날로그 여행법인데, 태양빛이 비치는 낮에만 이동이 가능하다. 육지에서는 대략 하루에 20㎞ 정도 이동한다고 보면 된다. 바다는 한층 더 빠르다. 지중해 에게해를 통하면 하루에 50㎞를 이동하는 것도 됐다. 산과 나무로 막힌 육지보다는 탁 트인 바다야말로 ‘고속도로’로 활용하기 좋다. 미국 스탠퍼드대 역사학과가 개발한 고대 로마 당시의 교통로를 재현한 소프트 앱 ‘오르비스(orbis.stanford.edu)’에 따르면 1세기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현 튀르키예 이스탄불)까지 최고속 여정이 51.9일로 나타난다. 바다와 육지를 합쳐 전부 1694㎞ 거리를 하루 평균 약 32㎞ 이동한 셈이다.

음식이나 숙소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자체 조달이나 노숙이 주류였겠지만, 알렉산더 대왕이 1등 공신으로 보인다. 시쿨루스 기록은 알렉산더가 지중해 에게해 소아시아 이집트를 전부 평정한 직후 발간됐다. 헬레니즘 말기인 셈이다. 통일된 대제국의 등장과 함께 ‘도시국가·민족·인종·종교’를 넘어선 상호 신뢰가 생기게 된다. 당연하지만 ‘상호 신뢰=상호 부조’다. 상업용 숙소나 음식점이 거의 없던 시대였지만, 개인 집과 음식이 여행객에게 제공됐다. 이후 대제국 로마의 출현과 함께 보통 사람도 그리스·메소포타미아·북아프리카·페르시아를 여행할 수 있게 됐다.

7대 불가사의와 미쉐린 가이드의 공통분모는 여행


▎고대 7대 불가사의. / 사진:위키피디아
고대 여행을 얘기할 때 주의할 부분이지만, 21세기 여행과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크게 두 가지 분석 프레임이 떠오른다. 첫째, 신에 대한 열정이다. 앞서 ‘7대 불가사의=눈과 정신의 새로운 체험’이라고 강조했다. 고대 여행이 갖는 기본 개념이지만, 종교적 차원의 순례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일신 사상이 생기기 전의 세계관이지만, 인간은 삼라만상 모든 신을 두려워했다. 죽음·기아·전쟁이 일상화한 시기일수록 신의 가치와 의미가 한층 중요했다. 외지 곳곳에서 만난 신에게 기도하고 공물을 바쳤다.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는 말이 등장한 것은 1882년이다. 독일 철학가 니체에 의해 종교적·관념적·철학적 차원의 신을 추방한 ‘인간 중심 선언’이다. 니체가 말한 신은 천벌과 함께 인간에게 죄의식을 심어준 무서운 존재였다. 2000년 전 7대 불가사의 당시의 신은 니체가 추방할 당시 신보다도 100배 이상 엄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그리스 아테네를 기준으로 하면 7대 불가사의 조형물 전부가 반경 1000㎞ 안에 들어서 있다. 당시 아무리 늦어도 한 달 내외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한군데만 보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친김에 7곳 전부를 둘러보더라도 길어야 반년 정도 걸렸을 것이다.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반년 여정이 엄청 길게 느껴질 듯하다. 반면 당대의 사람들은 결코 길지 않은 보통의 일상적 성지순례 정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7대 불가사의 조형물 자체가 신을 찬미하고 신의 세계로 연결되는 공간이다. 현지로의 여행은 신의 뜻을 새기는 성지순례 그 자체로 해석됐다. 당시 성지순례는 후손 번성·무병장수·경제적 안정으로 연결되는 최고의 보험과 같은 존재였다. 미쉐린 레드 가이드는 니체의 ‘인간 중심 선언’ 직후 탄생했다. 21세기 여행안내서가 그러하듯 신에 대한 열정이나 성지순례의 개념이 전혀 없다. 산업화로 들어선 인간의 욕망을 응축한 책이 미쉐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비즈니스다. 신이나 성지순례 차원의 얘기에서 갑자기 교역 문제가 나온다는 것이 이상할 듯하지만,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여행은 비즈니스로 직결된다. 간단히 말해 경제적 목적이 새로운 세계로 가는 주요 의미 중 하나였다. 신기한 물건이나 현지 특산물을 발견해 소개하고 거래할 목적으로서의 여행, 아니 성지순례다. 21세기 이슬람권 지역의 특징 중 하나인 1주일에 한두 번씩 열리는 장마당을 보자. 프랑스의 장마당 마르셀(Marcel)의 원형이기도 하지만, 이슬람 장마당은 반드시 모스크 주변 어딘가에 들어선다. 비즈니스의 중심이 바로 모스크인 셈이다. 기독교는 이슬람과 달리 교회 주변에서의 비즈니스를 터부시한다.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당시 행한 이른바 ‘성전 정화(淨化)’ 스토리가 배경이다. 예수가 성전을 돈벌이 장소로 활용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했다는 성경 기록에 따라 ‘성전 주변=비즈니스 무공해 지대’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당시는 ‘교역=신전과 신의 조형물 주변’으로 정착돼 있다. 신전과 주변이 장사 무대가 된 것은 나름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그리스 로마는 물론 이전 메소포타미아·페르시아·이집트에 존재한 신전의 기능 중 하나가 비즈니스였기 때문이다. 공물을 바치면서 신을 추앙하는 성스러운 땅인 동시에 금이나 지하자원 등 중요한 물건과 식량을 보관하는 물류창고가 신전의 기능이었다. 돈을 보관하고 빌려주는 은행 기능도 겸했다. 신관의 역할은 신에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돈·물건·비즈니스에 관한 세속적 업무에까지 미쳤다. 그 같은 배경을 고려하면 이슬람권의 ‘모스크=장마당 중심지’는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같은 기존 흐름에 반했다고 볼 수 있다.

‘신성한 신탁’ 개념의 비즈니스 현장 답사


▎아르테미스 여신은 이집트의 이시스 신과 로마의 비너스로 연결되는 출산·풍요·번성의 상징이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조형물 대부분은 신과 비즈니스를 하나로 엮는 교차로 역할을 했다. / 사진:유민호
그리스 로마 당시의 일자형 거리 표식판 머리 부분에는 신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신은 헤르메스(Hermes)다. 수천만원대 가방과 가죽 제품을 아우르는 브랜드의 황제 프랑스 에르메스도 그리스 신에서 유래된 상표다. 그리스인은 헤르메스를 다양한 능력과 역할을 감당하는 신으로 추앙했다. 보통 신발이나 모자에 날개를 단 모습으로 표현했다. 제우스의 전령사인 우편의 신, 빠른 계산에 기초한 장사의 신, 여기저기 오가는 여행의 신이 그리스인이 본 헤르메스의 모습이다. ‘우편=장사=여행’을 하나로 묶은 신인 셈이다.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우편·장사·여행’를 동일한 개념으로 수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세기 기준으로 본다면 ‘우편=인터넷, 장사=국제 자유무역, 여행=글로벌 시대’로 풀이할 수 있을 듯하다. 그 같은 배경하에서 살펴보면 7대 불가사의로의 여행은 ‘신성한 신탁(信託)으로서의 비즈니스 현장 답사’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여행을 많이 할수록 신을 기리는 성지순례 체험을 하고, 사람·도시·국가 간 비즈니스도 활성화하는 구도인 셈이다.

21세기 상황이지만 7대 불가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은 총 3곳에 불과하다. 아직도 건재한 이집트 피라미드가 대표적이다. 튀르키예의 에페소스 아르테미스 신전과 보드룸의 할리카르나소스도 그나마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등대, 이라크 바빌론의 공중 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로도스섬의 청동상은 책속의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 정확한 위치조차도 파악이 안 된 상태다.

필자는 7대 불가사의 흔적 3곳을 모두 체험했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20여 년 전 들른 적이 있다. 부끄럽지만 인류 문명·문화사에 무지(無知)했던 시절이다. 바늘방석 같은 낙타 등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고생하면서 ‘크다·높다·넓다’ 등의 형용사만 반복한 여행이었다. 개인적 판단이지만, 무지할수록 형용사나 부사를 남발하는 것이 전부다. 명사, 특히 고유명사가 없는 기억은 ‘희미한’ 한순간 추억에 그칠 뿐이다. 형용사나 부사가 아닌 명사와 고유명사가 많은 여행일수록 한 단계 높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기둥 하나만 달랑 남은 불가사의 현장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남쪽으로 100㎞ 떨어진,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할리카르나소스 무덤. 무덤의 주인은 마우솔로스다. 기원전 4세기 건립 당시 높이가 45m에 달했던 초대형 조형물이다. / 사진:유민호
튀르키예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할리카르나소스는 필자의 주된 여행 루트 중 하나다. 둘 다 튀르키예 동부의 아나톨리아 에게해와 인접해 있다. 아르테미스와 할리카르나소스는 남북으로 100㎞ 정도 떨어져 있다. 단 하루면 두 군데 모두 자세히 보면서 돌아다닐 수 있다. 여름철이면 유럽에서 온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 두 군데 중 필자가 애착을 갖는 곳은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신전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기둥이 이유인데, 높이 20m 정도 되는 기둥 맨 꼭대기에 학이 살고 있다. 봄에 가면 막 태어난 새끼들도 볼 수 있다. 지난 5월에는 무려 새끼 네 마리가 좁은 기둥 위의 집에 거주 중이었다. 오후 내내 지켜보니 부모가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기둥 하나만 달랑 남은 7대 불가사의 현장이지만, 자연의 파워와 생명체의 생존력이 넘실대는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뻥 뚫린 공간을 지켰던 초대형 신전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여행 순례 비즈니스에 나섰던 고대인의 모습도 떠올랐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세월과 함께 모두 흙과 재로 변한다.

기둥 주변에서 장사하던 사람에게 어린 새끼 학들이 언제 독립하는지 물어봤다. “새끼는 원래 다섯 마리였다. 현재 네 마리지만, 아마 곧 두 마리 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기둥 꼭대기 위 공간이 협소하고 먹이도 모자라기 때문에 새끼들끼리 서로 싸우게 된다. 한 마리가 이미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아마 네 마리 가운데 두 마리도 곧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약한 아이가 20m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 잔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부모 학은 떨어진 새끼 학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여름이 되면 새끼들도 독립해 다른 곳으로 간다. 부모 학도 겨울이면 어딘가로 갔다가 봄이 되면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돌아온다. 아르테미스는 번성과 출생의 신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에 남은 유일한 신전 기둥 위의 학 가족 둥지. 매년 봄마다 주인이 바뀌는 곳으로, 번식과 출생의 신 아르테미스의 파워를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 / 사진:유민호
신·자연·우주의 가치와 의미 음미할 수단

아르테미스는 야생동물·처녀·사냥·출생에 관련된 신이다. 로마에서는 다이아나(Diana)로 불렸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메소포타미아의 대지의 신과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Isis)로 연결된다. 고대인이 항상 가까이 두고 싶어 했던 친근한 신이기도 하다. 아르테미스가 7대 불가사의에 포함된 이유는 당대 최대 규모의 신전이었기 때문이다. 신전의 크기는 보통 기둥의 크기와 개수로 가늠한다. 영국 고고학팀이 공개한 아르테미스 신전의 조감도를 보면 전방 기둥 8개, 측방 기둥 20개로 이뤄져 있다. 전방이 72m, 측방이 129m에 달하는 초대형 신전이다. 아르테미스의 크기는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파르테논은 전방 기둥 8개, 측방이 18개다. 길이는 전방이 31m, 측방이 70m 정도다. 그리스 문명의 상징이자 아테네의 걸작으로 불리는 파르테논의 거의 2배에 달하는 곳이 아르테미스다. 신전이 크다는 것은 사람의 왕래와 비즈니스가 활발했다는 의미다. 신전 주변은 물론 보관이나 대여와 같은 신전 자체를 통한 교역이 왕성했다고 볼 수 있다. 큰 신전을 지으려면 주변의 교통 상황도 좋아야 한다. 사방으로 연결된 평평하고 넓은 길은 물론 바다와 강을 통한 운송로는 7대 불가사의의 공통분모다.

뻥 뚫린 폐허 속 아르테미스를 대하면서 중국의 만리장성이 떠올랐다. 만리장성이 기원전 3세기 초에 탄생했다는 점에서, 기원전 5세기에 들어선 아르테미스 신전과 동세대 조형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만약 그리스인이 2700㎞ 길이에 이른다는 만리장성을 봤다면 고대 ‘8대 불가사의’로 기록했을까? 100% 확신하지만 만리장성은 결코 불가사의 리스트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높고 긴 성이라고 해도 그리스인 관점에서는 여행·비즈니스·성지순례와 무관한 인간 자유 장애물에 불과했을 것이다. 7대 불가사의의 공통점은 탁 트인 공간에 들어선 조형물로,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조형물 내부 출입에는 제약이 있지만, 노예든 시민이든 조형물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반면 만리장성은 인간의 이동과 교류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탄생했다.

만리장성이 중국과 아시아를 대표하는 조형물이라고 해도 그리스 로마의 세계관으로 보면 불필요한 유적에 불과하다. 중국 입장에서는 ‘외적의 칩입을 막기 위한 방어벽’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존재에도 북방의 침략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당연한 상식이지만 강하고 튼튼한 성이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내부 단결은 물론 스스로 강인한 몸과 마음을 지녀야만 평화를 이뤄낼 수 있다. 현재 중국의 대외 인터넷 차단 시스템 이름이 만리장성이다. 중국인은 유튜브·페이스북·구글·트위터에 접근할 수 없다. 적이 아니라 실제는 중국 내부를 감시하기 위한 물리적·정신적 통제 장치가 만리장성의 진짜 의미인 듯하다.

인간의 행복과 품격을 높이는 수단으로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만큼 좋은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7대 불가사의는 인간의 욕망을 넘어선 신·자연·우주의 가치와 의미를 음미할 수단이자 목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성지순례라고 하면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부터 떠올릴 듯하다. 인류 초유의 자유·지혜·감동을 느낄 디즈니랜드 스타일의 대모험 성지순례가 이미 2000년 전 7대 불가사의에서 시작됐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212호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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