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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19) 대구 팔공산과 갓바위, 비로봉, 동화사 

 

“등산이 뭐가 그리 좋으냐?” 친구의 물음에 답을 찾다

대구에서 예정된 업무 미팅이 월요일 오후 2시였다. 부리나케 준비해서 서울에서 대구까지 KTX를 타고 빨리 달려간다면 오매불망 꼭 한번 가보고 싶던 팔공산을 이번 기회에 밟을 수 있을 듯했다. 동대구역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바로 팔공산으로 내달렸다.

팔공산(八公山)의 높이는 1192m다. 동서로 254km에 걸쳐있고 대구와 영천, 경산, 칠곡, 군위에 이르는 큰 산으로 경북도립공원에 속해있다. 갓바위는 팔공산 관봉(冠峰) 해발 850m 높이에 있었고, 팔공산 케이블카가 있는 곳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주차장까지는 약 8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매년 수능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팔공산 갓바위에서 정성 들여 기도하는 어머니, 할머니들을 매스컴을 통해 보면서 팔공산 어느 산자락 아래에 우주의 기가 많은 곳에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꽤나 경사가 심하고 높은 산봉우리 정상에 있었다. 나 역시 고개를 오르는 내내 숨을 헐떡이면서 새삼 그분들의 정성과 노력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갓바위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푯말에선 계단이 총 1365개라고 했다. 갓바위 부처님이 영험해 계단을 다 오르면 소원 한 개는 꼭 이뤄준다고 했다. 어떤 소원을 빌까 고민에 빠졌다. 건강하게 장수해달라고 빌까, 부자가 될 달라고 빌까, 가족의 화목을 위해 빌까, 멋진 글을 쓰게 해달라고 빌까. 아니면 자식들 모두 좋은 곳에 취직에 훌륭한 사람 되게 해달라고 빌까, 이 땅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빌까. 많고 많은 상념 중에 지금 내가 운영하는 회사가 100년, 아니 50년만 견실하다면 그것이 뼈대가 돼,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을 해결해주지 않을까! 그 생각에 이르자 다른 모든 소원을 뒤로하고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기도했다.

“갓바위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 꼭 우리 회사가 50년 이상을 살아남아 사회에 봉사하고 국가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굽어살펴 주소서!” 그렇게 마음속으로 주저리주저리 읊조리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신기하게도 계속 그것을 되뇌자 그동안 매너리즘과 잡생각에 빠져 등한시했던 회사의 비전과 신념이 생생히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SNS 마케팅을 더욱 활성화하고, 사업영역을 더욱 다각화하는 등 구체적인 구상을 떠올리게 됐다. 어쩌면 갓바위 부처님의 영험함도 있겠지만, 1365계단을 오르면서 생각하고 되뇌면서 확실하게 비전과 신념을 각인하고 구체화하기 때문에 마침내 소원을 이뤄지게 하는 영특함이 특별하게 더 발휘되는 것 아닐까? 나의 소원이 꼭 이뤄지길 기원해 본다.


그렇게 1시간 30여 분을 오르자 드디어 갓바위가 나타났다. 갓바위는 머리 위에 갓을 쓴 듯한 자연판석이 올려져 있어 속칭 ‘갓바위’로 불리며 사람들이 신성시했는데, 불상의 왼손바닥에 약함을 들고 있어 이름 지어진 그 진짜 이름은 ‘약사여래좌상’이다. 최근 3차원 스캔 조사에서 약함을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엄지손가락을 구부려 손바닥 위에 얹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다. [화성지]라는 문헌에 따르면 이 약사여래좌상은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년) 때 의현스님이 어머니의 넋을 기리기 위해 창건했으며 불상의 크기는 받침대를 포함 593.9cm이고 무릎 넓이는 319.6cm다. 불상과 받침대가 큰 하나의 바위에서 조각됐으며, 현대에 들어서는 갓을 쓴 듯한 자연판석(보매)이 학사모와 비슷해, 불상 앞에서 기도하면 수험생에게 효험이 있다고 소문이 난 것이다. 시험 철이면 전국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고 한다. 불상은 마치 무엇을 깨달았을 때 흐뭇하게 웃는 듯 염화미소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불상의 시선에서 내려다본 대구 시가지는 야릇한 신비스러움에 쌓인 한 조각의 무릉도원이었다.

하산길에 반갑게 나를 아는 체하는 사람이 있어 깜짝 놀랐다. 3시간 가까이 나를 기다리던 택시 기사님이 밤이 어둑어둑해지자 한참이나 올라와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따뜻한 마음이 참 감사하고 고마웠다. 기사님과 갓바위 부처님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팔공산 케이블카 바로 아래 무인산장에 도착했다. 팔공산의 효험 있는 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정말 편안하게 꿀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7시부터 팔공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10여 분쯤 돼서 나이 지긋하신 대구 토박이 아저씨를 만났다. 나의 물음에 두 마디 이상의 대답이 이어지지 않는, 전형적인 '묵직한' 경상도 아저씨였다. 인사말을 한 이후 조만간 우리 사이에 어떤 물음도 대화도 더는 이뤄질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평소 말 많은 내가 이 조용한 군자에게 불편을 주고 무례를 범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곧 떨어져 각자의 길을 걸었다.

역시나 역사는 승자의 산물이자 기록이었다. 팔공산도 승자의 이름과 역사가 수많은 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잠들어 있었다. 팔공산의 본래 이름은 ‘공산’이었는데, 고려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싸워 대참패를 한 후 신숭겸 등 8명의 휘하 장수를 잃고 목숨이 촌각에 달려있을 때 인근 백성들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도망친 전장이라고 했다. 왕건은 이후 절치부심한 끝에 결국 후삼국을 통일한다. 그 감회가 얼마나 남달랐을까! 그때부터 사람들은 공산을 팔공산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가슴 쓰라린 아픔을 부여안고 피와 혼이 산화된 곳곳에서 새 이름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왕산(적병에 포위된 왕건이 이 산으로 올라가서 능선을 타고 세 번 만에 피신한 곳), 왕굴(왕건이 견휜에게 패한 뒤 3일동안 숨어 지낸 동굴), 일인석, 독좌암, 파군재, 해안, 반월, 안심, 실왕리, 미리사, 실내천, 전타, 무태, 연경, 나발고개, 지모동, 불로동, 안일사, 안지랑, 임휴사, 검사동, 입석동 등이 그때 새롭게 탄생한 지명이다.


3시간 만에 산세가 울창하고 편안한 산길을 기분 좋게 올라 정상인 비로봉에서 바라본 팔공산은 웅장하고, 깊이가 있고, 멋이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숙연했다. 비로봉 정상(1192m)은 방송국 중계탑과 군부대 등으로 시야가 가려 정상의 감흥이 조금 떨어졌지만 비로봉에서 1.2km 떨어진 하늘공원에서 바라본 운무에 둘러싸인 대우주는 정말로 황홀하고 신비로웠다.

지난번 모임 때 만난 한 친구가 “등산이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물은 적 있다. 그때는 명쾌히 대답하지 못했는데, 바로 내가 그때 하고 싶은 대답이 여기에 있었다. 산 밑 우리가 사는 저잣거리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대우주의 장대함, 호연지기가 거기에 있었고 얼마나 내가 작고 부질없는 것에 목메 어리석고 우매하게 살고 있는지를, 새끼손톱보다도 작게 보이는 산 아래 여러 마을이 웅변해주고 있었다. 비로봉에서 400m 떨어진 동봉에서 바라본 팔공산의 단풍과 태극기에는 1300여년 전 왕건이 쓰라린 아픔을 딛은 역사가 공존하고 있었고, 한편으론 유구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찬란하게 우뚝 선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이 읽혀 참으로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오후 2시 예정된 미팅 시간에 맞추고자 정오 즈음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동화사(桐華寺)를 찾았다.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 극단화성이 창건했는데, 당시에는 ‘유가사’로 불렸다고 한다. 신라 흥덕왕 7년, 832년에 들어서야 심지왕사가 절을 크게 증축했는데 겨울임에도 오동나무꽃이 상서롭게 펴서 꽃 이름을 따 동화사로 개명했다고 한다. 화랑정신과 통일의 정기를 품은 팔공산 동화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동화사에 영남 승군의 사령부를 설치해 팔공산성을 쌓고 여러 전투를 지휘해 눈부신 전공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유서 깊은 절이라서 그런지 왠지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숙연해졌다.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사명대사의 금빛 동상이 유난히 발길을 사로잡았다.

생각해보면 임금도, 영의정도, 사또도, 대장장이도, 스님도, 무당도, 백정도, 기생도, 노비도 모두 잠시 역할과 위치가 달랐던 조선의 백성일 뿐이다. 지위고하, 신분 차이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저 모두 죽으면 썩어 사라질 나약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잠시 맡겨진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사장, 부장의 역할이 영원히 이어질 자신의 모습인 양 착각해 우쭐대면서 어리석게 평생을 잘난 체 거들먹거리며 산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명대사는 보편적 인류애를 뛰어넘는 비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동화사를 천천히 걸으면서 그 친구가 했던 또다른 질문이 생각났다. 멋진 산을 등산하다 보면 거의 빠짐없이 사찰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의 아내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가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그러면 사찰을 종교시설로 봐야 하는지, 우리의 고유문화로 봐야 하는지를 그는 내게 물었었다. 그에 대한 대답이 거기에 있었다. 대부분의 사찰은 종교적인 차원의 건축물이나 불상이 20% 정도를 차지하고 80% 정도는 우리가 살아온 전통과 생활양식이 잘 보존된 문화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보물과도 같은 수많은 문화재와 조상의 얼, 그리고 멋스러운 풍치와 풍경을 이런 사찰이 아니면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특히 동화사는 그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이라고 할 정도로 모든 것들이 잘 갖춰져 있었다.

오후 1시 20분, 어제의 그 개인택시 기사님이 동화사로 나를 마중 나와 주셨다. 기사님께 “경력이 몇 년이나 되셨느냐?”고 물으니, 10년마다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는데 5~6번쯤은 됐다고 한다. 연세가 80세이니 대구에서만 딱 60여년을 택시 운전을 하신 것이다. 그분의 택시에는 내비게이션이 없었다. 운행 속도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일정했는데, 약속장소에 도착한 시간은 그분이 말한 대로 정확했다. 꼭 살아있는 부처님이 이틀 동안 나를 인도해 준 것 같았다. 깊어가는 가을날의 1박 2일 대구 팔공산 등반을 마쳤다. 참 멋진 대구여행이었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0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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