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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 (23) 감악산에서 우중(雨中) 운무(雲霧)에 빠지다 

 

잘 익어 인간의 향내가 나는 친구를 만났다

2023년 1월 14일, 기온이 영상 14도까지 올라가고 철쭉이 비몽사몽 계절 감각을 잃고 만개한 이상기후 속에 이틀 연속 비가 내렸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 친구 마나님들과의 청계산 산행은 무기한 연기됐고, 대신 감악산 산행으로 일정을 변경했다. 그리고 그날 마치 운명처럼, 잘 익어 인간의 향내가 나는 그 친구를 만나게 됐다.

감악산 등산을 위해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친구가 운전하는 깔끔한 고급 세단의 오디오에서는 매혹적인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요한슈트라우스의 왈츠곡, 티볼리의 소풍,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가 이어지더니 뒤이어 모차르트의 황홀한 음악이 내 귀를 즐겁게 했다. 목련화, 향수, 고향 생각, 오빠 생각, 보리밭….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우리 가곡들이 흘러나왔다. 내 마음은 어느새 세월을 뛰어넘어 추억 속 고향 마을로 달려가고 있었다. 청보리가 파랗게 올라온 저쪽 너머에서는 노란 원피스를 입고 수줍게 미소 짓던 옆집 소녀가 있었다. 찔레꽃, 아카시아꽃, 진달래, 개나리, 감꽃, 벚꽃....야생화가 흐드러지게 꽃대궐을 이루던 뒷동산에는 옛 고향 친구들의 그리운 얼굴도 보였다. 추억에 잠겨있던 와중에 친구의 묵직한 목소리가 아름다운 선율을 뚫고 내 귀에 들어왔다.


“친구! 나는 일주일에 5일 동안은 밤낮으로 많은 이들의 세상에 찌든 한숨 소리를 들으면서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서 법무사로 일하고 있네. 주말이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마시고 골프를 치고 도박을 하고 이성친구를 만나고 발버둥 치지. 그런데 나는 그런 것들은 일절 하지 않고 고생하는 나를 위해 1억 정도의 최고급 세단 2대를 사서 주말이나 휴일에는 인간의 때가 묻지 않는 곳, 비닐하우스가 없이 끝없이 펼쳐진 연천의 넓은 들판, 고창의 청보리밭, 강원도 첩첩산중 쉽게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시골길,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와 저수지를 찾아다니며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네. 그러면 나 자신이 자연과 동화 되어 긴장과 스트레스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그동안의 격정과 피로를 다 녹여준다네. 그리고 속으로 다짐을 하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자. 술 사주고 로비하고 남의 비위 맞춰 일감 따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작은 호의에도 정성을 다해 꼭 답례하고, 하나를 주면 두 개를 돌려준다는 마음으로 살자고. 그런 마음으로 살면서 경험과 신뢰를 쌓고 누구에게나 인간적으로 다가갔더니 내가 조금 실력이 못 미쳐도, 남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주네. 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가!”


뭐랄까, 마치 잘 익은 술독에 빠진 느낌이었다. 인간의 아름다운 향기가 진동하며 그 친구가 정말 달라 보였다. 생각할수록 곱씹을만한 대목이 많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과 인간의 향기에 취해 약속 장소인 감악산 기슭 주차장에 도착했다. 여전히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우중산행임에도 누구 하나 빠진 친구 없이 9명 전원이 도착해 감악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모르는 이들이 멀리서 본다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 패잔병이 전쟁터로 끌려가는 듯 처량하고 애처로운 모습처럼 보였겠지만, 우리는 형형색색 챙겨 온 우의를 입고, 40년이 넘은 지기답게 왁자지껄 화기애애 웃음꽃을 피웠다.

100여 미터를 오르자, 그 유명한 감악산 흔들다리가 나타났다. 유명세에 비해 내 눈에는 그저 평범해 보였는데, 그 너머 우아하게 피어오른 몽롱한 운무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비에 젖은 감악산을 휘감은 그것은 춤을 추는 듯 을씨년스러우면서도 꿈결 같은 몽롱한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신선이 사는 선계(仙界)가 이러할까? 선녀들이 백옥 같은 속살을 드러내며 멱을 감는 듯, 몽환적인 풍경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겨울을 견뎌내며 아직 꿋꿋하게 나무에 매달려 있는 잎들도 보였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은 마지막 생명의 숨소리를 다하려는 듯, 차가운 겨울비 속에서도 고운 자태를 처연히 뽐내고 있었다.

그렇게 2시간여 만에 우리는 감악산의 악귀봉, 장군봉, 임꺽정봉(매봉제) 정상을 차례로 올랐다. 감악산은 예부터 바위 사이로 검은 빛과 푸른 빛이 동시에 흘러나온다 해서 감색 바위라는 뜻의 감악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감악산 일대는 광활한 평야 지대여서 삼국시대부터 모두가 탐을 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6.25 전쟁 때도 최고의 격전지로써 피로 물든 붉은 산야였다. 임꺽정봉은 조선 명종 때 의적 임꺽정이 관군을 피해 숨어 지내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맑은 날 산 정상에 서면 임진강 하류의 기름진 평야와 개성의 송악산도 보인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운무가 앞을 가렸다. 그 풍경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처럼 내 마음속에 긴 여운만 남겼다.


비 오는 숲속에 두 갈래 풍경이 있었습니다.
운무가 끼어 두 풍경을 모두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한참을 서서 운무 속에 감춰진 장엄한 임진강 평야를 그리워하며
하염없이 그쪽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른 풍경을 봤습니다.
똑같이 아름답지 않고, 가고 싶지 않았지만
아마, 내가 가야만 하는 현실의 풍경이라고 생각했지요.

비록 아름답지만, 운무 속에 가려진 그 향기는
천 길 낭떠러지 악마의 미소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미련 없이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지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보지 못한 마치 천사가 날 유혹하는 듯한 천 길 낭떠러지 그 악마의 풍경은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향기로 남을 것만 같아요.



마침내, 천 길 낭떠러지 바위 머리 위 뿌리를 묻고 푸르른 절개를 꿋꿋이 지키며 고귀한 자태를 뽐내는 한 그루 소나무에 경의를 표하며 감악산 최고 정상(675m)에 올랐다. 그곳에는 며칠 전 신문에서 봤던 감악산비가 처량하게 서있었다. 높이 170cm, 너비 70~79cm. 무른 화강암이라 오랜 세월 풍파로 글자가 모두 사라진 몰자비(沒字碑)라고 했다. 최근 한 학자가 사라진 글자 속에서 다른 진흥왕순수비에 나오는 한자 ‘典’ 글자를 찾았다며 제5의 진흥왕순수비라고 주장했던 글이 생각났다. 내 눈에는 아무리 씻고 봐도 맹탕인데…. 이 비석의 이 한 글자는 후대의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했을까?.... 감악산비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멋진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며 요기를 한 뒤에 하산을 시작했다. 내려오는 길에는 법륜사에 들려 이국적인 동자승을 보고는 오늘 나와 일정을 같이 한 멋쟁이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돌아오는 길, 아침처럼 다시 고급 세단에 기대어 감미롭게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감상했다. 아름다운 음악은 세파에 찌든 내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줬다. 어쩌다 우리 인간들은 끝내는 허무하기만 한 물질 문명을 숭상하고 남과 비교하며 내 처지를 한탄하고, 안타깝게 사라져가는 인생을 사는가! 저 들판의 야생화, 지저귀는 새 소리, 졸졸졸 시냇물 소리만 들어도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데…. 오늘 하루 멋진 친구가 들려주는 주옥 같은 인생의 지혜와 노하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한 그날, 잘 무르익어가는 향내의 여운을 잊지 않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5악장 전체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맛봤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인간의 향기에 취했던, 잊을 수 없는 산행이었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0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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