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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 (24) 눈 덮인 백두대간 태백산에서 

 

인류의 스승, 책의 위대성을 생각했다

한민족 반만년 역사의 장엄한 기운이 서린 태백산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영하 17도의 동장군이 매서운 북풍한설 칼바람과 의기투합하니 인류사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칭송받는 핸드폰조차 무력화할 정도였다. 추위는 오장육부를 싸늘한 냉동기로 만든 것도 모자라 손가락, 입술, 얼굴 등 약하고 노출된 부위는 날카로운 송곳으로 찔린 듯 아파왔다. 그럼에도 나를 비롯한 등산인들이 두꺼운 외투를 동여매고 이 태백산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온 세상이 하얀 별천지이니 순수하고 깨끗한, 동화 나라 수정같이 청순한 이 눈꽃에 찌들고 찌든 세파의 검은 마음을 그저 풍덩 담그고 싶은 순수한 동심의 발로일 수 있다.

두 번째, 태백산이 백두대간의 중심에 있고, 삼국사기에 등장할 정도로 역사적으로 유구한 산이니 그 흔적을 온몸으로 느껴보고자 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태백산은 최고봉인 장군봉(1560m)과 문수봉(1517m)이 중심에 있으며, 경관이 빼어나지는 않지만 사방팔방에 솟은 웅장함과 장엄함이 단연 으뜸이다. 가장 크고 밝은 산이라는 뜻처럼 태백산에 오르면 내가 얼마나 작고 어리석은 피조물인지 피부로 다가온다. 그러니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한 수신의 마음으로 오르기에 제격이다.

그리고 또 하나, 산에 오르면 자연이 주는 경외감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산다는 저 주목처럼 인내와 기다림, 겸손함, 비워야 채워지는 심오한 철학을 배우고 일깨우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다. 이러한 연유로 오늘도 등산인들의 발걸음은 태백산을 향한다.


이런저런 생각 하다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 8시간이 넘는 긴 여정 끝에 드디어 오후 1시쯤 태백산 정상 장군봉에 올라섰다. 눈앞에는 하늘과 맞닿은 하얀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천제단을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마치 고대 로마 원형경기장의 검투사처럼 온 우주 만물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경외심에 휩싸였다. 유레카! 유레카! 맞아! 바로 그거야! 태백산은 한반도 중심에 있으면서 접근성이 좋고 1500m가 넘는 높은 산인데도 마치 평지처럼 얕은 구릉지가 산 정상에 넓게 펼쳐져 많은 사람이 운집할 수 있다. 오목렌즈처럼 우주의 기가 한 곳에 빨려드는 곳, 그래서 신을 영접하기 위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그 많고 많은 산 중에서 바로 이 산, 태백산이 단군왕검을 비롯한 많은 선조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아닐까. 유구한 역사가 흐르는 동안 변함없이 이곳에서 천제를 지냈던 것 또한 아닐까. 그렇다. 만약 김부식의 '삼국사기', 일연의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의 조상이 누구이고, 나는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겠는가? 책이 없었다면 지금의 인류 문명이 이렇게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최고의 발명품은 문자와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읽은 몇 권의 책들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파노라마치기 시작했다.


먼저 몬티 라이먼이 쓴 '고통의 비밀'이라는 책이다. 통증은 인간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극한의 고통이나 죽음까지 이르지 않기 위해 뇌가 자신에게 알리는 선제적 경고이며 보호 호르몬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통증이 없으면 살이 괴사하고 장기가 망가지는데도 지각하지 못한 채 시나브로 죽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빠른 응급조치와 치료를 위해 뇌가 내리는 일종의 비상 신호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따금 고통의 원인이 다 해결됐음에도, 기시감이나 분위기만으로, 습관적으로 지레짐작해 오작동 경고를 보내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만성 통증의 가장 유력한 여러 원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압박감, 나쁜 습관, 운동 부족, 불안감, 사회적 고립과 스트레스가 염증 반응, 즉 고통을 가중시킨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만성 통증의 원인을 찾아내 근본적인 치유를 하고, 마음의 상처도 깨끗하게 씻어내서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도록 긍정적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근래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마샤 리네한의 '인생이 지옥처럼 느껴질 때'이다. 저자는 유복한 집안의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작은 시골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란 후 마샤의 고모님 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남자들을 위해 미소를 머금고, 우아한 옷을 입고, 머리에 예쁜 꽃장식 등을 하는 등 마네킹 같은 모습의 요조숙녀가 되는 수업을 받고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는다. 좋은 가문의 멋진 남편을 만나 결혼에 골인해 사모님 소리를 듣고 존경을 받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마샤 리네한의 어머니는 자신이 누리는 존경과 행복을 딸들도 똑같이 누리기를 바라면서 딸들의 적성이나 성격을 무시한 채 화분 속의 꽃처럼, 화려한 마네킹처럼 요조숙녀가 되도록 교육시킨다. 하지만 공부 잘하고 활달한 마샤 리네한은 고3 사춘기 시절, 어머니의 억압에 자기도 모르게 우울과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해 버린다. 하루아침에 분노조절장애자, 정신병자로 둔갑하는데, 그 멀쩡하고 똑똑한 여자가 2년간 정신병원에 감금돼 잔혹한 치료를 받고 진짜 정신병자가 되어간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감옥에서 해방된 그녀는 끊임없는 노력 끝에 박사학위를 받고, 마침내 워싱턴대학교 종신교수 타이틀을 획득한다. 그녀는 과거 자신이 아팠던 시절을 남들이 겪지 않도록 새로운 정신치료법 개발이라는 평생의 목표를 다부지게 펼쳐간다. 정신병원에서 자신이 직접 겪은 고통과 아픔, 잔혹한 치료법 대신 명상치료와 마음챙김, 임상실험을 통해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없던 새로운 변증법적 행동치료법을 완성한다. 그 치료법으로 많은 정신병 환자들을 어둠의 감옥에서 구해낸 것은 물론이고 2018년 '타임'지가 선정한 ‘위대한 과학자: 우리 세상을 바꾼 천재와 선구자’가 되는 영광을 얻는다. 이 책을 통해 잘못되고 왜곡된 신념이 얼마나 큰 불행을 낳는지, 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면서 또한 얼마나 강하고 위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됐다.


마지막으로 빌 설리번의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이라는 책도 생각났다. 이 책에 따르면 인간의 ‘이기적 유전자’가 종족 번식을 위해 생존에 필요한 섹스(사랑), 식사, 수면을 가장 황홀하고 즐겁고 행복한 감정으로 만들었는데, 우리 인간이 무의식적인 중독 수준으로 이들을 추구하고 행동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바탕 위에 후성유전학(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약물 중독, 알코올, 영양 상태 등의 환경이 2세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연구하는 학문)과 미생물총(우리 몸속에 유익균과 무익균의 미생물 총합)이 더해져 그 사람의 기분, 기질, 성격, 건강, 수명 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 사람의 운명이란 비범한 우연이 아니라 태교와 주위 환경 등이 결합한 필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우리 인간의 뇌는 이기적 유전자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섹스라는 수십만 년 내려온 유전자의 고유한 사명이자 소명을 거부하는 정체성의 아노미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보다 애를 낳고 기르는 것이 힘들고 나의 행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인구 절벽의 한 원인이고, 이기적 유전자의 위기가 가속화돼 결국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고 번식력의 상실로 이어지면 인간이 영영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가 머지않아 도래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러한 사태는 인류의 생존 존립의 문제로써, 인간들이 합심해 풀어야 할 궁극의 난제이다.


책은 이렇게 수십년간, 또는 한평생을 통해 수만 번의 실험과 연구, 경험, 깨달음, 실패와 고통, 좌절 속에 피어난 지식과 지혜를 담아 단숨에 독자에게 논리정연히 공급한다. 이 덕분에 우리 인간은 캄캄한 어둠 속을 나아가 광명의 신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책은 우주 최고의 보물이며, 태양처럼 소중한 존재다. 계속되는 그 상념의 나래 속에서 한평생 처음으로, 희미하고 미약하게나마 내 소명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천문학, 경제학, 인문학, 사회학, 자연학, 철학, 과학, 기술, 종교 등 나는 비교적 폭넓게 세상과 우주 만물의 원리를 책을 통해 섭렵했다. 그러다보니 세상만물의 원리, 인간사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얻은 결론은 “나는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이며, 모든 만물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생로병사의 법칙에 따라, 약간의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을 소중히 여기고,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건강과 장수를 위해서라도 재미있고 행복하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최고의 소명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아니겠는가!


책에는 수많은 이들의 경험과 지혜가 녹아 있다. 공자, 맹자도 책에서 지혜를 얻고 책을 사랑했다. 나도 죽을 때까지 책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많은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어 성인 반열에 오른 공자처럼 태백산 문수봉에서 바라본 함백산이 마치 옥황상제가 산다는 대궐마냥 참으로 멋스럽고 정교해 보였다. 그렇게 비몽사몽 허공을 스케이트를 타고 활강하듯, 책의 위대함에 허우적거리면서 눈 깜짝할 사이 태백산을 내려왔다. 코로나19로 인해 3년 만에 다시 열린 태백산 눈꽃 축제에서 눈으로 만든 토끼가 내 마음을 아는 듯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으면서 하얀 미소를 보낸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0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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